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병을 통해서야 나는 알았다. 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이 상호호혜적인 사랑에 기반한다는 것을. 내 돌봄이 모성에서 발현된 헌신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의리와 도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의도치 않고 실현하게 된 이 모종의 윤리가 사실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와도 이런 종류의 사랑을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다. 윤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사랑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필요를 내 필요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눈사람 올라프도 말했다. "Some people are worth melting for." 당신을 위해서 녹는 것쯤이야. 나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사랑의 이러한 속성이 바로 컴패션(compassion)의 토대일 것이다.
compassion, 흔히 하듯 연민이나 동정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척아쉬운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누군가의 고통(passion)을 함께한다(com)는 뜻이다. 대가 없는 간병, 조건 없는 돌봄이 바로compassion의 이데아이자 눈에 보이는 실재다. 그리고 누군가를통해 이 compassion을 한번 경험한 이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이에게 다시 그것을 되돌려주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 누군가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윤이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고, 엄마인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고 당당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투병하는 동안 더 크고 풍부하며 섬세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고 배우기를, 다시 그 사랑을 베풀어 아프고 약한 너라도 거절당하지 않고 환대받는 경험을 하기를 기대한다. 어린이라면 응당 그렇듯 놀고 자고 낄낄거리면서도 키가 크고 마음이 자라는 아주 당연한 시간을 희망한다. 이것이 내가 윤이를 돌보며 주고싶은 전부다. 그래서 나는 윤이가 이 시간을 모조리 잊기를 바라면서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돌봄에 있어 생물학적 친연성은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으면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단한 일이라고들 하나, 이는 그만큼 돌봄의 노동 가치가 내내 평가절하 되어왔단 뜻이다. 또한 돌봄의 의무를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손쉽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어쩌면 간병은 기술적 측면에서 엄마가 아닌,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다른 이가 더 전문적으로 잘해낼지 모른다. 신사임당이 병원에 가면 나이팅게일이 될 것이란 환상을 버려야 한다.

오늘 나의 노력은 아이의 치료 성과만을 성적표로 삼지 않는다. 돌봄을 매개로 축적된 경험과 감정은 나의 삶, 그리고 아이의 삶을 통해서 오래도록 천천히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나와 아이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여성에게 있으리라고 믿어온 선천적 자질이나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여성에게만 당연하듯 부과해온 암묵적 의무에 따른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껏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는 여전히 그 의무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픈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결심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이었다. 돌봄 부담을 분담할 수 있다거나 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극한의 고통과 온전한 행복을 동시에 느끼며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헌신은 모성 신화에 등떠밀린 것이 아니다. 나와 윤이의 사랑은 그렇게 전형적이거나 일방향적이지 않다. 내가 아이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계산 없이 돌격하는 순정에 나는 내 시간과 자유를 기꺼이 희생한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의리 정도가 적당하겠다. - P62

윤이가 노래를 부른다. 레이스가 달린 반스타킹을 목이 긴 장갑처럼 손에 끼고 팔딱팔딱 춤을 춘다. 자기가 제알 좋아하는 르세라핌의 노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라고 한다. 윤이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가슴에 바운스를 주며 I‘m a mess, mess, mess‘ 하고 첫 소절을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요즘의 나는 워낙 엉망진창인 상태니까. 그런데 ‘괜찮겠지, 뭘 해도, 착한 얼굴에 니 말 잘 들을 땐. 괜찮지 않아, 그런 건, 내 룰은 나만 정할래‘라고도 한다. 신난다. 정말로 ‘Get itl ike boom, boom, boom‘이다. 노래가 워낙 짧은 데다 몇 소절 안되는 가사가 거의 선전 구호 수준으로 반복되니 부르기도 좋다. 아이돌이 노래하는 세계관이 이렇게 넓고 깊은 줄 몰랐다. 역시 세상은 변한다. ‘이것 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라고 노래하던 시절은 진작에 지났다. 윤이는 푸른 수염의 아내 이야기를 이렇게 처음 듣는다. 노래하고 춤추며 프시케를 만난다. 바로 그렇게, 사람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아무리 가족이라도 타인의 행복을 내가 보장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책으로 배우고 시행착오로 복습하는 대신, 춤추는 몸이 먼저 체득하길 바란다. 그 무대에서 인정투쟁의 연대기가 마침내 막을 내리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P116

일본처럼 돌봄화폐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일찌감치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일본이 1970년대부터 시도한 방법인데 ‘후레아이 키푸‘(3九切符, Caring Relationship Tickets)라고 한다. 평소 노인들을 도와 시간 점수를 얻고, 이 점수를 나이가 들었을 때 본인이 스스로 상환받거나 다른 도시에 사는 더 나이가 많은 가족구성원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심지어 점수는 현금으로 지급될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돌봄은 시설에 갇혀서도, 가족에 전유되어서도 안 된다. 아직 헌법으로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돌봄을 받을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돌봄은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우선 돌봄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돌봄이 구현하는 가치가 효율, 성공, 개인적 성취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모두가 긍정할 때, 지역사회돌봄이 가능하다. 기꺼이 서로를 돌보겠다는 개인 간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사회가 등가교환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돌봄화폐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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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원봉사‘라는 단어 자체의 뉘앙스와 제가 하는 행동 사이에 괴리감이 왜 생겼는지에 대해서도 생각해봅니다. 후생노동성 사회지원국 지역복지과에서는 "자원봉사에 대해 명확한 정의를 내리기는 어렵지만 일반적으로는 ‘자발적 의지에 기반해 타인 또는 사회에 공헌하는 행위‘를 가리켜 자원봉사 활동이라고 일컬으며, 활동의 성격으로 자주성(주체성)‘, ‘사회성(연대성)‘, ‘무보상성(무급성)‘ 등을 들 수 있다"고 설명했습니다. 이 설명을 읽어보면 ‘타인 또는 사회(공)‘와 ‘자신(사)‘은 과연 명확하게 구분될까라는 의문이 샘솟습니다. 도시에 살던 무렵에는 임대한 집과 그 부지 안쪽이 ‘사‘, 바깥쪽이 ‘공‘이라는 느낌이 또렷해서 공사의 경계가 명확했던 듯합니다. 그러고 보니 코로나19 팬데믹 시기에 학교가 휴교했을 때, 아이들을 데리고 공원에 가도 왠지 모를 비난의 시선을 느끼고 집에 있어도 "아이 목소리가 바깥까지 들립니다"라는 쪽지를 받는다는 부모들의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습니다. 팬데믹이라는 특수한 변화 탓도 있겠지만, 그런 상황을 거치며 공사 구분에 대한 잠재의식이 강화된 것 같기도 합니다. 여기서는 공적인 장소에 사적인 것이 나오는 경우를 일절 허용하지 않는, 공과 사 사이에 커다란 간극이 있는 듯한 느낌을 받습니다.
하지만 시골에서 살다 보니 그 경계에 명확한 선을 그을 수 없게 되었습니다. 집만 해도 툇마루와 현관 앞, 봉당까지는 다른 사람이 덜컥덜컥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 일상이고, 큰 방을 개방하면 모임을 열거나 관혼상제를 치르는 공적인 장소가 되기도 합니다. 사적과 광장, 신사 같은 공적인 장소를 청소하며 관리를 하는 것도 대개는 동네 사람들이니 공과 사의 범위가 그때그때 바뀌는 면이 있습니다. 그래서 최종 이용자로서만 어떤 공간과 관계를 맺는 경우가 드문 듯합니다. 하지만 이런 것이 ‘자발적 의지에 기반해 타인 또는 사회에 공헌하는 행위‘ 인가 하면, 그와는 조금 다른 느낌입니다.
이러한 시골 생활이 반영되었는지, 어느새 루차 리브로도 공과 사를 넘나드는 장소가 되었습니다. 그렇다 해도 개관일이 한 달에 열흘 정도이니 시골 사람이 자신의 장소를 공유하는 감각과 도시 사람의 공과 사에 대한 감각의 중간쯤이겠지요. 평소에는 사적인 공간으로 쓰는 집의 3분의 2를 개방해 찾아오는 사람들과 거실과 서가를 공유합니다.
이곳을 오가는 사람들은 단순한 이용자라기보다 ‘공‘을 함께 만들어주는 이들로 느껴집니다. 어떤 이는 저희 도서관의 간판과 책장을 만들어와 루차 리브로의 공간을 꾸미는것을 도와주었습니다. 또 어떤 이는 빌려간 책에 대한 감상을 다양한 시선에서 이야기해 장서에 대한 저희의 이해가 깊어지도록 도와주었습니다. "이 시리즈가 루차 리브로에 1권밖에 없어서 뒤편은 직접 사서 읽었어요. 재밌었으니까 기증할게요" 하며 속편을 가져와준 이도 있었습니다. 공과 사가 넘나드는 장소를 최종 이용자로서 대하는 것이 아니라, 저마다 손닿는 곳에 있는 ‘공‘을 함께 만들어나갑니다.
이러한 경험의 축적이 ‘공‘에 대한 무력감을 무너트리고 사회를 함께 만들어나가는 첫걸음이 되기를, 산기슭 도서관에서 꿈꾸고 있습니다. - P46

