오레스테스가 어머니의 정부 아이기스토스를 죽이고 어머니를 죽이러 가자, 클뤼타이메스트라는 젖가슴을 내보이며 살려주기를 애원한다. 아이스퀼로스의 비극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의 결정적인 장면이다. 이 작품은 1부  「아가멤논」, 3부 「자비로운 여신들」과 함께 『오레스테이아』로 불리는 내용 3부작 중 2부다. 아이스퀼로스는 『오레스테이아』로 기원전 458년 비극경연에서 일등상을 받았다. 아버지(아가멤논)의 죽인 이를 죽이는 복수이지만, 친어머니를 죽여야 하는 오레스테스의 고뇌가 느껴진다.

(오레스테스와 퓔라데스, 궁전에서 달려온다. 오레스테스의 칼에서 핏방울이 떨어진다)

 

오레스테스: 당신도 찾고 있었소. 그자는 충분한 보답을 받았으니까.
클뤼타이메스트라: 슬프도다. 가장 사랑하는 강력한 아이기스토스여, 당신일 죽다니!
오레스테스: 그자를 사랑한다고? 그렇다면 그자와 같은 무덤에 누우시오./ 그러면 당신은 결코 그자를 배신하지 못할 테니까.
클뤼타이메스트라: 멈춰라, 내 아들아. 얘야 너는 이 젖가슴이/ 두렵지도 않느냐? 잠결에도 이 어미의 젖가슴에 매달려/ 그 부드러운 잇몸으로 달콤한 젖을 빨곤 했는데.
오레스테스: 어떻게 할까, 퓔라데스? 어머니를 죽이기가 두렵구나.

-『아이스퀼로스 비극 전집』 중 「제주를 바치는 여인들」892~899행

머뭇거리나 오레스테스에게 용서는 없다! 그녀의 정부 옆에서 죽이려고 궁전으로 데려간다.

 

#01. 클뤼타이메스트라 VS 오레스테스, '살려 달라' 젖가슴을 내보이며 아들에게 애원하는 어머니

이번에는 서사시 <일리아스> 22권. 절친 파트로클로스의 죽음으로 다시 전투에 나선 아킬레우스와 헥토르의 대결이 펼쳐진다. 헥토르는 일리오스와 스카이아이 문 앞에 그대로 버티고 서 있다. 스카이아이에는 아버지 프리아모스와 어머니 헤카베가 제발 성안으로 들어오고, 아킬레우스와 맞서지 말라고 눈물로 호소한다. 프리아모스의  애처로운 호소에 이어 어머니가 나선다.

[이번에는 또 그의 어머니가 눈물을 흘리며 울었고
옷깃을 풀어헤쳐 다른 손으로 젖가슴을 드러내보였다.
그녀는 눈물을 흘리며 그에게 물 흐르듯 거침없이 말했다.
“헥토르야, 내 아들아! 이 젖가슴을 두려워하고 나를 불쌍히
여겨라. 내 일찍이 네게 근심을 잊게 하는 젖을 물린 적이 있다면.
내 아들아! 그 일을 생각하고 성벽 안에 들어와서
적군의 전사를 물리치고 선두에서 그와 맞서지 마라.
무정한 녀석! 그가 너를 죽이면 나는 내가 낳은 자식인 너를
침대에 뉘고 슬퍼하지 못할 것이며, 많은 선물을 주고 얻은
네 아내도 마찬가지다. 너는 우리에게서 멀리 떨어진
아카이오이족의 함선들 옆에서 날랜 개들의 밥이 될 테니까.”]

-『일리아스』 22권 79~89행. 그러나 헥토르는 죽음의 길을 간다. '잔혹한 운명이 그를 그곳에 묶어놓았던 것'이란다.
 
#02. 헤카베 VS 헥토르, '살아 달라' 젖가슴 드러내며 아들에게 호소하는 어머니 

이번에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안드로마케」(Andromache)(『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1』 천병희 옮김, 숲, 2009)다.

"그리고 그대는 트로이아를 함락한 뒤-따질 것은
따져야겠으니 하는 말인데-그대의 수중에 들어온
아내를 죽이기는커녕 그녀의 젖가슴을 보자 칼을 던져버리고
애무를 받아들였고, 그대를 배신한 암캐에게
아부를 했지, 퀴프리스에게 져서, 그대 가장 용렬한 자여!"
-「안드로마케」 627~631행 페넬우스가 메넬라오스에게. (헥토르의 아내 안드로마케는 전쟁 포로로 끌려와 아킬레우스의 아들 네옵톨레모스의 첩살이를 하며 몰롯소스라는 아들을 낳았다. 메넬라오스가, 헬레네와 낳은 딸 헤르미오네가 정실부인인데, 후사가 없자 안드로마케 모자를 탓하며 죽이려 들자 아킬레우스의 아버지 펠레우스가 나타나 이를 제지하며, 헬레네와 메넬라오스의 재결합을 질타하는 장면이다.)

