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해가 지나고 나는 우연히 ‘고통 전시회Pain Exhibit‘라는 웹사이트를 알게 됐다. 섬유근육통, 만성피로증후군, 편두통, 관절염 등 질병이나 사고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려온 사람들이 자신으 고통을 표현한 미술작품을 온라인상에 전시하는 곳이다. …… "통증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나 자신이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느껴진다." "통증은 소통되지 않고, 미칠 정도로 주관적이며, 언어와 계량에 저항하는 자기 혼자만의 현실이다. 통증 속에 사는 것은 고립 속에 사는 것이다." "나는 자화상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건 내가 겪는 고통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내게 미술작업은 항상적인 통증이 있는 삶을 살아내도록 나 자신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림은 마치 얼굴 없는 적에게 얼굴을 주면서 내 통증의 기록이 되는 것과도 같다." - P61
타인들의 현실과 분리되어 나만의 현실 속에 있다는 느낌은 사실 드문 경험이 아니지 않은가. 인생의 힘든 순간에 누구나 경험한다. 나는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바깥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말이다. 내 속은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없고, 내 안에서는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외부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외롭고 부조리하다는 감정이 들며, 멀쩡해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은 때로 분노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률이 봄에 높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되곤 한다. ‘일조량이 늘어나며 충동적 행동을 유발하게 해서‘ ‘겨울에 심하던 우울증이 봄이 되어 누그러지며 죽을 기운이 생겨서‘.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봄볕의 부드러움, 바람이 품은 온기, 연두빛 싹들의 생기로 가득한 세상과 자신의 내면이 극명하게 달라서라고. 고통받는다는 것을 이처럼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간극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간극 자체가 고통을 가져온다. - P78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 P83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증이 역사가 된다는 건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역사 쓰기는 편집, 조작, 오류를 동반한다. 완전하게 전달하고 완벽하게 공감받고 싶어. 갈증과 갈망은 아픈 사람을 사로잡지만 완전과 완벽을 향한 시도는 손으로 구름을 뚫고 천국의 조각을 떼오려는 일과 같아서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이에게만 언어는 온다. - P112
곧 배웠다. 미래를 생각하는 건 금기였다. 사막의 너비를 가늠하지 마라. 과거를 생각하는 것도 금기였다.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뒤에 두고 너는 앞만 보고…… 내다보거나 뒤돌아보는 일 모두 자해였으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씩만 살자, 하루씩만. 나의 만트라가 된 말.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자고 일어나고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그 모두를 알려주는 고통은 표지였고 조련사였고 온갖 세세한 것을 전부 통제하는 미친 관리자였다. 한편으로 고통이 정한 루틴은 내게 종교이기도 했다. 루틴만 믿고 따르면 언제나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먹고 자는 일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도 루틴만 지켜지면 괜찮은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나 자신도 속일 수 있다. 신마저도 내가 괜찮은 줄 알 것이다….. - P146
희생자-여성작가로서의 초상이 사라지지 않는 건 많은 경우 그저 관성이나 지적 게으름 때문일 수 있다. 예술가들의 고통과 고난이 언제나 흥미로우며 관심을 끌어모으는 화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엔 다른 차원의, 젠더화된 끌림이 있다. "우리가 여성 희생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 우리가 정말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리스 레싱은 영화 <디 아워스>를 두고 정확하게 개탄한다(나는 레싱이 사용한 ‘우리‘라는 주어의 정직함이 좋다. 여성 희생자를 사랑하는 게 남성들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고통받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못한다.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나아가 그런 초상은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와 예술이 몰두하고 개발하고 정교화해온 도상 • 서사의 역사와 닿아 있다. 19세기 화가들이 집착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그래서 물에 빠지고 또 빠졌으나 결코물에 불은 모습인 적은 없었던) 오필리아, 미치고 병들고 자살하고 비참하게 죽은 그 수많은 문학작품과 오페라와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이 계보를 이루는 역사, 여성의 질병과 수난과 죽음이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드라마를 추동하고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감정적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예술의 역사. 우리의 사랑은 이 오래되고 화려한 역사의 자장 안에 있다. 헤밍웨이의 엽총이나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가죽 벨트는 남성지에 패션 아이템으로 소개되지 않을 것이다. 은은한 달빛이 포치 위에 곱게 내려앉은 밤에 월리스가 목을 매는장면으로 시작해서 목을 매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 그 장면의 미적인 요소가 아련하고 가슴을 휘젓는 슬픔을 증폭하도록 구성되고 배치되는 영화는 상상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의 함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제정신이 아니고(죽었기에) 의식이 없고 행위할 수 없고 모든 통제력을 잃고 운명에 찢긴 여성을 향한 매혹은 여성 혐오의 극단이다. 여성의 수동성과 고통과 죽음에서 미학을 발명한 가부장제 사회의 도착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여성 희생자의 초상을 놓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자기파괴적인 일인지 모른다. - P176