문화인류학자 쓰지 신이치의 『로이즈 뷰티풀』을 읽었을 때의 일입니다. ‘슬로‘, 즉 느림을 키워드 삼아 음식과 거주지, 노동과 여가, 과학기술, 신체, 문화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서 질문을 던지는 이 책을 저자의 매력적인 시선에 가슴 두근거리며 읽어나가다가, 어느 한 구절에 강하게 마음이 끌려 몇 번이나 그 부분을 따라 쓰면서 상상의 나래를 펼쳐나갔습니다. 그 구절은 프랑스 라르자크 지방의 몽트레동이라는 마을에 사는, 프랑스를 대표하는 유명한 블루치즈 ‘로크포르‘의 생산자이자 트랙터로 건설 중인 맥도널드 건물을 파괴해 체포당한 반핵·환경운동가 조제 보베에 관한 이야기 중 그가 사는 마을에서 일주일에 한 번 열리는 시장에 대한 부분이었습니다.

…… 이러한 사태에 대해 취재한 도넬라 메도즈와 할 해밀턴은 보베가 사는 마을을 방문해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사항을 보고했다. 불과 예닐곱 가구가 사는 이 작은 마을에서는 일주일에 한 번씩 시장이 열리는데, 인근 동네에서 많은 사람들이 저마다 농산물이나 공예품을 가지고 모여든다. 사람들은 각자가 가져온 음식과 와인으로 함께 요리하고 먹고 마시면서 노래를 부른다. 연극 공연도 펼쳐진다. 여기에는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이 없다. 하나의 공동체가 있을 뿐이다.
쓰지 신이치, <슬로 이즈 뷰티풀>

이 대목을 읽었을 때 마침 플리마켓 같은 마을 장터 운영에 가끔 참여하던 중이어서, ‘이런 시장을 만들 수 있다면 좋겠는걸‘ 하고 소박하게 동경했습니다. 하지만 이 이야기를 다른 사람에게 했더니 "뭐? 그럼 장터에서 돈으로 물건값을 치르는 게 아니라 물물교환을 허용하겠다는 거야?"라고 했습니다. 어쩐지 현실적인 방법은 아닌 듯했고, 또 그것만으로는 뭔가 부족한 기분도 들었습니다. 결국 그 시점에서는 저희가 놓인 환경과 문화 속에서 구체적으로 어떻게 하면 그런 시장을 실현시킬 수 있을지 알지 못한 채로 어느새 장터 운영에서도 멀어졌습니다.
몇 년 뒤에 문득 생각이 나서 이 책을 집어 들고 이 구절을 다시 읽었을 때, 장터라는 형태는 아니지만 루차 리브로가 조제 보베의 마을 시장처럼 되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습니다. 저희는 일상 속 생각을 ‘오므라이스 라디오‘라는 인터넷 라디오로 방송하거나 책으로 쓰는 것 외에도 저희가 읽어온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하는 생활의 나눔을 실천하고 있습니다. 이는 단순히 수확물이 너무 많아서 나눠주고 싶다는 것과 비슷한 느낌이며, 저희 나름의 방식으로 사회와 지속적인 관계를 맺어나가고자 하는 마음의 표현이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라디오 청취자들이나 도서관에 오는 사람들이 매우 다양한 방식으로 저희에게 무언가를 되돌려줍니다. 시를 지어서 보내주고, 수확한 야채를 가져다주고, 루차 리브로의 간판을 만들어주고, 시간을 함께 보내주고, 길에서 주운 소형 라디오를 가져와주고, 내밀한 이야기를 들려주고, 청소를 도와주고, 자신의 전문 지식을 바탕으로 이야기를 해주는 등 실로 다채로운 방식의 답례를 날마다 받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는 조제 보베의 마을 시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 없이 각자가 수확하고 만들고 생각한 것이 순환되는 모습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순환이 생겨난 걸까요. 이와 관련 있어 보이는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처음으로 취직해 가나자와에 살면서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도서관 카운터에 앉아 있는데, 학생 하나가 "볼펜 좀 빌려주세요"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카운터의 연필꽂이에는 매직펜과 샤프 밖에없어서 제 필통에서 볼펜을 꺼내 건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개인 물건을 빌리는 건 좀......" 하며 뒤로 물러났고, 볼펜을 받아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것이어도 그 볼펜이 카운터의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면 분명 학생은 기꺼이 썼을 것입니다.
이 일은 왠지 모르게 제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서비스라면 기꺼이 받을 수 있지만 일시적인 나눔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생각과도 무관하지 않겠지요. ‘폐를 끼치지 말자‘의 정도가 심해져서 서비스나 계약을 통하지 않으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할 정도의 강박관념이 잠재의식에 마다 받고 있는 기분입니다. 이는 조제 보베의 마을 시장에서 생산자와 소비자의 구분 없이 각자가 수확하고 만들고 생각한 것이 순환되는 모습과 닮은 데가 있는 듯합니다.
그렇다면 의도하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째서 이런 순환이 생겨난 걸까요. 이와 관련 있어 보이는 기억이 하나 떠오릅니다. 처음으로 취직해 가나자와에 살면서 대학도서관에서 일하던 때였습니다. 도서관 카운터에 앉아 있는데, 학생 하나가 "볼펜 좀 빌려주세요" 하고 말을 걸었습니다. 공교롭게도 그때 카운터의 연필꽂이에는 매직펜과 샤프 밖에없어서 제 필통에서 볼펜을 꺼내 건네려고 했습니다. 하지만 학생은 "개인 물건을 빌리는 건 좀......" 하며 뒤로 물러났고, 볼펜을 받아 들지 않았습니다. 똑같은 것이어도 그 볼펜이 카운터의 연필꽂이에 꽂혀 있었다면 분명 학생은 기꺼이 썼을 것입니다.
이 일은 왠지 모르게 제 마음에 계속 남아 있었습니다. 서비스라면 기꺼이 받을 수 있지만 일시적인 나눔에는 뒷걸음질을 치는 건, 우리 사회에 깊이 뿌리내린 ‘남에게 폐를 끼치지 말자‘는 생각과도 무관하지 않겠지요. ‘폐를 끼치지 말자‘의 정도가 심해져서 서비스나 계약을 통하지 않으면 타자와 관계를 맺지 못할 정도의 강박관념이 잠재의식에 가지치는 방법을 가르쳐주는 사람이나 원예 가위를 보내주는 사람도 나타났습니다.
이렇게 돌아보니 조제 보베의 마을 시장 같은 순환이 루차 리브로에 생겨난 계기는 저희의 ‘할 수 없음‘에 있었던 것 같습니다. 또 그 ‘할 수 없음‘을 모두에게 공개한 것이 오히려 윤활유가 되어주는 듯합니다. 『로이즈 뷰티풀』의 저자 쓰지 신이치가 슬로, 즉 느림을 ‘속도 부족‘으로 치부해버리지 않고 거기서 가능성을 발견했듯이, ‘할 수 없음‘ 에서 시작되는 순환이 사회 여기저기에서 생겨나는 모습을그려봅니다. - P66

