돌봄의 또 다른 진실은 구체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 돌봄을 추상적인 윤리 강령으로, 정의로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는 건 돌봄 생태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돌봄의 실질적인 요청을 급작스런 ‘닥침‘이나 당혹스런 ‘호출‘로만 만나게 된다면, 시민사회가 헛돌고 있다는 징표다. 시민의 시민 됨, 즉 시민적 덕성을 무엇보다 돌봄의 실천 경험, 돌봄의 역량, 돌봄 자산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돌봐보니까 돌봄이 무섭지 않다.‘ ‘돌봐달라고 부탁할 용기도 생겼다.‘ ‘돌봄의 겹들이 이해된다.‘ 경험자들의 말이다. 물론 돌봄의 경험은 실패와 좌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보람, 사랑과 증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정동들로 요동친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가 점차 돌봄의 동심원을 형성하는 것 또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돌봄의 실천 속에서만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돌봄의 역설 내지는 다면성이다. 돌봄의 사회화나 공공화 또는 시민적 돌봄이나 시민의 자리에서 돌보기 등이 여전히 대부분 사람에게 명료하지 않은 건 돌봄의 물질적 구체성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다. - P10
아이를, 장애가 있는 아이를 온전히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란 쉽지 않다. 믿음과 신뢰의 토대가 없으면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장애아 보호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만나는 활동지원 선생님들이라 이들에겐 어느정도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다. 특히 중증 장애아의 경우, 보호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무엇보다 재활시설이나 제도 등 구체적인 정보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필수 지지대였다. 성장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찬빈이의 이웃 시민이 될지 모르겠지만, 장애아 보호자 커뮤니티가 매우 중요한 자조그룹인 건 확실했다. 필요한 참견과 성가신 오지랖 사이에서 무게 추가 왔다 갔다 하는 이 관계는 특히 돌보는 엄마들이 고립이나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연결하는 작은 사회다. 이 커뮤니티 안에서 주고받는 구체적인 서로 돌봄은 시민사회가 갖춰야 할 돌봄 역량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P27
돌봄은 표준화되기 어려운 아주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진다. 또 그 관계는 고정된 게 아니다. 평등하기보단 출렁거리며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정연처럼 돌봄의 탈젠더화, 탈가족화를 부르짖는 사람이 남편처럼 가족을 우선 의존하는 사람과 배우자 관계에서 돌봄을 협상하듯, 협상의 자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등장한다. 부모님 돌봄에는 일반적인 ‘효‘의 감각과는 다른, 평생 고만고만하고 간당간당하고 쓰라렸던 삶에 대한 두 사람의 연민이 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 앞에서는 별 협상 없는 동맹이 가능했다. 또 돌봄은 자기 자신의 숱한 정체성 간의 협상이기도 하다. 정연과 남편 두 사람 다 심야나 새벽 배송을 질색한다. 싼값에 그 시간대의 배달노동을 당연시하는 세태에 맞선다는 점에서는 동맹이다. 하지만 전격적인 돌봄이 시작되면서 장보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된 때가 있었다. 생필품이 아쉽고 정신이 없어 뭔가 빠뜨렸을 때마다 둘의 삶에는 새벽 배송이 끼어들었다. 동맹과 협상의 자리는 자주 변동됐고 전선은 다시 그어지곤 했다. 여성, 아내, 엄마, 딸, 임금 노동과 돌봄 노동을 모두 하는 이중의 노동자, 소비자, 시민의 정체성이 정연 같은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노화, 질병 등으로 돌봄자였다가 돌봄 의존자였다가 자리를 갈아탄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정체성들과 협상 중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협상 테이블은 고정된 게 아니라 출렁거린다. - P51
상희는 동생들이 오면 주중에 엄마 상태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한다. 새겨듣건 흘려듣건 상관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돌봄으로써 함께 돌보고 책임지는 사람이길 원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행된 돌봄에도 동생들이 동행과 공유의 감각을 가질 수 있어야 자신도 독박 돌봄의 덫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봄의 역량은 하면서 배우고, 또 배우면서 느는 거라서 동생들의 돌봄 태도나 기술도 느릿느릿 성숙의 길을 가고 있다. - P77
