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어는 때로 사물, 사람, 세계 등에 대한 인식 체계에 깊이 관여한다. 혐오의 언어가 빠른 속도로 증식하는 것에 비하면 저항의 언어는 늘 순탄하지 못하다. 내가 말하는 ‘저항의 언어‘는정확한 언어에 가깝다. 정확하게 말하려고 애쓴다는 것은 정확하게 보려는 것, 정확하게 인식하려는 것, 권력이 정해준 언어에의구심을 품는다는 뜻이다. 권력이 저항의 언어를 항상 진압하는 이유다. 그 대신 권력의 기준으로 왜곡된 언어를 적극적으로유포한다. 권력의 망언이 난립하는 가운데서도 이에 맞서는 언어들도 지치지 않고 생성된다. 바로 그 지점에 나는 아름다움이 있다고 생각한다. 지금까지 나를 끌고 온, 그리고 앞으로도 꾸준히 끌고 갈 화두에서 빠지지 않는 것은 ‘아름다움‘이다. ‘아름다움‘이라는 어휘를 쓰는 것이 때로 오해받을 소지가 있지만 그것은 아름다움 자체가 많이 오해받고 있어서다. 아름다움은 노동과 사랑을 필요로 한다. 그래서 아름다움은 땀을 흘리며 무한히 타자를품어낸다. 철학자 시몬 베유simone Weil는 "아름다움은 선에 대한 우리들의 갈망을 반추하는 거울과 같다"고 말했다.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 고통과 연대하고 권력에 저항하며 정상성에 균열을 내어 세상에 충격을 주는 행위. 저항과 연대에는 언제나 강한 생명력이 느껴진다. - P8
‘창작의 고통‘이라는 말이 가진 모순은 《고통받는 몸》에서 일레인 스캐리 Elaine Scarry가 한 문장으로 잘 정리했다. "예술가들이 너무나 성공적으로 괴로움을 표현한 탓에 예술가 집단이 가장 진정으로 고통받는 사람들로 여겨지고, 그래서 도움이 절박하게 필요한 다른 사람들에게서 의도치 않게 관심을 빼앗을 위험"이 항상 도사린다. 즉, 고통의 표현은 때로 그 고통을 권력으로 바꾼다. 창작을 통해 고통을 다루기보다 창작을 하는 나의 고통에 대해 더욱 열심히 말하는 창작자들이 실로 많다. 버지니아 울프Virginia Woolf는 문학에서 육체적 고통이 제대로 다뤄진 적이 거의 없다고 지적했으며, 수전 손택Susan Sontag은 시각 예술에서 질병이나 출산처럼 인간의 몸이 겪는 고통이 거의 다뤄진 적 없다고 지적했다. 존버거John Berger는 장 프랑수아 밀레Jean-François Millet 이전에 어떤 유럽 화가도 육체노동을 작품의 주제로 다루지 않았다는 점을 상기시켜줬다. 시골에서의 노동, 곧 농부의 노동은 버거의 표현대로 ‘유화라는 언어‘가 무시해왔던 주제다. - P13
은폐된 고통에 이름을 붙이고 구체적인 서사를 채우는 일은 비명을 언어화하는 작업이다. 비명 속에서 말을 찾고 고통의 이름을 정확하게 알아갈 때 고통의 연대가 구체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 청자가 있는 고통은 조명받는다. 그러나 남들이 들어주는고통은 절반의 고통일 뿐이다. 언어로 정리할 수 없거나, 비명이되어 쏟아지는 소리로만 존재하여 고통의 청자를 만날 수 없을 때, 그래서 그 고통이 철저히 소외될 때, 고통은 진정 고통으로 존재한다. 설명되지 않는, 혹은 아무도 설명을 요구하지 않고 듣지 않으려는 몸의 고통을 구체적으로 말하는 일은 그 자체로 운동이다. 은폐되어 보이지 않는 고통을 보이도록 만드는 과정에서 고통의 주체를 새롭게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노동자의 산업재해처럼, 약자들의 고통일수록 오랫동안 이름이 없었다. 육체노동의 고통, 여성의 몸이 겪는 고통, 임신한 흑인 여성의 몸에 닥치는 위험 등에는 구체적인 서사가 있지만 권력이 없을수록 고통을 말하기 어렵고, 또 말한다 해도 들어줄 청자가 없다. 누구도 알아보지 못하는 고통이야말로 진정한 고통이 아닐까. - P22