그날 밤에는 도쿄 나가노부의 ‘옆 동네 커피’에서 남편과 함께 『1층 혁명: 사설 마을회관 ‘카페 런드리‘와 마을 조성』의 저자 다나카 모토코 씨와 대담을 했습니다. 다나카 모토코 씨는 길에서 커피를 무료로 나눠주는 ‘취미‘에서 착안해 ‘마이 퍼블릭(사설 공공시설)‘, 즉 필요한 공공시설은 직접 만든다는 아이디어를 낸 분으로 업무용 세탁기와 건조기를 두고 시작한 ‘카페 런드리‘도 이 아이디어의 연장선상에 있습니다. 대담 도중 다나카 씨가 다음과 같은 취지의 말을 했습니다.
"저는 우리 가게의 직원 모두가 어떤 손님에게든 늘 같은 어조, 같은 분위기로 ‘어서오세요‘라고 인사하지 못해도 괜찮다고 생각해요."
그 말을 들은 순간, 저는 바로 이것이 낮에 나눈 규칙 이야기에 대한 답변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습니다. 다나카씨는 다른 가게에서는 누구에게나 항상 같은 어조로 "어서오세요" 하고 말하는 것이 당연시되고 있기 때문에, 오히려 ‘카페 런드리‘에서는 그렇게 하지 않고 변화를 허용한다는 이야기를 이어서 했습니다. 이 내용은 그의 저서에도 있습니다.

직원들이 각자의 개성을 전면에 드러내며 일하기를 바라기에, 결국 나는 손님을 포기하게 만들기로 했다. 돈을 냈으니 이곳에서는 신처럼 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우리의 모든 서비스가 완벽할 것이며 언제나 판으로 찍어낸 것처럼 일률적으로 빈틈없는 대접을 받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 것을. …………나는 직원들에게 자주 이런 말을 한다. 우리 가게는 사람이 운영하는 곳이니까 흔들리는 게 당연해. 컨디션이 안좋을 때도 당연히 있고, 손님이 지난번에 왔을 때와는 뭔가 다르다고 느끼는 경우도 있는게 원래는 당연한 일이지.
다나카 모토코, <1층 혁명: 사설 마을회관 ‘카페 런드리‘와 마을 조성>

이는 공간의 규칙에 대해서도 할 수 있는 이야기가 아닐까요. ‘피하고 싶은 사태를 방지하고, 원래 생각했던 방향으로도 나아갈 수 있는‘ 완벽한 규칙을 준비해 둘 필요는 없습니다. 규칙을 정하는 것도 활용하는 것도 그 규칙이 적용되는 공간에 모이는 것도 사람이므로, 서로 흔들리거나 변화가 있어도 괜찮습니다. 그런 흔들림을 받아들일 수 있는 공간에서야말로 뭔가 재미있는 일이 생겨나지 않을까요. 규칙에 대한 저의 생각을 이야기할 때 자신감을 가지고 이렇게 말했으면 좋았을걸 하고 아쉬움이 남았습니다. 하지만 다나카 씨의 책에는 이런 구절도 있습니다.

여기는 다른 곳과 다릅니다. 모쪼록 자유롭게 시간을 보내세요. 하고 싶은 것을 하세요. 당신답게 있으세요. 나는 분명 이렇게 생각하고 있긴 하지만, 이 문장을 그대로 써서 가게에 걸어두는 멋없는 짓은 하고 싶지 않다. 멋이 없다는 것만으로 커뮤니케이션의 가능성은 닫히고 만다.
- 같은 책

그러므로 역시 루차 리브로 관내에는 이용 규칙을 붙여두지 않을 것이고, "이런 식으로 규칙을 정하는게 좋아요" 하고 조언하기보다 루차 리브로라는 공간이 운영되는 방식을 계속 보여주는 것이 최고라는, 원점으로 되돌아간 듯한 결론에 이르렀습니다. - P93

