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정하기 싫어서 다정하게 에세이&
김현 지음 / 창비 / 202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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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은 동사,라고 어느글에 쓴 적 있고. 덧붙이자면 일렁이다는 여름 동사의 일종. 겨울의 동사는 속삭이다. 봄의 동사는 어른거리다. 가을의 동사는 흘러가다. 어른거리고 일렁이고 흘러가 속삭이는 마음의 사계절. 동사를 활용해 마음의 사계절을 그려보세요. 그것이 바로 당신을 설명하는 일. - P26

고요히 한 생각 머물면
앞 강물도 지워지고
앞산 숲도 지워진다

너는 말없이 말하고
나는 들리지 않게 듣는다

-강상기 묵언(默言) 부분 - P66

폭력 피해 여성 없는 세상을 꿈꿨던 (여성인권운동가) 이문자님의 자취에 마음이 동하여 그가 일흔살에 남긴 이런 말을 몇번씩 되뇌어보는 하루.
아무것도 모르고 발을 디뎠고, 지금까지 한눈팔지 않았다. - P83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내려다보게 될 때
나는 내게 묻게 되리

봄이 저 멀리 아득해지는 이유를
여름이 콸콸 쏟아지는 이유를
가을은 어디까지 떨어져 내리는가
겨울은 왜 마음을 쌓아 올리는가

아무런 대답도 듣지 못하리

나는 살아왔으므로
이유도 모르고 살아왔으므로

(…)

살아 있다는 것
신이 결코 알 수 없는 것

신이 한번도 경험하지 못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불행한 것
그것이 인간의 가장 행복한 것

친구들
그대들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며 빛을 채워주는 날
작고 따뜻한 손으로 내게 말 걸어주시오

우리는 평화로운 영혼임을
우리는 확신에 찬 신념임을
우리는 다정한 우정임을
우리는 우리의 삶을 이루고 있음을

그리하여
언젠가 내 얼굴이 나의 얼굴을 바라보게 될 때
우리는 우리들의 곁에서 다시
첫 우정의 말을 시작할 것이니

고맙소, 친구들이여 - P85

어쩌면 많은 작가들이 조장하고 있는 것은 빛나는 미래에 대해 꿈꾸기일 것이다. 전진하지 않고 후퇴하는 현실의 이야기를 바꿔 쓰는 사람. 그 행동하는 몽상가를 작가라 달리 부르는 것이기도 하리라.
오랫동안 성소수자 해방에 헌신한 운동가 피터 태철은 세상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일 수 없다면 당신이 원하는세상을 꿈꾸라고 말한다. 그리고 덧붙인다. 꿈이 생겼으니,
이제 나아가자고. - P120

언젠가 한번 한 책방에서 열린 문학 행사의 진행자가 되어 작가와의 만남을 이끈 적이 있다. 참여 인원이 적어서 행사라기보다는 정모 같은 분위기가 되었는데, 이런저런 얘기가 오가던 중에 한 여성이 말했다.
-저는 마음에 병이 있습니다.
듣자 하니 그이 마음의 병은 말을 살아지 해서 생긴 것이었다. 그날 그 말하지 못하는 마음을 헤아려 적은 글에서 나는 마음에 말이 없는 사람이 있을까라고 물었다. 그지. 나도, 너도 마음에 말이 있지. 다 말해버릴까, 하는 고민을 최근에 꽤 여러번 했다. 그 가운데 한번은 말했다.
-내가 받은 고통을 생각해봤어?
그러나 그러니까 누군들 할 말이 없겠는가. - P180

오드리 로드Audre Lorde는 시는 사치가 아니라고 썼습니다. 1977년에 백인 아버지들은 생각하므로 존재한다 말하지만, 흑인 어머니는 느끼므로 자유롭다 (꿈속에서) 속삭인다. 시는 그 꿈의 실행을(혁명적 요구를) 선언하는 새 언어를 만들어낸다. 시를 사치라고 폄하한다면 그것은(여성됨이라는 힘) 미래를 포기하는 것이라고 시인은 얘기하지요. 오드리 로드의 ‘행동을 위한 에세이‘를 모아놓은 책 <시스터 아웃사이더>(후마니타스 2018)는 1984년 미국에서 출간되었고, 34년이 지나서야 한국에서도 읽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 책은 우리가 삶을 성찰할 때,라는 말로 시작해 우리가 진실을 말한다면,이라는 말로 끝납니다. 삶을 성찰해야만 진실을 말할 수 있다. 울화의 불씨가 진실의 불씨가 된다는 말. - P206