"태초에 노동이 있었다"는 김남주 시인의 시구처럼, 노동은 인간 사회의 본질이다. 숭배의 대상도 패배의 징표도 아닌, 살아 있는 자의 행위다. 노동과 삶의 균형을 뜻하는 신조어 ‘워라밸Work and Life Balance‘은 오히려 노동과 삶을 분리시킨다. 나는 노동해방은 가능하지 않으며 지향해야 할 가치라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해방‘을 말할수록 노동은 소외된다. 노동 해방에 관해 말하기보다 노동의 가치와 노동자의 권리에 대해 인식하는 것이 먼저다. 그것이 우리가 하지 못한 ‘공부‘일 것이다. - P35
플랫폼 노동자들은 온라인 커뮤니티를 통해 소통하지만 물리적으로 각자 다른 시공간 속에서 홀로 이동하기에 동료들을 만날 수 없다. 누군가의 시간을 아껴주기 위해 일하는 배달노동자들의 시간은 치밀하게 지배받는다. 그들은 채팅방을 통해 식사시간과 화장실 출입까지 보고한다. 정보의 비대칭과 소통 창구의 독점 속에서 노동자들은 감시받지만 동료와 연결되기는 힘들다. 다시 말해, 인간은 고립되고 데이터는 연결되었다. 기업 입장에서 플랫폼 노동은 노동자들의 소통과 연대를 막을 수 있는최적의 형태다. - P62
출판계만이 아니라 패션과 외식 산업 등에서도 ‘할머니‘는 그야말로 ‘힙‘한 키워드다. 시장은 빠르게 움직인다. 할머니와 밀레니얼의 합성어인 ‘할매니얼‘이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할머니들의 패션과 입맛 등은 할매 감성이라 불리며 하나의 스타일이 되었다. 할머니에 대한 환호에는 젊은 여성들의 미래에 대한 소망이 반영되어 있다. 이러한 의미 있는 변화에도 불구하고 ‘할머니‘에 대한 문화적 소비를 마냥 긍정하긴 어렵다. 시장에서 소비되는 감성과는달리 실제 많은 할머니들의 삶은 빈곤하기 때문이다. 빈곤의 여성화Feminization of Poverty는 빈곤의 할머니화가 되었다. 미래에 ‘~한 할머니‘가 되기를 바라는 마음은 현재의 여성 노인 빈곤에 대한 불안을 보여준다. ‘귀여운 할머니‘가 되고 싶다는 소망에는 역설적으로 가난과 질병, 고독에 대한 두려움이 포함되어 있다. - P73
목소리는 몸을 벗어나 존재를 확장시키는 역할을 한다. 그렇기에 역사는 약자의 목소리를 묵살한다. 대신 몸으로만 재현한다. 묵살은 잠잠히 죽인다는 뜻이다. 여성의 주체적 경험이 지식화되거나 역사화되지 못하도록 방해받는 이유는 지속적으로 이들을 피해자의 위치에만 한정해서 바라보려 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전옥주는 5·18 여성동지회를 만들어 투쟁했던 여성들과 연대한 ‘연결된 몸‘이었고, 폭력의 목격자이며 저항의 참여자로서 ‘말하는 몸‘으로 살아왔다.《광주, 여성》에 담긴 여성들의 이야기는 내가 관념적으로 이해하던 ‘살아남은 자의 슬픔‘이라는 개념을 전복시켰다. 과연 살아남은 자의 슬픔은 누구의 감정일까. "어떤 방식으로든 5.18에 참여한 여성들에게는 ‘더불어 죽지 못한 죄의식‘을 발견할 수 없었다. 여성들의 관심은 오롯이 삶"이었다는 편집자의 말처럼 실제 이 여성들의 구술에는 온통 연결에 대한 갈망, 새로운 배움에 대한 희망, 증언하고자 하는 의지 등이 드러나 있었다. - P155
18세기에 올랭프 드 구주 Olympe de Gouges와 메리 울스턴크래프트는 누구나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관습과 문화 속에서 차별을 인식하며 여성의 권리를 주장했다. 그렇게 인권의 범주를 확장시켜왔다. 여성이 권리를 주장하고 노예가 자유인이 되는 것은 끊임없이 ‘남성 자유인‘을 불편하게 만들면서 진행되었다. 구체적 존재들이 지워진, 막연한 ‘시민‘이라는 개념은 공허하다. 이제는 인간 중심적 사고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목소리도 날로 높아져서 동물의 권리까지 논의의 대상이 되었다. 이처럼 다양한 정체성들이 각자의 위치에서 싸우고 연대하며 흩어진다. 각자의 정체성에 함몰되는 싸움이 아니라, 타자가 주체가 되는 투쟁을 통해 싸움의 영역을 넓힐수록 인권의 영역도 확장된다. - P175