문장을 쓸 때 떠올리는 광경이 있습니다.
여러 사람이 회의실의 긴 책상에 둘러앉아 활발하게 이야기를 나누며 다양한 말로 화이트보드를 채워나가는 광경입니다. 이는 제가 2018년에 참여한 인지행동치료의 접근법을 따른 그룹 활동인 자존감 회복 프로그램SEP의 한 장면입니다. 이 활동의 내용을 간단히 설명하자면, 참가자 중 누군가의 일상 속 고민에 대해 그 사람의 마음이 편해지는 부적 같은 말을 모두 함께 제안하는 것입니다. 거기서 나온 몇가지 후보 중에서 당사자가 하나를 골라 수차례 소리 내어 말하며 몸에 스며들게 하는 것까지가 한 세트입니다.
예컨대 ‘주위 사람들은 모두 완벽한데 나만 엉망인 것 같아서 괴롭다‘는 고민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말이 화이트보드를 채웠습니다. "딱히 완벽하지 않아도 괜찮아", "사실은 모두가 완벽하지 않아", "당신은 엉망이 아니야" 등등. 내일을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되는 말을 이렇게 다채롭게 여러각도에서 제안받는 경험은 흔치 않을 거라고 느꼈습니다.
저도 이 활동에서 도움을 받았습니다. ‘앞으로의 인생이 막연히 불안하다‘는 고민에 대해 다양한 각도에서 많은 말을 건네받았습니다. "지금을 소중히 여기면 돼", "기댈 수있는 사람을 찾자", "긍정적인 시뮬레이션을 해보자" 등등 저 혼자서는 생각지도 못했던 말을 잔뜩 만났고, 그것은 지금도 마음 든든한 경험으로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또 참가자들의 배경이 저와 비슷해서 다른 사람의 고민도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 P1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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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킹맨션의 보스는 알고 있다 - 기존의 호혜, 증여, 분배 이론을 뒤흔드는 불확실성의 인류학
오가와 사야카 지음, 지비원 옮김 / 갈라파고스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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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진국의 우리는 산다는 것과 경제가 격리되어 있는 듯한, 거대한 허구의 세계 시스템에 우리를 맞추며 살아가는 것 같다. ‘현대스러움‘과 근원적인 경제의 논리가 인류사적으로 교차하고 있다. 청킹맨션의 탄자니아인들이 살아가는 모습은 미래 인류 사회가 어떠해야 하는지를 모색하는 이들, 공유• 연결• 특이점singularity • 기본 소득basic in come에 관심을 두는 모든 이에게도 흥미로울 것이다. 이들은 ‘아무도 신용하지 않는 것‘을 규칙으로 삼는 세계에서 누구에게나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한 사업 모델과 생활 보장 구조를 동시에 구축하고 있다. - P31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은 "다들 자신의 비즈니스를 하고 있어", "타인의 인생은 타인의 것이야"라고 말하며 남이 살아가는 방식에 그다지 참견하지 않는다. 하지만 그들은 "믿지 마"라고 이야기하면서도 우연히 만난, 정체를 알 수 없는 젊은이를 기꺼이 집에 머물게 한다. 믿지 말라고 내게 충고했던, 바로 그 인물과 서로 식사를 한턱 내고, 서로 돈을 빌려주고, 때로 다른 입장에서는 "그는 신용할수 있는 사람이야"라고도, "믿었는데 배신당했어"라고도 한다. 겉으로 드러내고 하는 사업과 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 표면상의 얼굴과 뒷모습, 페르소나와 민낯이라는 이분법적인 인간관에 따라 ‘신용‘을 설명하는 것과 개인적으로 교제하는 타자를 ‘믿거나‘ ‘믿지 않는‘ 것은 서로 별개의 일이다. 그의 또 다른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서도, 또다른 얼굴에는 전적으로 신뢰가 결여되어 있어도, 특정한 얼굴은 진심으로 ‘신뢰‘할 수 있다. ‘우정‘에 대해 생각해보면, 신뢰란 본래 그런 것인지도 모른다. 이는 무관심이 아니라 다양한 사정을 감안하여 일부러 관심을 두지 않기로 결심한 배려이기도 하다. - P59

카라마를 비롯한 조합원들과 생활하다 보면 조합 활동에 대한 실질적인 공헌도, 특정한 어려움, 궁지에 빠지게 된 ‘원인‘을 거의 불문하고, 마침 홍콩에 있는 그 타자가 처한 상황(결과)에만 응답하여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지원해주는 태도가 폭넓게 관찰된다. 이는 죽음이라는 특별한 사태에만 한정된 것이 아니다. 또한 조합 활동과 타자에 대한 세세한 규칙이나 규범을 가능한 한 만들지 않는다/애매한 채로 둔다는 의도가 있음을 알 수 있다. 앞에서 얘기한 사례가 보여주듯이 이들의 집회에서는 다양한 의견이 나오는데, 최종적으로는 ‘여러 사정이 있으니 세세하게 따지지 말자‘는 결론에 도달한다-무임승차자 문제도, 기부금을 상황에 따라 달리 받자는 제안도 다시 문제삼지 않았다.
…… 이들은 조언을 요청받지 않는 이상 타자의 비즈니스와 행위에 끼어들지 않기에 그 사람의 ‘사정‘을 자신이 속속들이 알 수 없음을 이해하고 있다.
…… 두 번째 배경으로는 그들만의 독자적인 인간관・주체관이 있다. 어디까지가 ‘자기 책임‘이고 어디부터가 ‘불운‘의 영역인지를 묻는 것은 원래 매우 어려운 일이지만, 이들은 애초에 개별적인 실천· 행위의 귀결을 타인에 대한 인물 평가 -‘노력이 부족하다‘, ‘생각이 안이하다‘, ‘별로 착하지 않다‘ 등 -와 연결 지어 말하는 것 자체를 거의 하지 않는다.
…… 이는 ‘본성‘, ‘드러내놓고 할 수 없는 사업‘을 몰라서 그런다기보다 누구나 처한 상황에 따라 좋은 방향으로도, 나쁜 방향으로도 변모할 가능성이 있다는 이해에 기초하고 있다고 보인다. …… 즉, ‘페르소나‘와 그 뒷면에는 ‘민낯‘이 있는데 ‘민낯‘을 모르니까 신뢰할 수 없다, 라고 생각하는 게 아니라, 책임을 돌릴 수 있는 일관된 불변의 자기 같은 건 없다고 인식하고 있는 듯하다.
세 번째 배경은 난민으로 거주하지 않는 조합원들은 유동적으로 아시아와 아프리카 국가들을 오가기 때문에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을 고려/계산하는 것 자체가 어렵다는 점이다. …… 말하자면 이들은 ’서로 돕는 인간을 구별, 평가하는 기준을 명확화하기‘와 ’상호 부조의 기준 규칙을 명확화하기‘ 어느 쪽도 하지 않는다. - P88