그리고 어깨

강아솔의 노래를 들으며 사랑을 달리 부를 수 있는 말이 이렇게나 많구나, 하고 고개를 먼저 끄덕였다. 봄. 정말 봄이구나. 창밖을 내다보니 마침 회갈색 직박구리 한마리가 날개를 펴고, 이 나무에서 저 나무로 재빠르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생명의 몸짓에서 사랑을 보았다고 한다면 믿으실지 손님이 한명도 없는 카페에 앉아 실로 오랜만에 말갛게 미소 지었다. 식은 사과차에 미지근한 물을 넣어 마셨는데도 제법 따스한 기운이 몸에 돌았다. 몸이 따뜻해지는 일도 역시 사랑이고, 들키는지도 모르고 혼자 웃는 일도 사랑이다. 누군가에게 기대고, 말없이 어깨를 낮추는 것은 각각 아름다운 일이지만, 역시 엇갈리지 않고 동시에 이루어질 때 더 사랑스럽다. 나란히 숨을 고르는 일. 사랑은 모쪼록 그런 일.
……
빛과 내가(그림자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의 일’은 잠이 들기 전에 서로의 이마를 짚어주거나 새끼손가락을 살짝 잡아주었다 놓는 일. 먼저 잠든 사람의 얼굴을 바라보거나 발등을 쓰다듬어주는 것이다. 그런 사랑의 일상을 머릿속에 그려보고 있으니 문득 궁금했다. 강아솔은 우리가 우리의 일을 그토록 아끼는 까닭을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마음이 순해지는 일, 사랑. - P2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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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고 싸우고 살아남다 - 글쓰기로 한계를 극복한 여성 25명의 삶과 철학
장영은 지음 / 민음사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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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리스 레싱은 자신이 태어난 곳과 자란 곳을 모두 부정하고 싶었다. 환멸로 가득했다. 생래적 허무주의자 도리스 레싱은 아프리카에서도 또 한 차례 인간의 한계를 깊이 깨닫는다. 그는 남아프리카의 관목 숲 사이에서 "시간이 한 손으로 모든 것을 주면서 또 한 손으로는 그것을 전부 빼앗아 간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고 고백했다. - P26

1925년에 『댈러웨이 부인』, 1927년에는 『등대로』를 연이어 발표하면서 버지니아 울프는 드디어 작가로서 자신감을 획득한다. "내 마음 속에서 자기 자신의 목소리로 무엇인가 말하는 방법을 찾아냈다는 사실을 확신하고 나자 일종의 해방감도 느꼈다. "매일같이 아버지와 어머니 생각을 하곤 했다. 그러나 『등대로』를 쓰고 난 다음에, 나는 그들을 내 마음속에 묻어 버렸다." 버지니아 울프는 "나는 이제 누가 칭찬하지 않아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을 것이라는 느낌이 든다."고 선언했다. - P39

책을 읽으며 콜레트는 점점 지혜로워졌다. 비로소 자신을 진심으로 아끼는 사람들의 말이 들리기 시작한다. 어머니와 몇몇 친구들은 콜레트에게 너는 너의 이름으로 글을 쓰고 작가로 살아가면서 여성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고, 꼭 그렇게 될 것이라고 밑도 끝도 없이 콜레트를 칭찬하며 여성 작가의 탄생을 기다렸다. 콜레트도 더 이상 허송세월하지 않고 자기 삶의 주인공으로 살기 시작했다.
콜레트는 누군가를 제대로 격려해 주는 일이 때로는 한 사람의 인생을 바꾸고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든다는 사실을 경험하게 된다. 콜레트도 먼저 누군가를 알아보고 응원하는 사람으로 살았다. 1951년, 콜레트는 지독한 관절염으로 고생하며 어쩌면 자신에게 남은 시간이 얼마 안 될지 모른다는 예감에 휩싸였다. 그러자 가 보지 않은 길이 궁금해졌다. 자전적 소설을 스스로 극으로 각색까지 한 「지지」를 브로드웨이 무대에 올려 보고 싶었다. 주인공 지지 역을 물색하던 중 몬테카를로에서 우연히 오드리 헵번을 발견하고, 콜레트는 그 자리에서 일어났다. "저길 봐, 내가 찾던 지지야." 대문호 콜레트가 손짓했지만, 오드리 헵번은 무대 위에서 연기를 해 본 적이 없다는 이유로 출연을 거절한다. 콜레트는 오드리 헵번을 끈질기게 설득했다. 공연 전까지 특별히 두각을 드러내지 못한 채 그저 맹렬히 연기 수업을 받을 뿐이던 오드리 헵번은 막이 오르자 서서히 역량을 발휘하기 시작했고, 막이 내릴 때쯤에는 관객들을 완전히 사로잡았다. - P48

어떤 사건이 벌어지더라도 프리다는 그림을 그리고 공부를 했다. 프리다의 소망은 변함이 없었다. "내가 되고 싶은 여자가 될 수 있었으면 좋겠다." - P65

제이디 스미스가 지향하는 문학 역시 마찬가지이다. 그의 믿음은 확고하다. 시간과 싸워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지금 이 순간 무엇을 할 것인가? 작가는 오직 그 질문만을 던진다. "구원은 현재하고 있는 일에, 지금 쓰고 읽는 것에 존재한다." 글 쓰는 여자는 오늘에 집중한다. - P93