 

헬레네는 스파르테의 왕비(공주)다. 메넬라오스가 데릴사위로 왕이 된 것이므로 혈통으로 보아 헬레네를 '여왕'으로 불러도 될 것이다. 스파르테(펠로폰네소스동맹)와 아테나이인들(델로스 동맹)이 전면전을 벌이는 펠로폰네소스 전쟁 초기(기원전 430~425년 사이)에 공연된 것으로 알려진, 「안드로마케」에서, '스파르타의 왕비' 헬레네는 '가장 나쁜 여자', '개 같은 배신녀'로 그려지고 있다. 뿐만 아니라 스파르타의 여성 전체가 욕을 먹고 있다. 최혜영은 『그리스비극 깊이 읽기』 159~160면) 비극은 아테네에서 집필되고 아테네의 무대에서 상연되었는데, 헬레네를 공격하는 것은 곧 스파르타를 견제하는 방법임을 주장한다. 헬레네의 트로이아행을 어떻게 보아야 할까? 예나 지금이나 의견이 분분하다. 그녀가 트로이 왕자 파리스를 기꺼이 따라갔다는 설이 있는가 하면,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했다(납치설), 또 하나는 헬레네의 환영(허상)만 파리스를 따라 트로이로 갔고, 실제의 헬레네는 이집트에 머물다가 남편을 만나 집으로 무사히 돌아왔다는 설 등이 있다.

 

#03. 헬레네 VS 메넬라오스, 살라고, '다시' 살려고 가슴 드러내며 성적 매력 발산하는 헬레네
아름답고 성적 매력이 넘친다. 하지만 부도덕하다. 헬레네의 이런 모습은 그리스인들의 교과서였던 『일리아스』 속 이미지다. 세 번째는 텍스트에 도기 그림까지 추가한다. 기원전 5세기경 아티카에서 제작된 도기인데 대체로 호메로스적 관점에서 헬레네를 그리고 있다고 보고 있다. 메넬라오스가 칼을 들고 헬레네를 처단하기 위해 다가가다(이때 헬레네는 가슴을 드러내고 성적 매력에 호소하고 있는 모습으로 그려져 있기도 하다), 결국 칼을 떨어뜨린 채 그녀를 다시 받아들이는 모습이다.

 

적색무늬 토기, 루브르 박물관 소장. 왼쪽에서는 아프로디테 여신이 헬레네와 메넬라오스 사이에는 에로스가 날아다니며 이들의 재결합을 부추기고 있다. 헬레네의 입장에서는 ‘살려고’ 하는 일이고, 이를 계기로 메넬라오스와 ‘다시 살게’ 된다. [사진 출처]https://commons.wikimedia.org/wiki/File:Helen_Menelaus_Louvre_G424.jp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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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족(三族)을 멸(滅)한다는 말이 있다. ‘삼족의 벌’이라는 형벌인데, 반역죄를 지은 사건의 주모자에게 내리는 형벌로 사극(드라마)이나 영화에서 자주 접하는 용어다. 그런데, 삼족은 본래 아버지·아들·손자를 말하거나(三代), 이처럼 아버지의 형제자매, 자기의 형제자매, 아들의 형제자매를 이르는 동성삼족(同姓三族)을 뜻했으나, 고려 후기부터는 대체로 이성삼족(異姓三族)까지 뜻하고 있다. 외가 처가까지도..

 

삼족(三族)을 멸(滅)한다, 그리스 비극에서 찾은 비극
이성삼족이란 종족(宗族)·본족(本族)·본종(本宗) 등으로 불리는 부계의 친족과 모당(母黨)·처당(妻黨)이라는 모계·처계 친족을 포괄한다(이 범위를 일러 일족이당(一族二黨)이라고도 한다.). 본가는 말할 것도 없고, 죄인의 어머니(외가) 집안과 아내(처가)의 집안까지 씨를 말려버린다는 무지막지한 형벌이 아닐 수 없다. 공동운명체에 속하는 어느 한 사람의 잘못은 그 화가 삼족 전체에까지 미치는 일이 많았다. 이를 삼족의 벌이라고 하는데, 이러한 연좌제(連坐制)가 적용된 사례가 삼국시대에도 보인다. 그러나 벌을 받는 범위는 집권자의 뜻에 따라 넓혀지기도 하고 좁혀지기도 하는 경우를 볼 수도 있다. [위키백과]를 참조했다.

 

이런 연좌제(連坐制)가 적용된 사례 삼국시대에도
그렇다면 이는 우리나라만의 얘기일까? 양상은 조금 다른데, 그리스 비극을 공간 배경이 되는 그리스의 폴리스 간의 갈등관계에서 살피면 무시무시한 저주가 거기 깃들어 있음을 알 수 있다. 필자가 최근에 주목하는 책,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아테나이가 그들의 자랑인 비극 경연을 통해 어떻게 주변의 경쟁국들을 견제하고, 그리 인식하도록 시민들을 교육했는지 그들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조금만 곁들여도 곧이어 파악할 수 있다. 특히 아테나이의 인접 국가인 테바이의 신화와 역사를 소재로 차용한 그리스 비극 3대 작가들은 정도의 차이가 있기는 하나, 비극 작품을 통해 테바이의 역사와 전통을 폄하하는데 기여했다. 비극 경연은 당대 최고의 공연예술로 시민교육의 주요한 도구였는데, 그 내용을 파악하면 일종의 아테나이에 대한 애국심을 고취하는, ‘의식화’였다고 볼 수 있는 것.

 

그리스 비극경연, 아테나이 애국심을 고취 ‘의식화’ 마당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를 마무리하며, 최혜영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사』 한 대목을 인용한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전야에 코린토스인들이 아테나와 전쟁을 일으키기 위해 스파르타를 설득하는 연설이다. "아테네인은 조국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몸도 완전히 남의 것인 양 희생하고, 또 조국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까지도 바친다"고 말하는데, 여기서 '자신의 생각까지도 바친다'는 지적은 매우 상징적이다. 당시 아테네인들로 하여금 공통의 생각을 갖게 한 기제들이 있다면, 대표적인 것 하나가 바로 비극 공연이 아니었을까, 책의 저자는 이렇게 진단한다.

