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 앓기, 읽기, 쓰기, 살기
메이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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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가 지나고 나는 우연히 ‘고통 전시회Pain Exhibit‘라는 웹사이트를 알게 됐다. 섬유근육통, 만성피로증후군, 편두통, 관절염 등 질병이나 사고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려온 사람들이 자신으 고통을 표현한 미술작품을 온라인상에 전시하는 곳이다.
……
"통증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나 자신이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느껴진다."
"통증은 소통되지 않고, 미칠 정도로 주관적이며, 언어와 계량에 저항하는 자기 혼자만의 현실이다. 통증 속에 사는 것은 고립 속에 사는 것이다."
"나는 자화상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건 내가 겪는 고통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내게 미술작업은 항상적인 통증이 있는 삶을 살아내도록 나 자신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림은 마치 얼굴 없는 적에게 얼굴을 주면서 내 통증의 기록이 되는 것과도 같다." - P61

타인들의 현실과 분리되어 나만의 현실 속에 있다는 느낌은 사실 드문 경험이 아니지 않은가. 인생의 힘든 순간에 누구나 경험한다. 나는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바깥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말이다. 내 속은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없고, 내 안에서는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외부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외롭고 부조리하다는 감정이 들며, 멀쩡해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은 때로 분노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률이 봄에 높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되곤 한다. ‘일조량이 늘어나며 충동적 행동을 유발하게 해서‘ ‘겨울에 심하던 우울증이 봄이 되어 누그러지며 죽을 기운이 생겨서‘.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봄볕의 부드러움, 바람이 품은 온기, 연두빛 싹들의 생기로 가득한 세상과 자신의 내면이 극명하게 달라서라고. 고통받는다는 것을 이처럼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간극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간극 자체가 고통을 가져온다. - P78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 P83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증이 역사가 된다는 건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역사 쓰기는 편집, 조작, 오류를 동반한다. 완전하게 전달하고 완벽하게 공감받고 싶어. 갈증과 갈망은 아픈 사람을 사로잡지만 완전과 완벽을 향한 시도는 손으로 구름을 뚫고 천국의 조각을 떼오려는 일과 같아서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이에게만 언어는 온다. - P112

곧 배웠다. 미래를 생각하는 건 금기였다. 사막의 너비를 가늠하지 마라. 과거를 생각하는 것도 금기였다.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뒤에 두고 너는 앞만 보고…… 내다보거나 뒤돌아보는 일 모두 자해였으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씩만 살자, 하루씩만. 나의 만트라가 된 말.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자고 일어나고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그 모두를 알려주는 고통은 표지였고 조련사였고 온갖 세세한 것을 전부 통제하는 미친 관리자였다. 한편으로 고통이 정한 루틴은 내게 종교이기도 했다. 루틴만 믿고 따르면 언제나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먹고 자는 일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도 루틴만 지켜지면 괜찮은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나 자신도 속일 수 있다. 신마저도 내가 괜찮은 줄 알 것이다….. - P146

희생자-여성작가로서의 초상이 사라지지 않는 건 많은 경우 그저 관성이나 지적 게으름 때문일 수 있다. 예술가들의 고통과 고난이 언제나 흥미로우며 관심을 끌어모으는 화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엔 다른 차원의, 젠더화된 끌림이 있다. "우리가 여성 희생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 우리가 정말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리스 레싱은 영화 <디 아워스>를 두고 정확하게 개탄한다(나는 레싱이 사용한 ‘우리‘라는 주어의 정직함이 좋다. 여성 희생자를 사랑하는 게 남성들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고통받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못한다.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나아가 그런 초상은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와 예술이 몰두하고 개발하고 정교화해온 도상 • 서사의 역사와 닿아 있다. 19세기 화가들이 집착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그래서 물에 빠지고 또 빠졌으나 결코물에 불은 모습인 적은 없었던) 오필리아, 미치고 병들고 자살하고 비참하게 죽은 그 수많은 문학작품과 오페라와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이 계보를 이루는 역사, 여성의 질병과 수난과 죽음이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드라마를 추동하고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감정적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예술의 역사. 우리의 사랑은 이 오래되고 화려한 역사의 자장 안에 있다.
헤밍웨이의 엽총이나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가죽 벨트는 남성지에 패션 아이템으로 소개되지 않을 것이다. 은은한 달빛이 포치 위에 곱게 내려앉은 밤에 월리스가 목을 매는장면으로 시작해서 목을 매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 그 장면의 미적인 요소가 아련하고 가슴을 휘젓는 슬픔을 증폭하도록 구성되고 배치되는 영화는 상상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의 함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제정신이 아니고(죽었기에) 의식이 없고 행위할 수 없고 모든 통제력을 잃고 운명에 찢긴 여성을 향한 매혹은 여성 혐오의 극단이다. 여성의 수동성과 고통과 죽음에서 미학을 발명한 가부장제 사회의 도착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여성 희생자의 초상을 놓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자기파괴적인 일인지 모른다. - P176