볼프는 신화의 가치를 긍정했다. "신화는 특별한 방식으로 인간적인 것, 내가 생각하기에 모든 문학에서 문제 삼고있는 그 인간적인 것에 대해 질문하도록 강요합니다. …… 우리는 왜 인간의 희생을 필요로 하는가. 왜 우리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고 언제나 계속해서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가?"
오래된 신들의 이야기 속에서 "인간적인 것"을 발견해 낸 볼프는 "희생양을 필요로 하는 사회에 질문을 던졌다. 어쩌면 볼프 자신이야말로 분단과 통일 시대의 갈등 상황에서 여러차례 "희생양"이 되었는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가는 새로운 질문을 계속해야 좋은 글을 쓸 수 있다고 믿었다. "이 몸을 끌고 어디로 가야 하는가.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은 과연 어디에 존재할 것인가." 코린토스의 희생양 메데이아는 마지막까지 묻고 또 물었다.
81세가 되던 해인 2010년 마지막 작품을 발표한 볼프는 그 다음 해 세상을 떠났다. 볼프는 분단과 통일의 중요 국면마다 "나에게 어울리는 세계, 나에게 어울리는 시간"이 무엇인지 냉철하게 성찰한 작가였다. 글 쓰는 여자는 끊임없이 질문한다. - P122

2001년 9·11 테러 직후, 수전 손택은 부시 행정부를 정면으로 비판하며 반(反) 이성적인 분위기에 휩싸인 미국 사회를 향해 목소리를 높였다. "부디 다 같이 슬퍼하자. 그러나 다 같이 바보가 되지는 말자. 역사를 조금이라도 알고 있다면 그동안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그 다음에는 무슨 일이 벌어질지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수전 손택에게 "애국심이 없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그는 크게 개의치 않았다. 그는 "문제를 명확히 제기하고, 널리 만연한 (과도한) 경건함을 반박하는" 것이 작가의 임무라고 생각했다.
2003년 프랑크푸르트 국제 도서전에서 독일 출판협회 평화상을 수상한 수전 손택은 문학을 "자유의 공간으로 들어갈 수 있는 여권"이라고 정의하며, 문학을 선택했기에 "국가적 허영심, 속물근성, 강제적인 편협성, 어리석은 교육, 불완전한 운명, 불안이라는 감옥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다행스러워했다. 다만 죽음을 거부할 수는 없었다. 이듬해인 2004년 12월, 71세의 수전 손택은 골수성 백혈병으로 세상을 떠났다. - P148

1877년부터 <폭풍의 언덕>이 재평가되기 시작했다. 시대마다 새로운 찬사가 잇달았다. "<폭풍의 언덕>은 어떤 소설과도 닮지 않았다."는 서머싯 몸의 평가는 정확했다. 버지니아 울프는 에밀리 브론테의 "거대한 야심"을 꿰뚫어 보았다. 에밀리는 "세상을 한 권의 책 안에 결합시킬 힘"을 스스로 발견한 작가였다. 오직 세상을 견딜 수 있는 "용기"만을 간구했다. "내 영혼은 비겁하지 않다/ 세상 폭풍우에 시달리는 지구 안에서 떨지도 않는다." 에밀리는 자신의 영혼을 지켰다. 세상 앞에 당당했다. 글 쓰는 여자는 용기를 잃지 않는다. - P159

사형수 가네코 후미코는 남은 시간을 "자서전인 듯한 글을 쓰는 데 열중하여 거의 휴식도 운동도 하지 않은 채 오로지 원고 쓰는 일에만 매달렸다." "가까운 시일 안에 형을 받을 것이기 때문에 나는 서둘러 자서전을 쓰고 있습니다. 이것이 출판되어 하나라도 내게 공명해주는 사람이 세상에 있다면 그것으로 만족하며, 나의 시작부터 생명이 끝나는 날까지 이 세상의 절멸과 나의 죽음에 의미를 부여할 수 있을거라 믿고 있습니다." 가네코 후미코는 마지막 순간까지 다쿠보쿠의 시를 잊지 않았다. "핑계대지 말고 당당하게 살아가라. 언젠가 흙으로 돌아갈 몸이니까." 1926년 4월 가네코후미코는 무기징역으로 감형되었고, 석 달 뒤 자살을 감행하여 천황의 ‘은사‘에 저항했다. - P182

헤르타 뮐러는 스스로에게 어려운 질문을 던진다.
"침묵하면 불편해지고, 말을 하면 우스워"지는 곤혹스러운 시대에 과연 문학은 무엇을 감당할 수 있을까? 그는 자신의 글쓰기가 증언에 머물기를 원하지 않았다. 헤르타 뮐러는 자신이 겪었던 ‘악몽‘을 이야기하면서 삶의 가치를 환기시켰다. "이것들 보라고, 살고들 싶지." - P201

