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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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상한 말처럼 들리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과거의 어떤 시간들, 특히 당시에 우리를 완전히 굴복시키기 직전까지 갔던 어떤 순간들을 완전히 지나기 위해서는, 그 순간을 지난 후에야 얻게 된 역량이 필요하다. 얀은 스무살 이후에 걸을 수 없고, 점점 근육이 소실되어서 마침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는 한계 속에서 살았다. 그리고 바로 그 한계 속에서 살며 그가 배운 것들 덕분에, 비로소 그는 그 한계를 통과할 수 있는 인간이 되었다. 너무 늦은 것이 아닐까? 스무 살이라는 한계 안에서 살 때, 즉 열여덟이나 열아홉 살 즈음에 그 힘이 필요했던 것이 아닐까? 방법이 있다. 그 한계를 통과하며 얻은 우리의 역량으로 바로 지금 그 한계 가득한 ‘과거‘를 진정으로 통과하는 것이다. 얀은 그렇게 서른여섯 살의 시점에서 스무 살이었던 ‘과거‘를 통과한다. - P14

그러나 이 책은 ‘지원 기관‘으로 대표되는 임상적, 관료적 시선이 개개인의 구체적인 몸을 이해하고 돕기보다는, 일반화된 질병에 대한 ‘임상적 사례‘로 개인을 분류하고, 당사자보다 마치 그 개인을 더 많이 안다는 듯이 신체와 삶에 어떻게 개입하는지에 관해서도 비판적으로 다루고 있다. 지원 기관 앞에서의 얀은 "정기적으로고장 나는 기계에 불과할 뿐이다." - P16

테라 인코그니타(terra incognita, 미지의 땅) - P36

어린이의 삶을 산다는 것은 타인의 눈을 의식하지 않고 온전히 자기 자신의 모습으로 여유롭게 세상을 산다는 것을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을 받는다는 것은 가시적 대상으로 살아간다는 것을 의미하며, 외부의 시선으로 자기 자신을 바라본다는 것은 스스로를 통제할 수 있는 훈련을 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아이들은 하루 종일 무엇을 하며 시간을 보낼까? "특별히 하는 건 없어요." 이것은 어른들의 질문에 대한 대답이다. 바로 그 때문에, 아이들은 어른들이 보고 있는 동안 ‘특별히 하는 건 없는‘ 일을 할 수가 없다. 즉, 타인의눈, 성인 어른들의 눈앞에선 무엇인가를 해야만 한다는말이다.

타인의 시선은 훈육과 통제를 의미한다.

타인의 시선, 성인의 시선은 시간을 더욱 가시적으로 만든다. 여기에서 여기까지의 시간. 학교의 수업과 수업 간의 시간. 쉬는 시간은 대기 시간이다. 대기 시간은 수많은 분과 초로 이루어져 있다. 책상과 벽 사이를 왔다갔다 하고,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 든다. 책상 앞에 앉아 창밖을 바라본다. 시간은 흐르지만, 흐르는 시간을 인지할 수 없다. 세상을 여유롭게 대하는 꿈을 꾼다. 자유로운 삶을 꿈꾼다. - P57

내게 책임감이라는 것은 너무나 강하게 자리 잡고 있기에 밝힐 필요가 없다. 푸코에 의하면 책임감은 담론적으로 그 주체를 지배한다고 했다. 즉, 책임감은 그 주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위하는 방식에 조건을 부여한다는 것이다. 책임감은 항상 선제적인 조건을 포함하기에 내가 굳이 따로 결정을 내리지 않아도 된다. 내가 하는 행위, 내가 해야 하는 행위는 모두 책임감에서 나온다. 나는 어떤 일을 하기 전에 자주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예를 들어 가기 싫은 곳에 가야만 할 때, 낯설고 외딴곳에서 강의를 해야할 때, 불편하고 거북한 곳에서 열리는 컨퍼런스에 참석해야 할 때면 그 전날 밤잠을 이루기가 쉽지 않다. 하지만 이처럼 몸이 반항할지라도 결국엔 책임감이 이기기 마련이다. 그렇지 않다면 지금의 나는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 P71

о사회학자 어빙 고프먼 (Erving Goffman)은 낙인을 뜻하는 스티그마(Stigma), 즉 신뢰할 수 없는 가시적 표식에 관해 글을 썼다. 스티그마라는 단어는 고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했으며, 피부를 불에 지져 표식을 남기는 것을 뜻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탈옥자이거나, 선량한 사람들이 사는 도시의 삶, 즉 ‘폴리스(Polis)‘에 발을 들여놓기에 적절치 않은 사람이라 간주되었다. 사람들은 이러한 표식을 지닌 이와는 말을 나누거나 함께 어떤 일을 하는 것을 기피했다. 이 표식을 지닌 사람은 타인의 존중을 받지 못했다. 이탈리아의 철학자 조르조 아감벤(Giorgio Agamben)은 호모 사케르(Homo Sacer)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들은 사람이 아니다. 이것은 벌거벗은 삶이며 보호받지 못하는 삶이다." - P84

1794년, 프랑스에서 혁명력으로 테르미도르 열 번째 날이었던 7월 28일, 급진적인 자코뱅파의 리더 조르주 오귀스트 쿠통(Georges Auguste Couthon)은 단두대로 끌려갔다. 그를 동아줄로 결박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그의 몸은 근육 수축과 마비로 인해 일반인과 달랐기 때문이다.

쿠통의 휠체어는 현재 파리의 카르나발레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다. 그것은 살롱 의자 위에 속을 넣어 푹신하게 만든 쿠션을 얹고, 팔걸이를 덧댄 것이었다. 앞쪽에커다란 바퀴 두 개와 뒤쪽에 작은 바퀴 하나가 달린 것이 특징으로, 앞바퀴 두 개는 안쪽의 볼트를 축으로 각각 돌아가며, 이 두 개의 원시적 회전 메커니즘은 팔걸이와 같은 높이에 자리한 손잡이에 의해 조종된다.

쿠통은 이 기계를 스스로 조종할 수 있었다. 아마도 엄청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한 손으로 손잡이를 움직일 경우 기계는 빙글빙글 돌기만 하고, 손잡이 두 개를 동시에 움직여야만 앞뒤로 기계를 조종할 수 있었다. 그만큼 많은 힘이 필요했다.

짐작건대 그 기계를 움직이는 것은 밧줄로 묶은 자동차를 이로 끌어당기는 것과 비슷한 힘을 들여야 했을 것이다. 바퀴는 통나무로 제작되었으며, 조종 장치는 수작업으로 만들어졌다. 그의 휠체어는 마찻길이나 진흙길, 즉바깥에서 사용하기에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나는 그가 왜 휠체어를 만들었는지, 그것이 그에겐 얼마나 중요한 일이었는지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정체성과 연민이 아니었을까. 그는 누가 자신에게 말을 거는지 확인하기 위해 엄청난 힘과 노력을 들여 몸을 돌려야 했다. 그럼에도 그는 방 안의 한쪽 끝에서 다른 쪽 끝까지 움직였으며, 여기저기의 대화에 참여했다. 그는 정치인이었다.

쿠통은 자코뱅파에 속했으며, 공안위원회의 일원으로 공포정치를 실행했다. 로베스피에르를 비롯한 자코뱅파의 리더 대다수는 그와 같은 날에 처형당했다. 하지만 쿠통의 처형은 조금 연기될 수밖에 없었다. 이 사실은 그 당시 의미심장한 효과를 지니고 있었다. 즉, 그를 인도적인 방법으로 처형하기 위해 15분이라는 시간이 지연된 것이다. 그의 특수한 신체 상태를 고려했을 때 요구되는 것이 적지 않았기 때문이다. - P101

세상을 바라보는 사고 가능한 유일한 방식인 문자는 권위적이고 이념적이라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이데올로기, 즉 이념의 기능은 사회적 현실을 자연스럽게 보이도록 하는 것이며, 동시에 현실이 자연과 마찬가지로 순수하고 불변적으로 보이게도 한다. - P103

나는 너무나 오랫동안 긴장 속에서 부단한 노력을 하며 살아오다 보니"이만하면 충분해"라고 큰소리로 말하는 것이 결코 쉽지 않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한 번쯤은 그런 말을 하는 것도 좋다. "이 일은 할 필요가 없어." 그렇다. 나는 내게 닫혀 있는 문을 억지로 열어야 할 필요도 없고, 내 자리가 없는 곳에서 억지로 내 자리를 만들지 않아도 된다.

