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윌리엄 워터하우스의 그림 <티스베>(1909년)

 

"시기심 많은 담장이여.

왜 연인들을 방해하는 거니?
우리가 서로 온몸으로 결합하도록

네가 허락하거나, 그것이 과하다면

우리가 입이라도 맞출 수 있도록
네가 조금씩 열리는 것은

너에게는 얼마나 사소한 일이니?
우리가 네 고마움을 모르는 것이 아니야,

우리의 말을 사랑하는 이의 
에 전해줄 통로가 주어진 것이

네 덕분임을 우리는 알고 있어." -오비디우스 『변신 이야기』 183-185면

 

세월이 흐르면 곧 해묵은 기억이 되겠지만, 주말드라마 <내 딸, 금사월>이 후반부에 이르면서, 금사월이 친엄마에게는 철천지 원수인 집안의 남자와 결혼을 선언하는 장면에서, 시청자들의 반감이 적지 않았다. 더구나 복수는 복수를 부른다거나, 악순환의 고리를 끊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선택 운운하는 금사월의 대사에 시정자들은 반응했다. 이러한 사정 때문인가, 스토리는 그것이 일종의 속임수였음을 금사월이 친엄마에게 고백하는 것으로 수습한 듯하다. 이런 해프닝을 보면서 느낀 바는 이렇다. 시청자들은 그간의 누적된 억울함을 지켜보았기에, 속시원한 '징악'을 바란다는 것. 현실에서는 결코 일어날 수 없는 일, 아주 드문 사례의 해결이라고 할지라도 드라마니까, 영화니까, 드라마나 영화에서만이라도 그런 모습을 보고자 하는 시청자들 마음을 읽는다. 드라마가 너무 복잡해졌지만, 어쨌든 작가는 사월(백진희)과 찬빈(윤현민)의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가능한 사랑으로 바꾸고자 했으리라, 생각해본다. 그들의 사랑을 이루는데 걸림돌이 있으면 있을수록 더욱 불타오른다는 것이 사랑의 방정식 중 하나이니까.

 

오비디우스의 『변신 이야기』에 실린 많은 이야기 중에서 가장 애절한 사랑 이야기 하나를 꼽으라면, 「퓌라무스와 티스베의 사랑」를 나는 선택한다. 이 이야기의 새로운 버전이 셰익스피어의 『로미오와 줄리엣』이고 『한여름밤의 꿈』이다. 벽돌 벽을 성벽 수준으로 에워쌌다는 높다란 도시 바뷜론. 젊은이들 가운데 가장 잘 생긴 퓌라무스와 동방의 모든 처녀들 가운데 가장 미인 티스베. 두 젊은이는 담 하나를 사이에 두고 사는 이웃이다. 한데 두 집 사이에 놓인 담장은 어마어마하게 높아, 벽돌로 쌓았지만 성벽에 가깝다. 살다보니 서로 알게 되고 사귀다가 그 사랑이 깊어졌다. 머지않아 둘은 결혼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나 두 집안의 가장들은 자식들의 결혼은 물론이고 교제조차 무조건 반대다. 도저히 뛰어넘을 수 없는 높은 벽은 가까이 있으나 먼 두 집안 사이의 감정의 벽을 상징한다. 그러나 이 장벽에도 틈새는 있다. 부실시공 때문에 생긴 하자(瑕疵), 아주 좁은 틈 하나가 있다. 벽에 금이 가 있는 것(하자는 틈 하(瑕)에 흠 자(疵)이다.) 이 틈새를 통해 두 연인은 목소리로 사랑을 나눈다. 막으면 막을수록 더욱 불타오르는 사랑!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진정한 갈구인지, 집안 어른들, 특히 가장의 독단에 대한 반항인지 오늘날 드라마나 영화의 로맨스에서도 통용되는 시츄에이션이다. 조건 없는 사랑이란 세파에 시달리며 인생의 쓴맛과 단맛을 두루 경험한 기성의 시각에는 철부지들의 불장난에 불과함에도. 