 

아테네인들, “조국을 위해서는 자신의 생각까지도 바친다”

테바이를 배경으로 하는 비극작품으로 가장 성공을 거둔 이는 '비극의 완성자' 소포클레스다.  페리클레스 시대를 대표하는 이 시인은 서른이 안 된 나이로 기원전 468년에 비극경연대회에서 아이스퀼로스를 누르고 우승한 뒤로 대 디오뉘소스 제의 경연에서 모두 18번이나 우승한다. 그가 쓴 비극 123편 중 전해오는 것은 7편, 그 중 최고의 비극으로 평가되는 「오이디푸스 왕」이 있으며 아리스토텔레스는 『시학』에서 이를 격찬하여 비극의 전형(典型)이라고 하였다.
「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436에서 433년 사이에 공연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어지는 이야기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는 기원전 406년경 소포클레스가 죽기 직전쯤 쓴 것으로 실제 공연은 죽은 다음인 401년에 이루어졌다. 그런데 소포클레스는 두 작품보다 오이디푸스 왕가를 다룬 작품을 먼저 썼는데, 「안테고네」(기원전 442년)다. 시건 진행 순으로 정리하면 「안테고네」는 오이디푸스 왕이 죽은 이후에 벌어진 일이지만, 테바이 왕가를 배경으로 하는 소포클레스의 세 작품 중 가장 먼저 쓴 것.

 

테바이의 불행은 아테네의 행복? 정점 찍은 「오이디푸스 왕」

소포클레스가 쓴 테바이 왕가를 다룬 비극들 말고도 당대의 많은 비극작가들이 오이디푸스 왕 관련 이야기를 다루었다. 오이디푸스를 주인공으로 삼은 아이스퀼로스의 『오이디포디아』는 「라이오스」, 「오이디푸스」,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의 3부작에 <스핑크스>를 포함한 4부작으로 구성되었다고 한다. 이 가운데 3부에 속하는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기원전 430~428년 사이)만 온전하게 전한다.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은 오이디푸스 왕이 죽고 난 다음, 두 아들이 왕권을 둘러싸고 싸우다가 둘 다 죽는 사건을 다루는 작품이다.
에우리피데스도 오이디푸스 왕가의 비극을 다룬 극을 썼다. 「크리시포스」, 「오이디푸스」, 「페니키아 여인들」이 그것이다. 이 가운데 「페니키아 여인들」(기원전 412~408년 사이?)만이 온전하게 남아 있다. ‘크리시포스’는 라이오스 왕이 동성애적 사랑으로 납치한 소년의 이름이고 라이오스는 오이디푸스의 친부인 전(前) 왕이다. 「크리시포스」에서 에우리피데스는 오이디푸스 가문이 저주받게 된 근본 이유를 다루었으리라. 망명자 신세였던 라이오스는 자신을 받아준 은인 펠롭스의 아들이자 자기 제자였던 크리시포스를 성추행하고 납치하는 죄를 저지름으로써 신들의 저주를 받게 되었다는 것. 이 작품은 「오이디푸스 왕」의 일종의 '프리퀼(Prequel) 스토리'라 할 수 있다. 프리퀄(Prequel)은 그 이전의 일들을 다룬 속편.

 

현존 아이스퀼로스, 에우리피데스에서도 ‘테바이 공격’ 흔적 역력
「페니키아 여인들」은 이오카스테와 오이디푸스 사이에 태어난 두 아들 폴리네이케스와 에테오클레스의 비극적 죽음을 다룬 작품이다. 그런데 앞서 소개한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하는 일곱 사람」과 소재가 비슷한데 난데없이 페니키아 여인들이 등장하는 것일까? 테바이를 건국한 시조인 카드모스가 알파벳을 창조한 페니키아 출신, 곧 외지인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란다. 당시 디오니소스 극장에서 공연을 지켜보던 사람들-아테네인들은 물론이고 각 나라에서 온 대사들이나 방문자, 거류민들 등-에게 테바이 왕족은 페니키아 출신의 이민족이 세운 축복받지 못한 국가가라는 점을 분명하게 상기시켜 주었을 것이라, 라고 최혜영은 쓰고 있다.

 

프레임 전쟁: 테바이 건국 카드모스가 페니키아 출신이라 「페니키아 여인들」

현존하는 작품들로만 치면, 그나마 소포클레스는 오이디푸스 왕을 중심으로 위아래 3대에 이르는 비극에 대해 집중하고 있다. 그러나,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 거슬러 올라가 테바이의 주요 수호신들 중 하나인 디오니소스 신을 무대에 올린다. 테바이는 디오니소스 신의 탄생지로, 실제로 디오니소스 신전이 테바이인들 삶에서 비중이 컸음을 고고학적 발굴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는 것, 디오니소스 신은 테바이 공주를 어머니로 태어났지만, 테바이를 싫어하고, 곧잘 테바이를 적대시하는 모습으로 그려지는데, 대표 비극이 에우리피데스의 「박코스의 여신도들」 인 것이다. 뿐만 아니라,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이 죽은 이후, 그 다음 세대의 이야기들도 비극으로 만들어졌다. 전사한 에테오클레스의 아들 라오다마스가 성장하자 크레온은 그에게 왕위를 물러준다. 하지만 라오다마스 치세에 폴리네이케스의 아들 테르산드로스가 이끄는 아르고스 일곱 장수들의 아들들, 즉 에피고노이(후손들이라는 뜻)가 아버지들의 복수를 위해 다시 테바이를 공격한다. 이번에는 아르고스의 페리고노이가 승리하고 테바이 왕 라오다마스가 전사함으로써, 마침내 폴리네이케스의 아들이 테바이의 왕이 된다. 이와 관련된 이야기를 다루는 비극이 소포클레스의 「에피고노이」 혹은 「에리필레」라는 것(현존 비극은 아니다).