그의 단편소설 「천년의 기도」의 주인공 시 씨의 딸이 아버지에게고백한 것처럼, 이윤 리도 영어로 소설을 쓰며 해방감을 느꼈다. "자기 감정을 제대로 표현해 본 적이 없는 언어를 쓰며 자란 사람은 새 언어로 말하기가 더 쉬워져요. 그건 사람을 다시 태어나게 만들어요." - P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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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의 싸움‘에 관해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간 발표한 글도 있고, 새로이 쓴 글도 있다. 언제 쓴 글이건 대부분 이런 물음을 품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존재를 가리는지, 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그리고 싸움이 지나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이런 질문을 품고 썼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 같은 표현을 질색한다. 누군가의 존재를 온갖 장치로 가리고,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고, 목소리마저 가로막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혹은 ‘들리지 않는‘ 같은 수동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놓고 거짓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왜 보이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자명하다. 왜 외면하는가? 왜 앞서 잊는가? 왜 제대로 보지 않는가? 이 질문은 누굴 향하기 전에 나부터 걸려드는 질문이다. - P5

이 책에 담은 것은 흔적이다.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 사건과 과정, 평가와 의미가 아니다. 그저 흔적이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은 흔적을 남긴다.
싸움이 끝나질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부터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때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들의 흔적을 좇았다. 지워진 발자국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들을 설명할 문장을 만들었다.

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작은 후회를 감수하며 사는 사람.

후회없이 살고 싶다.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살면서 깨닫는다. 후회 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는 후회를 예감하며 한 발을 내딛고 자신이 감당할 만한 후회를 삼키며 살아간다. 어떤 일을 겪어낸 이들에게서 내가 본 의지와 끈기 같은 것, 그러니까 저력이라 불렀던 것은 숱한 후회를 감수하면서도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마음이자, 후회를 뒤로 감춘 채 내주는 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뒷자리에서도 여전하다. 어떤 흔적을 뒤적여도, 아무리 오래된 사건과 만나도, 여전히 움직이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였기에 나 또한 아주 천천히 몸을 틀 수 있었다. - P9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송전탑이 세워지고 마을이 쪼개지고 다친 몸이 욱신거리고 상처가 잊히질 않아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싸움을 끝낼 수도, 질 수도 없다. 이곳은 그네들의 삶터였다. 사는 일엔 끝이 없다. 돈 몇 푼에 숨어 들어갈 수도, 쪼개진 마을이 싫다고 떠날 수도 없다. 어차피 막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거짓 위안을 할 수도 없다. 그저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거친 흙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땀 흘린 날들처럼, 과정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땀 흘려야 하는 삶처럼, 살아온 대로 살아가야 한다.
상처도 땀에 흘려보내야 한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싸움을 끝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질 수가 없다. - P29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거든요. 도시처럼 서로가 연이 없는 그런 동네가 아니라, 뭔가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하고 같이 놀아야 하는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이 지혜롭다 느낄 때가 많거든요. 서로 조금씩 뭔가를 회복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어요. 일 있으면 내일 온나. 밥 먹으러 간다면 같이 가자. 뭐 이런 거죠. 밉지만 용서하겠다. 그러니 같이 뭐라도 해보자. 그러면서 자기의 분노가 어쨌든 조금씩 사그라드는 거죠. 이건 슬기로움이랑 어쩔 수 없음이랑 반반인 것도 같은데. 오래된 공동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죠." - P41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비롯해 숱한 외침을 들으며, 십수 년간 한국 사회가 깨달은 것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체라는 허상을 위해 희생을 치르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미 존재하는 곳을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소리를 내고 외쳤기에 그들은 존재를 드러냈고, 메아리 같은 응답을 받기도 했다. 그 외침이 멈춰야 싸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더는 오지 않을 때 싸움은 끝이 난다. 응답은 기다리는 일이다. - P44

평화는 포탄이 멈춘 날, 갑자기 만들어진 완성작이 아니다. 그때로부터 돌탑을 쌓아 올리듯 지켜내야 하는 일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란, 시대에 따라 이름만 바꾸어 등장한다. 그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건 사는 동안의 과제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도 누군가는 부둣가를 정비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누군가는 장사 준비를 한다. 미군 폭격장이 설치된 마을에 사람이 살았듯이 어디서든 사람이 산다. 새마저 알을 낳고 살아간다. 모든 생명이 기억하고 살아낸다. 평화란 살아가는 일이다.
평화란, "아침까지 푹 잘 수 있는 것". 동화작가 하마다 케이코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 평화를 말했다.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땅이 평화롭기를, 삶이 고요하기를. - P60