이들의 일상적인 상호 부조의 대부분은 ‘겸사겸사‘ 이루어진다. 예를 들면 2017년 1월경 카라마와 동료들은 불법 체류가 적발돼 3개월간 교도소에 수용되었다가 나온 마바야를 돌봐줬다. 카라마는 마바야가 무일푼이 되었다는 걸 알아서 점심과 저녁 식사 시간에 우연히 마주치면 밥을 사줬다. 하지만 딱히 더 신경을 써서 밥 먹자고 부르지는 않았고, 마주치지 않으면 한턱 내지도 않았다. 그래도 그날 장사가 잘된 누군가가 우연히 그와 마주치곤 했기에 -그들이 식사를 하러 가는 레스토랑은 항상 똑같다- 마바야는 늘 식사를 했다. 상대가 안내해줬으면 하는 곳이 목적지로 가는 길 도중에 있다면 데려가고, 침대가 비어 있으면 머물게 해준다. 아는 일이라면 친절히 가르쳐주고, 겸사겸사 해줄 수 있는 일이라면 흔쾌히 받아들인다. 하지만 부담스러운 상담은 선선히 거절하고, 자신의 상황에 따라 약속을 연락도 없이 어기며, 부끄러운 - P94

기색도 없이 "어이, 재패니즈!" 하고 웃으면서 찾아온다.
앞서 설명한 국경을 초월하는 ‘연계 플레이‘도 이 ‘겸사겸사‘의 논리로 작동한다. 마침 우연히 중국에서 홍콩으로 온 사람이 연락 담당을 맡고 기부금을 모은다. 상품구매를 마치고 모국으로 귀국하는 사람은 홍콩과 중국에서 모인 기부금과 텐트를 나른다. 이 ‘겸사겸사‘의 연계는 시신 운구에 한정된 일이 아니다. 홍콩에 난민으로 거주하는 탄자니아인은 모국에 있는 가족에게 줄 물건을 마침 귀국하는 교역인에게 맡기고 그 교역인은 ‘겸사겸사‘ 전달한다. 자금이 없어 홍콩에 건너오지 못하는 사람은 교역인에게 캐리어의 남는 공간만큼 자신의 상품도 ‘겸사겸사‘ 구매해 달라고 부탁한다. 누구나 ‘무리하지 않는다‘는 태도를 견지하고 있기에 이 상호 부조는 도움을 주는 사람에게 과도한 부담이 발생하지 않는다.
그들은 "타인을 도울 수 있는 사람이 반드시 있다"고 말한다. 돈을 벌 수 있다는 얘기에 솔깃해 앞선 이가 준 종잇조각 하나를 ‘길 안내‘ 삼아 중국과 홍콩에서 장사를 시작한 그들에게 ‘궁지에 빠진 경험‘을 물으면 다들 수없이 겪어본 인생의 위기를 들려준다. 그 위기들을 극복할수 있었던 것은 집회에서 조합원들이 말했듯이 우연히 만난 누군가에게 도움을 받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신념은 ‘동포에게 친절히 대해야 한다‘는 기대가 아니라, 각기 다른 인간들이 갖고 있는 서로 다른 가능성에서 주고받기 give and take의 기회를 발견해내는 각자의 ‘지혜‘에서 비롯한다. 이미 이야기했듯이 카라마의 휴대폰에는 정부 고관이나 대기업 사장, 사기꾼, 도둑, 전과자까지 온갖 사람이 등록되어 있다. 이들과의 네트워크는 ‘겸사겸사‘에 의해 구축되어왔다. 상대를 불문하고 돕는 까닭은 자신이 어려운 지경에 처했을 때 도움을 줄 수 있는 인물이 달라지기 때문이다.
어느 날 카라마가 내게 물었다. "사야카, 사기를 당했을 때 가장 도움이 되는 정보를 가르쳐줄 수 있는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 내가 "음... 경찰이나 변호사?" 하고 대답하자 "아니지. 그야 사기꾼의 친구인 게 당연하잖아. 누가 나중에 도움이 될지 모르는 거야. 왜냐하면 미래는 아무도 모르거든. 성공한다면 대기업 경영자인 동료가 중요해질 수 있어. 하지만 체포당하면 수감자인 동료가 중요해지는 법이야. 일본에 가는 날이 온다면 일본인인 사야카에게 길 안내를 부탁하겠지만, 어쩌면 태국에 가게 될지도 모르지. 중요한 것은 동료의 숫자가 아냐. [유형이 다른] 이런저런 동료가 있는지야"라고 말한다.
이처럼 타자의 ‘사정‘에 개입하지 않고, 구성원 사이의 엄밀한 호수성이나 의무와 책임도 불문한 채, 무수히 확대 증식하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이 각자 ‘겸사겸사‘ 할 수 있는 일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이들은 부담 없는 ‘서로 돕기‘를 촉진하고 국경을 초월하는 거대한 안전망 safety net을 만들어나가고 있다.
이 ‘열린 호수성‘은 구성원 간의 신뢰와 호수성을 키움으로써 ‘선한 사회‘를 목적 지향적으로 구축하고자 하는 ‘시민 사회 조직‘의 논리보다 ICT나 사물인터넷 IoT, AI등 테크놀로지의 발전에 의해 주목받게 된 공유경제나 공짜경제 Freeconomics 사상과 더 가까운 것처럼 보인다. 즉, 이들의 조합을 승차 공유 서비스 우버나 숙소 공유 서비스 에어비앤비, 또는 불특정 다수 유저의 게시물을 통해 다양한 정보를 무료로 이용하는 여러 사이트 같은 ‘플랫폼‘ 이라고 생각하면 논리가 통한다. 조합 활동은 이들이 비즈니스를 위해 구축한 SNS상의 경매 시스템이나 전자화폐가 오가는 크라우드 펀딩과 밀접하게 연동된다. - P94

어떤 인물을 다른 수많은 타인보다 ‘신뢰‘할 수 있다고 느끼는 핵심적인 순간은, 역시 자신 외의 누군가가 "그때는 정말 큰 도움을 받았어", "네가 없으면 재미없네"라는 댓글을 남김으로써 적어도 가장 최근의 상황에서 그가 많은 사람의 호감을 얻고 있음을 알게 되는 때다. 가족에게 줄 선물을 사는 데 동행하거나 홍콩 각지를 안내하고, 장례와 모국으로의 시신 운구 같은 탄자니아 홍콩조합의활동에 적극적으로 공헌하고, ‘겸사겸사‘ 낯모르는 젊은이에게 길 안내를 해주거나 집에 머물게 해주는 등의 친절은 반드시 당장의 ‘이익‘을 목적으로 삼고 있는 것은 아니지만, TRUST라는 구조가 있으면 그러한 친절이 돌고돌아 언젠가 ‘새로운 장사‘로 이어질지도 모른다는 기대정도는 할 수 있게 된다. 즉, 전문적인 사이트가 아닌 SNS 그 자체를 활용하는 행위가 비즈니스상의 이익과 사회적인 실천을 극히 자연스러운 형태로 유기적으로 연결하고 있다.
이렇게 비즈니스에 관한 이기적인 관심과 타자에 대한 이타적인 행동을 분간하기 어렵게 맺어져 있는 구조가 구축되면, 누군가가 내게 베푼 친절에 직접 갚아주지 못하더라도 이게 그 사람의 기회로 이어질 수 있으며, 내가 다른 누군가에게 제공한 친절에 상대방이 직접 갚지 않더라도 나는 이미 기회를 붙잡았을지도 모르는 세계가 구축되어간다. 즉, 여기에도 ‘부담‘을 애매하게 만들며 자발적인 도움을 촉진함으로써 ‘분명 누군가가 도와준다‘라는, 국경을 초월한 거대한 안전망을 형성하는 장치가 있는 것이다. - P172