인생 후반에 그의 하루는 대개 이랬다. 오전에 세 시간의 글쓰기, 오후엔 원고 타이핑, 편지와 일기 쓰기, 손님 만나기, 모임과 외출, 독서, 그리고 무엇보다 산책. 아침에 몇백 단어를 종이 위에 쏟아낸 버지니아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몇 시간씩 활보하며 머릿속으로 문장들을 곱씹고 지어냈다. 단단하게 조직된 일상은 오르내리는 기분과 신체를 붙잡아두는 안정의 앵커였고, 그가 병자이면서 그 밖의 많고도 많은 것일 수 있었던 풍요의 근간이었고, 그 자체로 만족의 원천이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평온한지. L과 함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 규칙적이고 정돈된 생활, 정원, 밤의 내 방, 음악, 산책, 수월하고 즐거운 글쓰기." 이렇듯 병을 포함해 자신이 마주한 상황들과 씨름하면서도 자신에게 딱 맞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관계를 끈질기게 마련해가고 누린 사람에게 허약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병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말 역시 환자의 무력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울프가 평범하게 -다른 이들처럼 바쁘게 자기 일을 하며,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과 보통인 기분을 오가며- 보낸 대부분의 날을 지운다. - P189

취약함을 비하하지 않을 것이다. 단어들을 재정의할 것이다. 가령 강인함은 무너진 적 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돌아오는 것이 될것이고, 행복은 괴로움의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곤경을 수용하고 통과하는 기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며, 충만함은 즐거움만 가득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도 기쁨도 전부 온전히 살아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또한 취약함을 결함으로 고정해두지 않는 그런 언어는 현상의 양가적인 이면을 함께 이해할 것이다. ‘진짜 멋지고 높은 파도와 지옥같이 깊은 심연‘을 오가는 흔들림은 고통스러운 부침일 뿐 아니라 경험의 넓은 진폭일 수 있다. 남들보다 커다란 삶의 용량capacity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기반일 수 있다. - P191

"1913년 이후로 이렇게 내 감정의 절벽에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버지니아가 고백했으며 "무서운 시기"였다고 레너드가 회고했을 만큼 힘겨운 일 년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위기를 울프는 완전히 무너지는 일 없이 통과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자기 몸과 정신의 작동에 관한 지식, 참조할 수 있는 과거 경험들, 개발하고 축적해온 대응책 등 병자로서의 숙련은 그가 버티는 데 핵심적이었을 것이다(돌보는 사람으로서 레너드의숙련 역시 당연히 중요했을 것이다). 이듬해 출간 직전, 울프는 한번 더 일기에 두려움을 고백한다. "노출된 순간들은 무섭다"고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뜨거운 벽돌 위에서 춤추는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걸 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겠지. 지금까지 앓아온 역사에 근거해 미래의 자기 상태를 예상해보는 외삽 추정은 만성적인 병이 있는 환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이 문장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 반복, 어느 정도의 체념, 어느 정도의 각오는 존경스럽고, 또한 가슴 아프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고 강인하고 담대하게.
용기와 끈기만 있으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P199

무엇이 날 떠내려가지 못하게 했더라. 무엇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더라. 십몇 년이 지나도록 내 발은 가끔씩 지면에 닿지 않는다. 내가 왜 아직도 지구에 붙어 있었더라.
바다 위에 백만 개의 다이아몬드로 부서지는 빛, 신나서 못견디겠다는 듯 부풀어오른 적란운, 반짝반짝하는 손동작처럼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나뭇잎들, 내가 만지면 몸을 떨며 오줌을 싸는 바보 같은 강아지, "너 짐 아니야. 짐인 적 없었어", 구름처럼 뭉치고 퍼지고 나와 함께 흘렀던 음악들, 그의 머리칼 사이에 코를 묻었던 기억,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 "죽음은 어찌되었든 올 테니까, 중요한 건 죽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고 그건 기적일 거야"(이사벨 아옌데), 마침내 돌아갈 거라는 믿음 혹은 망상, 누군가와의 약속, 누군가의 편지, 말, 문장들, 내 안의 속삭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죽지 않은 적도 있고,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살기도 했다. 할 일. 그래, 일도 중요했지. 나는 농담하곤 했다. "그 고통에 관한 책만 번역하고 죽자고 생각했는데, 너무 두꺼운 책을 골랐지 뭐야!"
기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생존의 시간을 뒤늦게 재평가한다. 어쩌면 나는 그 오랜 시간을 그저 가짜 미끼를 쫓아 질주하는 경주견처럼 산 게 아닐까. ‘그곳‘은 늘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리고 고통스러운 여정의 끝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사실은 이게 전부야. 달리던 중에 게임의 규칙을 깨닫고 멈춰 낑낑댄 개가 한 마리라도 있었을까.
무엇이 날 일으켜주는지 아니?
만물이야 Anything.
일몰 후에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그래도 매일 강가를 걷고 또 걷는다. 물을 가르는 보트의 모터 소리를 듣는다. 수상스키에 올라탄 이의 즐거운 몸을 본다.

