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저는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다학제팀이 환자와 함께하는것 자체가 그냥 서사라고 말이죠. 환자의 서사에 우리가 들어가 있는 것이 그만큼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환자한테 뭘 특별하게 해주지 않더라도 환자의 공간에 함께 존재하며 같이 하루를 살아가는 것, 그러면서 환자가 오늘 뭘 할지, 누구를 만날지, 어떻게 무료한 시간을 보낼지 함께 이야기 나누는 것, 그런 것이 중요한 서사 중의 하나라는 생각이 듭니다. - P6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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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상을 정원으로 빼다니, 흥미롭습니다. 정원에 있으면 자연도 보이고, 아파트도 보이고, 호스피스 2층과 3층의 병실과 복도 창문도 보입니다. 게다가 정원은 1층 로비와 연결되는 곳입니다. 사람들의 동선의 중심에 정원이 있습니다.
정원은 환자뿐 아니라 호스피스를 오가는 사람들의 위치와 관점을 움직이게 합니다. 머릿속이 복잡할 때 산책이나 운동을 하면 문제가 달리 보이듯이, 자신의 위치와 관점을 바꿔보면 마음이 편안해지기도 하죠. 무엇보다 정원에서 사람들은 호스피스가 일상과 분리되지 않고, 다양한 존재들이 ‘함께 살고 있는 곳‘이라는 점을 느낄 것 같습니다. - P53

최대한 환자가 편안함을 느낄 수 있는 방향으로 방법을 찾았군요. 특히 다학제팀에서 그러한 논의를 여러 차례 했다는 게 인상적입니다. 확실과 불확실의 이분법을 넘어, 환자가 처한 상황을어떻게 개선할 수 있을지를 고민했다는 점에서요.
제 생각에 그 방역 지침에서 빛을 발한 것은 동백 성루카병원이라는 ‘군집herd‘의 변화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 군집은 바이러스라는 외부의 적에 대한 자기방어 전략을 세운 게 아니라, 애초에 바이러스와 함께 지낼 수밖에 없는 인간 삶의 조건을 질문했습니다. 서로의 몸이 연결되어 있음을 느끼고, 서로의 어려움과 고통에 응답하려고 했습니다. 코로나19에 취약하다는 이유로 그저 환자를 격리하는 게 아니라, 엄중한 상황을 직시하되 환자가 겪을 수 있는 불안함, 외로움, 차별에 대응하는 방식으로 군집, 즉 ‘공동체‘를 변화시켰습니다. - P56

앞서 말기 환자들의 시간이 ‘선형적이지 않고 장소와 인간관계에 의해서 비선형적으로 구성된다‘고 이야기했는데요. 그것과 이 연구는 맥이 닿아 있습니다. 즉 말기 환자와 그를 돌보는 가족들의 시간은 우리가 일상적으로 느끼는 선형적 경험보다는, 타인에 의해 구성되어 만들어지는 기억의 총화에 가깝습니다.
이 이론을 호스피스에 적용해보면 어떨까요? 환자·보호자들은어떻게 해야 호스피스에서 잘 지냈었다고 기억할까요? 얼마나 더 오래 살았는지 하는 것만이 가장 중요한 게 아닙니다. 호스피스 입원 이후 환자의 심한 고통을 경감시키고, 또 마지막에 좋은 기억이 남도록 환경을 조성하면, 결과적으로 환자와 보호자들이 의미 있는 경험을 하게 될 가능성이 있다는 뜻입니다. 이는 환자의 재원 일수, 더 나아가 이전 투병 기간에 겪은 고통들에 대한 해석마저 달라지게 할 수 있습니다. 호스피스에서 사별가족들과의 마무리를 중요하게 여기는 것도 이런 맥락에서 볼 수 있습니다. - P61