나한테 한 달에 90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으로 경화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저녁 지어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 나한테는 그게 사회적 대화야. 그리고 자기들처럼 나 고립될까 봐 신경 써주는 친구들이 있고. 이런 게 다 모여서 엄마를 직접 돌보고 싶다는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선택했다지만 그 선택은 나에게 있었던 게 아닌 거야. ‘충분히 했어, 이제 됐어‘라는 상태는 어떤 돌봄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워. 그런데 돌보는 사람을 돌봐주는 체계와 안정적인 자원,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품기조차 어려운 꿈이야. - P87
"저의 이야기가 ‘어쩔 수 없어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 개인의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돌봄 지도 만들기에 디딤돌이 되길 희망합니다." - P89
2010년대 초반 Y요양병원에서 있었던 HIV 감염인 학대가 다시 떠올랐다. ‘감염인도 귀한 목숨이고 싶다.‘ 당시 HIV/AIDS 인권활동가가 외치는 말을 들으며 명치 끝에 느껴지던 통증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무지와 몰염치의 등에 올라탄 혐오는 그때 이후 멈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나는 이렇게 서로 무관한 사람처럼 살아왔던 거지? 알 만한 사람들도 감염인을 두고 빈곤할 것 같다, 일을 못 하고 있을것 같다. 숨어 살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던가. 사실 나도 그러지 않았나...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지 않은가... 희수는 이 어이없는 경계 짓기와 선량한 무지에 자신의 몫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데. 희수는 이제라도 자기를 휘감는 무기력과 분노를 똑바로 직면하고 싶었다. - P115
감염인이 감염인을 돌본다. 이거야말로 PL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초창기부터 맺어온 관계의 핵심이었다. 이것이 비감염인 희수가 체감하는 S커뮤니티의 힘이고 미래였다. 크고 작은 PL 모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의미 없는 단순 반복이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의 돌봄역량을 키우는 역사였다. 이 역사는 감염인을 위해 진행된 지원사업 이야기가 아니다. 감염인 당사자들의 일상을 고립이나 무기력한 자포자기에서 지켜준 서로 돌봄의 이야기다. 소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체계도 없이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여도 이 돌봄들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다. …… 여기 S커뮤니티에서 감염인들은 비감염인 눈치 보는 일 없이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며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았다. 지원의 자리에 서로를 보듬는 지지와 상담이 놓였다. 의료나 생활, 관계 영역에서 할 수 있는 한 종합 돌봄을 제공하려 서로 애쓴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 문화적으로든 ‘우리‘라는 연대 의식을 공유하고, 발휘하고, 재생산하는 허브다. 감염인들에게 ‘우리 캠프 가자‘, ‘우리 나들이 가자‘, ‘돌봄 필요하면 연락해라‘ 같은 초대 메기지를 계속 보내는 건 누구도 고립이나 소외의 희생자가 되지 않길 한마음으로 희망하기 때문이다. - P119
"죽음을 배운다는 건 죽음을 삶의 끝자락으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과 뗄 수 없어요. 죽음을 돌보는 건 삶을 돌보는 것이죠. 우리가 어울려서 같이 사는 거, 같이 살다가 또 죽음을 곁에서 지키는 거, 그게 돌봄이에요. 따로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의 삶은 하루와도 같아요. 오늘 하루를 꽉 차게 살고 죽음을 맞이하듯 마무리하면, 내일이라는 다른 시간이 또 새로운 삶으로 시작됩니다. 죽음은 늘 보이는 곳에 함께 있어요. 수도회에서는 외출할 때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갑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도 나중에 해야 할 말이나 건네야 할 감정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잔여를 남기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면 죽음 앞에서그렇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일은 없을 거라고 수도회에서는 가르치죠." - P134
수현은 말 없이 작은 아이 뒤로 천천히 걷는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방패막이를 자처한다. 그냥 지켜보는 돌봄, 의도와 계획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지켜보다가 당사자의 필요에 응답하는 돌봄, 그게 좋은 돌봄이라 하지 않던가. - P154
"그래도 폐쇄적인 공간에 머물기만 하는 대신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삶을 함께 사는 활동이 우리가 하는 돌봄이에요. 주로 엄마로 대표되는 가족이 유일한 ‘친구‘이고 또래 친구나 직장 동료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서마저 닫힌 생활을 강요하면 어디 가서 관계를 만들어요? 나들이도 가고 체육도 센터 안에서만이 아니라 동네 헬스클럽 가서 하고, 노래방 가서 놀고, 마트 가고, 키오스크도 찍어보고. 그러는 게 삶을 사는 거예요. ‘놀아준다‘가 아니라 같이 노는 거예요. 인솔하는 게 아니라 같이 나들이하는 거예요. 이런 활동에 사회적응 훈련, 치유, 체험, 힐링, 이런 단어들 더 이상 쓰지 맙시다. 아니 도대체 발달장애인은 십 몇 년이고 왜 늘 적응하는 훈련만 해야하나요? 그냥 사는 거지. 외식이 왜 늘 체험이에요? 그냥 나가서 먹으면 되는 거지. 장애인은 왜 맨날 캠프에 가나요? 그냥 여행 가는 거지." - P163