무엇이 날 잡아주는지 아니?

풀 냄새가 내 몸을 물들이지 못한다. 다시 산책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윤슬에도, 적란운에도, 플라타너스에도 나는 자꾸 무감하다.

만물이야.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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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배우고 익히고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법. 숨만 쉬고 있어도 박수 칠 일이다. 기다리는 법.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때가 있다. 제한 속의 자유로움. 내 몸이 정해준 한계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은 같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앎. 나는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안다. 내 몸부림을 안다. 다짐과 맹세를 안다. 내 밤의 꿈과 악몽과 기도를 안다. 무엇이 나를 지탱하는지 안다. 내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렇게나 커다란 공포와 아름다움, 그게 모두 내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내 마음이 그걸 버틸 수 있다는 걸 안다. 혹은 산산조각난 마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안다. 지침이 된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과 조바심, 과거에 대한 향수나 후회로 질식되지 않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 나의 최선이 닿은 곳이 여기임을, 여기, 오직 여기임을 믿는다. 쓰기의 기술 몇 개. 그건 앓기의 기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고독 속에 번창하기, 두 현실을 살기,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기, 자신에게 분명해질 때까지 실험하기, 두려움 속에 계속하기, 불확실성 속에 계속하기, 더이상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하기..…………
그 어떤 아름다움도 경이도 배움도 무의미해지는 밑바닥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겪고 난 지금, 이중 어떤 것은 더이상 내 마음을 밝히지 못한다. 한때 자부심을 가졌던 앎에도 무감해졌다. 병이 계속 악화되었다면 할 수 없을 소리라고 여기게 된 것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내 삶에서 가장 놀랍고 중요한 변화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게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는 끈기와 단단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전부 아팠던 시간에서 왔다. 내 언어와 비밀과 사랑의 수원. 병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남을 것이다.

나는 되고자 했던 게 되지 못한 것인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원했던 삶을 놓친 것인가, 시간을 버리고 낭비한 것인가, 기회와 청춘을 빼앗겼는가, 상실뿐인가 뒤처진 것인가,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이 질문. 선택할 수 있다면 이 병이 없었길 원해?

답을 해보자면, 그렇다, 병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건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한 번 더 겪으라고 한다면 그냥 안 살고 말 것이며(우리가 인생을 한 번만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리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얻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라는 답이 지금의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라면 대답을 못 하겠다. 다른 방식으로는 내게 오지 않았을 변화들 때문이다.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는 태산이 시작된 곳과 대양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삶의 아이러니와 농담에 의해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만든 그 시간이 없었길 내가 어떻게 원할 수 있겠는가. 어릴 때 꿈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내 자신을 조금 더 잘 견디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이 나로,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을 겪은 바로 이 나로 살고 싶다.
‘이 단체에서 오 년만 더 해보고 우리끼리 새로 단체를 만들어 키우자!‘라고 루미-세상을 떠난 내 친구-와 의기투합했던 날을 생각한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꾸었던 꿈을 생각한다. 내가 갔을지도 모르는 섬들, 건넜을지도 모르는 바다들, 배웠을지도 모르는 외국어들을 생각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의 뒷면, 사랑하는 그 풍경을 지겨울 정도로 자주 봤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대신 나는 질병의 왕국을 오래 떠돌았으며 고통의 언어를 익혔다. 그러나 내가 과거의 꿈과 계획을 돌아보는 때는 드물고, 돌아본다고 해도 회한의 감정이 아니다. 내 작은 세계 안에서 내가 출 수 있는 가장 큰 춤을 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이 춤이 남긴 내가 마음에 든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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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왜 동경하는 만큼 사랑하고, 사랑하는 만큼 질투하고 증오할꺼. 그래서 갖고 싶어 하고, 가질 수 없으면 부숴버리고 싶러 하곹 불쌍해하다가 미워하고, 안타까워하다가 꺾어버리고 싶어할까. - P69

몇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그 순간을바라보는 일. 이야기는 거기에서 시작된다. 나에게서 나를 떼어놓으면 자유로워진다. - P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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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웃으면서 살아갑니다
단노 도모후미.오쿠노 슈지 지음, 민경욱 옮김 / arte(아르테)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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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매에 걸려도 혼자 고민하지 말고 신뢰할 수 있는 사람에게 힘드니까 도와달라고 목소리를 내는 게 아주 중요합니다. 가족은 물론, 가족 이외의 사람에게 전하는 게 중요합니다. 가족에게 상담하기 어려워도 가족이 아닌 사람에게는 말할 수 있는 게 많습니다. 그런 파트너를 하나씩 늘림으로써 평범한 생활을 해나갈 수 있지 않을까요. 간병인이 아니라 같이 뭔가를 하는 파트너이자 불가능해진 것을 도와주는 활동 지원자인 셈입니다.
"할 수 없는 것을 돕고 할 수 있는 것은 같이한다."
이것이 치매인으로서 내가 세상에 바라는 것입니다. - P20