러시아는 이런 반응을 내게서 이끌어 냈다. 왜냐하면 나는 러시아에서 몇몇 특정 한계를 느끼고 인지해야만 했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 3개월 동안 머물며 기초 과목을 섭렵하고 주요 과목을 선택하기 직전, 불현듯 이 일을 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이 스쳤다. 이 일을 했을 때 내가 얻을 수 있는 유일한 대가는 비슷한 종류의 공부를 더 많이 해야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곳, 그 나라는 내게 투쟁만 제공할 뿐이었다.

"이만하면 충분하다"라는 말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는 의미다. 동시에, 다른 세상을 향한 동경을 포기한다는 의미와도 같기에 때로는 고통스럽기도 하다. 모든 상실의 경험이 고통을 수반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상실의 경험은 슬픔을 동반한다. 슬픔은 더는 가능하지 않은 일, 더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들 때문에 생겨난다. 슬픔은 어떤 물건이나 사람과 앞으로 영원히 함께할 수 없다는 사실을 인지할 때 생겨난다. 이때 함께할 수 없는 사람은 자기 자신 또는 자기 자신의 한 부분일수도 있다.

자아는 주어지는 것일 뿐 아니라 받아들여야 하는 것이다.(어빙 고프먼)

나는 러시아에서 가능한 것과 불가능한 것의 경계보다 더 중요한 또 다른 경계가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것은 바로 평생을 바쳐도 될 만큼의 값진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의 경계였다. 그 경계가 어디에 있는지, 또 경계 너머에 무엇이 있는지 알 수 없었지만 그 의미를 깨달았다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그때 이후 나를 원하는 곳, 나를 받아들이는 곳으로 서서히 발길을 돌리기 시작했다. 그것은 일종의 시작이라고도 할 수 있었다. - P125

보르헤스는 「끝없이 두 갈래로 갈라지는 길들이 있는 정원」에서 서로 다른 미래와 서로 다른 과거는 동일한 순간을 시작점으로 생성된다고 말했다. - P147

당신은 걷고 있어요. 항상 넘어지지만, 그것을 매번 깨닫진 못하죠. 한 걸음을 내디딜 때마다 당신은 앞으로 살짝 넘어지지만 얼른 몸을 추슬러 다른 발을 앞으로 내밀죠. 걷는다는 것은 넘어지는 것을 반복하는 일이랍니다. (로리 앤더슨) - P173

내 몸에는 아무런 이상이 없다. 그렇다면 그 생각은 과연 어디서 생겨나는 것일까? 도대체 무엇이 그 그림자를 내게 던지는 것일까?

일반적으로 낙인이 찍힌 개인도 우리의 정체성에 관해서는 같은 생각을 한다. 이것은 명백한 사실이다. (어빙 고프먼)

정체성을 획득한다는 것은 누군가를 닮기 위해 배우는 것이며, 동시에 각 개인은 서로 다르다는 것을 배우는것이다. 내가 어떤 사람이 되고 싶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은 지금의 내 모습과 과거 이상적으로 생각했던 내 모습이 얼마나 차이를 보이는지 그 간격을 재어 보고 싶기 때문이다. 나는 이제 얼마나 그 모습에 가까워졌는지 알아보고 싶다.

낙인 또는 스티그마에 관한 고프먼의 개념은 수치심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고 수치심은 실존적 변이와 연결되어 있다. 낙인 개념이 작용하기 위해서는 낙인의 대상자와 그를 둘러싼 주변 사회 및 일반 구성원들이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이해하고 동의해야 한다는 전제 조건이 필요하다. 수치심은 기본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생각 때문에 생겨난다. 잘못된 조건하에서 사는 삶인 것이다. 나는 바로 이 수치심에서 벗어나고자 한다. 나는 글을 쓰며 수치심을 고찰하고 표출하며, 글과 함께 수치심을 내려놓고자 한다.

낙인은 행위를 통해 위장하고 억제할 수는 있지만 행위를 통해 제거할 수는 없다. 낙인이라는 것은 그 사람이 무엇을 하느냐가 아니라, 그 사람이 누구인가에서 이유를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사람이 누구인지, 또는 그 사람이 주변에 어떻게 보이는가에 따라 그가 하는 모든 행위를 해석하는 틀이 형성된다. 이 틀 안에서는 가장 순수하고 무고한 행위조차도 수치심이 초래될 수 있다. 내가 옷을 신중하게 골라 입고, 휠체어를 깨끗하게닦고, 올바르게 행동하려고 노력하는 이유는 부분적으로나마 내가 보내는 다른 신호, 다른 표시가 타인의 눈에 어떻게 해석되는지 잘 알기 때문이다.

나는 다른 삶을 살 수도 있었다. 내가 과거에 시도해 본 기존의 입증된 방식과 규정에 순응하는 방식만이 존재하는 것은 아니다. 나는 울분을 쏟아 내며 활동가로 살수도 있었다. 스스로를 쇠사슬에 묶고, 있는 힘껏 소리를 지르며 살 수도 있었다.

하지만 나는 이 세상 그 어느 누구도 성가시게 할 생각은 없다.

저항을 이루는 요소는 무엇인가? 그것은 또 다른 언어, 또 다른 태도이다. 수치스러워하지 않으며 공개적으로 이야기하는 것이다. 나의 삶은 다른 이들의 삶과 다르다. 나는 나만의 삶을 살고 있다.

나는 이 말들과 이 책으로 세상 속에 나를 위한 자리를 만든다. 만약 이 일이 성공한다면, 나는 세상의 한 부분을 재창조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말들과 이 책으로. - P191

가끔은 그처럼 쉽게 해결될 때도 있다. 사람들은 기꺼이 도움을 주려 한다. 그들은 어떻게 도와야 할지 모르지만 도우려는 마음을 품고 있다. 어떤 이들은 나를 안아 들어 올리는 일을 문제없이 해낼 수 있는 반면, 어떤 이들은 그렇지 않다. 거리를 두고 뒤에서 지켜보는 사람도 있고 가끔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뻣뻣하게 긴장된 모습으로 가만히 서 있는 사람도 있다. 내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니다. 내게 필요한 것은 도움을 줄 때 내가 얼마나 약한지 또는 얼마나 강한지, 내가 어느 방향으로 몸을 움직일 수 있는지, 그리고 내가 언제 균형을 잃고 넘어지는지 자세히 알기 위해 내게 충분히 가까이 다가와 줄 수 있는 사람들이다. 물론 우연을 배제할 수는 없겠지만, 대체적으로 집에 조그만 아이들이 있는 사람들, 무거운 것을 운반하는 데 익숙한 사람들, 자신보다 더 약한 사람들의 몸에 대해서 잘 알고 있는 사람들이 도와줄 때면 나도 매우 편하게 움직일 수 있다. 숨을 들이쉬어 보자.

물론 상황이 생각처럼 돌아가지 않을 때도 있다. 다 큰 어른들은 낯선 이들에게 좀처럼 도움을 청하지 않는다. 도움이 필요할 때도 그들이 자신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만큼 가까이 다가와야 한다면 꺼리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이 명백한 원인이 존재하는 한계를 넘게 되면 다음 단계로 진입하는 장의 문이 열리기 마련이다.