둘은 마침내 목소리만을 겨우 듣는 감질나는 사랑에서 벗어나 한 걸음 더 진도를 나가자고 약속한다. 어둠이 내리면 감시자들을 속이고 대문 밖으로 나와 만나기로 결정한 것. 약속 장소는 집 밖 탁 트인 들판을 가로질러 어디쯤 무덤가에 서 있는 어떤 나무 아래다. 바뷜론 성벽을 쌓았다는 세미라미스의 남편인 나누스의 무덤가에 서 있는 뽕나무다. 그곳에는 "눈처럼 흰 열매가 주렁주렁 매달린 키 큰 뽕나무 한 그루가 시원한 샘물 바로 곁에" 서 있었다. (오로지 텍스트만으로 저편의 누군가와 소통하던 PC통신 시절, 사람들은 불원천리를 탓하지 않고 누군가를 만나기 위해 차를 몰았다. 이처럼)

 

대문을 나선 티스베가 먼저 약속 장소인 나무 아래로 간다. 그런데 암사자 한 마리가 불쑥 나타난다. 방금 소 떼를 습격했는지 주둥이가 온통 피투성이다. 달빛 덕분에 재 빨리 위험을 감지한 티스베는 부근의 어두운 동굴 안으로 피신하는데, 엉겁결에 목도리를 떨어뜨리고 만다. 연못에서 갈증을 해소하고 돌아오던 사자는 그 목도리를 발견하고는 갈기갈기 찢어버린다. 그렇게 티스베의 목도리에는 사자의 입와 입가에 묻는 피가 묻는다. 뒤늦게 약속한 나무로 향하던 퓌라무스가 바로 이 목도리를 발견한다. 모두 내 탓이야! 나 때문에 내 사랑 티스베가 처참하게 죽었구나! 퓌라무스는 절규한다. 그리고 티스베의 죽음을 돌이킬 수 없는 것으로 받아들인 그는 차고 있던 칼을 빼어 자신의 옆구리를 찌른다. 그렇게 죽어가면서 그는 상처에서 칼을 뽑았다고 한다. 파손된 수도관의 작은 틈새로 물줄기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오듯, 피는 청년이 쓰러진 자리 주변을 적시기 시작한다. 그의 피가 뿌려지자 나무의 열매는 검은색으로 바뀌었고, 그의 피에 흠뻑 젖은 뿌리와 거기에 매달려 있던 오디들도 자줏빛으로 물든다.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본래 다 익어도 흰색이었는데, 검붉은 색으로 열리기 시작했다는 '변신'설이다)

이쯤이면 사자가 갔을 거야, 내 사랑 퓌라무스가 진작에 와 기다리고 있을 거야, 티스베는 약속한 나무로 돌아오는데, 장소와 나무 생김새는 익숙한데 열매의 색깔은 그녀를 헷갈리게 한다. 그러나 잠시 후 자신의 연인을 발견한 티스베는 머리를 쥐어뜯으며 통곡하기 시작한다. 곧이어 연인의 칼로 티스베도 자결한다.


"죽음만이 그대를 내게서 떼어놓을 수 있었지만 죽음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어요.

..부모님들이시어. ..우리가 한 무덤에 함께 눕는 것은 시샘하지 말아주세요!"