처음 가는 장소나 강연회장에 갈 때도 스마트폰 내비게이션을길 안내에 활용하고 있습니다. 회식 때도 가게 이름만 알면 갈 수 있습니다. 혼자 쇼핑을 하러 가면 헤맬까 봐 걱정이지만 내비게이션이 있어서 안심합니다. 이렇듯 스마트폰은 치매인에게 가장 도움이 되는 도구입니다. 다만 내가 이렇게 사용하는 것은 치매가 되기 전부터 사용하고 있었기 때문이고, 치매 진단을 받은 뒤에 사용법을 배우려면 쉽지 않습니다. 치매가 되기 전에 익숙하게 사용할 수 있도록 해둬야 합니다. 그러면 치매에 걸려도 스마트폰을 활용하여 평범한 일상을 계속할 수 있습니다. - P84

카드를 가지고 있을 때와 가지고 있지 않을 때 사람들의 반응은 완전히 다릅니다. 카드를 보여주기만 해도 이해한다는 표정이 돌아옵니다. 그런 경험 덕분에 앞으로는 자신이 치매라는 사실을 숨기지 말고 당당하게 이 카드를 사용하자고 결심했습니다.
낯선 사람들도 도움을 청하면 모두 다정하게 알려줍니다.
이름을 잊어버려 어떻게 하나 하고 생각했을 때 옆에 앉은 여성이 "저도 그 역에서 내리니까 같이 가요"라고 말했습니다. 사람들은 남을 도와주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가 많습니다. 구체적으로 뭘 할 수 없는지 알려줘야 도움을 받을 수 있다는 것도 알았습니다. 또 주위 사람에게 도움을 받으면서 이 병을 숨길 필요가 없다는 것도 실감했습니다. - P92

불안, 공포, 동요, 불쾌감 등으로 마음이 안정돼 있지 않으면 실수로 이어지는 것 같습니다. ‘환경‘이 중요하다는 말을 자주 듣는데 여기서 ‘환경‘은 그런 의미가 아닐까요. - P116

질문할 때에는 단답식으로 대답할 수 있는 질문은 하지 않습니다. 열린 질문이라고 영업 때 자주 사용했던 방법을 시도합니다. 예를 들어 "얼마 전 열린 올림픽 야구 경기를 보셨나요?"라고 물으면 "봤어요"나 "안 봤어요"로 끝나지만 "옛날에는 어떤 스포츠를 하셨나요?"라고 물으면 "야구를 했죠"처럼 이야기가 확대됩니다. 음식도 마찬가지입니다. "겨울은 전골이 좋지요?"
라고 물으면 "네" 하고 끝나지만 "겨울 음식은 뭘 좋아해요?"라고 말하고 "전골이나 군고구마, 정말 많지요"라고 덧붙여 먼저 얘기합니다. 상대가 "전골이 좋아요"라고 말하면 "어떤 전골이 좋아요?"라고 묻고 "두부전골"이라고 답하면 "아! 두부전골을 좋아하는군요" 하고 마지막은 확인하는 의미에서 예나 아니오로 대답할 수 있게 합니다. 영업에서는 되도록 고객의 얘기를 끌어낼 수 있도록 단답형으로 대답할 수 없게 질문하는 것이 상식입니다.
치매인에게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그러면 의외로 이야기가 잘될 겁니다. 치매인 중에 말하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습니다. 그런데 쉽게 대답할 수 있도록 예, 아니오로 대답하게 하면 유도 심문이 돼버립니다. - P239

이제까지 오렌지도어는 안식처가 아니라 ‘입구‘라고 얘기해왔습니다. 입구라는 말을 계속하지 않으면 즐거우니까 모두 이곳을 안식처라고 생각하고 그 자리에 머물고 맙니다. 오렌지도어는 즐거운 곳이라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즐거우니까 오길 바라는 게 아닙니다. 오렌지도어는 첫걸음을 내딛기 위한 입구이고일본워킹그룹은 국가에 우리의 목소리를 전하기 위해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장입니다. 그 점을 명확하게 해두지 않으면 근간이흔들립니다.
그럼 왜 지역 워킹그룹이 필요할까요? 가까운 곳부터 바꿔야한다는 것을 스코틀랜드에서 배웠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나라가바뀝니다. 국가가 바꾸려고 해도 자신이 사는 지역에서 필요로하는 것과는 차이가 있습니다. 지역을 바꾸는 것이 바로 국가를바꾸는 것입니다. - P244

왜 사람은 다른 사람이 모이는 곳에 갈까요? 다른사람과 만나면 즐겁기에 가는 겁니다.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 사람이나 장소가 있으면 시간을 내서라도 가고 싶은 게 당연합니다. 강연회도 굳이 시간을 내서 가는 것은 뭔가 도움이 될 것 같기 때문입니다.
잡지도 자신에게 좋은 정보가 있을 것 같아 돈을 내고 삽니다. 도움이 될 것 같아서 갔는데 그렇지 않으면 다음에는 가지 않습니다. 이것은 치매인만이 아니라 모든 사람에 해당할 겁니다. - P251