모든 것은 내게 달려 있었다. 항상 그랬다. 수동성 또한 사회적으로 눈에 보이는 태도라는 사실을 깨닫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렸다. 나는 다른 사람들보다 훨씬 행동의 제약이 많지만, 그 때문에 수동적일 필요는 없다는 것을 깨달아야만 했다. 캘리포니아에서 잠시 살았던 것은 이것을 깨닫는 데 큰 도움이 되었다. 그곳에서 미소 짓는것을 배웠고, 내 목소리를 잘 사용해야 한다는 것도 배웠다. 나는 내 삶을 직접 연출하는 것을 배웠다. 숨을 내쉬어 보자. - P200

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 있다. - P206

슬픔은 파도일 뿐 아니라 반향을 일으키는 파문이며, 폭풍 뒤에 오는 고요함이기도 하다. 이처럼 슬픔은 역설적이다. 슬픔은 내가 단 한 번도 가지지 못했던 것들에 대한 생각뿐 아니라, 스스로 벗어난 것들에 대한 생각 속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어쩌면 슬픔은 시간이 흐르는것을 깨닫는 것만큼이나 간단한 것일지도 모른다. 그것은 "절대 안 돼"라고 말하는 목소리, "결코 다시는 안돼"라고 말하는 목소리다.

오래된 진료 기록을 읽을 때, 어린아이였던 나를 관찰하는 임상적 문서들을 읽을 때, 나의 미래를 예견하는 비관적이고 암울한 기록들을 읽을 때면, 내 삶은 생존에 관한 역사이며 나는 불행에서 구제된 존재라는 것을 깨닫게 된다. 동시에 나는 나를 닮은 사람들, 나를 닮았던 사람들, 그리고 불행에서 구제되지 못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슬픔은 직접 가 보기 전에는 그 누구도 이해하지 못하는 곳이다. (조앤 디디온) - P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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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사이와 차이 - 장애를 지닌 언어학자의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
얀 그루에 지음, 손화수 옮김, 김원영 추천 / arte(아르테) / 202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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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표본 집단에 속하지 않는다. 우리는 길의 가장자리에 서 있다. 우리는 각각 다른 삶의 방식을 하나하나 직접 시험해 보아야 하며, 어떠한 보장도 없이 수많은 실패를 경험할 것이라는 것도 잘 알고"(206쪽) 있으면서 가장자리로 나아가야 한다. 표본이 되기를 거부하고 예외적 존재가 되는 그 경계면으로, 가장자리로 한 발을 내딛는 용기는 우리 시대 모두가 직면한 과제다. 물론 그 경계의 끝에서 한 발을 더 나아가는 일에는 많은 고난이 따를 것이다. 얀이 모든 가장자리에서 성공했던 것도 아니다(그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말하자면 ‘서구‘의 가장자리에서 처절하게 실패하고 만다). 그러나 실패를 해야만 그 실패의 순간을 지나갈 힘을, 그 과거를 다시 통과할 몸을 우리가 가지게 된다는 점을 다시 유의하자.

…… 각 범주의 ‘표본’은 두 가지 길을 간다. 범주적 한계 앞에서 온전히 굴복하거나 한계를 극복한 예외 사례가 되거나. 굴복과 극복은 표면상 상반되어 보이지만 모두 임상적 시선에, 다수의 기대에, 권력의 통제 안에서 언제나 예정된 길이라는 점에사는 동일하다. 그렇기에 우리 존재와 삶이 특정한 기준에 의해 분류된 ‘표본‘에 그치지 않는 길은 굴복과 극복이 아닌 다른 선택지에 있을 텐데, 이 책의 독자라면 그 길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한계 지어진 과거와 그 한계를 지나온 현재 사이를 가로지르며, 현재의 힘으로 과거를 다시 쓰기. 과거에 내 몸에 새겨진 흔적을 발굴하고, 인정하며, 현재를 끌어안기. - P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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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상상력 - 관계와 사회의 새로운 힘을 모색하는 사람들
김영옥.류은숙 지음 / 코난북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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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봄의 또 다른 진실은 구체적인 경험과 맞닿아 있다. 돌봄을 추상적인 윤리 강령으로, 정의로운 주의 주장으로 내세우는 건 돌봄 생태계에 아무런 보탬이 되지 않는다. 언제나 돌봄의 실질적인 요청을 급작스런 ‘닥침‘이나 당혹스런 ‘호출‘로만 만나게 된다면, 시민사회가 헛돌고 있다는 징표다.
시민의 시민 됨, 즉 시민적 덕성을 무엇보다 돌봄의 실천 경험, 돌봄의 역량, 돌봄 자산을 기준으로 이해하는 전환이 필요하다.
‘돌봐보니까 돌봄이 무섭지 않다.‘ ‘돌봐달라고 부탁할 용기도 생겼다.‘ ‘돌봄의 겹들이 이해된다.‘ 경험자들의 말이다.
물론 돌봄의 경험은 실패와 좌절, 더할 나위 없는 기쁨과 보람, 사랑과 증오 등 감당하기 어려운 정동들로 요동친다. 그러나 그 소용돌이가 점차 돌봄의 동심원을 형성하는 것 또한 경험하게 된다. 이것이야말로 돌봄의 실천 속에서만 경험하고 해석할 수 있는 돌봄의 역설 내지는 다면성이다. 돌봄의 사회화나 공공화 또는 시민적 돌봄이나 시민의 자리에서 돌보기 등이 여전히 대부분 사람에게 명료하지 않은 건 돌봄의 물질적 구체성이 그만큼 부족하다는 뜻이다. - P10

아이를, 장애가 있는 아이를 온전히 다른 사람 손에 맡기기란 쉽지 않다. 믿음과 신뢰의 토대가 없으면 감행하기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장애아 보호자들의 네트워크를 통해서 알음알음으로 만나는 활동지원 선생님들이라 이들에겐 어느정도 ‘내 편‘이라는 믿음이 있다.
특히 중증 장애아의 경우, 보호자들이 서로 주고받는 위로와 격려, 그리고 무엇보다 재활시설이나 제도 등 구체적인 정보는 없어서는 안 될, 그야말로 필수 지지대였다. 성장하면서 어떤 사람들이 구체적으로 찬빈이의 이웃 시민이 될지 모르겠지만, 장애아 보호자 커뮤니티가 매우 중요한 자조그룹인 건 확실했다. 필요한 참견과 성가신 오지랖 사이에서 무게 추가 왔다 갔다 하는 이 관계는 특히 돌보는 엄마들이 고립이나 무기력증에 빠지지 않도록 서로를 연결하는 작은 사회다. 이 커뮤니티 안에서 주고받는 구체적인 서로 돌봄은 시민사회가 갖춰야 할 돌봄 역량의 토대가 될 수 있으리라고 믿는다. - P27

돌봄은 표준화되기 어려운 아주 개인적인 관계에서 벌어진다. 또 그 관계는 고정된 게 아니다. 평등하기보단 출렁거리며 비대칭적으로 기울어져 있다. 정연처럼 돌봄의 탈젠더화, 탈가족화를 부르짖는 사람이 남편처럼 가족을 우선 의존하는 사람과 배우자 관계에서 돌봄을 협상하듯, 협상의 자리에는 각양각색의 사람이 등장한다. 부모님 돌봄에는 일반적인 ‘효‘의 감각과는 다른, 평생 고만고만하고 간당간당하고 쓰라렸던 삶에 대한 두 사람의 연민이 있다. 그래서 양가 부모님 앞에서는 별 협상 없는 동맹이 가능했다.
또 돌봄은 자기 자신의 숱한 정체성 간의 협상이기도 하다. 정연과 남편 두 사람 다 심야나 새벽 배송을 질색한다. 싼값에 그 시간대의 배달노동을 당연시하는 세태에 맞선다는 점에서는 동맹이다. 하지만 전격적인 돌봄이 시작되면서 장보는 것 자체가 사치가 된 때가 있었다. 생필품이 아쉽고 정신이 없어 뭔가 빠뜨렸을 때마다 둘의 삶에는 새벽 배송이 끼어들었다.
동맹과 협상의 자리는 자주 변동됐고 전선은 다시 그어지곤 했다. 여성, 아내, 엄마, 딸, 임금 노동과 돌봄 노동을 모두 하는 이중의 노동자, 소비자, 시민의 정체성이 정연 같은 한 사람에게서 나타나며 노화, 질병 등으로 돌봄자였다가 돌봄 의존자였다가 자리를 갈아탄다. 남편도 마찬가지로 자기의 정체성들과 협상 중일 것이다. 그런 두 사람의 협상 테이블은 고정된 게 아니라 출렁거린다. - P51

