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싸움‘에 관해 적은 글을 모아 책으로 엮었다. 그간 발표한 글도 있고, 새로이 쓴 글도 있다. 언제 쓴 글이건 대부분 이런 물음을 품고 있다. 무엇이 그들의 존재를 가리는지, 왜 그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는지, 그리고 싸움이 지나간 자리를 떠나지 못하는 이들은 누구인지. 이런 질문을 품고 썼다고 했지만, 정작 나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 ‘목소리 없는 사람들‘ 같은 표현을 질색한다. 누군가의 존재를 온갖 장치로 가리고, 적극적으로 보지 않으려 하고, 목소리마저 가로막는 사회를 살아가면서, ‘보이지 않는‘ 혹은 ‘들리지 않는‘ 같은 수동의 표현을 사용하는 것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 대놓고 거짓말하는 걸 보는 기분이랄까. ‘왜 보이지 않는가?‘ 이 질문의 답은 자명하다. 왜 외면하는가? 왜 앞서 잊는가? 왜 제대로 보지 않는가? 이 질문은 누굴 향하기 전에 나부터 걸려드는 질문이다. - P5
이 책에 담은 것은 흔적이다. 싸움이 지나간 자리에 남는 흔적. 사건과 과정, 평가와 의미가 아니다. 그저 흔적이다. 어떤 일이 있었고, 어떤 일은 흔적을 남긴다. 싸움이 끝나질 않는다고 말하는 사람부터 싸움이 끝나지 않았다고 말하는 사람까지. 때론 그건 이미 지나간 일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만났다. 그들의 흔적을 좇았다. 지워진 발자국 같은 이야기를 들으며, 나는 스스로 납득하기 위해 이들을 설명할 문장을 만들었다.
큰 후회를 남기지 않으려고 작은 후회를 감수하며 사는 사람.
후회없이 살고 싶다. 이 말이 얼마나 오만한 것인지 살면서 깨닫는다. 후회 없이 사는 일은 불가능에 가깝기에, 우리는 후회를 예감하며 한 발을 내딛고 자신이 감당할 만한 후회를 삼키며 살아간다. 어떤 일을 겪어낸 이들에게서 내가 본 의지와 끈기 같은 것, 그러니까 저력이라 불렀던 것은 숱한 후회를 감수하면서도 발을 내딛는 사람들의 마음이자, 후회를 뒤로 감춘 채 내주는 품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사건의 뒷자리에서도 여전하다. 어떤 흔적을 뒤적여도, 아무리 오래된 사건과 만나도, 여전히 움직이는 이들을 만나게 된다. 나도 마찬가지다. 그들이 움직였기에 나 또한 아주 천천히 몸을 틀 수 있었다. - P9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송전탑이 세워지고 마을이 쪼개지고 다친 몸이 욱신거리고 상처가 잊히질 않아도, 나의 마음은 지지 않았다. 싸움을 끝낼 수도, 질 수도 없다. 이곳은 그네들의 삶터였다. 사는 일엔 끝이 없다. 돈 몇 푼에 숨어 들어갈 수도, 쪼개진 마을이 싫다고 떠날 수도 없다. 어차피 막아봤자 소용없는 일이었다고 거짓 위안을 할 수도 없다. 그저 주어진 결과를 받아들이고 살아가야 한다. 거친 흙에서 열매를 얻기까지 땀 흘린 날들처럼, 과정과 다른 결과가 나올 수 있음을 알면서도 땀 흘려야 하는 삶처럼, 살아온 대로 살아가야 한다. 상처도 땀에 흘려보내야 한다. 삶이 계속되는 동안 싸움을 끝낼 수 없다. 그래서 마음은 질 수가 없다. - P29