"오늘은 누가 몸이 아프나, 어디가 안 좋아서 못 나오려나. 전화를 해보는 거야. 내가 자꾸 전화를 하니까 사람들도 미안해하고 일 생기면 나한테 미리 전화를 주고. 그렇게 못 오는 이유를 말해주면 나는 또 이제 안심하는 거야."
허물어진 자리를 책임으로 메우고 있는 걸까.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버텨주기 때문에, 반핵아시아포럼도 경주에 오고. 이런 것조차 없으면 (탈핵 운동이) 발 디딜 틈이 없잖아. 저 사람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우리가 버텨주는 거잖아."
책임이란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은 마음이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나 또한 그런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자꾸 찾아 다독여. 그래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억지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어. 그러니 잘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디 나라를 크게 바꾸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믿는 만큼 씩씩하게 이야기하고 내 주장을 뚜렷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 세 사람만 모여서 월성에 대한 우리 이야기 듣고 싶으면, 불러라, 가겠다. 그래서 참 안가본 곳이 없지." - P95

"콜센터 이야기를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재를 가니 콜센터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
감정노동과 진상 고객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우리는 콜센터 노동을 모른다. 이들의 기술과 자부심, 경력을 모른다. 그걸 모르는 것은 회사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들이 싸운 덕분에 알게 됐다. 단지 저임금, 닭장, 고용불안, 감정노동으로 이야기되는 고충이 아닌, 이들의 고용을 야금야금 갉아먹은 어떤 시스템에 대해.
외주화, 인력파견, 아웃소싱이라는 말을 참으로 쉽고 익숙하면서도, 잘 모를 것으로 만든 이 사회를 알게 됐다. - P97

"세상은 여자 노동을 뜨겁게 생각해주질 않아요.‘
남편이 직장에서 잘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줄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하면 "이참에 쉬어" "봉사나 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여자 노동은 뜨겁게 생각해주지 않는지 물었다. 자신의 뜨거운 노동을 가벼운 해고로 되돌려준 회사와 싸우길 결심한 이였다.
그의 말이 좋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차별받아선 안 된다고, 여성들의 노동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해왔지만, 저토록 당당하게 여성의 노동이 "뜨겁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나에게 여성의, 아니 누군가의 노동은 뜨거운 것이 되었다.
미적지근하게 취급되는 것들이 있다. 여자 노동이 그렇고, 나이 듦이 그렇고, 빈곤이 그렇고, 서울이 아닌 곳이 그렇고, 사람이 아닌 생이 그렇고, 그러니까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난 모든 것이 그런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온도를 지닌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가려져 있다. 공단 담벼락 너머, 변두리 지역, 여느 가정집, 어느 곳에나 숨겨진 사람들이, 아니 가로막힌 사람들이 있다. 장막은 결국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시선에 있는 것. 장막을 들춰 그곳에 가면, 내가 보게 되는 건 몸을 숨긴 이들이 아니라 이들이 지키려는 무엇이었다. - P182

그런데도 세상이 ‘힘든 일 안 하려 한다는‘ 한국 젊은이를 탓하고, ‘한국인 일자리 뺏는다는‘ 이주노동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그 사이를 ‘쓸모없는 노동‘이라 낙인찍힌 노년 노동이 메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배운 게 많아도, 힘이 세도, 혈기가 넘쳐도 못하는 일. 손에 익고 일머리가 깨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경험과 숙련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이들이 하는 노동에는 ‘저숙련‘이라는 이름을 붙는다.
저숙련, 단순, 반복이라는 말이 붙는 노동의 특징은 ‘대체 가능‘이다. 언제든 내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감은 ‘이 돈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이병철은 자신은 쉽게 대체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내가 없으면은 회사가 일을 못 합니다. 작년에 고무호스를 끼우다가 산재가 났는데. 한 달 회사를 못 갔어요. 내 없을 때 회사에서는 이 사람도 넣어보고 저 사람도 넣어보고. 못해요. 고무 모형이 10개 20개가 아니고, 1,000개가 넘어요. 그만큼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저도 다 몰라도 800개 정도는 아는데. 며칠 와서 일하는 사람이 그걸 다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회사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회사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는다. 저렴하기에 사용하는 노동력이다. 그 노동을 인정하는 순간 저렴하게사용할 수 없어진다.
탓을 하는 이는 사장이나 관리자 개개인만이 아니다. 이 사회가 노년 노동을 얕본다. 이는 사회가 노년 노동(과 저숙련·육체·단순·반복이라 부르는 노동)을 관리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따로 부르는 말이 있다. ‘후려치기‘. 알다시피 흥정을 할 때 물건을 후려치는 이유는, 가격을 깎기 위해서다. 애초에 저렴한 노동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값싼 노동이 만들어진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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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자동 사람들 - 왜 돌봄은 계속 실패하는가, 2021년‘올해의 인권책’선정
정택진 지음 / 빨간소금 / 202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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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자유주의 체제의 특징은 공공부조인 기초생활보장제도에도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기초생활보장제도는 일차적인 복지의 주체를 가족으로 설정하고, 가족으로부터 돌봄과 복지를 제공받지 못하는 대상에 한해서만 수급권을 부여하는 잔여적 (residual) 형태로 구성된다. 수급신청자가 소득 및 자산 기준을 통과하더라도, 법적 부양의무자인 ‘1촌 직계혈족(부모, 자녀) 및 그 배우자(며느리, 사위 등)‘에게 부양능력이 없거나 미약하다고 판단될 때에만 수급권이 보장된다. - P74