탄자니아인의 플랫폼은 어디까지나 엄밀한 호수성을 기대하기 어려운, 정해진 형태가 없고 이질성이 강한 멤버십 속에서, 누군가에게 부담을 지우지 않은 채 무리하지 않으면서 가벼운 마음으로 서로 돕기 위한 시행착오를 겪는 과정에서 구축된 것이며, 시장 교환의 논리가 그 위에 올라타고 있을 뿐이다. 즉 ‘닫힌 호수성‘을 ‘열린 호수성‘으로, ‘증여 교환‘을 ‘분배‘로 조정해나가는 과정에서 자생적으로 형성된 구조가 나중에 시장 교환 쪽에서도 활용된 것이다.
게다가 ‘효율성‘을 추구하여 이들의 플랫폼을 시장교환에 적합한 형태로 세련화 · 제도화해 나간다면, 본래의 목적이었던 ‘인심을 쓰는 기쁨‘, ‘동료와의 공존‘, ‘놀고 싶은 마음과 장난치고 싶은 마음‘, ‘자영업의 자유로운 정신‘의 가치보다 경제적 가치를 우선하게 만드는 모순을 낳는다.
친절한 행동은 타자에게 공감하고 동료와 공존하기 위한 것이며, 이것이 ‘장사‘에도 연결된다면 기쁜 일이고 행운이다. 그러나 ‘장사‘를 위해 동료에게 등급을 매기거나 평가하고, 동료를 늘리려는 경쟁이 목적이 되면 친절한 행동 자체가 따분한 일이 된다. 동료를 웃길 수 있는 웃긴 동영상을 인터넷에서 찾거나 많은 동료에게서 칭찬받는 자신을 찍은 동영상을 올리는 것은 ‘놀이‘이자 ‘즐거움‘ 그 자체이며 겸사겸사 ‘일‘에도 활용하고 있을 뿐, ‘일‘을 위해 인터넷을 뒤지거나 자신을 찍은 동영상을 올린다면 모처럼의 즐거움이 시시해지고 귀찮기 짝이 없는 시간이 되고 만다.
생각해보면 ‘즐겁지 않다‘, ‘귀찮다‘ 같은 매우 자연스러운 실천적인 감각, 거래 실적이나 능력으로 친구에게 등급을 매기는 것은 옳지 않다는 평범한 공정함을 지니고 굳이 ‘카오스‘ 상태로 남아 있는 데에는, 시장 교환과 증여 교환이나 분배의 가치가 역전되지 않는 접속 형태가 있는 것 같다. - P176

프랑스의 인류학자 마르크 앙스파크Mark Anspach는 『다음엔 내가 갚을 차례A Charge de Revanche』‘라는 저서에서 "상대도 같은 것을 한다는 조건"으로 성립하는 상호성(호수성)에 대해 논한다. 서로 돕기는 ‘그를 돕는다면 내가 어려울 때 상대방도 똑같이 나를 도울 것이다‘라고 서로 기대하는 선순환의 호수성이다. 하지만 ‘당한 만큼 갚아준다‘라는 복수의 연쇄, 악순환의 상호성도 존재한다. 앙스파크는 선순환하는 상호성을 위해서는 상대방에게 자발적으로 증여(빌려주기)를 하고 상대방과의 미래 관계를 믿고 여기에 ‘베팅할‘ - 처음에는 리스크를 받아들일 - 필요가 있으며 더불어 선순환을 유지하려면 서로가 상대방에게 "빚을 졌다"라는 감정을 계속 가질 필요가 있다고 설명한다.
앙스파크의 논의는 이러한 선순환의 호수성이 얼마나 쉽게 악순환의 호수성으로 전락하는지 설명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지금 우리가 사는 세계는 ‘안심‘, ‘안전‘을 부르짖으며 미래를 예측 가능하게 만들고 리스크를 줄여야 한다는 사고방식을 전면에 내세우고 있다. 이런 사고방식은 ‘준다는 확약 없이는 줄 수 없는‘ 사회적 관습을 강화하고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즉시 청산하려는 태도를 낳는다. 문자메시지도 친절도 곧바로 답하지 않으면 불안하다. 어떻게 될지 모르는 미래에 빚을 남겨두는 것이 걱정이다. 그러한 관계에서는 내가 준 것과 상대방이 준 것이 등가인지, 매 순간 빌려준 것과 빌린 것을 셈해서 딱 맞아떨어지는지 신경 쓰인다. 따라서 어느 한쪽이 ‘손해를 보고 있다‘고 느끼면 선순환의 상호성은 손쉽게 악순환의 상호성으로 전화轉化한다. 현대 일본에서 ‘나만 애쓰고 있다‘, ‘나만 손해를 보고 있다‘는 불만과 이것이 낳는 두려움- 예를 들면 혐오 발언 - 이, 친구나 부부 사이 등과 같은 인간관계를 맺기 성가시다는 감각부터 연금, 기초생활보장 등의 사회 제도에 대한 불신까지 광범위하게 영향을 미치고 있다. - P258

마찬가지로, 스스로 무엇이든 해낼 수 있는 인간, 완벽한 인간이 되게끔 노력해서 자신의 가능성에 베팅하거나 또는 가치관과 자질이 서로 비슷한 동질적인 소수와 깊은 관계를 맺고 이에 따른 호수성 및 응답할 의무에 확실히 응답해가는 대신에, 능력, 자질, 선악의 기준, 인간성이 다른 사람들과 가능한 한 많이 느슨하게 연결되고 타자의 다양성이 만들어내는 ‘우발적인 응답‘의 가능성에 베팅하는 것은 ‘이질성과 유동성이 높고 누가 응답해줄지 모르는‘ 상황에서는 불합리한 전략이 아니다. 어떤 일이든 나름대로 해내는 제너럴리스트인 동시에 어떤 인간과도 나름대로 함께 헤쳐나갈 수 있는 제너럴리스트가 되어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나가는 것이다.
이처럼 이들은 타자의 사정에 깊게 발을 들이지 않고 멤버 상호 간의 엄밀한 호수성이나 의무 혹은 책임도 불문한 채, 무수히 증식 확대되는 네트워크 내 사람들이 각자 ‘겸사겸사‘ 할 수 있는 것을 하는 ‘열린 호수성‘을 기반으로 삼음으로써 부담 없이 서로 돕기를 촉진하고, 홍콩, 중국, 마카오, 태국, 두바이, 아프리카 국가에 걸친 거대한 안전망을 만들어냈다 - P264