그때나 지금이나 기본적 필요 충족에 그치는 돌봄이 아니라 당사자가 욕망을 드러내고 요구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싶다. 칸트와 여왕에게는 욕망이 있다. 잠, 배설, 식사, 옷입기. 씻기는 일상의 기본이지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만 제공하면 하루 종일 같은 곳에 가둬놓고(보호하고) 개별화와 관계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일상이 채워져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미리 마련된 서비스와 프로그램에 칸트가 따르지 않으면 ‘고집부리고 떼쓰는 것‘이 되고 ‘도전 행동‘이 된다. 고집부리는 것이 아닌 요구와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걸 얘기하고 싶다. 칸트의 필요나 요구, 욕망은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칸트의 능력에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칸트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수현은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파트너다. 수현은 관계 속에서 칸트의 요구나 욕망이 손톱만큼 자라나는 걸 볼 때 두근거린다. 자기 손톱이 자라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어, 손톱이 벌써 이만큼 길었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자른다. 서로를 계속 지켜보며 반응하는 돌봄 관계에서는 손톱이 자라는 그 느리고 미묘한 변화가 보인다. 이용자 중에서 직업 훈련이 가능한 사람은 하루에 두시간씩 외부 기관에 실습을 간다. 비닐봉지에 면봉 열 개를 넣는 작업 훈련이었다.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면봉을 다 담고도 비닐이 남았던 모양이다. 늘 침묵하던 이용자가 더 담게 면봉을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두 시간은 고사하고 잠시도 집중하지 못하고 들썩이던 이용자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에는 끝날 시간이 되자 갑자기 ‘더 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단순한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그야말로 거짓말같이 한순간 피어난다. 수현이 파악한 필요만이 아니라, 보호자, 부모가 요구한 욕구만이 아니라, 서로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칸트가 뭔가를 ‘좋다‘고 받아들일 때, ‘싫다‘를 표현할 때, 칸트의 반응이 다르다. 처음에는 ‘못해요, 못해요‘가 입버릇이었다가 같이 하면서 차츰 할 줄 아는 걸 찾는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직원도 그렇다. 같이 호흡을 맞추다 어느 순간에 번쩍 뭔가가 되어질 때, 표현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서로의 성취가 된다 - P164
아이에게 역할 모델은 대단한 성공을 이룬 인물이나 특별한 전문직일 필요는 없다. 신뢰가 가는 어른이면 충분하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해내는,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어른 말이다. 경아가 보기에 마을 주민들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역할 모델이다. 헬스클럽 관장을 비롯해 곳곳에 포진한 주민들이 있다. 소방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그와 관련된 훈련을 알려주는 분도 있고, 장학금을 만들고 센터를 위해 이런저런 특별행사를 기획하는 상인회 같은 곳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경아는 돌아다니는 앱과 같다. 지원하고 연계할 수 있는 정보와 사람이 경아에 탑재된다. 경아가 연결을 시도하면 요청을 받은 쪽이 성가셔하거나 내빼는 일은 드물다. 대체로 우호적이다. 공무원은 연결할 수 있는 공적 서비스를 알려주고, 이 동네에 없는것은 다른 쪽을 수소문하여 알아봐준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움직이면서 만들어간다. 아이의 상황도 천차만별이다. 미리 다 규정한 매뉴얼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상황에 따라 시행착오를 거쳐 지도를 고쳐 그리는 식이다. 그러려면 마을 주민들의 모세혈관, 실핏줄 같은 연결망 그리고 참여가 필요하다. 관심 끄고 살면 편한데 자기 에너지를 써야 하는 성가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 P184