 

오이디푸스 왕의 손자들 간의 골육상쟁까지도 다뤄, 삼족의..

오이디푸스나 그의 아들들, 카드모스나 펜테우스 같은 테바이 왕은 아니었지만, 테바이 왕가와 결혼을 통해 연계된 이들을 소재로 한 비극도 있다. 보이오티아 지역의 왕 아타마스를 소재로 삼은 비극이 대표적이다. 아타카스는 보이오티아의 오르코메노스 왕으로서, 카드모스의 딸 이노와 결혼했던 인물이다. 디오니소스 신의 이모이기도 한 이노는 아타마스의 두 번째 부인이었는데, 이들의 결혼으로 인한 비극사는 아테네인들의 관심을 끌었던 것으로 보인다. 실제로 소포클레스는 아타마스와 그 아들 프릭소스 등 아타마스 집안의 가정사를 소재로 한 세 편을 비극을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러나 아이스퀼로스의 아타마스 비극은 정말 단편적으로 전하고, 에우리피데스의 「이노」 역시 현전하지 않는데, 비참한 결말을 가진 비극이었을 뿐 아니라, 궁극적으로는 테바이에 대한 부정적인 느낌을 유포하는 작품이었을 것으로 추정한다.

 

글머리에서 정리한 ‘삼족의 벌’을 떠올리게 하는 아테나이와 테바이 사이의 골 깊은 갈등을 현존 비극을 통해 확인하거나 유추할 수 있다. 아테네 비극에서 테바이 왕가의 이야기가 왜 이처럼 집요하게 등장하는 것일까? 최혜영은 그리스 비극이 공연된 기원전 5세기는 물론이고 그 이전으로 거슬러 올라가 테바이의 아테네의 역사적 관계를 살피며 나름의 답을 찾고 있다. 헤로토토스의 『역사』(페르시아 전쟁 중 테바이는 ‘반그리스적’인 행동을 일삼았다)를 다시 읽어야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도 그리스 비극을 새로운 관점에서 이해하기 위해서라도 다시 펼쳐야 한다. 바쁘다. 현존 작품들을 다시 읽는 것은 그 이전에 해야 할 일이니……. 비극경연을 통한 아테나인들의 그들의 주변국들에게 대한 견제는 집요하고 철저하다. 미중 혹은 중미 무역전쟁 등등 너무나도 현재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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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제는 '신간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 독서 지도'. 헤로도토스의 『역사』를 이야기하다가 영화 <300>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 영화 <300>부터 이야기한다. 아니 영화 <300>에 대한 이야기부터 시작하는데, 『역사』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다. 교양의 기본인 고전 읽기가 그만큼 대중들의 독서에서 일정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는데, 그 거리가 상당하다는 반증이다. 영화 <300>2도 예외는 아니다. 『플루타르코스 영웅전』 중 그리스 5인 로마 5인, 천병희 선생이 가려뽑은 10인의 그리스로마 영웅 가운데 테미스토클레스가 있는데, 이 인물에 대한 이야기를 하려면 영화 <300>2부터 시작해야 한다.

 

일정한 거리가 너무 멀어 늘 '안타까운'

오늘도 예외는 아니었다. 신간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를 읽는 중인데, 생각을 정리하려고 인근의 카페를 찾았다. 처음 가본 곳, 30대 중반의 듬직한 몸을 가진 청년이 주인이다. 마침 월요일이라 인근 기념관들이 휴관이기에 한가하다는 것은 나중에 알았지만, 이어서 쓸 글감을 기획하는 동안 나는 도서관에서 열공하는 학생처럼 책들을 늘어놓고 글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문득 카페 주인 총각과 이야기를 시작했는데, 마침 어렵게 구한 오늘자 <한겨례> 천병희 선생님 플라톤전집 출간 인터뷰 기사(탁자에 놓았는데)가 계기였다. 발뒷꿈치를 가리키며 '아킬레스 건'에 대한 이야기로 『일리아스』 얘기를 했다. 프로이트가 정립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를 거론하는 것으로 소포클레스의 유명한 비극 <오이디푸스 왕> 이야기를 시작했다. 늘 이런 식이다. 왜 늘 이래야만 하는지는 모르겠다.

 

 

'아킬레스 건'에서 시작하는 『일리아스』 얘기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는 저자 최혜영 교수도 머리말에서 밝히고 있듯, 정리하자면 (한국인의) 그리스 비극 읽기에 새로운 길을 낸 저작이라고 말할 수 있다. 책명에 포함된 단어 '깊이'는 이 책을 통독하는 일이 녹록치 않음을 언질을 한다. 천병희 선생은 이번 플라톤전집 완간 이전에 그리스 3대 비극작가들의 현존하는 작품들을 완역한 세 권의 전집을 출간했다. 『아이스퀼로스비극전집』(2008년 10월), 『소포클레스비극전집』(2008년 10월), 『에우리피데스비극전집』1.2(2009년 5월)이 그것이다. 33편의 3대 그리스 비극작가의 현존 작품들을 완역한 해가 2009년인데, ‘원전번역 그리스비극전집세트’(전4권) 가격은 100,800원(알라딘 10%할인)이다. 이어서 천병희는 아리스토파네스의 현존 비극들을 완역한 『아리스토파네스희극전집』(전2권, 2010년 11월)도 펴냈다.