"조물주께서 가장 사랑하시는 것이 다양성입니다." 성공회 사제이며 신학자인 패트릭 쳉Patrick S. Cheng의 《급진적인 사랑》의 발간사는 참으로 아름답다. 퀴어 신학을 이해하는 입문서로서 쳉의 글도 좋지만, 이 책으로 독자들을 안내하는 발간사에서 이미 ‘정신이 깨어나는‘ 기분이 든다. "장미가 민들레를 혐오하거나 멸시하지 않듯이, 모든 차이는 경이로운 아름다움이며 존중받을 일이지, 결코 혐오나 차별의 조건이 아닙니다." 우주의 다양성은 우리가 다 파악할 수도 없이 심오하며 거대하다. 인간 개개인을 하나의 우주로 인식한다면 그 안의 무궁무진한 다양성은 결코 부정당할 수 없다. - P193
태도가 마음이며, 형식이 내용이고, 언어가 곧 정치다. - P210
관심 없음을 적극적으로 말하는 행위는 그 문제를 모르고 싶다는 주장이며, 관련 사안에 대해 듣고 싶지 않다는 말하기 방식이다. 다시 말해, 나는 앞으로도 모르겠다는 선언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무관심을 표출할 수 있다는 게 권력이다. 타자의 고통에 대한 감각이 없고, 자신을 불편하게 만드는 앎을 적극적으로 모르려고 하고, 모르지만 판단할 수 있다는 확신이 모이면 바로 죄의식 없이 폭력을 저지르게 된다. 듣기 괴로운것 중에 하나는 ‘산업‘과 ‘시장‘을 늘 중심에 두고 ‘어쩔 수 없다‘를 반복하는 목소리다. - P287
1910년 미국 시인 엘라 휠러 윌콕스Ella Wheeler Wilcox의 시 <목소리 없는 자들의 목소리 The Voice of The Voiceless> 이후, 이는 운동 캠페인 구호로 자주 등장했다. ‘지금도 많은 사람들이 좋은 의미로 이 구호를 사용한다. 그러나 이는 인도의 소설가 아룬다티 로이Arundhati Roy, 베트남계 미국 소설가 비엣 타인 응우옌VietThanh Nguyen 등에 의해 오늘날 꾸준히 비판받는 구호이기도 하다. 로이는 목소리 없는 자들은 없다고 주장했고, 응우옌은 목소리 없는 자들을 위해 목소리 내는 것이 아니라 목소리가 없어지는 그 구조를 부숴버려야 한다고 했다. 나는 이들의 생각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목소리 없는 자들은 없다. 듣지 않거나 침묵을 강요당할 뿐이다. 전태일의 대학생 친구가 필요한 게 아니라, 대학생 친구가 없어도 전태일의 목소리가 들리는 사회여야 한다. - P296
나와 참석자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그들간의 관계도 있다. 강연이 열리는 그날 그 장소에서 주변 지역의 활동가들이 만남을 가진다. 비대면 강의에서는 이런 관계들이 모두 사라지고 나의 강의만 남는다. 물론 온라인도 장소다. 나는 온라인 장소에서 강의라는 목적에 충실히 임한다. 이를 두고 물리적 거리를 ‘극복‘한다고 여길 것이다. 그러나 물리적 거리의 ‘극복‘은 달리 말하면 장소감의 ‘상실‘이라고도 볼 수 있다. 시간을 공유하지만 그 시간 동안 공유하는 장소 경험이 없는 것이다. - P322
이야기를 짓는 능력이 아니라 이야기를 듣는 능력에 초점을 맞춰보면, 타인의 서사를 이해하려는 태도는 실제로 윤리적 변화를 만든다. 예를 들어 장애인 시설에서 일했던 사회복지사가 발달장애인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자.