계속되는 삶의 이야기

김호성 : 말기 돌봄에서는 환자가 삶의 서사를 구성하도록 돕는 것이 중요합니다. 다학제팀 팀원들이 늘 노력하는 부분이기도 한데, 현실에서 좋은 결과를 내는 일이 쉽지만은 않죠. 하지만 환자의 서사가 갖는 중요성과 가치를 알고 지지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의미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의료 영역은 크게 네 가지로 나눌 수 있습니다. 건강 증진·예방영역, 질병 치료 영역, 재활 영역, 그리고 완화의료 영역입니다. 사람들이 가장 관심을 많이 가지고 돈을 쓰는 곳은 건강 증진 · 예방 영역일 겁니다. 고가의 건강검진은 물론, 다양한 약물이나 기능식품까지 시장이 넘쳐납니다. 또 사람들은 치료 영역에도 관심이 많은데요. 치료 목적을 가진 한국의 이른바 빅5 대형 상급병원의 요양급여비 규모가 4조 원 가까이 됩니다. 다음으로, 재활 영역은 최근 10년 전부터 각광받기 시작했습니다. 노인 인구가 많아지면서 근골격계 질환도 늘어나고, 퇴행성 질환이 부각되었죠. 여기저기 재활병원을 쉽게 볼 수 있고요. 그런데 아직까지 완화 영역에 대해서는 관심이 많이 없는 듯합니다.
말기 환자를 어떻게 돌봐야 할 것인가? 이런 질문에 일반 사람들은 요양원, 요양병원, 호스피스, 급성기 병원 등을 모호하게 떠올립니다. 어떤 시설이 무슨 역할을 하는지 불분명하게 다가오죠. 생의 끝자락에서 누구나 타인의 돌봄을 받게 됩니다. 삶의 마지막 공간이 반드시 의료기관일 필요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현대인들이 마지막을 의료기관에서 보내는 현실을 고려해볼 때, 말기 돌봄 공간에 대한 논의가 시급합니다. 물리적 시간만이 아니라 삶의 서사가 가진 중요성을 이해하는 공간이 필요합니다. ‘삶의 서사는 어떻게 형성되는가‘, ‘삶의 서사를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에 대한 논의가 이루어지는 그런 공간 말입니다.

