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 상하 두 권으로 펴낸 장미의 이름_서문 앞에는 으레 헌사(獻詞)가 놓일 자리에 이런 문장이 적혀 있다. 이 서문은 198015일에 썼다. 탈고 시점부터 39년이 흘렀다. 움베르토 에코는 2016219일에 세상을 떠났다. 향년 84세. 소설은 픽션(fiction)이다. 사실이 아니지만 독자가 사실처럼 받아들일 때(개연성 확보) 파장은 클 수밖에 없다. 소설가는 서문에서조차 사실인 것처럼 거짓말을 하려는 유혹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가장 위대한 거짓말은 서문에 있다다. 소설론 강의에서 들은 얘기다. 장미의 이름처럼 꼭 들어맞는 경우가 또 있을까?

에코는 작가이기 전에 볼로냐대학교 기호학과 교수(1971~ )였다. 어떤 의미가 생성되고 소비 되는 현상을 다루는 학문. 언어의 구조와 그 의미를 연구한다는 데서 언어학 분야와 맞닿아 있다 하지만 언어학과 다르게 기호학은 비언어 기호 체계도 연구 대상이다. 기호학(記號學)이 그렇다. 현대 사회의 세기말적 위기를 소설에 담고 싶다, 에코의 바람이었다. 마침 출판사에 근무하는 여자 친구가 추리소설을 써보라고 권유하고, 장미의 이름2년 만에 썼단다. 여자 친구, 고마우신 분이다.

장미의 이름은 일독만으로 의미 파악이 쉽지 않은 작품이다. 노년에 이른 화자가 7일 동안, 자신이 겪은 인생 최고의 경험을 회상하는 방식이다. 그래도 추리소설답게 끊임없이 일렁이는 호기심 덕분에 책은 읽힌다. 화자의 내레이션이야말로 독자의 눈길을 붙드는 역할을 톡톡히 한다. 작가가 책머리에 "당연히 이것은 수기(手記)이다."라고 한 수수께끼를 풀고 싶은 것이다.

장미의 이름은 웃음(희극, 코미디나 개그, 정치풍자)이 가진 강력한 힘을 역설한다. 말 그대로 민주주의가 실현된 국가일수록 정치풍자가 허용되고 권장되며, 풍자 대상에서는 예외가 없다. 전문가들이 제공하는 웃음에는 서슬 퍼런 날이 서 있다. 비극에 이어 고()희극이, 비극과 동시에 희극이 축제 마당 연극 경연에 오르던 황금기의 아테나이가 그랬다. 그러한 맥은 오늘 미국의 정치문화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이는 언론자유(지수)와도 비례한다.

이참에 장미의 이름을 다시 읽은(거의 처음처럼) 계기가 있다. <김현정의 뉴스쇼>(유투브)를 시청하는데 공중파 시간이 끝나고 앵커와 제작진들, 일부 게스트가 후일담을 나누는데(시청자들은 실시간에 댓글 참여, '댓꿀쇼')에서 누군가 희극이 가진 힘을 이야기하면서 장미의 이름을 언급했다. 한 권의 금서를 둘러싸고 살인사건이 이어지는데 그 책이 아리스토텔레스가 썼다고 여기는 <시학> 2권이란다. 장미의 이름1(시학에서 미처 다루지 못한 (그리스) 희극에 관해 다루고 있다는 것. ", 그랬지!, 그런 대목이 있었지."하고는 천천히 그리고 찬찬히 읽기 시작했다.


25장으로 구성된 시학의 핵심은 6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유명한, 비극의 정의가 시작되는 것. 그 앞은 비극을 정의하는 데 필요한 기초를 다뤘고, 이어질 장들은 이에 대한 부연설명이 되는 것이다. 6장에서 비극은 '완결되고 일정한 크기를 가진 전체적인 행동의 모방'이라고 정의한다. 7장에서는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며 비극의 정의 중 '전체'에 대해 자세히 다루는 식이다.

"처음은 필연적으로 다른 것 다음에 오는 것이 아니라 그다음에 필연적으로 다른 것이 존재하거나 생성되는 것이다. 반대로 끝은 필연적으로 또는 대게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것이다. 중간은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도 다른 것이 존재하는 것이다."

언어유희로 여길 수 있고, 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당연하신 말씀을 왜 늘어놓는 것일까? 간결하고 명징한 문체로 예술론을 전개하면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왜? 나는 이 대목이 늘 궁금했다. 그런데, 앞서 얘기한 6장 첫머리에 바로 그 유명한 구절이 나온다.

"6절 운율에 의한 모방과 희극에 관해서는 나중에 이야기하기로 하고 먼저 비극에 관해 이야기하기로 하자."

‘6절 운율에 의한 모방은 서사시다. "서사시에 관해서는 23·24·25장에서 거론하지만 희극에 관한 논의는 없다."(옮긴이 주석) 바로 이 대목에서 에코는 추리소설 장미의 이름을 착안하였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소개한 '발견(무지의 상태에서 앎의 상태로 이행하는 것)의 종류 가운데 네 번째인 '추리에 의한 발견'을 주로 사용하면서 말이다. 희극에 관해 논한 후속편, <시학> 2권이 '없을 리 없다' 에코는 그런 심증에 기반하여 논픽션처럼 픽션의 세계를 펼친다.