"…마을에 사는 사람들의 슬기로움을 느끼거든요. 도시처럼 서로가 연이 없는 그런 동네가 아니라, 뭔가 사람들끼리 일을 해야 하고 같이 놀아야 하는 시골에서 사는 사람들이 그 갈등을 풀어내는 과정이 지혜롭다 느낄 때가 많거든요. 서로 조금씩 뭔가를 회복해보려는 시도들이 있어요. 일 있으면 내일 온나. 밥 먹으러 간다면 같이 가자. 뭐 이런 거죠. 밉지만 용서하겠다. 그러니 같이 뭐라도 해보자. 그러면서 자기의 분노가 어쨌든 조금씩 사그라드는 거죠. 이건 슬기로움이랑 어쩔 수 없음이랑 반반인 것도 같은데. 오래된 공동체 속에서 살아온 사람들의 생존 방식이죠." - P41
밀양 송전탑 반대 투쟁을 비롯해 숱한 외침을 들으며, 십수 년간 한국 사회가 깨달은 것은 ‘그런 곳이 있다‘는 사실이었다. 전체라는 허상을 위해 희생을 치르는 공간이 존재한다. 이미 존재하는 곳을 보기 위해 많은 시간을 들였다. 소리를 내고 외쳤기에 그들은 존재를 드러냈고, 메아리 같은 응답을 받기도 했다. 그 외침이 멈춰야 싸움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응답이 더는 오지 않을 때 싸움은 끝이 난다. 응답은 기다리는 일이다. - P44
평화는 포탄이 멈춘 날, 갑자기 만들어진 완성작이 아니다. 그때로부터 돌탑을 쌓아 올리듯 지켜내야 하는 일이다. 평화를 위협하는 일이란, 시대에 따라 이름만 바꾸어 등장한다. 그로부터 삶을 지켜내는 건 사는 동안의 과제이다. 바람이 부는 날에도 누군가는 부둣가를 정비하고, 비가 오는 날에도 누군가는 장사 준비를 한다. 미군 폭격장이 설치된 마을에 사람이 살았듯이 어디서든 사람이 산다. 새마저 알을 낳고 살아간다. 모든 생명이 기억하고 살아낸다. 평화란 살아가는 일이다. 평화란, "아침까지 푹 잘 수 있는 것". 동화작가 하마다 케이코는 어린이의 입을 빌려 평화를 말했다. "폭탄 따위는 떨어뜨리지 않는 것" "집과 마을을 파괴하지 않는 것" 그리고 "잘못을 저질렀다면 잘못했다고 사과하는 것". 평화란 "내가 태어나길 잘했다고 하는 것." 땅이 평화롭기를, 삶이 고요하기를. - P60
"오늘은 누가 몸이 아프나, 어디가 안 좋아서 못 나오려나. 전화를 해보는 거야. 내가 자꾸 전화를 하니까 사람들도 미안해하고 일 생기면 나한테 미리 전화를 주고. 그렇게 못 오는 이유를 말해주면 나는 또 이제 안심하는 거야." 허물어진 자리를 책임으로 메우고 있는 걸까. "우리가 여기서 이렇게 버텨주기 때문에, 반핵아시아포럼도 경주에 오고. 이런 것조차 없으면 (탈핵 운동이) 발 디딜 틈이 없잖아. 저 사람들 마음대로 할 수 없게 우리가 버텨주는 거잖아." 책임이란 말로는 다 설명되지 않은 마음이다. "내가 무너지면 안 되겠다. 나 또한 그런 책임감이 있기 때문에, 내 스스로를 자꾸 찾아 다독여. 그래 나는 잘하고 있는 거야. 지금 나는 아무 잘못도 없고, 억지를 쓰고 있는 것도 아니고, 나는 있는 그대로 이야기하고 있어. 그러니 잘하고 있는 거야. 내가 어디 나라를 크게 바꾸고 그러는 게 아니라, 내가 믿는 만큼 씩씩하게 이야기하고 내 주장을 뚜렷하게 하는 거야. 그렇게 마음을 다잡지. 세 사람만 모여서 월성에 대한 우리 이야기 듣고 싶으면, 불러라, 가겠다. 그래서 참 안가본 곳이 없지." - P95
"콜센터 이야기를 많이 봐서 잘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취재를 가니 콜센터에 대해 아는 게 없더라고." 감정노동과 진상 고객 이야기는 익숙하지만, 우리는 콜센터 노동을 모른다. 이들의 기술과 자부심, 경력을 모른다. 그걸 모르는 것은 회사도 마찬가지. 하지만 이들이 싸운 덕분에 알게 됐다. 단지 저임금, 닭장, 고용불안, 감정노동으로 이야기되는 고충이 아닌, 이들의 고용을 야금야금 갉아먹은 어떤 시스템에 대해. 외주화, 인력파견, 아웃소싱이라는 말을 참으로 쉽고 익숙하면서도, 잘 모를 것으로 만든 이 사회를 알게 됐다. - P97