인생 후반에 그의 하루는 대개 이랬다. 오전에 세 시간의 글쓰기, 오후엔 원고 타이핑, 편지와 일기 쓰기, 손님 만나기, 모임과 외출, 독서, 그리고 무엇보다 산책. 아침에 몇백 단어를 종이 위에 쏟아낸 버지니아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몇 시간씩 활보하며 머릿속으로 문장들을 곱씹고 지어냈다. 단단하게 조직된 일상은 오르내리는 기분과 신체를 붙잡아두는 안정의 앵커였고, 그가 병자이면서 그 밖의 많고도 많은 것일 수 있었던 풍요의 근간이었고, 그 자체로 만족의 원천이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평온한지. L과 함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 규칙적이고 정돈된 생활, 정원, 밤의 내 방, 음악, 산책, 수월하고 즐거운 글쓰기." 이렇듯 병을 포함해 자신이 마주한 상황들과 씨름하면서도 자신에게 딱 맞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관계를 끈질기게 마련해가고 누린 사람에게 허약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병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말 역시 환자의 무력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울프가 평범하게 -다른 이들처럼 바쁘게 자기 일을 하며,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과 보통인 기분을 오가며- 보낸 대부분의 날을 지운다. - P189
취약함을 비하하지 않을 것이다. 단어들을 재정의할 것이다. 가령 강인함은 무너진 적 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돌아오는 것이 될것이고, 행복은 괴로움의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곤경을 수용하고 통과하는 기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며, 충만함은 즐거움만 가득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도 기쁨도 전부 온전히 살아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또한 취약함을 결함으로 고정해두지 않는 그런 언어는 현상의 양가적인 이면을 함께 이해할 것이다. ‘진짜 멋지고 높은 파도와 지옥같이 깊은 심연‘을 오가는 흔들림은 고통스러운 부침일 뿐 아니라 경험의 넓은 진폭일 수 있다. 남들보다 커다란 삶의 용량capacity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기반일 수 있다. - P191
"1913년 이후로 이렇게 내 감정의 절벽에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버지니아가 고백했으며 "무서운 시기"였다고 레너드가 회고했을 만큼 힘겨운 일 년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위기를 울프는 완전히 무너지는 일 없이 통과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자기 몸과 정신의 작동에 관한 지식, 참조할 수 있는 과거 경험들, 개발하고 축적해온 대응책 등 병자로서의 숙련은 그가 버티는 데 핵심적이었을 것이다(돌보는 사람으로서 레너드의숙련 역시 당연히 중요했을 것이다). 이듬해 출간 직전, 울프는 한번 더 일기에 두려움을 고백한다. "노출된 순간들은 무섭다"고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뜨거운 벽돌 위에서 춤추는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걸 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겠지. 지금까지 앓아온 역사에 근거해 미래의 자기 상태를 예상해보는 외삽 추정은 만성적인 병이 있는 환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이 문장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 반복, 어느 정도의 체념, 어느 정도의 각오는 존경스럽고, 또한 가슴 아프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고 강인하고 담대하게. 용기와 끈기만 있으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P199
무엇이 날 떠내려가지 못하게 했더라. 무엇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더라. 십몇 년이 지나도록 내 발은 가끔씩 지면에 닿지 않는다. 내가 왜 아직도 지구에 붙어 있었더라. 바다 위에 백만 개의 다이아몬드로 부서지는 빛, 신나서 못견디겠다는 듯 부풀어오른 적란운, 반짝반짝하는 손동작처럼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나뭇잎들, 내가 만지면 몸을 떨며 오줌을 싸는 바보 같은 강아지, "너 짐 아니야. 짐인 적 없었어", 구름처럼 뭉치고 퍼지고 나와 함께 흘렀던 음악들, 그의 머리칼 사이에 코를 묻었던 기억,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 "죽음은 어찌되었든 올 테니까, 중요한 건 죽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고 그건 기적일 거야"(이사벨 아옌데), 마침내 돌아갈 거라는 믿음 혹은 망상, 누군가와의 약속, 누군가의 편지, 말, 문장들, 내 안의 속삭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죽지 않은 적도 있고,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살기도 했다. 할 일. 그래, 일도 중요했지. 나는 농담하곤 했다. "그 고통에 관한 책만 번역하고 죽자고 생각했는데, 너무 두꺼운 책을 골랐지 뭐야!" 기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생존의 시간을 뒤늦게 재평가한다. 어쩌면 나는 그 오랜 시간을 그저 가짜 미끼를 쫓아 질주하는 경주견처럼 산 게 아닐까. ‘그곳‘은 늘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리고 고통스러운 여정의 끝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사실은 이게 전부야. 달리던 중에 게임의 규칙을 깨닫고 멈춰 낑낑댄 개가 한 마리라도 있었을까. 무엇이 날 일으켜주는지 아니? 만물이야 Anything. 일몰 후에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그래도 매일 강가를 걷고 또 걷는다. 물을 가르는 보트의 모터 소리를 듣는다. 수상스키에 올라탄 이의 즐거운 몸을 본다.
무엇이 날 잡아주는지 아니?
풀 냄새가 내 몸을 물들이지 못한다. 다시 산책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윤슬에도, 적란운에도, 플라타너스에도 나는 자꾸 무감하다.
만물이야.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 - P2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