상희는 동생들이 오면 주중에 엄마 상태가 어땠는지 무슨 일이 있었는지 시시콜콜 이야기한다. 새겨듣건 흘려듣건 상관치 않았다. 일주일에 한 번 방문하는 게 아니라, 일주일에 한 번이라도 돌봄으로써 함께 돌보고 책임지는 사람이길 원했다.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수행된 돌봄에도 동생들이 동행과 공유의 감각을 가질 수 있어야 자신도 독박 돌봄의 덫에 갇히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돌봄의 역량은 하면서 배우고, 또 배우면서 느는 거라서 동생들의 돌봄 태도나 기술도 느릿느릿 성숙의 길을 가고 있다. - P77

나한테 한 달에 90시간이 주어지는데 그 시간으로 경화가 우리 집에 와서 나랑 같이 저녁 지어 먹으면서 수다를 떨어. 나한테는 그게 사회적 대화야. 그리고 자기들처럼 나 고립될까 봐 신경 써주는 친구들이 있고. 이런 게 다 모여서 엄마를 직접 돌보고 싶다는 내 소망을 이룰 수 있는 거지.
그러니까 내가 선택했다지만 그 선택은 나에게 있었던 게 아닌 거야. ‘충분히 했어, 이제 됐어‘라는 상태는 어떤 돌봄에서도 도달하기 어려워. 그런데 돌보는 사람을 돌봐주는 체계와 안정적인 자원, 손을 내미는 사람이 없으면 아예 품기조차 어려운 꿈이야. - P87

"저의 이야기가 ‘어쩔 수 없어서‘의 이야기가 아니라 ‘하고 싶어서‘의 이야기가 되면 좋겠습니다. 저 개인의 경험이라는 울타리를 넘어 시민들이 공유할 수 있는 돌봄 지도 만들기에 디딤돌이 되길 희망합니다." - P89

2010년대 초반 Y요양병원에서 있었던 HIV 감염인 학대가 다시 떠올랐다. ‘감염인도 귀한 목숨이고 싶다.‘ 당시 HIV/AIDS 인권활동가가 외치는 말을 들으며 명치 끝에 느껴지던 통증이 생생하게 되살아났다. 무지와 몰염치의 등에 올라탄 혐오는 그때 이후 멈춘 적이 없는데 어떻게 우리는, 나는 이렇게 서로 무관한 사람처럼 살아왔던 거지? 알 만한 사람들도 감염인을 두고 빈곤할 것 같다, 일을 못 하고 있을것 같다. 숨어 살 것 같다는 식으로 말하지 않던가.
사실 나도 그러지 않았나... 나는 얼마나 다른가⋯⋯ 나도 그들에 대해 아는 게 너무 없지 않은가... 희수는 이 어이없는 경계 짓기와 선량한 무지에 자신의 몫도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아, 어떻게 하지, 뭐라도 해야 하는데. 희수는 이제라도 자기를 휘감는 무기력과 분노를 똑바로 직면하고 싶었다. - P115

감염인이 감염인을 돌본다. 이거야말로 PL 커뮤니티 구성원들이 초창기부터 맺어온 관계의 핵심이었다. 이것이 비감염인 희수가 체감하는 S커뮤니티의 힘이고 미래였다. 크고 작은 PL 모임이 생겼다 사라지기를 반복했다. 그것은 의미 없는 단순 반복이나 실패의 역사가 아니라 서로의 돌봄역량을 키우는 역사였다.
이 역사는 감염인을 위해 진행된 지원사업 이야기가 아니다. 감염인 당사자들의 일상을 고립이나 무기력한 자포자기에서 지켜준 서로 돌봄의 이야기다. 소소해서 눈에 잘 띄지도 않고, 체계도 없이 산발적으로 이뤄지는 것처럼 보여도 이 돌봄들이 바로 역사의 현장이었다.
……
여기 S커뮤니티에서 감염인들은 비감염인 눈치 보는 일 없이 편하게 하고 싶은 말을 쏟아내며 필요한 도움을 주고 받았다. 지원의 자리에 서로를 보듬는 지지와 상담이 놓였다. 의료나 생활, 관계 영역에서 할 수 있는 한 종합 돌봄을 제공하려 서로 애쓴다. 물리적으로든 심리적, 문화적으로든 ‘우리‘라는 연대 의식을 공유하고, 발휘하고, 재생산하는 허브다. 감염인들에게 ‘우리 캠프 가자‘, ‘우리 나들이 가자‘, ‘돌봄 필요하면 연락해라‘ 같은 초대 메기지를 계속 보내는 건 누구도 고립이나 소외의 희생자가 되지 않길 한마음으로 희망하기 때문이다. - P119

"죽음을 배운다는 건 죽음을 삶의 끝자락으로 그리고 동시에 다른 삶의 시작으로 이해하는 겁니다. 좋은 죽음은 좋은 삶과 뗄 수 없어요. 죽음을 돌보는 건 삶을 돌보는 것이죠. 우리가 어울려서 같이 사는 거, 같이 살다가 또 죽음을 곁에서 지키는 거, 그게 돌봄이에요. 따로따로 떼어서 생각하지 말고, 하나로 살아내야 합니다.
하나의 삶은 하루와도 같아요. 오늘 하루를 꽉 차게 살고 죽음을 맞이하듯 마무리하면, 내일이라는 다른 시간이 또 새로운 삶으로 시작됩니다. 죽음은 늘 보이는 곳에 함께 있어요.
수도회에서는 외출할 때 방을 깨끗이 정리하고 나갑니다. 내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아도 아무런 문제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거죠.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누구에게도 나중에 해야 할 말이나 건네야 할 감정을 남겨두지 않습니다. 잔여를 남기지 않는 삶에 익숙해지면 죽음 앞에서그렇게 막연한 두려움에 사로잡힐 일은 없을 거라고 수도회에서는 가르치죠." - P134

수현은 말 없이 작은 아이 뒤로 천천히 걷는다. 그들이 눈치채지 못하게 방패막이를 자처한다. 그냥 지켜보는 돌봄, 의도와 계획대로만 하는 게 아니라 지켜보다가 당사자의 필요에 응답하는 돌봄, 그게 좋은 돌봄이라 하지 않던가. - P154

"그래도 폐쇄적인 공간에 머물기만 하는 대신 삶을 살아야 하잖아요. 삶을 함께 사는 활동이 우리가 하는 돌봄이에요. 주로 엄마로 대표되는 가족이 유일한 ‘친구‘이고 또래 친구나 직장 동료를 만나기 어려운 상황인데 여기서마저 닫힌 생활을 강요하면 어디 가서 관계를 만들어요? 나들이도 가고 체육도 센터 안에서만이 아니라 동네 헬스클럽 가서 하고, 노래방 가서 놀고, 마트 가고, 키오스크도 찍어보고. 그러는 게 삶을 사는 거예요.
‘놀아준다‘가 아니라 같이 노는 거예요. 인솔하는 게 아니라 같이 나들이하는 거예요. 이런 활동에 사회적응 훈련, 치유, 체험, 힐링, 이런 단어들 더 이상 쓰지 맙시다. 아니 도대체 발달장애인은 십 몇 년이고 왜 늘 적응하는 훈련만 해야하나요? 그냥 사는 거지. 외식이 왜 늘 체험이에요? 그냥 나가서 먹으면 되는 거지. 장애인은 왜 맨날 캠프에 가나요? 그냥 여행 가는 거지." - P163