희극시학6장 첫 대목의 언급 말고 시학의 어디 쯤에 숨어 있는 걸까? 앞서 언급한 '전체'에 대한 부연 설명에 있다고 본다. '전체는 처음과 중간과 끝을 갖는다.' 그런데 현존하는 시학의 끝부분은 파손되어 있다. "비극과 서사시의 일반적 본질과 그 종류, 구성 요소의 수와 성질, 성공과 실패의 여러 원인, 비평가들의 비판과 그에 대한 해결에 관해서는 이쯤 해두자……."로 끝나는 것. 옮긴이(천병희)도 이와 관련 "이 파손된 부분에서는 (최소한)비극과 희극의 비교론이 펼쳐졌을 것으로 추정한다."는 주석을 달았다.

(약간의 스포일러) 세상에서 사라지고 없는 것들까지 희귀한 장서(藏書: 책을 간직해 둠. 또는 그 책.)들을 소장하고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가상의, 공간 배경) 전체가 한 권의 장서(:감출 장) 때문에 불에 타 사라진다. 희극에 관해 논하였다는, 아리스토텔레스 스스로가 말한 시학의 전체 가운데 끝부분, "필연적으로 또는 대개 다른 것 다음에 존재하고, 그다음에 다른 것은 필연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을 감추려는 세력과 찾으려는 이들의 갈등(문제)이 소멸되는 즈음에, 수도원은 소실(燒失)되어 끝장을 보게 되는 셈이다. 발상도 그렇거니와 훌륭한 마무리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은 후반부에서 (가상의) <시학> 2권의 첫 대목을 소개한다.

"……1부에서 우리는 비극을 다루면서 이 비극이 연민과 공포를 야기함으로써 카타르시스의 창출을 통해... 이제 약속대로 희극을 풍자극, 광대극과 더불어 다루면서 이 희극이 어리석은 자들을 즐겁게 함으로써 비극과 같은 작용을 하는 과정을 검토해보기로 하자. "(장미의 이름831)

천병희 선생의 시학(원전번역, 문예춢판사) 초판은 1982년에 발행된다. 선생은 1975년에 처음 <시학> 그리스어 번역을 시도했다고 한다.(수사학/시학옮김이 서문) 이 책 이윤기 선생이 장미의 이름초판을 펴낸 해는 1986년이다. 움베르토 에코가(서문) 장미의 이름을 탈고한 해는 19801월 이전이다. 그래도 문학 전공자가, 창작을 고민하면서 천병희의 시학이 원전번역으로 나와 있음에도 너무 가볍게 읽지 않았나, 때늦은 후회다. 천병희 선생은 시학을 생활고로 힘들게 공부하던 시절에 옮겼다. 한 출판사에 매절(인세가 아닌)로 넘길 수밖에 없었던 사연이다. 근래에 이르기까지 그 출판사의 손에 꼽히는 스테디셀러였는데, 선생의 희랍어·라틴어 원전 번역서들을 꾸준히 펴내는 출판사에서 수사학/시학(2017)으로 묶어 발행하였다.'시학'은 고전번역가의 인생 역정을 읽을 수 있는 책이기도 하다.

에코는 희극을 다룬 시학 후속편이 집필되고 발행이 되었지만 너무 위험한 내용이라 극소수만 독점하고 널리 알려지지 않았다는 설정(픽션)에서 장미의 이름을 썼다. 그런데 천병희 선생은 출간 당시, 그리고 십수 세기 동안 묻혀 있다가 발굴되어 세계사를 뒤흔들었던 사연 많은 금서(禁書)를 번역하기도 했다. 타키투스의 게르마니아(20123, ). 한 권의 책이 가져온 파장은 위험천만했으며, 순혈주의에 토대가 되어 유대인 학살의 근거가 되었다. 실제의 책(시학)과 관련한 가상의 책(에코의 경우) 때문에 벌어진 참사(장미의 이름)가 아니라, 게르마니아라는 책(논픽션)이 야기한 비극(논픽션)이 실제 일어난 것더불어 크리스토퍼 B. 크레브스가 쓴 가장 위험한 책-로마 제국부터 나치 독일까지 <게르마니아> 오독의 역사(20129, 민음인, 현재 절판)게르마니아(최초의 원전 번역)에 이어 번역·출간되어 입체적인 독서가 가능하게 되었다

장미의 이름은 책(시학)을 다룬 책일까? (시학)이 미처 다루지 못한 책을 다룬 책인 것은 분명하다. 움베르토 에코는 웃음(희극)이 가진 신비한 힘과 그 '파괴력'을 충분히 다뤘다, 그 안에 시학_희극편을 품고 있다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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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imeroad 2022-05-22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2019년 3월에 작성한 글을 2022년 5월 22일, 기존 글을 대폭 수정하여 별도의 카테고리에 올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