사실 나도 다양한 창업가의 아이디어가 넘쳐흐르는 공유경제에 매력을 느낀다. 하지만 동시에 생각한다. 타자에게 나누어줄 수 있는 잉여 자원을 가져 더 선한 사회 실현에 공헌 가능한 ‘시민‘과 밀접하게 관련된 공유경제에서누락된 사람들은 어떻게 하면 좋을까. "예금 0원, 주소 불명, 직업은 사기꾼, 취미는 방랑입니다"라고 회원 가입란에 써도 받아들여질 수 있을까.
이 책에서 강조한 ‘겸사겸사‘는 그 사람이 가진 정신적/재정적/능력적/시간적 여력이다. 그런데 홍콩의 탄자니아인들은 유휴 자원이나 자투리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겠다는 목적 지향적인 경제 논리로 ‘겸사겸사‘를 조직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들이 ‘겸사겸사‘, ‘무리하지 않는 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그것이 주는 사람이 유효하게 써먹을 수 있는 ‘낭비‘이기 때문이 아니라, 그 ‘대단치않음‘이야말로 각자의 인생을 찾아 홍콩에 와서 각자의 방식대로 살아가는 개별 인간의 자율성, 서로 간의 대등함을 저해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들이 서로를 돕는 이유는 시민 사회, 환경 지속적인 사회를 실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우연일지라도 ‘함께 있게‘ 된 정체를 알 수없는 타자에게 ‘나는 당신의 동료다‘, ‘당신은 나의 동료다‘라고 표명하기 위해서인 듯하다. 즉, 새로운 경제 형태를 만들기 위해 커뮤니티의 논리를 도입한 것이 아니라, 동료 간의 증여와 분배를 위해 테크놀로지와 자본주의경제의 논리를 도입하고 있는 것이다.
보츠먼과 로저스는 이어서 다음과 같이 지적한다.

인류학자와 사회경제학자들은 "당신이 나에게 좋은 일을 해주면 나도 당신에게 좋은 일을 해줄게"라는 직접 호혜주의 reciprocity의 원리를 오랫동안 연구해왔다. (...) 친척끼리, 이웃끼리, 작은 마을 주민끼리 거래하던 시절, 서로 얼굴을 맞대고 주고받던 시절, 누가 누구와 어떤 교류를 했는지 쉽게 파악할 수 있었던 시절에는 서로 돕는 게 당연했을 것이다. 하지만 서로 모르는 사람들, 또는 지리적으로 멀리 떨어진 사람들이 주고받는 커뮤니티에서는 어떨까?
소셜 네트워크에서 상호 부조는 간접적으로 이루어진다(간접 호혜주의). 이곳에서는 더 이상 ‘내가 널 도우면 네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단순한 전제가 성립하지 않는다. 이제 상호 부조의 구조는 ‘내가 널 도우면 누군가가나를 도와줄 것이다‘로 바뀌었다.

이 ‘내가 널 도우면 누군가가 나를 도와줄 것이다‘라는 원칙은 내가 홍콩 탄자니아인의 사회적 세계를 파악하기 위해 관심을 갖고 있는 원칙이다. - P266

카라마와 동료들과 함께 지내면서 나는 종종 이상한 기분에 빠진다. 이들은 하나같이 "누구도 신뢰하지 않아", "누구도 신뢰해서는 안 돼"라고 말한다. 딱히 성격이 비뚤어진 것도 아니고 지나친 경계 태세를 취하는 것도 아니다. 제5장에서 언급했듯이 홍콩 탄자니아인들은 모두 배신당한 경험이 있기에 이는 타자를 이해하는 현실적인 태도에 지나지 않는다. 그런데도 이들은 자주 "나는○○에게 사랑받고 있어", "OO는 나를 좋아해"라고 단언한다. 참여하고 있는 네트워크에 대수롭지 않게 올린 자신의 요구나 아이디어에 우연히 응답하는 자가 나타나면 "저 사람은 나를 좋아해"라고 말한다. 누구도 신용하지 않는 할 수 없는 세계에서 나에게 베팅했으니 ‘저 사람은 분명 나를 좋아한다‘는 논리가 성립하는 듯하다. 그런데 반대로 "저 사람은 나를 싫어해", "나는 ㅇㅇ가 좋아"라는 말은 좀처럼 들을 수 없다. 왜냐하면 ‘밑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올린 요구나 아이디어에 우연히 응해준 타자야말로 중요하기 때문이다. 응하지 않은 타자 때문에 속을 끓이는 것은 애초에 ‘밑져야 본전‘이거나 ‘우연한 상황‘이었으니까 의미가 없는 데다, 내가 누구를 좋아하는지 또한 내 활동의 성패와 거의 관계가 없다.
물건이나 서비스, 정보가 그때그때 필요한 누군가에게 자연스럽게 돌아가는 시스템, 누군가에게 과도한 부담이나 권위를 부여하지 않고 돌아가는 분배 시스템이 시장경제 한복판에서 형성되어가기를 나는 기대한다. 제5장에서 다룬, 내가 잠시 경험한 것처럼 서로 나누어줌으로써 동료가 되고, 그럼으로써 동료가 마침 우연히 소유한 자원 - 무임승차 멤버십과 팔다 남은 상품 - 을 계속 나누어주는 시스템이 넓은 네트워크로 실현된다면 어떨까. 이에 따라 딱히 뛰어나지 않고 때로는 불성실하다 해도 누군가의 변덕 덕에 반드시 살아갈 수 있는 분배경제의 유토피아가 구축되어가는 것을 몽상해본다. 인공지능이든 전통적인 종교든 이를 실현할 수 있다면 뭐든 상관없다고 생각한다. - P2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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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다는 것에 관하여 - 앓기, 읽기, 쓰기, 살기
메이 지음 / 복복서가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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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가 지나고 나는 우연히 ‘고통 전시회Pain Exhibit‘라는 웹사이트를 알게 됐다. 섬유근육통, 만성피로증후군, 편두통, 관절염 등 질병이나 사고 후유증으로 만성적인 통증에 시달려온 사람들이 자신으 고통을 표현한 미술작품을 온라인상에 전시하는 곳이다.
……
"통증은 사람들이 이해할 수 있는 것 너머에 있다. 나 자신이 걸어다니는 시체처럼 느껴진다."
"통증은 소통되지 않고, 미칠 정도로 주관적이며, 언어와 계량에 저항하는 자기 혼자만의 현실이다. 통증 속에 사는 것은 고립 속에 사는 것이다."
"나는 자화상을 통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느낌을 표현하고자 한다. 그건 내가 겪는 고통을 설명하려는 시도다. 내게 미술작업은 항상적인 통증이 있는 삶을 살아내도록 나 자신을 돕기 위해 하는 일이다. 그림은 마치 얼굴 없는 적에게 얼굴을 주면서 내 통증의 기록이 되는 것과도 같다." - P61