방문진료를 좋아하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이 일이 쉽다는 뜻 또한 아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 하루 방문 건수는 달라지지만 영구임대아파트처럼 방문할 환자가 근거리에 모여 있는 경우에는 오전 오후 꼬박 매달려 여덟 집 정도를 방문한다. 기운이 쏙 빠진다. 우울과의 대화 속에서 치켜올리려고 온갖 오버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거절에 부딪힐 때도 많다. 힘을 쥐어짜 다가가고 아무리 공을 들여도 도움을 거절하는 환자도 많다. 마음을 줬다가 상처받은 경험이 많으니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라 짐작한다. 화를 내고 문을 닫아걸면 어쩔 수없이 다가가기를 멈춘다. 무언가 해달라고 하는 경우보다 거부하는 경우가 훨씬 어렵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기대하는 바가 없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거절당해왔을지 헤아리려 할 뿐이다. 찾아가 물어본다. 방문의 뜻이다. 찾고 묻기가 충분히 잦아질 때, 닫힌 방문이 빼꼼히 열리기를 고대해본다. 돌봄은 일방이 아닌 관계다. 문 열어주는 당사자의 참여가 필수다. 주민이자 당사자가 스스로 돌보는 힘, 서로 돌보는 힘에 기대어 사라와 동료들이 곁에 다가갈 때 스르르 열리는 문. 의료, 돌봄, 복지의 경계를 허무는 힘은 선언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런 만남과 부딪힘이다. 찾고 묻고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또 주변인의 지지와 덕담으로 기운 차리는 사라의 삶 또한 누군가의 지속적인 ‘방문‘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돌봄 의존자는 또 어떤가. 사람의 역량은 수면 위 빙산의 일각에서 사고팔 수 있는 노동력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 그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활동 전체다. 고령자와 어린 세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활동이 돌봄이다. 돌봄 의존자는 일방적 수혜자나 대상자도 아니다. 관계적 역량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관계에서 건강이 비롯한다는 의료사협의 철학에서 이분들의 존재는 필수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이다. 의존하는 사람이 있어 돌봄 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봄 체계가 지역 공동체의 이익이자 자산이다. 이를 통해 사회라는 것을 재생산하고 미래를 만들어낸다. 나이 든 이를 돌보고 어린 사람을 양육하며, 빈곤, 질병, 장애, 이주 배경 등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는 구성원들의 운명을 잔여적이고 한시적인 정부의 지원 체계에만 맡기는 대신, 서로 돌봄의 체계로 같이 떠맡겠다는 것이 의료사협의 공유자산이다. 이런 자산이 시장화된 돌봄과 공동체 돌봄의 차이를 만든다. - P226
사람들이 SNS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사진을 올릴 때마다 ‘나만 고양이 없어!‘라고 한탄하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연수에게 그런 고양이 사진 같은 존재가 일본의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공공병원 비율도 높을뿐더러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공익적 역할을 하는 민간 병원 역할도 그에 못지않다. 민의련에는 1800여 개 의료기관이 가입해 있다. 모두 공공성을 띤 민간병원이다. 농협이 설립한 병원, 생협이 운영하는 병원, 공익재단법인이 운영하는 병원 등이다. 법인에 소속된 1차 의원과 돌봄시설이 함께 활동한다. 이럴 때 1차 의원은 의사 개인의 자영업이 아니라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늘리겠다고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운영이 어려워지면 튼튼한 시민참여 구조 속에서 지원을 받는다. 공익적 민간 병원에는 서포터즈 역할을 하는 시민 조직이 있어서 이들 병원을 우선 이용하고 재정 후원자 역할도 맡는다. 그중 한 곳의 기관지를 봤더니 인근 업소 이름 3백여 개가 실려 있다. 동네 빵집, 동네 꽃집, 동네 술집, 동네 채소가게, 동네 잦화상, 그런 이름들이 후원자로 들어차 있으이 지역 1차 의원과 각종 돌범시설은 주민의 것이라 할 만했다. - P239
"무겐 프로젝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저 이번에 탐방 갔다가 이 말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무겐이 뭐예요?" "조합원과 무한 대화한다는 뜻이래요. 조합원의 꿈을 무한 실현한다는 뜻도 있대요. 그래서 구성원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깨달을 때까지 토론한대요." "맞아요. 맞아. 사실 처음부터 자기가 정말 뭘 원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요. 얘기하고 경험하다 보면 깨닫는 것 아니겠어요?" "조합원 되면 더 안전하고 질 좋은 진료를 받는다니까 협동조합에 들어오잖아요? 또 최근에는 초고령 시대를 맞으면서 안전한 노후를 위해 보험 들어놓는다는 생각? 그런데 무한 토론을 하면서 각자의 사연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지역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관계란 무엇인가를 막 얘기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꿈이 뭔지 알게 되고요." "저, 이 얘기 들을 때, 이 지점에서 전율이 일었어요. 이때 깨닫는 꿈이라는 건 개인적인 꿈이기도 하지만 협동조합 구성원으로서 갖는 꿈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되지?‘로 논의가 진척된다고 해요." "참여를 독려한다는 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해요. ‘독려‘는 누군가가 여전히 리더인 거예요. 아예 언어를 바꿔서 지역 주민, 조합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깨닫도록 하는 방식이래요." ‘무겐!‘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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