"유령"은 존재하지만 존재하지 않는다. 여러 복지 시설과 제도 속에서 정영희는 분명 물리적으로 존재한다. 그러나 그녀의 정체성은 정신지체 장애인, 노숙인, 일반수급자라는 형태로 환원될 때에만 인정받는다. 거기에 ‘정영희‘라는 정체성은 없다. 그래서 그녀는 물리적으로는 존재하면서도 자기 자신으로 인정받을 수 없는 "유령"이 되었다. 하지만 성적 욕망을 표출하고 누군가를 만나 연애 관계를 형성할 때 정영희는 성적 욕망을 자기 뜻대로 통제할 수 있다. 성적 욕망을 매개로 상대방과 상호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며 스스로를 드러낼 수 있다.
……..
여기에서 정영희가 표출하는 욕망은 자아의 표현이나 주체적 의지가 아닌 일종의 병리적인 것으로 드러난다. 정신지체 장애는 ‘통제할 수 없는 욕망‘이라는 특성으로 이해되고 전문적 시설을 통해 치료되어야 할 것으로 이어진다. 그러므로 정민희가 정영희에게 제공하고자 하는 포괄적 의미의 돌봄과 "사람다운" 삶은, 이러한 욕망을 스스로 제어하지 못하는 그녀를 대신해 그것을 관리하고 통제하는 일까지 포함한다. 폐쇄 시설 역시 가족이 제공하고자 한 일상적 돌봄의 일부분이다.
물론 폐쇄병동을 단순히 통제와 억압의 기제로만 바라보는 관점은 정신질환이나 장애가 가진 병리적 특성과 시설의 치료적 효과를 간과하는 오류를 범할 수 있다. 그러나 더욱 중요한 점은, 욕망, 정상, 통제와 치료로 이어지는 문법에서 부정될 수밖에 없는 정영희의 욕망이 본인에게는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다는 것이다. - P85

그런데도 기초생활보장제도에 관한 정보 부족이나 ‘주거조사관이 오고 나서 수급이 끊겼다‘는 식의 무성한 소문은 언제 수급이 중단될지 모른다는 우려와 공포를 불러일으킨다. 현장연구를 진행하는 동안 주민들은 기초생활수급에 대한 우려와 공포를 수없이 내게 들려주었다. 주민들은 자신의 현재 상황 때문에 곧 수급이 끊기는 것은 아닌지, 수급이 끊기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하는지, 어째서 이번 달 수급이 제대로 나오지 않았는지 물어오곤 했다. 기초생활수급은 쪽방촌 주민들의 삶을 유지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수단인 동시에, 그 수단이 사라졌을 때 언제라도 일상이 중단될 수 있다는 공포와 두려움의 대상이다. - P94

그래서 그녀는 경제적 궁핍과 불안정에 시달리면서도 홍인택과 관계를 유지하려 했다. 쥬앙 빌(João Biehl)과 피터 로케(Peter Locke)는 질 들뢰즈(Gilles Deleuze)의 논의를 빌려, "욕망은 끼어들고, 회피하고, 자신이 의도하는 것으로 승화함으로써, 권력이 만들어내는 주체화의 양식과 영토화를 지속적으로 비집고 나온다"고 말한다. 정신지체 장애인, 일반수급자, 클라이언트로, 돌봄을 받을 수도 줄 수도 없는 존재로 주체화되었던 정영희는 그것을 "비집고 나오는" 욕망을 관계의 형태로 "승화(sublimation) "함으로써 동자동 쪽방촌에서의 삶을 유지하고 있다. - P104

시신이 안치소에서 차량으로, 차량에서 카트로, 카트에서 화장 시설로 옮겨지는 과정은 행정 규정에 따른 절차다. 주민들이 볼 때 이러한 행정 절차에서 무연고 사망자는 추모와 애도의 대상이 아니라 처리되어야 할 "짐짝"에 가깝다. 그러나 절차와 절차 사이에 존재하는 - P117

그러나 주민들은 각자 동자동 쪽방촌에 오기까지 경험한 "과거 얘기, 가족 얘기, 자식 얘기" 등 서로의 "각자 사정"을 묻지 않는다. 물론 같은 공간에 거주하며 자연스럽게 서로의 과거를 알게 된 경우도 있다. 하지만 "우리는 그런 거 이야기 잘 안 한다"라는 조정일의 말처럼, 쪽방촌 주민들은 서로의 과거와 기억을 의도적으로 묻지도 대답하지도 않는다. 현장연구 기간 내내 많은 주민들이 이러한 ‘암묵적 윤리‘를 보여주었다. 자기 이야기를 털어놓다가도 "내가 너무 많이 말했네. 쓸데없는 이야야기를…………"라며 황급히 말을 중단하기도 하고, 나와 대화를 나누던 다른 주민에게 "그런 깊은 이야기는 막 하지 말어!"라고 소리치며 말리기도 했다. 그 이유가 무엇이든, 과거의 기억은 서로 함부로 묻거나 이야기하지 않는 것이 주민들의 암묵적 규범이다.
이처럼 쪽방촌 주민들 사이의 관계는 서로의 과거를 의도적으로 기억하지 않는 암묵적 윤리를 기반에 두고 있다. 누군가를 온전히 알고 기억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부분을 의도적으로 망각함으로써 주민들 사이의 연결은 가능하다. 주민들이 보여주는 연결은 완전한 연결이나 가까워짐의 형태가 아닌 부분적 거리 두기와 단절을 포함하는 망각의 관계에 가깝다. - P125