 

『그리스비극 깊이 읽기』, 한 걸음 더 들어간 '깊이'

이 가운데 '아리스토파네스희극'은 예외로 하더라도, 최혜영의 『그리스비극 깊이 읽기』를 탐독하기 위한 사전독서는 험난한 여정일 수밖에 없다. 포개면 베개로 쓰기에도 너무 높은 네 권의 하드커버(양장본) 비극전집을 섭렵해야 하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이겠는가,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극은 <페르시아인들>(아이스퀄로스 지음)로, 드물게 인간의 역사(페르시아 전쟁)를 다루고 있지만, 그리스비극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리스 신화 공부는 필수다. 그런데, 그리스신화는 '그리스신화'를 다룬 저작이 명확하게 나와 있는 것이 아니고(엄밀하게는), 당시에는 호메로스의 양대 서사시나 『신들의 계보』 그리고, 비극 작품 속에 등장하는 신화 소재들을 집대성하는 것을 통해, 그리스 신화를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고, 현재도 예외는 아니다.

 

'오리무중' 그리스 신화, 작품을 통해 만나야 하는 황홀함

그런데, 여기까지는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데, 작품 그 자체(텍스트)에 집중하는 데에 필요한 사전 독서이다. 어디까지가 사실(역사적)이고 어디서부터가 인간의 역사인지? '소크라테스(-플라톤) 문제'처럼 그리스 비극을 읽는 '그동안' 신화와 비극 사이에서 고민했지만, 앞서 거론한 <페르시아인들>(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비극이 하필 이 작품, 인간의 역사를 대놓고 다룬 작품이라는 것이 역설이며 시사점이 있다)은 작품 자체의 '존재 증명'이랄까, 예사롭지 않은 숙제를 이미 던지고 있었다. 최혜영은 그리스 비극을 제대로 읽으려면('깊이') 당대의 역사와 정치사를 고려하여야 한다고 역설한다. 너무도 당연한 얘기인데, (적어도 한국의) 그리스 비극 읽기에 새로운 차원을 제시하고 있는 것. 헤로도토스의 『역사』는 기본이고, 투퀴디데스가 안내하는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를 정독해야 그리스 비극을 새로운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는, 그런 길을 제시한다.

 

『역사』는 기본, 투퀴디데스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정독해야

사실, 그동안 우리의 그리스 역사에 대한 이해가, 아테나이를 중심으로 하고, 곁가지로 스파르테가 '주연급 조연'으로 등장하는 정도였다는(정리하자면) 필자의 견해에 적극 공감한다. 1970년대 순수-참여 논쟁에 이어, 1980년대에는 당시의 민주화투쟁과 맞물려서 민중문학이나 노동문학이 화두었다. 한 편의 시보다 교문 앞에서 전경들과 대치할 때 던지는 짱돌 하나, 화염병 하나가 절실한 시기였다. 그런 시기에 문학도가 '작품 그 자체'에만 집중하여(미국의 신비평) 읽고 논한다는 것은 도리가 아니었다. 문학과 운동 사이에서 고민하는 대학생이 그러했고, 1980년대 대표시인으로 분류되는 현역 시인들도 정도의 차이가 있을 뿐 극심한 고뇌의 세월을 보낸 그런 시기였다. 작품을 그것이 집필된 시기의 역사적·정치적 환경 관계에서 살피는 것이 화두였고 당연시되었음에도, 그리스 비극은 관심 밖의 영역에 있었고, 문득 작품 자체도 중요하지만 작품이 생산된 배경과 관련하여 살피는 최혜영 교수의 저작을 만나, 만감이 교차한다고나 할까?

 

한 편의 시와 짱돌 하나와 작품 그 자체 80년대

그리스비극을 '작품 그 자체'에 집중하여 분석하고 그 장르의 위대함을 역설한 이는 아리스토텔레스(<시학>)이고, <시학>과 긴밀하게 연관되어 있는 <수사학> 천병희 번역 『수사학/시학』은 그런 의미에서 그리스 비극을 이해하는 거의 당대의 '개론서'라고 할 수 있다. 번역가 천병희 선생의 몇 안 되는 저서 중 하나는 『그리스 비극의 이해』(문예출판사, 2002년 3월)다. 그가 독문학자이며 어느 영역보다 그리스비극이 '전문 분야'임을 확인할 수 있는 저작이다. 그리스 비극을 한국적인 정서에 입각하여 새롭게 해석한 책(연구) 하나를 꼽는다면 김상봉 교수의 『그리스 비극에 대한 편지』(한길사, 2003년 1월)다.

 

교수 천병희는 독문학자, 그리스 비극은 전문 분야

『일리아스』처럼 단도직입으로 시작하면 좋으련만, 이러한 (한국의 고전 읽기) 상황 때문에 최혜영의 『그리스비극 깊이 읽기』는 쉽지 않은 책이 될 수밖에 없는 '운명'의 산물이다. 내용 자체가 어렵다기보다는 관련된 비극 작품이나 역사와 신화 배경에 대해 본문에서 다뤄야 하므로, 비극 전집을 정독한 독자에게도 '새로운' 혹은 '생소한' 책이 되는 것, 관련하여 '깊이' 읽은 독자에게는 군더더기가 되는 이야기들도 포함해야 하는 의무가 얼마나 걸렸을까, 그러나 이러한 '작업' 또한 시대의 반영이다.