자립을 생각할 때는 ‘자기 결정‘을 하고 ‘자신이 하고 싶은 생활을 할 수 있는가‘가 중요합니다. 당사자에게 필요한 것은 다른 사람에게 보호를 받는 게 아니라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생활 지원자의 힘을 빌려 과제를 수행하는 겁니다. 보호를 받아 기능이떨어지는 것보다 어느 정도의 부담을 감수하더라도 이게 더 즐겁게 생활하는 방법이라고 생각합니다. - P255

일본의 케어 매니저도 지역지원센터 사람도 왜 치매인에게 직접 묻지 않고 가족에게만 질문할까요? 스코틀랜드를 여행하면서 그 점이 마음에 걸렸습니다. 우선은 그 사람에게 무엇이 가능할까, 어떻게 하면 같이 할 수 있을까, 치매인의 입장이 되어 생각했으면 좋겠습니다. 이런 말을 들으면 누구나 ‘그야 당연하지!‘라고 생각하겠죠. 하지만 당연한 일을 하지 않고 있는 게 현실입니다.
최근 치매인 여덟 명이 한 자리에 모여 얘기할 일이 있었습니다. 그때 "케어 매니저를 아세요?"라고 물었더니 모두 "알아요"
라고 말했습니다. 그런데 "집에 오지만 얘기를 나눈 적은 없어요"라고 말했습니다. 사실 케어 매니저 대부분은 치매인에게 살짝 인사한 뒤 "건강은 어때요?"라고 묻는 게 다입니다. 다음은 가족과 상담하니 치매인과 가까워지거나 신뢰가 쌓일 리가 없죠. - P261

스코틀랜드의 치매 카페에는 축구를 좋아하는 사람이 모여 축구만 얘기하는 축구장 미팅룸 같은 곳도 있습니다. 잉글랜드 북동부의 요크시 교외에 있는 아로마 카페에도 가봤습니다. 여기도 치매 카페였습니다. 특이하게도 이곳들은 처음부터 치매인만을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아주 평범한 카페였다고 합니다. 치매인 대여섯 명이 여러 카페를 돌아보고 치매에 친화적이라고 판단되는 곳에 ‘치매 친화시설(Dementia Friendly)‘이라는 마크를 붙여 선정하는 방식입니다. 치매에 친화적인 시설인지 아닌지를 당사자가 결정하는 겁니다.
물론 카페에는 치매를 공부한 사람과 자원해 일하는 치매인도있는데 도대체 왜 치매 카페인지 모를 정도로 평범해 보였습니다. 클래식한 소파와 테이블이 있는 느긋하고 편안한 분위기에서 치매인이 일반인과 섞여 평범하게 즐기고 있었습니다. 일본처럼 간병인이 데리고 가는 곳이 아닙니다.
동행한 야마사키 선생님이 "이곳에는 한 달에 치매인이 몇 명이 오나요?"라고 책임자에게 묻자 이런 답이 돌아왔습니다.
"그런 걸 알면 이걸 하는 의미가 없어요. 모르니까 좋은거아닌가요?"
여기서는 누가 치매인지 묻지 않습니다. 또 알 필요도 없습니다. 치매인이 곤란하면 도와준다, 그 정도입니다. 그래야 치매인이 안심할 수 있는 장소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일반 카페와 같으니까치매인도 느긋하게 커피라도 마시면서 얘기할 수 있습니다. 물론 치매가 아닌 사람도 옵니다. 그런데 일본은 반대입니다. 치매인만 모이게 합니다. 이상하죠. 그러니까 재미가 없습니다.
안식처가 재미있지 않기 때문에 가족도, 치매인도 가고 싶지않은 겁니다. 하지만 가족은 치매인이 집에 있으면 힘드니까 간병보험을 이용해 데이 서비스를 보냅니다. 그것밖에 선택지가 없기 때문입니다. 사교적인 사람은 그래도 괜찮지만 그렇지 않으면 지옥입니다.
일반사람이 가서 재미있으면 치매인도 재미있습니다. 치매인들의 안식처가 정말 치매인이 가고 싶어하는 장소인지, 다시 생각해볼 때입니다. - P2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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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없는 시간 - 나이 듦과 자기의 민족지
마르크 오제 지음, 정헌목 옮김 / 플레이타임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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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학적인 자서전을 쓰는 동력은 자신에 대해 이야기하려는 자기애적 유혹보다는 확실한 증거를 활용해 시간 속에 자신을 위치 지으려는 갈망에서 나오는 듯하다. 이런 갈망은 관광지에서 풍경이나 기념물을 직접 보는 대신 사진으로 남기느라 여념이 없는 관광객의 심정과 유사하다. 가벼운 사건과 찰나의 순간이 덧없음을 감안할 때, 지나간 체험을 분명한 믿음으로 바꾸어 남기기 위해서는 한 번이라도 대상을 다시 볼 필요가 있다. 또한 쉽게 기억을 빠져나가는 현재가 드리운 그림자로 인해 대상에 대한 기억이 이미 사라지고 있다는 걸 예상하고 대비하는 것도 중요하다. 이는 망각을 늦추는 경향이 있는 이른바 애도 작업과는 다르다. 타자가 더 이상 그곳에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이 직접 그곳에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하는 문제인 것이다. - P40