티스베의 마지막 기도다. 그녀는 칼끝을 가슴 아래에다 대고는 연인의 피로 따뜻한 칼 위에 엎어져 자결한다. 그녀의 기도는 신들과 부모님들을 감동시켰고, 두 연인의 죽음을 지켜본 뽕나무 열매는 그때부터 오늘날처럼 익은 뒤에는 색깔이 검어지게 되었다. 그런 이야기다. 로미오와 줄리엣의 비극을 새삼 거론할 필요는 없을 듯하다. 이 이야기의 출처는 로마의 시인 오비디우스(BC43~AD17)  가 쓴 『변신 이야기』다.  이 책은 『신들의 계보』와 같은 당시에 현존하는 문헌이나 당대에는 현존하였을 신화 이야기에서 소재를 수집하여, 재창조한 이야기집이다. 아폴로도로스의 『그리스 신화』처럼 도서관의 서지목록처럼 간결하게 정리된 신화집이 있기는 하나, 희랍의 신화들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뒷세이아』와 같이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녹아든 형식으로 널리 유포되었다고 할 수 있다. 두 서사시에 비하면 그보다 조금 후세에 집필된 『신들의 계보』는 서사시의 형식이기는 하나, 신들의 족보에 가까운 간결함이 있다. 본래의 신화 이야기를 호메로스처철 작품에 녹아들게 하는 경우가 있는가 하면, 헤시오도스처럼 계보에 충실한 글을 통해 신화를 정리한 경우도 있다. 『변신 이야기』는 전자 호메로스적인 글쓰기라고 할 수 있다. 어쨌든 '변신담'은 전설이 그에 걸맞는 증거물이 남아 있어야 하듯, 이후로 A가 B로 바뀌었다는 구체적인 사물이 있어야만 한다. 실제로 위에 소개한 오디가 다 익었을 때 오늘날처럼 검붉은 색을 띠게 되는 것은... 과 같은 이야기는, 소크라테스나 플라톤보다 앞선 시대를 살았던 이솝의 우화 한 대목에서 어긋나기 시작한다.

 

214 강도와 뽕나무

강도가 길에서 사람을 죽였다. 강도는 현장에 있던 사람들에게 쫓기자 피투성이가 된 희생자를 버리고 도망쳤다. 맞은편에서 오던 행인들이 손이 왜 그렇게 더럽혀졌느냐고 묻자 강도는 방금 뽕나무에서 내려오는 길이라고 했다. 강도가 그렇게 말하고 있을 때 뒤쫓던 사람들이 그를 따라잡았다. 그들은 강도를 붙잡아 뽕나무에 매달았다. 뽕나무가 강도에게 말했다. “당신을 처형하는 데 도움이 되어도 내 가슴은 아프지 않소. 살인은 당신이 저질러놓고 그 피는 나한테 닦으려 했으니 말이오.” 

이 우화의 교훈은 "본성이 착한 사람도 때로는 하찮은 자에게 명예를 훼손당하면 주저 없이 적의를 보인다는 것"이다. 물론 『변신 이야기』는 『이솝우화』보다 한참 후에 집필된 것이지만, 다루는 시대는 『이솝우화』가 화자되던 시대보다 앞선 때를 다루고 있다. 다만, 뽕나무의 열매인 오디는 처음에는 푸른 색이다가 하얀 색으로 변하고 흐물흐물 농익을 무렵에는 붉다 못해 검은색을 띤다. 예전에는 명주실(비단옷의 재료)을 뽑기 위해 누에를 치고, 그 누에의 먹이가 뽕잎이었는데, 지금 우리나라에서는 뽕나무를 '오디'를 확보하기 위해(잼이나 와인의 재료로) 재배한다. 열매가 완숙되면 보관성이 아주 낮아 흐물거리기 때문에, 수확기의 날씨나 투입할 적정 인력을 확보하지 못하면 일년 농사를 한방에 망치기 십상이다. 조금만 신중했으면 좋았을 것을, 일부의 단서를 가지고 속단하여 죽음에 이르는 퓌라무스나 연인을 따라 죽음을 선택하는 티스베의 사랑처럼, 오디에 얽힌 변신 이야기는 완숙기의 오디 열매처럼 쉽게 떨어져버렀다. 어쨌든. 앞선 시대에 집필된 『이솝우화』가 훗날 집필된 『변신 이야기』보다 현실을 잘 반영하고 있다는 점은 흥미롭다. 놓익은 검붉은 오디 열매의 표면에는 하얀 가루가 날려와 내려 앉아 있는데, 바로 이 대목에서 착안하여 '변신' 이야기가 재정리된 것은 아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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