송병기 : 저는 파리에서 퇴행성 신경질환을 겪고 있는 노인들이 모여 있는 요양원에서 현장연구를 했습니다. 두 개의 다른 세계가 빈번하게 충돌하더군요. 예컨대 입소자 그 누구도 벽걸이 시계를 보지 않는데 곳곳에 시계가 걸려 있었습니다. 의료진과 요양보호사에게 그 공간은 업무 시간표를 기준으로 작동하는 곳이었지만, 어르신에게 시간은 그렇게 선형적으로 흐르지 않았습니다. 입소자에게 아침은 시계가 지시하는 시간이라기보다는 오히려 어둡고 조용하고 느린 감각 같은 것이었습니다.
예컨대 어르신은 파자마를 입고 천천히 거실에 나오거나 침대에 그냥 머물 수도 있습니다. 거실에는 블라인드를 치고 조명을 따로 켜지 않습니다. 정 날씨가 흐리면 반만 켰습니다. 점심이나 저녁과 달리 음악이나 라디오 소리도 없습니다. 입소자는 아무 말 없이 지정석에 앉아 커피나 차를 마시고, 비스킷이나 토스트를 먹습니다. 아침 식사를 하면서 옆 사람의 식기를 챙겨주며 한마디를 건네기도 하고, 아무 말 없이 깨끗한 식탁보를 쓰다듬기도 합니다.
이들에게 하루의 시작은 어떤 옷을 입는 것, 어떤 속도로 움직이는 것, 어떤 장소에 가는 것, 어떤 소리를 듣는 것, 어떤 이와 만나는 것, 즉 총체적 감각에 달려 있었습니다. 이들이 기억을 잘 못한다고, 같은 행동을 반복한다고, 배회한다고, 말이 안 되는 소리를 한다고, 그 삶의 가치가 없어지는 걸까요? 이들을 제정신이냐 아니냐로 판단하는 게 맞을까요? 오히려 이들은 다른 감각으로 자기 삶을 살아간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요? 삶이라는 게 관계성에 의해서 지지되고, 편집되고, 새롭게 읽힐 수 있잖아요. 어떤 곳에서, 어떤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보내는가에 따라 질병이 삶의 위기로 이어지지 않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 P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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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후 저희 대화에서 드러나겠지만 자원봉사자는 호스피스 돌봄에서 중요한 역할을 합니다. 예컨대 목욕 봉사를 통해 환자를 만나기도 하고, 원예에 관심에 있는 환자와 함께 화분을 가꾸기도 하고, 사별가족 모임을 지원하기도 하죠. 또 이렇게 카페에서 환자, 보호자, 직원, 방문객도 환대합니다.
카페에 앉아서 정원을 바라보면 평온함이 느껴집니다. 카페 이름도 좋은데요, 그라시아 gratia. 은총, 감사, 친절 등을 뜻하는 라틴어죠. 종교적인 의미를 떠나서, 저만 해도 맛있는 커피를 마시면 저 자신과 주변에 너그러워지고 세상이 잠깐이라도 아름다워 보이는 경험을 합니다. 불어로 카페 cafe는 사람들이 모이는 공간이자 커피라는 음료를 뜻하는 말입니다. 카페가 나와 다른 사람들을 이어주는 공론장의 역할을 한다면, 지구 반대편에서 온 커피는 내 몸을 관통하며 나와 세계를 연결하는 음식입니다. 즉 공간을 통해서 ‘세계를 지각‘한다면, 음식을 통해서는 ‘세계의 일부‘가 된다고 볼 수 있겠죠. 나중에 음식에 대한 이야기도 자세히 나누면 좋겠습니다.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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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실존적·영적 고통은 ‘삶의 의미 찾기‘로 표현되죠. 정말이지 답이 없는 질문입니다. 이 삶의 의미 찾기‘는 스스로 마주해야 하는 영역이기도 합니다. 환자는 환자대로, 보호자는 보호자대로, 의사는 의사대로, 사회복지사는 사회복지사대로 삶의 의미가 있을 겁니다. 그런 점에서 기도실은 중요한 곳입니다. 혼자 묵상할 수있는 곳이죠. 제가 살펴봤던 여러 호스피스에서 기도실은 사람들이 많이 찾는 곳이었습니다. 신앙과 상관없이 기도실에서 삶의 여정을 찬찬히 정리하는 환자도 있었고, 사랑하는 이의 고통에 가슴 아파하며 우는 보호자도 있었습니다. 또 평소 친하게 지냈던 환자의 죽음을 슬퍼하는 간호사도 있었습니다. 기도실은 오롯이 나 자신과 마주하며, 내 삶의 서사를 음미하고 촘촘하게 연결하는 곳이었습니다. - P41