그때나 지금이나 기본적 필요 충족에 그치는 돌봄이 아니라 당사자가 욕망을 드러내고 요구할 수 있는 관계를 맺고싶다. 칸트와 여왕에게는 욕망이 있다. 잠, 배설, 식사, 옷입기. 씻기는 일상의 기본이지 그게 전부는 아니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만 제공하면 하루 종일 같은 곳에 가둬놓고(보호하고) 개별화와 관계 없는 똑같은 프로그램으로 일상이 채워져도 누가 뭐라 하지 않는다. 미리 마련된 서비스와 프로그램에 칸트가 따르지 않으면 ‘고집부리고 떼쓰는 것‘이 되고 ‘도전 행동‘이 된다. 고집부리는 것이 아닌 요구와 욕망을 드러내는 존재라는 걸 얘기하고 싶다.
칸트의 필요나 요구, 욕망은 무에서 저절로 생겨나는 것도 아니고, 칸트의 능력에서만 생기는 것도 아니다. 칸트와 주변과의 관계 속에서 생겨난다. 수현은 그런 관계 속에서 상호작용하는 파트너다. 수현은 관계 속에서 칸트의 요구나 욕망이 손톱만큼 자라나는 걸 볼 때 두근거린다. 자기 손톱이 자라는 걸 내내 지켜보고 있는 사람은 없다. 어느 날 ‘어, 손톱이 벌써 이만큼 길었네‘ 하고 대수롭지 않게 자른다. 서로를 계속 지켜보며 반응하는 돌봄 관계에서는 손톱이 자라는 그 느리고 미묘한 변화가 보인다.
이용자 중에서 직업 훈련이 가능한 사람은 하루에 두시간씩 외부 기관에 실습을 간다. 비닐봉지에 면봉 열 개를 넣는 작업 훈련이었다. 별다른 진전 없이 시간이 흘러가던 어느 날이었다. 면봉을 다 담고도 비닐이 남았던 모양이다. 늘 침묵하던 이용자가 더 담게 면봉을 달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두 시간은 고사하고 잠시도 집중하지 못하고 들썩이던 이용자도 있었다. 그런 그가 어느 날에는 끝날 시간이 되자 갑자기 ‘더 하고 싶다‘는 요구를 했다고 한다. 그렇게 단순한 말 한마디, 동작 하나가 그야말로 거짓말같이 한순간 피어난다.
수현이 파악한 필요만이 아니라, 보호자, 부모가 요구한 욕구만이 아니라, 서로 접촉하고 상호작용하는 가운데 칸트가 뭔가를 ‘좋다‘고 받아들일 때, ‘싫다‘를 표현할 때, 칸트의 반응이 다르다. 처음에는 ‘못해요, 못해요‘가 입버릇이었다가 같이 하면서 차츰 할 줄 아는 걸 찾는다. 당사자만이 아니라 직원도 그렇다. 같이 호흡을 맞추다 어느 순간에 번쩍 뭔가가 되어질 때, 표현의 의미를 알아차릴 때 서로의 성취가 된다 - P164

아이에게 역할 모델은 대단한 성공을 이룬 인물이나 특별한 전문직일 필요는 없다. 신뢰가 가는 어른이면 충분하다. 자기 일을 열심히 해내는, 자기 몫의 삶을 살아내는 어른 말이다. 경아가 보기에 마을 주민들은 아이에게 가장 좋은 역할 모델이다. 헬스클럽 관장을 비롯해 곳곳에 포진한 주민들이 있다. 소방공무원이 되고 싶다는 아이에게 그와 관련된 훈련을 알려주는 분도 있고, 장학금을 만들고 센터를 위해 이런저런 특별행사를 기획하는 상인회 같은 곳도 있다.
그런 사람들을 연결하는 일을 하는 경아는 돌아다니는 앱과 같다. 지원하고 연계할 수 있는 정보와 사람이 경아에 탑재된다. 경아가 연결을 시도하면 요청을 받은 쪽이 성가셔하거나 내빼는 일은 드물다. 대체로 우호적이다. 공무원은 연결할 수 있는 공적 서비스를 알려주고, 이 동네에 없는것은 다른 쪽을 수소문하여 알아봐준다.
완벽하게 세팅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다. 움직이면서 만들어간다. 아이의 상황도 천차만별이다. 미리 다 규정한 매뉴얼대로 작동하는 게 아니라 아이의 상황에 따라 시행착오를 거쳐 지도를 고쳐 그리는 식이다.
그러려면 마을 주민들의 모세혈관, 실핏줄 같은 연결망 그리고 참여가 필요하다. 관심 끄고 살면 편한데 자기 에너지를 써야 하는 성가신 일을 마다하지 않는 사람들. - P184

방문진료를 좋아하고, 운이 좋았다고 말하지만 이 일이 쉽다는 뜻 또한 아니다. 이동 거리에 따라 하루 방문 건수는 달라지지만 영구임대아파트처럼 방문할 환자가 근거리에 모여 있는 경우에는 오전 오후 꼬박 매달려 여덟 집 정도를 방문한다. 기운이 쏙 빠진다. 우울과의 대화 속에서 치켜올리려고 온갖 오버를 하다 보니 그런 것 같다.
거절에 부딪힐 때도 많다. 힘을 쥐어짜 다가가고 아무리 공을 들여도 도움을 거절하는 환자도 많다. 마음을 줬다가 상처받은 경험이 많으니 스스로를 지키려는 방어기제가 작동하는 것이라 짐작한다. 화를 내고 문을 닫아걸면 어쩔 수없이 다가가기를 멈춘다. 무언가 해달라고 하는 경우보다 거부하는 경우가 훨씬 어렵다. 누구에게도 무엇에도 기대하는 바가 없게 되기까지, 그가 얼마나 많이 거절당해왔을지 헤아리려 할 뿐이다.
찾아가 물어본다. 방문의 뜻이다. 찾고 묻기가 충분히 잦아질 때, 닫힌 방문이 빼꼼히 열리기를 고대해본다. 돌봄은 일방이 아닌 관계다. 문 열어주는 당사자의 참여가 필수다.
주민이자 당사자가 스스로 돌보는 힘, 서로 돌보는 힘에 기대어 사라와 동료들이 곁에 다가갈 때 스르르 열리는 문. 의료, 돌봄, 복지의 경계를 허무는 힘은 선언으로 되는 게 아니라 그런 만남과 부딪힘이다. 찾고 묻고 의심하고 회의를 품고 또 주변인의 지지와 덕담으로 기운 차리는 사라의 삶 또한 누군가의 지속적인 ‘방문‘을 받고 있는지 모른다.