"세상은 여자 노동을 뜨겁게 생각해주질 않아요.‘ 남편이 직장에서 잘리면 큰일이라고 걱정해줄 사람들이 정작 자신이 해고되었다고 하면 "이참에 쉬어" "봉사나 해" 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왜 여자 노동은 뜨겁게 생각해주지 않는지 물었다. 자신의 뜨거운 노동을 가벼운 해고로 되돌려준 회사와 싸우길 결심한 이였다. 그의 말이 좋았다. 여성이라는 이유로 일터에서 차별받아선 안 된다고, 여성들의 노동이 저임금 비정규직으로 채워지는 것이 문제라고 말해왔지만, 저토록 당당하게 여성의 노동이 "뜨겁다"고 말해본 적이 있던가. 그에게서 이 말을 들은 이후로 나에게 여성의, 아니 누군가의 노동은 뜨거운 것이 되었다. 미적지근하게 취급되는 것들이 있다. 여자 노동이 그렇고, 나이 듦이 그렇고, 빈곤이 그렇고, 서울이 아닌 곳이 그렇고, 사람이 아닌 생이 그렇고, 그러니까 중심이 아닌 주변으로 밀려난 모든 것이 그런 온도를 지니고 있다. 그런 온도를 지닌 이들은 잘 보이지 않는다. 어딘가에 가려져 있다. 공단 담벼락 너머, 변두리 지역, 여느 가정집, 어느 곳에나 숨겨진 사람들이, 아니 가로막힌 사람들이 있다. 장막은 결국 이 세상을 사는 우리의 시선에 있는 것. 장막을 들춰 그곳에 가면, 내가 보게 되는 건 몸을 숨긴 이들이 아니라 이들이 지키려는 무엇이었다. - P182
그런데도 세상이 ‘힘든 일 안 하려 한다는‘ 한국 젊은이를 탓하고, ‘한국인 일자리 뺏는다는‘ 이주노동자라는 누명을 씌우고, 그 사이를 ‘쓸모없는 노동‘이라 낙인찍힌 노년 노동이 메운다. 이들에게 주어지는 것은 아무나 할 수 없는 일이다. 아무리 배운 게 많아도, 힘이 세도, 혈기가 넘쳐도 못하는 일. 손에 익고 일머리가 깨어야 할 수 있는 일들이 대부분이다. 경험과 숙련이 요구된다. 그런데도 이들이 하는 노동에는 ‘저숙련‘이라는 이름을 붙는다. 저숙련, 단순, 반복이라는 말이 붙는 노동의 특징은 ‘대체 가능‘이다. 언제든 내 자리가 다른 사람으로 대체될 수 있다는 위협감은 ‘이 돈 받고도 일하는 사람‘을 만든다. 그러나 이병철은 자신은 쉽게 대체될 수 없다고 당당히 말한다. "내가 없으면은 회사가 일을 못 합니다. 작년에 고무호스를 끼우다가 산재가 났는데. 한 달 회사를 못 갔어요. 내 없을 때 회사에서는 이 사람도 넣어보고 저 사람도 넣어보고. 못해요. 고무 모형이 10개 20개가 아니고, 1,000개가 넘어요. 그만큼 다양하게 있다는 겁니다. 저도 다 몰라도 800개 정도는 아는데. 며칠 와서 일하는 사람이 그걸 다 기억할 수가 없어요. 내가 없으면 안 된단 말이에요. 회사도 알고는 있는데, 그래도..." 회사는 알고 있지만, 그래도 인정하지 않는다. 저렴하기에 사용하는 노동력이다. 그 노동을 인정하는 순간 저렴하게사용할 수 없어진다. 탓을 하는 이는 사장이나 관리자 개개인만이 아니다. 이 사회가 노년 노동을 얕본다. 이는 사회가 노년 노동(과 저숙련·육체·단순·반복이라 부르는 노동)을 관리하는 방식이기도 한데, 따로 부르는 말이 있다. ‘후려치기‘. 알다시피 흥정을 할 때 물건을 후려치는 이유는, 가격을 깎기 위해서다. 애초에 저렴한 노동은 없다. 이런 과정을 거쳐 값싼 노동이 만들어진다. - P1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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