오늘날 내게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는 건 당시 내가 느낀 보편적인 희열의 주관적인 본성과 부분적인 환상이 아니라 그 순간이 영원히 지나가 버렸다는 확실함 자체다. - P50

‘인식‘reconnaissance이라는 단어가 ‘재발견‘과 ‘감사‘라는 두 의미를 지니듯 독자들은 글을 읽으면서 자신을 재발견 혹은 적어도 시간이 안기는 불안 속에서 자신의 양가성을 재발견하고 저자에게 감사하게 된다. 사실 우리 안에는 하나의 내적 목소리가 존재하는데, 때때로 속삭임과 중얼거림, 의성어, 찡그림으로, 더 드물게는 "우리가 자신에게 말하고 있을 때" 명료한 단어 몇 개로 스스로를 드러낸다. 이 목소리는 우리의 가장 일상적인 현실에 참견하고 우리를 방해하며 때로는 가혹한 말로 우리를 평가("이런 바보멍청이 같으니!")하기도 한다. 요컨대 내적 목소리는 우리가 ‘구닥다리 노인네‘hors d‘age가 되었다는 의식을 언어로 표현한다. 즉 우리 삶의 과정에 동반되고, 우리가 스스로에게 거리를 두게 만들며, 운명과 우연, 나이와 무관하게 자유로이 부유하는 관심의 일부를 우리 안에 보존하는 일상적인 성찰을 표현하는 것이다. 만약 다소간의 환멸조로 "아, 이런, 너무 늙어 버렸군. 이젠 더 이상 젊어 보이지 않아…………"라고 자신에게 말한다면, 이는 스스로에 대한 동일시 없이 스스로를인식하고 한쪽으로 밀어 두는 것이다. 마치 자신에게서 조금은 빠져나왔지만 스스로를 완전히 잃어버리지는 않은 등장인물을 그려 낸 작가라도 된 것처럼 말이다. 이처럼 분열된 의식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우리가 소설이 사용하는 일반적인 장치 (등장인물들의 주체성을 초월하는 전지전능한 작가)에 놀라지 않는 까닭을, 그리고 우리가 많은 소설에서 우리 삶에 관한 은유를 대략적으로나마 찾으려 하는 까닭을 설면해 줄지도 모른다. - P58

따라서 문제가 되는 건 물질로서의 시간이요, 우리가 기꺼이 다듬으면서 구성하고 재구성하는 시간이며, 즐거움을 얻기 위해 함께 노는 시간이다. 나이 든 친구들이 다시 만나 기억을 나눌 때 이들은 지난날의 운치를 다시 회복할 수 없다는 걸 잘 안다. 게다가 이건 좋은 일이기도 한데, 예전의 기억들은 사실 따분하고 지루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들은 기억을 나누는과정에서 노화와 흘러가는 시간으로부터 자신을 떼어놓을 수 있는 즐거운 무언가를 재발견한다. - P61

계절이 그렇듯 세대들이 이어지며 지속된다고 보는 것은 서로가 인간이라는 종의 성원권을 공유한다고 이해하는 것이다. 이는 가족이나 생물학적 재생산과 같은 좁은 틀에 갇히지 않고서 유전hérédité이라는요인으로부터 자유로운 물려받음héritage의 휴머니즘을 주창하는 것이다. - P82

간혹 나이라는 것이 우리 바깥에 위치한 다른 어딘가에서 오는 게 아닌가 싶을 때가 있다. 그곳은 우리 뜻을 묻지도 않고 사물이 변화하며, 그로 인해 우리가 그 변화를 인식하지 못하는 장소다. - P92

물론 시간이 초래하는 변화가 반드시 쇠락의 징후를 뜻하는 건 아니다. 어떤 책이나 영화가 ‘나이 들었다‘고 말할 때 우리는 사실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 이야기하는 셈이다. 하지만 기억이 시작하는 지점에 하나의 관계(우리 자신이 책이나 영화와 맺는 관계)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주목한다면, 변하는 것은 관계며 우리 자신이나 작품이 변하는 건 아님을 명확히 인식할 수 있다. 그리고 그 관계는 새로운 에너지를 얻고서 더 풍요로워질수도 있다. 변화가 의미나 본질의 상실을 초래하지 않고 긍정적으로 작용할 수 있는 것이다. - P96