돌봄 의존자는 또 어떤가. 사람의 역량은 수면 위 빙산의 일각에서 사고팔 수 있는 노동력만이 아니다. 그 사람의 존재 자체, 그 사람이 맺을 수 있는 관계 그리고 그가 할 수 있는 활동 전체다. 고령자와 어린 세대뿐 아니라 모든 사람의 것으로 보편화할 수 있는 활동이 돌봄이다. 돌봄 의존자는 일방적 수혜자나 대상자도 아니다. 관계적 역량의 가능성을 품고 있다.
관계에서 건강이 비롯한다는 의료사협의 철학에서 이분들의 존재는 필수다. 이 관계는 일방적인 게 아니라 상호적이다. 의존하는 사람이 있어 돌봄 체계가 만들어진다. 그렇게 만들어진 돌봄 체계가 지역 공동체의 이익이자 자산이다.
이를 통해 사회라는 것을 재생산하고 미래를 만들어낸다. 나이 든 이를 돌보고 어린 사람을 양육하며, 빈곤, 질병, 장애, 이주 배경 등으로 차별과 배제를 겪는 구성원들의 운명을 잔여적이고 한시적인 정부의 지원 체계에만 맡기는 대신, 서로 돌봄의 체계로 같이 떠맡겠다는 것이 의료사협의 공유자산이다. 이런 자산이 시장화된 돌봄과 공동체 돌봄의 차이를 만든다. - P226

사람들이 SNS에 예쁘고 사랑스러운 반려동물 사진을 올릴 때마다 ‘나만 고양이 없어!‘라고 한탄하는 댓글들이 달리곤 한다. 연수에게 그런 고양이 사진 같은 존재가 일본의 전일본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이다. 일본은 한국에 비해 공공병원 비율도 높을뿐더러 질적으로도 뛰어나다. 공익적 역할을 하는 민간 병원 역할도 그에 못지않다. 민의련에는 1800여 개 의료기관이 가입해 있다. 모두 공공성을 띤 민간병원이다.
농협이 설립한 병원, 생협이 운영하는 병원, 공익재단법인이 운영하는 병원 등이다. 법인에 소속된 1차 의원과 돌봄시설이 함께 활동한다. 이럴 때 1차 의원은 의사 개인의 자영업이 아니라 공익법인이기 때문에 수익성을 늘리겠다고 편법을 사용하지 않는다.
간혹 운영이 어려워지면 튼튼한 시민참여 구조 속에서 지원을 받는다. 공익적 민간 병원에는 서포터즈 역할을 하는 시민 조직이 있어서 이들 병원을 우선 이용하고 재정 후원자 역할도 맡는다.
그중 한 곳의 기관지를 봤더니 인근 업소 이름 3백여 개가 실려 있다. 동네 빵집, 동네 꽃집, 동네 술집, 동네 채소가게, 동네 잦화상, 그런 이름들이 후원자로 들어차 있으이 지역 1차 의원과 각종 돌범시설은 주민의 것이라 할 만했다. - P239

"무겐 프로젝트라고 들어보셨어요? 저 이번에 탐방 갔다가 이 말을 들었는데 너무 좋았어요."
"무겐이 뭐예요?"
"조합원과 무한 대화한다는 뜻이래요. 조합원의 꿈을 무한 실현한다는 뜻도 있대요. 그래서 구성원들이 자신이 뭘 원하는지 깨달을 때까지 토론한대요."
"맞아요. 맞아. 사실 처음부터 자기가 정말 뭘 원하는지 확실히 알 수는 없지요. 얘기하고 경험하다 보면 깨닫는 것 아니겠어요?"
"조합원 되면 더 안전하고 질 좋은 진료를 받는다니까 협동조합에 들어오잖아요? 또 최근에는 초고령 시대를 맞으면서 안전한 노후를 위해 보험 들어놓는다는 생각? 그런데 무한 토론을 하면서 각자의 사연부터 자신이 생각하는 지역이란 무엇인가, 자신이 생각하는 관계란 무엇인가를 막 얘기하게 된다는 거예요. 그런 과정을 통해 자기 꿈이 뭔지 알게 되고요."
"저, 이 얘기 들을 때, 이 지점에서 전율이 일었어요. 이때 깨닫는 꿈이라는 건 개인적인 꿈이기도 하지만 협동조합 구성원으로서 갖는 꿈이기도 해요. 그래서 ‘그 꿈을 실현하려면 우리가 무슨 일을 어떻게 해야 되지?‘로 논의가 진척된다고 해요."
"참여를 독려한다는 말 자체를 바꿔야 한다고 해요. ‘독려‘는 누군가가 여전히 리더인 거예요. 아예 언어를 바꿔서 지역 주민, 조합원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목표를 깨닫도록 하는 방식이래요."
‘무겐!‘ - P2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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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신이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잘 활용하라.
-새로운 것을 유입시키는 데에만 집중하다 보면 새로 들어온 것들이 이미 있는 것들을 덮어버릴 수 있다. 자신이 올해 몇 권을 읽었다고 자랑하지 말고(서가에 몇 권 있다고 자랑하는 것과 비슷할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 지식을 얼마나 어떻게 활용하는지 반성하라.
-이미 갖고 있는 것들을 하이퍼링크로 서로 촘촘히 연결하라. 노드 간 이동속도가 빨라질 수 있도록 고속도로를 놔라. 즉, 이미 습득한 지식, 기술, 경험 등을 서로 연결 지어서 시너지 효과가 나게 하고 하나의 영역에서 다른 영역으로 왔다갔다하는 것을 자주 해서 다른 영역 간을 넘나들기가 수월해지도록 하라.
-새로운 것이 들어오면 이미 갖고 있는 것들과 충돌을 시도하라.
-현재 내가 하는 일이 차후에 밑거름이 될 수 있도록 하라.

•외부 물질을 체화하라.
-계속 내부 순환만 하다가는 일정 수준에 수렴할 위험이 있다. 주기적인 외부자극을 받으면 좋다. 단, 외부 자극을 받으면 그걸 재빨리 자기화해야 한다. 마치 인체가 음식을 먹어 자기 몸의 일부로 만들듯이, 외부 물질을 받아들이면 소화해서 자신의 일부로 체화해야 한다.

-외부 물질 유입 이후 생긴 내부의 갈등을 해결하려는 데에 노력을 기울여야한다. 무시하고 덮어두지 말라. 내가 가진 것들의 상생적 관계를 끌어내도록 하라.

•자신을 개선하는 프로세스에 대해 생각해 보라.
-예컨대 나의 A 작업을 되돌아보는 회고/반성 활동을 주기적으로 하는 프로세스를 만들어라(C 작업).
-나를 개선하는 과정(B 작업)을 어떻게 하면 개선할 수 있을지 고민하라.

• 피드백을 자주 받아라.
-사이클 타임을 줄여라. 새로운 정보를 얻었다면 1년 후에 크고 완벽한 실험을하려고 준비하기보다는 1달, 혹은 1주 후에 작게라도 실험해 보는 것이 좋다. 순환율을 높여라.
-일찍, 그리고 자주 실패하라. 실패에서 학습하라.

•자신의 능력을 높여주는 도구와 환경을 점진적으로 만들어라.
-일례로, 전설적 프로그래머 워드 커닝햄(Ward Cunningham)은 자기의 수족을 마음대로 놀릴 수 없는 불편한 언어에서 프로그래밍을 하는 경우 점차적으로 자신을 도와주는 환경을 만들어 나간다. 나의 속도를 늦추는 것들을 중력에 비유한다면, 워드는 중력을 점점 줄여나간다고 할 수 있다. 중력을 요만큼 줄였기 때문에 그 덕으로 몸이 더 가벼워지고, 또 그 때문에 중력을 줄이는 작업을 좀 더 쉽게 할 수 있다. 이런 식으로 되먹임을 해서 결국은 거의 무중력의 공간을 만들어낸다. 결국 그는 어셈블리 언어에서도 우아한 춤을 출 수 있다.
-완벽한 도구와 환경을 갖추는 데에 집착해선 안 된다. 그런 식으로는 무엇도 영원히 얻을 수 없다. "방이 조용해지고 배도 안 고프고 온도도 적절해지기만 하면 공부 시작해야지"라고 생각하는 사람들 중에 1등은 없다. 또한 실제로 그런 환경이 되어도 몸에 배어든 습관 때문에 결국은 공부하지 못할 것이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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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싸움은 아직 시작도 하지 않았다 - 멈춰버린 세상을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법
프리데만 카릭 지음, 김희상 옮김 / 원더박스 / 202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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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미 오래전부터 성공을 가장 잘 보증해주는것은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다양한 전술을 조합해가며 시도하는 자세임을 확인해준다. "더 잘 실패하자." 곧 실패를 두려워하지 않고 실패로부터 배우는 자세가 성공의 열쇠라는 점을우리는 새겨야 한다. - P12