 

최혜영의 『그리스비극 깊이 읽기』, 사실은 개론서

이 글은 『그리스 비극 깊이 읽기』라는 훌륭한 책을 '깊이' 읽기 위해 전제된 사전독서의 지도라고나 할까? 어쨌든 그리스 비극 덕분에 인연을 맺은, 전남대 철학과의 김상봉 선생을 비롯, 사학과의 최혜영 교수까지 전남대학교는 드물게도 그리스 비극의 전문가 (최소한) 두 사람을 보유한 지방의 국립대학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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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전 번역가인 천병희(80) 단국대 명예교수. 천교수는 최근 플라톤의 전집(전 7권·숲)을 완역(完譯)했다. 2012년 '소크라테스의 변론'과 '향연' '파이돈' 등을 묶어 첫 권을 펴낸 후 7년 만의 결실이다. 100세 시대, 나이를 묻는 것은 숙녀에게만 실례되는 일이 아닌 시대, 그럼에도 굳이 선생의 나이를 밝히는 것은 전집이 완간된 날은 천병희 선생이 팔십 세가 되는 생신 날이었기 때문,

천병희 선생의 모든 책은 도서출판 숲으로 모여 출간되었습니다. 출판사가 80세를 맞이하시는 선생에 대한 예우로 특별한 잔치 아닌 전집 출간으로 기념한 것으로 보임, 플라톤은 80세에 생을 마감합니다. 28세에 소크라테스의 죽음으로 충격을 받아 정치 입문의 뜻을 접고 철학의 길로 들어서지요. 천병희 선생은 만 28세에 동백림 사건으로 고초를 겪고 10년간 자격정지, 인생 일대 최대의 위기를 맞이합니다. 번역은 생계를 위한 하나의 길이기도 했지요.
플라톤은 이후 50년 동안 34편 가량의 대화편을 집필합니다. 이것들 모두와 위작논란까지 있는 작품들까지, 플라톤 전집을 천병희 선생이 완역했습니다. 사건이지요. 교수 생활을 병행하지만 정년퇴임 이후 박차를 가해 이번 전집만이 아니라 그리스 로마의 고전을 번역하신 세월이 50년, 전집 출간 의미를 담은 최근 인터뷰 세 꼭지를 소개합니다.(보도順)


 

"스무살에 처음 읽은 플라톤, 여든에도 여전히 그는 내 스승"
 [조선일보] 김성현 기자

입력 2019.05.11 03:01
http://news.chosun.com/…/html…/2019/05/11/2019051100082.html

 

 

 

 

 

 

 

 

 

 

 

 

플라톤 완역 천병희 교수 "고전 보면 시야가 넓어집니다"
[서울=연합뉴스] 박상현 기자

송고시간 | 2019-05-12 12:50 
https://www.yna.co.kr/view/AKR20190512022600005?input=1179m

 

 

 

 

 

 

 

 

 

 

 

"끝까지 읽도록 쉽게 번역하는데 공을 많이 들였죠”
 [한겨레]강성만 선임기자

등록 :2019-05-12 18:19
http://www.hani.co.kr/arti/culture/book/893596.html#csidxc403d9416cc63278ece39f4ca1d46c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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좀 늦었지만 『그날이 우리의 창을 두드렸다』(세월호의 시간을 건너는 가족들의 육성기록)를 주문하다가 생각한 검색어는 '304명'이었다. 내가 스크랩한 글들을 내가 검색어로 찾게 될 줄은 몰랐다.  작년 여름 『곽재구의 신포구기행』이 출간되었다. 앞서 자료수집용 게시판에 농민신문사의 월간 <전원생활>에 연재된 기행수필을 모아놓은 것. 연재는 2016년 1월부터 2018년 12월까지 36회 진행되었다. 내용이야 훤하지만 책으로 해당 페이지를 찾기가 쉽지 않아, 게시판에서 가서 검색한다. eBOOK을 구매했다면 간단한 문제인 것을. 검색어는 '304명'. 글 네 개가 뜬다. 시간 순으로 살핀다.

 

신포구기행 텍스트를 '304명'으로 검색하다
첫 번째가 진도 팽목항을 찾았을 때다. "시인 나해철은 304명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시집 한 권을 냈다. 시 304편으로 이뤄진 시집. 절망 속에서도 인간이기를 포기하지 않았던 사람의 이야기 한 편을 옮긴다." 그리고 시집 속 단원고 2학년 2반 양온유(17) 양을 기리는 시를 소개한다.(<전원생활> 2017년 3월호, 책은 2부 네 번째)
두 번째는 '목 놓아 부르는 목포' 편이다. '2017년 4월 9일. 목포에 왔습니다.'로 시작되는 후반부에서, 목포 신항. 세월호 거치소를 찾아간다. '304명'은 사고 상황을 정리하는 동안 거론되지만, 한 유가족 어머니의 인터뷰 장면이 와 닿는다.
"정말 비참한 것은 아이 잃은 우리를 매일 누군가가 감시한다는 것이었지요. 그들은 우리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지요. 아이를 잃은 우리를 범죄자 취급하는 것이었지요.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가슴이 찢어졌지요. 그때부터 마음을 다 닫았어요." (2017년 5월호, 책은 2권 다섯 번째)

 