이렇듯 텍스트와의 관계는 생동적이기에 우리는 읽고 또 읽어야만 한다. 나이가 들지 않는 책이란 독자로 하여금 항상 새로운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다는기대를 품게 만드는 책이다. 그런 책은 독자에게 자신이 영원히 살아 있다고, 그렇기에 자신과 독자를 연결한 운명이 "평생토록 영원히" 이어진다고 속삭인다. - P102

좀 더 이르든 뒤늦든 간에 가차 없이 가면이 벗겨지고 나이에 관한 가혹한 진실이 극적으로 드러나는 바로 그 순간이 언젠가는 찾아온다. 노쇠함이라는 최후의 몰락을 맞이하기 전에 사람들은 자신의 성 정체성을 이루는 가장 화려한 면모-한창 시기의 남성성과 여성성-를 잃어 가기 마련이다. 노화는 일찍 자각되기도 하지만, 고령에 따른 신체의 쇠약은 오랜 역사의 결과물이다. 결국 겉모습의 변화와 내부의 기능 장애를 통해 사람의 몸은 그를 ‘배신한다‘. 이러한 참패를 인식한 사람은 자신을 몸이 가한 고통의 피해자로 느끼고, 죽음을 향한 과정에서 몸이라는 연약한 껍데기가 인간의 정체성과 존재 전체를 이룬다는 사실을 거부하기까지 한다. 여기에도 ‘박해받고 있다‘는 의식이 존재하며, 이 의식은 얼굴 없는 운명(치명적인 힘인 나이)의 도구로서 각자에게 찾아오는 질병들에 대항하는 수단으로 쓰인다.
이와 관련해 두 가지 사항을 언급할 수 있다. 점진적으로 진행되는 신체적 노쇠 -어떻든 노화 자체의 증거인-에 시달리는 사람은 이를 신체적·정신적 고통으로 겪게 되는데, 이런 이중적인 고통은 오직 자연의 무관심을 전할 뿐이기에 달리 설명하기가 어렵다. 과거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것과 마찬가지로 몸은 시간이 흐름에 따라 노쇠하기 마련이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이러한 노쇠를 훨씬 더 일찍, 때로는 어린 시절부터 경험한다. 노쇠를 일찍 경험하는 이들은 굴욕감을 선사하는 고통스런 몸속에서 자신을 인식하기를 원치 않는 이들이 느끼는 비통함을 경감시켜 겪을 수 있고 또 그래야 한다. 부모가 아픈 유아와 청소년을 자주 병원에 보내듯 불안감을 느끼는 성인도 주기적으로 병원에 다녀야 한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들은 어떤 일이 일어나든 최악의 상황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그리고 오늘날까지도 누군가가 자신에게 가한 박해의 결과로 여겨지곤 하는 가장 ‘부당한‘ 운명에서 벗어나리라는 것을 이해하게 될 터다.
자기 인식을 확보하는 데 가장 효과적인 도구가 여기에 다시 한 번 등장한다. 그건 바로 타자에 대한 인식, 타자가 존재한다는 사실에 대한 인식, 그리고 타자가 나를 박해할지도 모르는 이가 아니라는 사실에 대한 인식이다. 왜냐하면 노화가 타자에 대한 문제인 경우, 우리는 타자를 그의 몸이나 몸이 만들어 낸 기호들 (열정에서부터 두려움에 이르는, 미소나 눈물이 표현하는 무한한 뉘앙스 차이)과 온전히 동일시하는 데 어떤 어려움도 겪지 않기 때문이다. 타자의 몸이 삶의 기호를 더 이상 제공하지 않는 순간, 그리고 삶의 모든 속성을 지녔던 누군가가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인정해야만 하는 그 순간이 오기 전까지는 말이다.
우리 자신을 우리의 몸과 구별하고 몸을 심문하면서 저주하거나 아첨하도록 강제하는 환상은 계속해서 우리 눈앞에 어른거린다. 성찰적 의식의 술책, 즉 우리가 몸 바깥에서 독립적으로 실존한다는 환상은 타자가 죽음과 더불어 그 이전과 이후를 근본적으로 단절시키면서 갑작스럽고도 최종적으로 사라진다는 명백한 사실 앞에 깨질 수밖에 없다. 시야에서 사라지고 몸에서도 떠나면 더는 그 어떤 것도 존재하지 않고 무無만이 존재하게 된다. 그럼에도 여전히 무언가가 남는다고 믿고 싶었던 인간이 발명한 단어들 -특히 공포와 희망으로 가득 찬 ‘죽음‘이라는 단어 자체- 은 공허함만을 감출뿐이다. - P107