"답은 간단해요. ‘포모‘가 그 비결이죠." ‘포모‘는 영어의 ‘fear of missing out‘의 머리글자를 따 만든 약어(FOMO)로, ‘뭔가 놓치고 싶지 않은 두려움‘을 뜻한다. "사람은 의무감이나 습관, 정치적 입장 표현으로 시위 현장을 찾지만, 그냥 친구와 함께 있고 싶어 참여하는 때도 많아요." 노이바우어의 설명이다. "하지만 제가 보기에 정말 결정적인 시점은 사람들이 시위 현장을 찾지 않으면 뭔가 놓치는 게 아닐까 하고 느낄 때 찾아옵니다. 무슨 구체적인 사건일 수도,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일 수도 있는 그 무엇을 말이죠. 역사를 쓰는 현장을 놓치고 싶지 않은 거예요." - P46

운동에 적극적으로 나서게 되는 가장 강력한 동기는 개인이 집단에 가지는 소속감이라고 대다수 연구는 확인해준다. 흥미롭게도 가장 중요한 요소는 다른 사람도 마찬가지로 행동할 거라는 확신이다. 특히 주변의 가족, 친구, 이웃, 동료가 함께하는 것이 최선이다. 인간은 자신이 잘 아는 사람들 안에서 편안하면서도 고양된 기분을 맛본다. 홀로 저항하고 싶은 사람은 없다.
결실을 거두기 힘들 뿐 아니라, 고립되어 쉽사리 공격받을 수도있기 때문이다. 인간은 자신의 노력으로 뭔가 이뤄낼 때의 기분,
자신이 속한 집단이 변화를 일으킨다는 확인, 그리고 정당한 방법으로 올바른 일을 한다는 확신을 원한다. 그러나 무엇보다도인간은 자신이 아는 누군가가 함께할 때 흔쾌히 행동에 나선다. - P59

‘다원적 무지‘가 우리 인식을 왜곡한다는 점을 밝혀낸 다양한 연구가 있다. 예를 들어 사람들은 다른 사람의 행동, 특히 규범을 지키려는 올바른 행동(이 행동의 하위범주인 운동 참여도 마찬가지)을 항상 과소평가하는 경향을 보인다. 우리는 언제나 다른 사람보다 내가 더 낫고, 더 솔직하며, 더 잘 헌신한다고 여긴다…. ‘다원적 무지‘는 우리를 곧장 ‘애빌린 역설‘에 빠뜨린다. 집단의 구성원이 각자 자신이 선호하는 방향과는 반대되는 결정을 내리는 데 동의하게 되는 이 역설로 인해, 구성원들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이 집단의 의견과 충돌한다고 잘못 판단하면서 집단의 의견에 거스리지 않기 위해 자기 뜻을 숙이고 집단의 결정을 따른다. 실제로 투명하게 서로 의견을 나누어보면 충돌은 전혀 일어나지 않음에도, 이 역설은 저항에도 고스란히 적용된다. 대다수 사람들은 자신이 소중히 여기는 가치와 확신을 위해서라면 기꺼이 저항할 의사가 있다. 그러나 다른 사람은 그러지 않을 거라고 믿는 나머지 이들은 선뜻 나서지 않고 수동적 태도를 보인다. - P70

지금까지 나는 왜 사람들이 저항에 거리를 두는지 그 몇 가지 원인을 살펴보았다. 우리는 흔히 그냥 가만히 있어도 다른 사람들이 알아서 해줄 거라거나, ‘우리가 뭘 할 수 있겠어, 영웅이 나타나야 해‘ 하고 생각한다. 특히 우리는 책임을 회피하려 할 때 잘못된 길로 빠지곤 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어떤 체제에서 어느 위치에 있든 간에, 불공정과 불의가 빚어지는 책임을 최소한 간접적으로는 가지고 있다.
어떤 정권, 그 어떤 민주주의 체제도 이를 떠받드는 사회적 기둥 없이는 존립할 수 없다. 그리고 우리는 바로 이 기둥 가운데 하나다. - P74

오늘날 운동가들이 즐겨 읽는 마크 엥글러와 폴 엥글러의 책은 20여년 전 헬비의 책에서 사회의 ‘기둥’이라는 비유를 가져왔다. 고대 로마의 신전처럼 권력자도 충성으로 자신을 받쳐주는 여러 ‘기둥‘에 의존한다. 그리고 이 기둥이 흔들리지 않도록 무력을 써서 안정시키도 한다. 이 기둥 가운데 하나 또는 두 기둥을 무너뜨린다고 해서 권력자가 바로 실권하지는 않는다. 하지만 여러 기둥이 흔들리며, 갈수록 그 정도가 심해지면, 잔혹하기 짝이 없는 독재자라 할지라도 빠르게 무너지는 변동이 생겨날 수 있다. 저항운동은 이른바 ‘티핑포인트‘, 작은 변화가 쌓이다가 결정적 변화를 부르는 임계점을 어떻게 불러올지 늘 유념하고 목표로 설정해야만 한다. 다시 말해서 사회의 변혁은 카오스와 카리스마로 이뤄지지 않는다. 자기희생을 두려워하지 않는 자세로 끈질기게 노력하는 자세가 변화의 원동력이다(물론 전략적으로 카오스와 카리스마를 활용할 수 있어야 한다). - P82

지리적으로 서로 멀리 떨어져 있음에도 미국의 성소수자 인권운동과 세르비아의 오트포르는 저항운동의 이런 작동 원리를 똑같이 보여준다. 두 운동 모두 조바심을 내지 않고 몇 년에 걸쳐 꾸준히 작업을 벌였다. 매력적인 대안을 제시했으며, 이들의요구가 받아들여지지 않는 동안 사회가 치러야 하는 비용은 계속 늘어났다. 전략적으로 사회의 기둥을 차례로 설득하며,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고 확신하는 ‘우리‘가 충분히 커질 때까지 계속해 나갔다. 그렇게 되자 오랫동안 결정을 내리지 못했거나, 무관심으로 일관하며 현상 유지에 급급해온 많은 이들에게도 변화를 선택하는 것이 더 유리하다는 점이 명백해졌다. - P86

사회를 지탱해주는 기둥을 흔들려 하는 이들은 그야말로 돌덩이에 부딪혀야만 한다. 기존 제도 안에서 작은 성과를 거두는 데 만족하지 않고, 기존 제도를 싹 뒤엎는 거대한 변혁을 이루려는 사람은 처음에는 겉보기로는) 실패해야만 한다. 제한적인 힘으로 되도록 많은 기둥을 가능한 한 꾸준하게 흔들려고 하는 사람은 저항운동의 초기는 물론이고 이후에도 드문 성공에 조바심이 나고 속이 탈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바로 제대로 하고 있다는 증거이다. 막스 베버는정치란 두꺼운 널빤지에 구멍을 뚫는 일이라고 이야기했다. 이말에 빗대 말하자면 저항운동이 뚫어야 하는 두꺼운 널빤지는기둥들이다. 기둥을 흔드는 지난한 작업에서 겪는 패배, 정치적이든 사법적이든 문화적이든 실패와 좌절은 저항이 애초부터 희망이 없다는 경고가 아니다. 오히려 이런 패배는 일종의 시험 결과로 받아들여야 한다. 이 결과로 우리는 어떤 기둥(그리고 사안에 따라 어떤 운동가)이 어느 정도 불안정한지, 어디가 무너질 가능성이 있는지, 상황이 달라지면 누가 기회주의적인 행동을 보일지, 혹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변하지 않을지 등의 소중한 데이터를 얻을 수 있다. - P91