"지원주택 중간평가 때 자신이 바라는 걸 그림으로 그려달라고 했더니, 호민 씨가 큰 네모에 크기가 다른 동그라미 3개를 그렸어요. 네모는 집을, 큰 동그라미는 호민 씨를, 중간 동그라미는 영미 씨를, 작은 동그라미는 아기를 의미하는 거였어요. 또 지원주택에 살면서 무엇이 좋은지를 물었더니 네모 3개를 그렸어요. 큰 테두리 네모는 집을, 작은 네모 2개는 텔레비전과 침대를 의미하는 거였어요. 자신의 집, 가구, 그리고 가족을 갖고 싶어 하고 소중히 여기는 마음이 뭉클하게 다가왔지요. 어떤 형태로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고, 그 소통의 의미가 정말 소중하고 중요하다는 것을 깊이 느낀 시간이었어요. 소통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건데 많은 사람들은 글씨를 맞게 써야 되고 말을 똑바로 해야 한다고만 생각해요. 의사소통의 의미를 거기에만 두고 있으니까 발달장애를 가진 사람들은 의사소통을 하지 못한다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렇지 않잖아요." - P344
연민은 강한 정치적 힘을 만든다. 그럼에도 고통을 재현하는 방식에 대한 고민이 따른다. ‘불쌍한 존재‘는 너무도 무력하다. 부당하게 고통받는 존재들은 그저 이 세계의 ‘불쌍한 존재‘라는 틀에 갇힐 뿐이다. 그렇게 연민의 대상 이상으로 나아가지 못한다. 타자의 불쌍함이 나의 사회적 참여의 감정적 원천이 될 때, 이는 사회의 구조적 불평등에 저항하는 연대 의식으로 향하기보다 불쌍한 대상을 도울 수 있는 나에 대한 우월감으로 빠지기 쉽다. 불쌍한 대상들이 더 이상 불쌍해 보이지 않을 때 순식간에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그렇다면 고통은 재현되지 말아야 하는가. ‘재현되어야 하는가 재현되지 말아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어쩌면 올바른 답을 끌어내지 못할지도 모른다. 그보다 고통을 ‘어떻게‘ 재현할 것인지 물어야 한다. - P349
바로 그 쓸모에 연연하지 않음을 드러내기, 그것이 계급을 드러내는 방식이다. 노동하는 손이 아니라 예쁘게 꾸며진 손, 실용적인 작업복이 아니라 불편하지만 보기 좋은 옷, 같은 음식이라도 오랜 시간 공들여 만들어야 하는 정갈한 상차림은 아름다움이 계급에 따라 차등적으로 분배되는 현실을 보여준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을 경시하거나 경계하는 이들은 아름다움이 현실의 복잡한 문제들을 가린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움은 속임수와 긴밀한 관계를 맺기 쉽다. 진실을 숨기고 있다는 점 때문에 때로 아름다움은 두려움을 자아낸다. "바다에서 가장 무자비한 종족들이야말로 사악한 광휘와 아름다움을 지니고 있다는 점"을 들어 이슈미얼은 바다가 음흉하고 기만적이라고 한다. 그렇기에 아름다움은 때로 권력이다. 아름다움을 추구하려는 의지는 권력 의지와 연결된다. 아름다움은 모방을 추구하게 만들면서 동시에 다른 사람과 차별성을 드러내기 때문이다. 미적 경험의 축적이 세계관의 확장이 아니라 지배력 강화로 향할 때 아름다움은 권력이 된다. - P353
아름다운 대상에 대한 소유가 아니라 대상을 어여삐 여기는 마음, 끊임없이 생명을 살리고자 하는 마음이야말로 아름다움과정의로움을 향한 가장 기본적인 실천이다. 아름다움은 분배되어야 한다. 가장 윤리적인 것이 가장 전위적이다. 윤리가 낡음이되어갈수록 끈질기게 윤리를 고민해야 한다. 아름다움을 권력의 도구로 활용하느냐, 분배와 돌봄으로 여기느냐에 따라 아름다움의 의미는 다른 방향으로 향할 것이다. 인간이 품은 모방 욕구는 아름다움을 복제하게 만든다. 그렇다면 무엇을 복제할 것인가. 권력화된 아름다움인가 분배하는 아름다움인가. 아름다움과 선함에 대한 동경이 나 이외의 타자와 동등하게 연결되고자 하는마음으로 연결될 수는 없을까. - P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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