"국가가 무엇인지, 국가 권력이 국민에게 이래도 되는지"
세 번째는 태안 격렬비열도를 찾았을 때인데, 이번 여행에는 동행이 여럿이다. "신진도 여객선터미널(안흥 외항)로 향했다. 터미널에서 N과 C, Y, <전원생활>의 기자를 만났다. N과 C는 시를 쓰고, Y는 싱어송라이터(가수 겸 작곡가)다." 그들은 등대에 이르는데, 동행인 N시인이 시 한 편을 낭송한다. "국토의 한 끝. 망망대해. 수평선이 펼쳐진 등대 그늘에서 N이 시 한 편을 읽었다. 그는 세월호에서 숨진 304명을 위로하기 위해 304편의 시를 써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라는 시집을 냈다." N은 나해철 시인이다. 그날 밤 세월호가 이 섬 부근을 지날 때, 모두 살아있었고, 이튿날 아침의 참사를 상상할 수 없었다. (2017년 9월호, 책은 1부 세 번째)
네 번째는, 보성 장도를 찾았을 때다. 이번 여행에서 '중공군 모자'로 거론되는 이가 나해철 시인인데, 여기서는 의사 나해철이다. 고교 시절부터 친한 친구였던 두 시인이 장도에 지난해(2017년)에 새로 생긴 13km의 산책로를 걷는다. 이번에 친구를 소개하는 내용은 좀 남다르다. "중공군 모자는 지난해 아름답고 슬픈 시집 한 권을 냈다. 세월호 희생자 304명을 위로한 시집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이 그것이다. 304일 동안 매일 한 편의 시를 쓰며 많이 울었고 많이 아팠고 더 많이 그리웠다고 한다.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이다."(2018년 2월호, 책은 3부 여섯 번째)

 

지난 한 해 나의 큰 자랑은 내 친구가 낸 이 시집
인세의 대부분을 세월호참사가족협의회 활동비로 기부한다고 했던 것 같은데.. 세월호 5주기 행사가 전국 곳곳에서 열렸다. 그렇게 4월이 갔다. 4월 12일, 목포 신항, 거치된 녹슨 세월호 앞에서 진행된 음악회(전남 20개 시군 드림오케스트라 추모음악회)에 다녀오는 것이 올해 나의 추모 행동이었다. 전남 20개 시군 학생들로 구성된 꿈키움 드림오케스트라 단원 1천여 명이 무대에 섰다. 관객들보다 출연자가 더 많은(?) 해서 특별한 공연이었달까? 굳이 하나를 더 거론한다면 영화 <생일>을 본 것. 음악회에 다녀와서 마음이 편치 않던 참에, 개봉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이 영화를 보았다. 불편함이 있었는데 그것을 정확히 설명할 수는 없다. 흔히 말하는 피로도와는 전적으로 다른 것이다. 아직 해결되지 못한 문제들이 산적한데, 이렇게 다큐도 아니고 정극(형식)으로 마주하고 있다는 사실이 좀 비현실적이었다고 할까? 영화가 끝나고 엘리베이터를 탈 때였다. 화장실에서 좀 전에 마주친 중년의 사내가 탑승한다. 좀 전의 그는 세수하고 1회용 타올로 얼굴과 손의 물기를 닦고 있었다. 용기를 내어 그에게 물었다.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였던가 정확한 대답(멘트)을  기억은 못하는데 내가 가지는 감정과 유사했던 것만은 분명하다.


<생일>이 끝나고, 영화 어땠어요, "힘들었어요!"
절반쯤 읽다가 멈춘 나해철의 『영원한 죄, 영원한 슬픔』 후반부를 읽기 시작한다. 페이스북을 통해 대부분을 읽었기에 익숙하지만 아직 다 읽지를 못하였다. 지난 주 토요일 광화문에서는 집회를 한 모양이다. 유투브에 집회 실황을 다룬 동영상을 보았다.‘다시 촛불, 자한당해산 촛불집회’다.
https://youtu.be/UrfOsjvzHOw
유가족인 어머니 한 분이 무대에 오른다. 호성이 엄마다. 분노와 절규다. 세월호참사 희생자와 유가족들에 대한 제1야당의 막말, 광화문 광장에 천막당사를 설치하겠다는 막무가내, 오죽 하면 ‘다시 촛불’이겠나! 동영상 24분에서 34분까지 10분 동안의 발언은 가슴을 후빈다. "이것이 나라냐!" "국가는 없다" 2014년 4월 이구동성으로 던진 질문이 계속되고 있다.
"나라가 뭔가. 대한민국 이 나라는 대체 뭐하는 곳인가, 이 부모가 가만히 집에 있을 수가 없었습니다. 알면 알수록(똑바로 들어~)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이것은 평범한 대한민국의 시민들이 살고 있는 이 나라가, 아니었어요. 1%의 저들의 나라." (위 호성 엄마의 연설 중)

 

해철은 304편의 추모시편들의 맨 앞에 '서문'을 앞세웠는데, 일종의 서시다.
"우리 국가를 믿고 있다가,/ 우리 사회를 믿고 있다가,/ 우리를 믿고 있다가,// 가만 있으라는/ 지도자의 말을 따르다가,// 산 채로 수장되신 분들에게,/ 세상에 남겨진 그분들의 가족들에게,// 국가는 없었다./ 우리 사회는 산산이 깨져 있었고, /우리는 없었다.// 그분들과 함께 하고자,/ 그분들이 되어 보고자,/ 울고, 외치고, 몸부림한 일 년 동안의 기록을 그분들께 바친다. // 영원한 죄와 / 영원한 슬픔을 / 벗어날 수 없을 것이나/ 더 나은 우리 민족공동체를 꿈꾼다.” (서문 전문)

 