부당한 법을 어겨도 좋은가 하는 물음은 핵심적인 사안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로 우리는 이렇게 생각해야만 마땅하다. "저는 자신의 양심에 비추었을 때 부당하다고 여겨지는 법을 어기고, 그렇게 해서 이웃 시민의 양심을 일깨워 이 법의 부당성을 보여주는 사람이야말로 법을 가장 존중하는 인물이라고 주장합니다." 더 나아가 킹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사실을 상기시킨다. "히틀러가 독일에서 한 모든 일은 ‘합법적‘이었으며, 헝가리의 해방투사가 한 모든 행동은 ‘불법‘이었습니다." 어겨야 할 법과 지켜야 할 법은 어떻게 구분할까? 킹은 이 구분을 위해 고대 로마 철학자 아우구스티누스가 쓴 글을 인용하며 ("부당한 법은 법이 아니다"), 토마스 아퀴나스의 논리를 빌려 다음과 같이 강조한다. "인간의 인격을 타락시키는 모든 법은 부당합니다. 인종차별은 인간의 영혼을 뒤틀고 인격에 해를 끼칩니다." 이로써 킹이 말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해진다. 인종을 차별하고 분리하는 모든 법은 부당하다. 이런 죄악에 우리는 반드시 맞서 싸워야만 한다. 부당한 법에 맞서는 저항의 모범을 킹은 초기 기독교인에게서 찾는다. "로마제국의 부당한 법에 굴복하느니 이들은 굶주린 사자와 고문의 고통을 택했습니다." 킹의 눈에는 철학자 소크라테스 역시 이런 모범을 보여준 인물이다. 오늘날 우리는 소크라테스의 "시민 불복종" 덕분에 "학문의 자유"를 누리기 때문이다. 킹이 보기에 "자유로 나아갈 길"을 가로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흥미롭게도 "큐 클럭스 클랜Ku Klux Klan, KKK"과 같은 백인 인종차별주의자가 아니라, "온건한 백인, 정의보다는 ‘질서‘를 더 중시하는 백인"이다. "이들은 정의가 살아 있는 적극적인 평화보다 긴장 관계가 없는 소극적인 평화를 더 선호하며, 줄곧 이렇게 말합니다. ‘당신의 목적에 동의하지만 방법에는 동의할 수 없습니다.‘" 어디서 많이 들어본 말이 아닌가? 기후 운동가들과 그 저항의 방법을 두고 쏟아진 바로 그 비난이다. - P120

그는 시민 불복종은 그만큼 민주주의를 신뢰한다는 표현으로 읽어야 한다고 강조한다. 다른 의견을 민주적으로 받아들여 줄 것이라는 신뢰가 바탕에 깔려 있어야만 저항이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만큼 우리는 시민 불복종을 존중하고 진지하게 받아들여야 한다. 그것이 불편을 주는데도 불구하고 참고서 그러는 게 아니라, 오히려 그것이 바로 불편을 주기 때문에, 그리고 불편을 주는 방식 때문에 존중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시민 불복종은 도덕적으로 정당하고, 공개적이며, 비폭력적이고, 의도적으로 법을 위반하되 사법적 결과는 감당하겠다는 성숙한 자세를 보이는 행위이다. 법치국가는 스스로 잘못된 길로 나아갈 수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면서, 국민이 "도덕적으로 정당한 실험"으로 "국가를 의심"할 수 있게 허용해주어야 한다. 처음에는 성가시고 불편할지라도 그래야 잘못을 바로잡고 고쳐나갈 기회를 얻는다. - P125

우리는 무엇보다도 모든 정치적 의사 표현과 행동을 어찌 됐건 동등하게 다뤄주어야만 한다는 잘못된 보편주의를 버려야 한다. 7장에서 정리한 규칙에 비추어 민주적이고 투명하며 정당한 저항으로 볼 수 없는 운동을 시민사회는 이해해서도 용납해서도 안 된다. 자유민주주의는 그 자신을 반대하고 심지어 폐지하려고 하는 저항도 용인해야 하는 딜레마에 처해 있지만, 그 딜레마는 어디까지나 자유민주주의의 규칙을 지키는 상대에게만 유효하다. 규칙을 의도적으로 깨는 세력에게까지 그러한 태도를 유지해서는 안 된다. 시민 불복종과 사회를 시끄럽게 만드는 시위는 민주적으로 선출된 정부의 주권을 인정하고 이 정부를 메시지 수신자로 삼을 때만 정당하다. ‘다른 생각을 하는 사람들‘이나 ‘페기다‘처럼 아예 조직적으로 민주주의의 근본 규칙을 위배하거나 심지어 민주주의를 폐지하려는 세력, 예를 들어 인종차별 또는 반유대주의를 거침없이 주장하는 세력은 위르겐 하버마스를 비롯한 여러 사상가가 정당한 저항 시위라면 마땅히 지켜야만 한다고 설명한 제약을 깨버린다. - P197

자기 효능감이 있는 운동은 희망에 부푼 집단의식, ‘우리‘를 만들어낸다. 훼손당한 가치와 규범을 보며 분노하는 감정, 다시말해서 불의와 부정을 허용해서는 안 된다는 공통의 정서가 ‘우리‘를 결집해준다. ‘우리‘라는 집단의식을 고취시키기 위해 저항은 불의와 부정이 무엇인지를 대중에 호소하는 간명하고 호소력 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수 있어야 한다. 갈등을 우리 대 저들, 올바름 대 그릇됨, 건설적 대 파괴적이라는 구도로 담아내어 누가 적인지 분명히 보여주면, 지켜야 할 도덕이 무엇인지 명확해지고 다른 이들과의 소통도 원활해진다. 그렇게 되면 사회 전반에 걸쳐 치유력이 발휘된다. 감동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형성된 집단은 사회의 모든 기둥에서 끈질기게 동맹을 찾아야 하며, 상대를 딜레마 상황으로 몰아넣어야 한다. 상대의 억압과 반격이 격렬하다는 것은 운동이 어느 정도 목표에 근접했음을 알려주는 반증으로 보아야 한다.
저항은 윤리를 바로 세우자는 선언이며, 윤리는 무엇보다도 이야기를 통해 전파되는 것이기에, 저항은 상징적 갈등 상황을 계속 만들어내 우리 앞에 계속 윤리적 선택을 제시해야 한다. 저항은 사람을 혼란에 빠뜨리고 귀찮게 만들 용기를 가져야만 한다. 거부와 회피는 까다로운 윤리적 결정 앞에 인간이 보이는 자연스러운 반응이다. 물론 두 가지 나쁜 선택지를 놓고 어느 하나를 골라야만 하는 상황은 딜레마이다. 하지만 완벽하게 좋은 해결책이 없기에 차선의 선택지를 고르는 딜레마는 피할 수 없다. 저항 본연의 과제는 문제를 문제라고 제기하는 것이며, 타협을 고민할 이유는 없지만, 저항이 혁명적 자세만 고집하지 않으려면 대안을 함께 고민해야 한다. 이른바 ‘해결책‘의 제시가 저항의 과제는 아니지만, 대안을 제시하지 못하는 저항은 비생산적인 현재에 머무르며 경직될 수 있다. 그렇지만 본디 저항운동은 내일을 바라보며 대안을 찾기보다는 더 근본으로 돌아가야 한다. 과격해진다는 의미에서가 아니라 원래 의미대로 충실하게 뿌리로 거슬러 올라가는 ‘급진화‘가 필요하다. 즉 저항은 오늘날 우리가 겪는 문제의 뿌리를 과감히 드러내, 온 세상이 똑바로 볼 수 있게 해주어야만 한다. 그러나 폭력은 언제나 잘못된 방법이다. 폭력은 저항의 윤리적 토대를 무너뜨리며, 상대가 직면한 딜레마에서 쉽게 빠져나갈 구실을 제공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단단히 단결해야 한다. 정말로 정당한 일을 위해 저항해야만 한다. 그리고 싸움을 멈춰서는 안 된다. 인내심을 가지고 꾸준히 나아가다 보면 언젠가 권력이 골고루 나뉘는 때는 반드시 찾아온다. - P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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