"여기에 나눠주는 게 정말 많잖아요. 이게 주민들을 마비시켜요. 이제 고마움도 못 느끼는 거죠. 나눠주면 좋아하긴 하는데 막상 물어보면 누가 준 건지도 몰라요. 비판적으로 봐야 하는데 그게 안 되는거예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 해야 하는 것도 그렇게 하지 못하게 되는거죠."
김동석은 무언가를 나눠주는 활동 때문에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진"다고 생각한다. "고마움"에 대한 감각은 사라지고 "비판적으로" 바라보는 눈은 어두워진다.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인데도 자기힘으로 무언가를 해내는 능력은 점차 사라진다. - P158

그가 바라보는 주민은 누구나 두 모습을 모두 갖고 있다. 그중 후자가 주민의 "본모습"에 더 가깝다. 그러나 평소에는 전자에 가려 쉽게 드러나지 않는다. 따라서 설령 주민들이 마비되고 길들여져 있다고 하더라도 강제적으로 없애거나 고쳐야 할 것이 아니다. 가려져 있는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이 주민자조조직의 목적이다.
"그런 거죠, 주민의 본모습을 발견하고 드러날 수 있게 하는 것."
여기에서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은 곽주형과 황민욱이 말한 임금노동과 경제적 생산 중심의 독립과는 다르다. 동료 주민을 위해 기꺼이 주머니에서 꺼낸 "3만원"은 주민의 "본모습"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하지만 그는 임금노동을 통해 무언가를 생산하지도, 부를 창출하지도, 독립을 성취하지도 않았다. 자신이 아플 때 병문안을 온 주민의 ‘줌(giving)‘에 응답해 "3만원"의 형태로 ‘되돌려주었을(reciprocat-ing)‘뿐이다. 죽음이라는 경계를 넘어 두 주민 사이에 이루어진 줌, 받음, 되돌려줌을 통해 둘은 상호 의존 관계를 형성하고 상징 차원에서 연결된 ‘우리‘가 된다. 김동석이 말하는 "본모습"이란 바로 이러한 상호의존 관계와 주민 사이에 형성되는 연대(solidarity)를 가리킨다.
그러므로 주민자조조직이 목적으로 삼는 변화란 의존에서 독립으로의 변화가 아니라, 의존에서 또 다른 형태의 의존으로의 변화다. 김동석은 각종 물품 지원에 일방적으로 의지하는 주민이 결국에는 "스스로 할 수 있는 것"과 "해야 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된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것을 지양해야 하는 까닭은 이러한 의존이 윤리적으로 올바르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다. 물품 지원에 대한 일방적 의존이 주민 간의 연대와 상호 돌봄, 즉 긍정적 상호의존으로 이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 P168

식도락에서 밥을 먹는 쪽방촌 주민의 모습, 무언가를 돌려주려 노력하는 1단지 주민의 모습이 일상적 차원에서 나타나는 호혜적 실천이라면, 난협이나 주민협동회의 활동은 조직화된 차원에서의 호혜적 실천이다. 이들은 일상적 · 조직적인 차원에서 상호 의존과 연대의 관계를 형성함으로써 자기 자신과 다른 주민들의 인격과 자존감을 유지하고 마비와 길들여짐의 낙인을 거부한다. 짜장면 나눔과 식도락 사업은 주민을 위해 식사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슷해 보이지만, 당사자인 주민에게는 결코 같은 경험일 수 없다. - P193