"알면 알수록 이건 나라가 아니었습니다"
2017년 1월, 『천만 촛불바다-촛불혁명기념시집』(실천문학사, 2017-01-25)이란 시집이 나온 모양이다. 신경림, 강은교, 박노해 등 '블랙리스트' 시인 61명 참여했다. '2016년 겨울 천만 촛불집회에 대한 시인들의 서정적 응답'이라는데, 거기 수록된 박노해의 시가 제목부터 예사롭지 않다. 「이게 나라다」전문이다.
"눈발을 뚫고 왔다/ 추위에 떨며 왔다/ 촛불의 함성은 멈추지 않는다/ 100만 촛불은 꺼지지 않는다// 어둠의 세력은 포위됐다/ 불의와 거짓은 포위됐다/ 국민의 명령이다/ 범죄자를 구속하라// 눈보라도 겨울바람도/ 우리들 분노와 슬픔으로 타오르는/ 마음속의 촛불은 끄지 못한다/ 우리는 포기하지 않는다/ 우리는 멈춰서지 않는다// 나라를 구출하자/ 정의를 지켜내자/ 공정을 쟁취하자/ 희망을 살려내자// 눈에 띄지도 않는 작은 나는/ 백만 촛불 중의 하나가 아니라/ 백만 촛불의 함성과 한몸이 된/ 크나큰 빛이 되어 나 여기 살아있다// 이게 나라다/ 이게 민주다/ 이게 역사다/ 촛불아 모여라/ 될 때까지 모여라" 
 

박노해의 「이게 나라다」, '다시 촛불' 국면에 새로워    
최근에 완간된 번역가 천병희의 플라톤전집 전7권 중 4권이 『국가』다. 첫 번역판은 2013년 2월에 나왔다. 한 고전모임에서 간사 역할을 할 때 얘기다. 교사들 모임과 엄마들(학부모) 모임의 토론회가 주1회씩 진행되었는데,  2014년 1월부터 이듬해 1월까지 1년에 걸쳐서 읽고 토론했다. 필자는 각각 다른 날 진행된 두 모임에 다 참석했는데, 바로 그 시기에 세월호 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텍스트는 천병희 선생의 번역이었다, 어쩌다 그렇게 된 것인데, 특히 뒷풀이(3교시)에서 벌인 열띤 그리고 격앙된 토론을 기록해놓았으면(녹화) 좋았을 걸 하는 생각이 든다.
2015년에는 플라톤의 주요 대화편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는 고전 필사다이러리북이 같은 출판사에서 출간되었다.  그 가운데 하나가『플라톤의 대화』다. 이 책에는 「향연」,「프로타고라스」, 「소크라테스의 변론」, 「파이돈」, 「파이드로스」 그리고  「국가」에 수록된 천병희의 번역 중 중요 대목들을 필사하게 해놓았다. 이 책에 수록된 「국가」는 509d~521c로, 『국가』의 제6권 후반부에서 제7권 전반부에 해당한다. 구매만 해놓고 '활용'하지는 않았는데, 며칠 전에야 「국가」부분부터 필사하기 시작했다.

 

2014년 1년동안 『국가』토론하는 동안 참사 일어나
철학자가 통치자이거나 통치자가 철학자가 되어야 한다. 플라톤이 주창한 『국가』의 핵심이다. 플라톤전집 7권에 수록된 <서한집>을 보면, 플라톤이 시칠리아 시라쿠사이 시를 두 차례 더 방문하여 이론을 실천하려 했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특히, 플라톤이 쓴 것으로 인정되는 일곱 번째 편지에 주목한다. 그러나 「국가」에서 이 주장은 철학에서 최고 경지에 이른 이가 곧 통치자가 되어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교육받은 적이 없어서 진리를 모르는 자들이야 말할 나위도 없지만 교양 쌓는 일에만 일생을 바치는 것이 허용되어 있는 자들 역시 국가를 능히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은 '그럴 것 같은' 것이 아니라, 당연한 일이 아닐까? 전자들의 경우는 공과 사를 불문하고 모든 행동의 지침이 될 수 있는 생활의 유일한 목적이 없기 때문에 그렇고, 후자들의 경우는 자신들은 살아 있는 동안 이미 '축복 받은 자들의 섬들'에 가서 살고 있다고 믿으므로 자진해서 일을 떠맡지 않을 것이기 때문에 그렇다네.” (『국가』519d)

 

「국가」의 이론을 실현하려 했던 플라톤의 실험
그만큼 교육을 통해(곧 수행을 통해) 깨달음을 얻은 지도자(오피니언) 그룹이 기반이 되고 제 역할을 할 때 철인 통치는 가능하다. 그러나 일정한 반열에 오른 철학자들은 너 나 할 것 없이 통치권을 맡지 않으려고 애를 쓴단다. 인생 도처에 상수(上手)가 있다지만 그들이 적재적소에서 제 역할을 맡기란 쉽지 않다, 그런 얘기로 들린다. 그러므로 아래 인용한 것과 같은 기이한 일이 발생하는데, 이를 오늘날 우리나라에 적용해서 살펴보면 와 닿는 것이 많다. "이게 나라냐?" 우리는 세월호 참사를 통해 국가가 없음을 알게 되었고, 동시에 국가를 발견하기 시작했다. 호성이 엄마의 절규가 귓전에서 쩌렁쩌렁 울린다.

"그리하여 우리 것이자 여러분의 것이기도 한 이 국가는, 오늘날 그림자를 둘러싸고 서로 싸우는가 하면 정권이 무슨 대단한 선이라고 되는 듯이 정권을 둘러싸고 당파싸움을 일삼는 자들이 다스리는 많은 국가들처럼 꿈속에서 통치하는 것이 아니라, 눈을 뜨고 제정신으로 통치하는 국가가 될 것이오. 그러나 사실은 다음과 같소, 통치할 사람들이 통치하는 일에 가장 열의가 적은 나라는 가장 훌륭하고 가장 조용하게 통치되지만, 그와 반대되는 치자들을 둔 나라는 그와 반대로 통치될 것이오,” (『국가』520c~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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