의료가 진단과 친료라는 말로 통용되는 현실에서, 돈도 안 되는 돌봄은 개인이 알아서 해결해야 하는 일로 치부된다. - P13

무엇이 생의 끝자락을 괴롭게 하는가

오늘날 우리가 경험하고 있는 생의 끝자락은 3가지 특징이 있다. 첫째, 돌봄의 경로가 삶을 ‘임시적인 상태‘로 만든다는 점이다. 환자가 안심하고 지낼 수 있는 곳이 없다. 집, 요양원, 요양병원, 급성기 병원 모두 불안한 장소이다. 환자는 의료라는 ‘컨베이어 벨트‘를 타고 자꾸 어딘가로 이동해야 하는 대상으로 변모한다. 의학적 판단에 따라서 환자 삶의 형식이 규정되는 셈이다. 그 과정에서 환자의 일상, 관계, 역사, 즉 목소리는 주변으로 밀려난다.
둘째, 생애 말기 돌봄을 함께 이야기할 ‘상대‘가 없다는 점이다.
생애 말기는 갑자기 인생의 진리를 깨닫는 시간이 아니다. 여전히 일상의 연속이다. 다만 돌봄의 중요성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시기이다. 예컨대 생애 말기를 어디서 보낼지, 누구에게 돌봄을 받을지, 어떤 의료 처치를 지속하거나 중단할지, 생계를 어떻게 유지할지, 임종은 어디서 할지 등등 여러 사안에 대해 생각하고 준비할 필요가 있다. 생애 말기 돌봄은 내밀하고 복잡하고 전문적인 일이다. 개인이 혼자 하기는 힘들다. 누군가와 함께 대화하고 계획을 세워야 한다. 문제는 그 ‘누군가(제도)‘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환자와 가족이 생애 말기 돌봄을 요양병원 의사나 대학병원 의사와 논의하기는 어렵다. 만약 생애 말기 돌봄을 시장에 내맡긴다면, 정치의 존재 이유를 묻지 않을 수 없다.
셋째,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력‘이 턱없이 부족하다는 점이다. 대개 생의 끝자락에 대한 상상은 어떤 병원을 가서, 어떤 의사를 만나고, 어떤 약을 먹고, 어떤 수술을 받아야 하는지에 대한 것에서 크게 벗어나지 못한다. 이러한 상상은 치료를 받고 회복을 기대할 수 있는 시기에는 유용하다. 하지만 치료를 받아도 회복을 기대하기 어려운 생애 말기에는 어울리는 상상이 아니다. 생애 말기는 ‘지난한 돌봄‘과 함께한다. 가령 환자가 음식을 삼키지 못할 때, 의학적 진단과 처치를 넘어서 어떻게 그 ‘취약함에 응답할 수 있을지 다양한 사람들이 다각도로 고민해야 하는 시간이다. 환자와 의료진의 관계, 돌봄과 의료의 관계가 근본적으로 달라져야 하는 생의 끝자락에 대한 풍부한 상상력이 절실하다.
"더러운 꼴 안 보고 깔끔하게 죽고 싶다"는 바람은 이런 맥락에서 생각해야 한다. 이 바람에는 생의 끝자락을 살아가는 사람을 ‘사람으로 대우‘하기 어려운 현실이 담겨 있다. 생애 말기에도 진단과 치료 외에 다른 가치로 디자인된 의료를 떠올리기 힘든 상태. 기대수명은 늘어나고 있지만, 정작 나이 드는 삶을 기대할 수 없는 역설. 죽는 것보다 늙는 것이 더 두려운 마음이 들어 있다. 현재 이 난국을 어떻게 타개할 수 있을지에 대한 대답으로 ‘안락사‘가 인기를 끌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한국과 안락사를 허용한 서구 국가들 사이에는 큰 차이점이 있다. 한국 내 안락사 논의의 시발점은 ‘환자의 자기결정권‘이라기보다는 ‘불평등한 삶의 조건‘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돌봄을 개인적 일로 고립시킨 결과 ‘간병 살인‘ 같은 문제가 발생하고 있는 한편, 개인들은 안락사를 통해 그런 문제에 대응하려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다. 이 엄혹한 현실에 대한 폭넓은 논의도 구체적인 방안도 부재하다. 그렇기에 한국에서 안락사라는 말은 ‘모종의 혐의‘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돌봄을 제대로 받지 못해서 선택한다는 혐의. 돈이 없어서 선택한다는 혐의. 가족에게 폐를 끼치기 싫어서 선택한다는 혐의. 안락사라는 말에는 온갖 혐의가 그림자처럼 따라다닌다. - P14

저는 창문의 개방성과 연결성에 주목합니다. 창문은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죠. 닫힌 곳을 열린 곳으로 변모하게 하는 사물입니다. 창문을 통해 안에서 밖을 볼 수도 있지만, 밖에서 안을 볼 수도 있습니다. 건물의 창이 때로는 ‘마음의 창‘이 되기도 합니다. 그창에 따라서 관점과 관계가 달라질 수 있죠. 여기 병실의 창문은 앞서 저희가 살펴본 신발장, 로비, 기도실과 같은 흐름 속에 있음을 알수 있습니다. 즉, 호스피스 공간은 집과 일상으로 대표되는 환자의 관계망과 연결되고자 한다는 겁니다.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공간으로서 말이죠. 환자는 병실에 있지만 관계가 단절된 존재가 아닙니다. 창문에 커튼을 칠 수도 있고 열 수도 있습니다. 혼자만의 시간을 가질 수도 있고, 타인과 함께하는 시간도 가질 수 있습니다.
제가 살펴봤던 프랑스의 한 호스피스 병실에도 큰 창이 있었습니다. 창 밖으로는 주차장과 도로가 보였죠. 한 환자가 틈만 나면 주차장에 있는 자전거를 보더군요. 자전거 애호가였습니다. ‘투르 드 프랑스‘(매년 7월 프랑스에서 열리는 도로 사이클 경기)에도 여러 차례 참여한 분이었죠. 환자의 마음을 헤아린 간호사들은 다학제팀 회의에서 그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습니다. 얼마 뒤에 호스피스 직원들은 각자 집에서 자전거를 가지고 와서 주차장에 세워두었습니다. 그리고 작게나마 자전거 경주를 열었죠. 그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 환자는 자신의 의견을 말하며 기뻐했습니다. 그때 저는 호스피스에서의 돌봄이란 게 ’벽에 창을 내는 일‘ 같다고 느꼈습니다. - P46