반드시 그렇지는 않다. 우리가 나이를 ‘만들건‘ faire 아니건 간에 우리는 우리의 나이를 ‘가진다‘avoir. 정확히 말하면 우리도 나이를 가지고 나이 역시 우리를 가진다. 나이를 가지는[나이가 드는] 것이 살아 있음을 뜻하듯 노화의 기호는 동시에 삶의 기호기도 하다. 일찍이 키케로가 우리에게 일깨워 준 것처럼, 자기 몸에 특히 신경 쓰는 사람들이 대는 구실의 배후에는 겉멋을 넘어 온전한 삶을 누리고자 하는 욕망이 있다. 많은 이에게 온전한 삶은 이른바 활동적인 삶의 과정에서 맞닥뜨리는 제약 탓에 불가능한 이상일 수밖에 없다. 그래서 가끔은 은퇴가 일종의 해방과 거듭남의 기회, 마침내 제대로 된 삶을 살아갈 수 있는 시간- 계산 없이 살아갈 수 있는, 더는 나이를 고민하지 않고 자신만의 시간을 누릴 수 있는- 을 얻게 되는 기회로 여겨지는 것이다.
다른 한편으로 행운이라는 문제도 있다. 누군가는 다른 이들에 비해 노년의 고통으로부터 영향을 덜 받거나 더 늦게 받는다. 그 결과 이들은 자연스럽게 ‘고양이의 지혜‘를 체득해 가능한 한도 내에서 자신의 몸을 활용하게 된다. 이들은 몸과 스스로를 동일시하면서 영리하게 자신의 힘을 비축해 둔다. 따라서 그들은 노년의 재앙에 관한 모든 비관적인 이야기와 정반대되는 사례를 제공한다. 가끔 우리는 삶을 즐기는 법을 익히기 위해 끝까지 기다려 온 것만 같은 노인들이 들려주는 멋진 유머에 놀랄 때가 있다. 당연한 일을 가리킬 때 고전적인 예시로 자주 인용되는 격언이 이를 요약해 준다. "죽기 5분 전까지만 해도 라 팔리스 씨는 아직 살아 있었다"Cing minutes avant sa mort, Monsieur de La Palisse vivaitencore. 그렇다, 바로 그거다. - P112

자신의 과거와 관련해 우리는 모두 창조자이자 예술가다. 우리는 흘러간 시간을 영원히 관찰하고 재구성하면서, 즉 뒤를 바라보면서 앞으로 나아간다. - P116

나이가 든다는 건 새로운 인간관계를 시도하게 된다는 뜻이다.
많은 사람이 모르고 있지만 이는 알고 있으면 좋을 특권이다. 또한 누군가에게 노년은 윗세대가 느꼈던 감정을 궁금해하면서 상상해 오기만 했던 일들을 경험하고, 어떤 면에서는 그들과 합류해 세대 간의 거리를 좁힐 기회가 된다. 노년이 되면 결국 무언가를 알게 되는데, 그건 바로 내가 어렸을 적에 노인들이 말해 준 것처럼 나이가 드는 게 크게 유난 떨 일이 아니라는 사실이다. 잘 모르는 사람들이 멀찍이서 바라본 타자와 같다는 점에서 노년은 이국적 정취exotisme와 같다. 사실 노년이란 건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노년에 이를 때까지 쌓여 간 시간은 과거에 일어난 일들을 순서대로 더한 축적물이 아니다. 시간은 쓰여있던 글자 위에 다시 글자를 써 넣은 양피지와 같다. 거기 기록된 모든 일이 다시 떠오르지는 않지만, 때로는 가장 먼저 기록된 일이 가장 쉽게 표면에 드러나기도한다. 사실 알츠하이머병은 망각이라는 자연선택 과정에 가속이 붙은 현상일 따름인데, 말기까지 남는 가장 끈질긴 이미지-사실에 가장 가까운 이미지는 아니더라도—는 대부분 어린 시절의 이미지다. 이런 관찰에는 잔인한 면이 있지만, 우리가 이를 반기든 개탄하든 인정해야만 하는 사실이 있다. 우리는 모두 젊은 채로 죽는다는 사실 말이다. - P127

이 책의 첫 장 제목이기도 한 ‘고양이의 지혜‘는 바로 그런 고양이의 시간 감각이 우리 인간의 노년에 어떤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지에 관한 은유다. 오제에 따르면 인간의 삶에서 상상력의 원료가 되는 시간과 달리, 나이는 세월의 흐름을 한 방향으로만 보게 만들면서 우리에게 제약을 가한다. 그러니까 나이에 관한 인식은 추상적 관념인 시간을 시간 그 자체로가 아니라 과거로부터 미래에 이르는 선형적인 흐름 안에서만 이해하게 만들어 인간을 그 속 어딘가로 밀어 넣는다. 이런 인식하에 우리는 각각의 연령대에 맞추어 특정한 사회적 의무나 역할을 스스로에게 부과하면서 계속 나이에 얽매일 수밖에 없다. 반면 세월의 흐름과 그에 따른 자연스러운 노화에 적응하면서 나이의 제약으로부터 벗어나 시간이 주는 자유를 받아들이는 것이 고양이의 삶이라는 은유를 통해 배울 수 있는 지혜라는 것이다. - P1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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