예컨대 칠레 산티아고 빈민 거주 지역(poblaciones)의 주민들은 선물과 증여를 통해 서로를 돕고자 한다. 그러나 이들은 받는 이의 존엄성을 지켜주기 위해 마치 자신의 행위가 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주민들은 안부를 묻는 척하며 은근슬쩍 노동을 돕고, 너무 많이 만들었다고 거짓말하며 음식을 나누거나, 우연한 만남을가장해 차를 태워준다.
선물의 순환이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선물의 시작, 즉 줌에 대한 최초의 인지가 있어야 한다. 그러나 주민들의 아닌 척하기는 줌에 대한 상호 인지를 차단한다. 따라서 줌에 수반되는 돌려줌의 의무도 발생하지 않는다. 동료 주민의 도움을 받는다 하더라도 그것이 마치 도움이 아닌 것처럼 우연으로 가장된 이상, 도움을 받는 이는 그 도움을 다시 되돌려줄 필요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설령 자신이 받은 도움이 돌려주지 못할 정도로 큰 것이라 하더라도, 돌려주어야 한다는 의무에 응답하지 못하는 데서 발생하는 인격 손상을 방지할 수 있다.
또한 도움을 받은 주민이 보답할 때에도 이들은 자신의 행위가 돌려주는 행위가 아닌 척한다. 즉 돌려주는 행위는 주는 행위에 대한 답례로서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받은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주는 행위로 발생한다. 이러한 행위가 계속해서 발생하면 선물은 ‘줌-받음-되갚음-줌‘의 순환이 아니라, ‘줌. 받음1, 줌. 받음2, 줌. 받음3‘과 같은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끊어진 시간들이 마치 지층의 단면처럼 층층이 쌓이는 "동시간적 선물(contemporary gift)"을 통해 주민들은 경제적 불안정성 속에서도 서로의 존엄성을 지키면서 지속적으로 서로를 도울 수 있다. - P195

출구 없는 세계에서 과연 어떤 윤리적 응답이 가능할지, 그 응답의 형태는 무엇일지 쉽게 결론내리기 힘들다. 포비넬리 또한 명확한 해답을 제시하지 않는다. 다만 포비넬리는 하나의 실마리를 제시한다. 그는 "삶은 어떤 구원적 미래를 설정하는 것이 아니라 ‘이것이 지금 여기의 모습이다(this is what is)‘라는 사실을 이해함으로써만 가능하다"라고 말한다. 전미래적 관점에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대안을 제시하기에 앞서 벽장 안의 아이와 자신이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아이의 고통 위에서만 자신의 행복이 가능하다는 사실을 이해해야 한다는 것이다. 또한 이러한 연결이 어떠한 공통의 구조 위에서 등장하는지 ‘지금 여기의 모습‘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만 한다.
이 책이 사회적 관계에서 나타나는 사회적 버려짐의 모습을 포착하고자 한 이유 역시 마찬가지다. 여러 개입에 대해 비판적 관점을 유지하면서도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라는 궁극적 해답을 제시하기보다 동자동 쪽방촌이라는 환경에서 주민들이 보여주는 ‘지금 여기의 모습‘을 가능한 한 충실히 그려내고자 했다.
이러한 작업 이후 다시금 맞닥뜨리게 되는 질문이 있다면 그것은 ’그래서 대안이 무엇이냐‘라는 질문이 아니라, 벽장을 마주하고 난 오멜라스의 시민으로서 ‘무엇을 할 것인가‘ 혹은 ‘어떻게 살 것인가‘라는 물음이다.
이제 이 책을 통해 벽장 안을 들여다본 독자와 쪽방촌 주민들 사이에도 부분적인 연결이 생겨났다. 이 연결이 지속될 수 있을지, 지속된다면 언제까지 가능할지, 또 어떠한 형태로 지속될는지는 알 수 없다. 하지만 벽장과 그 바깥의 부분적인 연결이 존재하는 한,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며 또 어떻게 살아야 하느냐는 물음과 계속해서 마주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비록 그 방식은 같지 않을지라도, 각자가 벽장 안의 고통에 윤리적으로 응답하는 일 또한 이러한 물음을 놓지 않는 한에서만 가능할 것이다.
우리는 타자의 삶을 모른다. 쪽방촌을 개선하기 위한 여러 시도들에도 결국 주민들이 사회적 버려짐을 경험하는 까닭은, 이러한 시도가 전미래 시점에 서서 ‘이렇게 하면 더 나아질 것이다‘라는 구원적 미래를 너무나 섣불리 제시하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그래서 지금 여기의 모습을 그려내는 작업은 중요하다. 공통의 구조 위에서 벽장 안팎의 부분적 연결은 드러난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윤리적 응답은 이때 비로소 가능해질 것이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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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럼 사소한 것들
클레어 키건 지음, 홍한별 옮김 / 다산책방 / 2023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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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득 서로 돕지 않는다면 삶에 무슨 의미가 있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 나날을, 수십 년을, 평생을 단 한번도 세상에 맞설 용기를 내보지 않고도 스스로를 기독교인이라고 부르고 거울 앞에서 자기 모습을 마주할 수 있나? - P119

펄롱은 미시즈 윌슨을, 그분이 날마다 보여준 친절을, 어떻게 펄롱을 가르치고 격려했는지를, 말이나 행동으로 하거나 하지 않은 사소한 것들을, 무얼 알았을지를 생각했다.
그것들이 한데 합해져서 하나의 삶을 이루었다. 미시즈 윌슨이 아니었다면 어머니는 결국 그곳에 가고 말았을 것이다. 더 옛날이었다면, 펄롱이 구하고 있는 이가 자기 어머니였을 수도 있었다. 이걸 구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면.
펄롱이 어떻게 되었을지, 어떻게 살고 있을지는 아무도 모르는 일이었다. - P1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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