송병기 : ……그러한 이벤트, 혹은 공간의 실천은 그 의의가 큽니다.‘ ‘환자가 어떻게 살아왔는가‘, ‘환자의 나머지 삶을 어떻게 일관되고 통합적으로 디자인할 것인가‘ 등을 고려했다는 점에서 그렇습니다. 환자와 보호자 입장에서는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하루일 것 같습니다.
호스피스에서 환자가 죽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호스피스에서 사람들은 생의 끝자락에서도 놓칠 수 없는 일상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천합니다. 제게는 결혼식이 굉장히 흥미롭게 다가오는데, 알다시피 결혼식은 새로운 삶의 시작을 알리는 의례잖아요. 이 역시 앞서 언급한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공간‘과 일맥상통합니다. 한편, 저는 ‘삶의 의미‘가 이렇게 복잡다단한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환자가 신체적으로 편안함을 느낄지라도, 결혼을 하지 않은 자식이 걱정되어 잠 못 이루는 경우를 어렵지 않게 볼 수 있습니다. 결혼의 의미는 차치하고, 환자가 자식을 생각하는 마음에 주목하게 됩니다. 저마다 추구하는 삶의 의미가 있으니까요.
프로그램실에서 이러한 의례를 준비하는 데 많은 역할을 하는분이 사회복지사로 알고 있습니다. 대개 사회복지사를 복지관이나 주민센터에서 보게 되죠. 그런데 호스피스에서 사회복지사의 역할을 다시 생각하게 됩니다. 사회복지사는 의료인, 종교인, 전문치료사, 자원봉사자, 보조인력 간의 협업이 잘 이루어질 수 있도록 하는, 이른바 코디네이터 역할을 합니다. 치료를 중심으로 디자인된 일반병원에서는 의사의 지시를 중심으로 다른 직군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이죠. 의사의 리더십에 기반한 수직적 형태의 조직을 유지합니다. 반면, 돌봄을 중심으로 디자인된 호스피스에서는 다양한 직군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네트워크 형태의 조직을 운영하는데, 거기서 사회복지사의 코디네이터십이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김호성 : 한국의 거의 모든 병원에 사회복지사들이 있기는 합니다. 그분들은 보통 환자의 치료적 접근에 필요한 사회적 자원을 적절히 연계하는 역할을 하죠. 제도적인 부분에서 일어나는 고통을 다루는 겁니다. 그런데 호스피스에서는 그것에 더해 특히 환자의 사회적·관계적 부분을 돌보는 데에 초점을 맞춥니다. 앞서 말씀드린 결혼식이 하나의 예입니다. 딸의 결혼식이 두 달 후인데, 어머니인 환자는 그때까지 살 용기와 자신이 없었죠. 그때 사회복지사가 제안하여 프로그램실에서 미니 결혼식을 열었습니다. 환자는 침상에서 이를 지켜봤고요. - P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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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화·성상 옆을 보면 임종한 환자들의 이름이 적힌 작은 나무 명패들이 벽면에 죽 부착되어 있습니다. 저는 종교가 없습니다만, 말기 돌봄 영역에서 그런 기록행위와 의례의 공간이 있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즉, 종교적 의미를 넘어서, 한 사람이 죽으면 끝이 아니고 누군가가 기억을 한다는 것이죠. 입구이자출구에 이런 애도와 추모의 공간이 있는 셈인데, 이는 마치 삶과 죽음이 부드럽게 연결된 느낌을 갖도록 합니다. - P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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