타인들의 현실과 분리되어 나만의 현실 속에 있다는 느낌은 사실 드문 경험이 아니지 않은가. 인생의 힘든 순간에 누구나 경험한다. 나는 암흑 속에 있는 것 같지만 바깥세상은 아무렇지 않게 돌아가고 있다는 느낌을 말이다. 내 속은 무너져내리고 있지만 그걸 아는 사람이 없고, 내 안에서는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지고 있지만 외부엔 아무런 흔적이 없다. 외롭고 부조리하다는 감정이 들며, 멀쩡해 보이는 세상과 사람들의 모습은 때로 분노를 일으키기까지 한다. 우울증 환자의 자살률이 봄에 높은 이유는 다음과 같은 말로 설명되곤 한다. ‘일조량이 늘어나며 충동적 행동을 유발하게 해서‘ ‘겨울에 심하던 우울증이 봄이 되어 누그러지며 죽을 기운이 생겨서‘. 하지만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봄볕의 부드러움, 바람이 품은 온기, 연두빛 싹들의 생기로 가득한 세상과 자신의 내면이 극명하게 달라서라고. 고통받는다는 것을 이처럼 주관적 세계와 객관적 세계의 간극이라는 관점에서 정의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간극 자체가 고통을 가져온다. - P78

모든 그림 중 고통을 가장 잘 표현한 작품을 꼽으라고 한다면 나는 바로 이 그림, 피도 칼도 상처도 등장하지 않는 이 그림을 고르겠다.
얼핏 보기엔 평화로운 어촌 마을의 일상을 그린 풍경화로 보인다. 농부는 밭을 갈고 양치기는 양을 몰고 낚시꾼은 낚시를 하고 배는 바다 위를 떠간다. 제목을 보고 나서야 그림이 무엇에 관한 것인지 알 수 있다. <추락하는 이카로스가 있는 풍경>. 화면 오른쪽 물 아래로 사라져가는 두 다리가 이카로스다.
또 양치기의 시선이 어디를 향하는지도 알게 된다. 양치기는아직 하늘을 날고 있는 이카로스의 아버지 다이달로스를 보고있다.
처음 이 그림을 봤을 때 ‘천재다!‘라며 감탄했다. 내 오랜 관심이 ‘보이지 않는 내부의 것을 어떻게 그리지‘에 있었다면, 피터르 브뤼헐은 내면의 암흑이나 지옥을 그리는 대신 시점을 밖으로 빼내 전환함으로써 고통받는 사람의 내부에서 일어나는 일을 오히려 정확히 그려내기 때문이다. 태양 가까이 날았던 드문 환희와 영광의 기억을 포함해 모든 것이 사라지는 순간, 한 세계가 사라지는 그 순간은 화면 한구석 사라져가는, 거의 우스꽝스럽게 보이는 작고 가냘픈 두 다리로 나타날 뿐이다. 너무도 사소하고, 하찮고, 혼자다. 이와 대조적으로 화면 전체를 차지하고 있는 것은 변함없이 일상적인 세계의 풍경이다. 이 격차가 고통임을 브뤼헐은 알고 있었다. - P83

통증의 한가운데에 있다는 건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통증이 역사가 된다는 건 거리가 생긴다는 것이고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이며, 역사 쓰기는 편집, 조작, 오류를 동반한다. 완전하게 전달하고 완벽하게 공감받고 싶어. 갈증과 갈망은 아픈 사람을 사로잡지만 완전과 완벽을 향한 시도는 손으로 구름을 뚫고 천국의 조각을 떼오려는 일과 같아서 영원히 실패할 것이다. 불완전함을 받아들인 이에게만 언어는 온다. - P112

곧 배웠다. 미래를 생각하는 건 금기였다. 사막의 너비를 가늠하지 마라. 과거를 생각하는 것도 금기였다. 네 가장 소중한 것을 뒤에 두고 너는 앞만 보고…… 내다보거나 뒤돌아보는 일 모두 자해였으므로 해서는 안 되는 일이었다. 하루씩만 살자, 하루씩만. 나의 만트라가 된 말. 하루를 보내는 건 어떤 의미에서는 ‘쉬웠다. 내가 할 수 있는 일과 없는 일은 정해져 있었기 때문이다.
언제 자고 일어나고 먹을지, 무엇을 먹을지, 무엇을 할지, 무엇을 하면 안 되는지 그 모두를 알려주는 고통은 표지였고 조련사였고 온갖 세세한 것을 전부 통제하는 미친 관리자였다. 한편으로 고통이 정한 루틴은 내게 종교이기도 했다. 루틴만 믿고 따르면 언제나 구원받을 수 있기 때문에, 같은 시간에 일어나 같은 시간에 먹고 자는 일만 할 수 있다면 나는 무너지지 않은 것이다. 사라지고 싶은 마음이 드는 날도 루틴만 지켜지면 괜찮은 것이다. 그러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다. 나 자신도 속일 수 있다. 신마저도 내가 괜찮은 줄 알 것이다….. - P146

희생자-여성작가로서의 초상이 사라지지 않는 건 많은 경우 그저 관성이나 지적 게으름 때문일 수 있다. 예술가들의 고통과 고난이 언제나 흥미로우며 관심을 끌어모으는 화제이기 때문일 수도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 거기엔 다른 차원의, 젠더화된 끌림이 있다. "우리가 여성 희생자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아, 우리가 정말 그들을 얼마나 사랑하는지." 도리스 레싱은 영화 <디 아워스>를 두고 정확하게 개탄한다(나는 레싱이 사용한 ‘우리‘라는 주어의 정직함이 좋다. 여성 희생자를 사랑하는 게 남성들만은 아니기 때문이다). 그렇다. 우리는 고통받는 여자를 사랑한다. 그들에게서 눈을 떼지못한다. 그들에 관해 이야기하기를 멈추지 못한다. 나아가 그런 초상은 가부장제 사회의 문화와 예술이 몰두하고 개발하고 정교화해온 도상 • 서사의 역사와 닿아 있다. 19세기 화가들이 집착하며 그리고 또 그렸던(그래서 물에 빠지고 또 빠졌으나 결코물에 불은 모습인 적은 없었던) 오필리아, 미치고 병들고 자살하고 비참하게 죽은 그 수많은 문학작품과 오페라와 영화 속 여자 주인공들이 계보를 이루는 역사, 여성의 질병과 수난과 죽음이 아름다움을 생산하고 드라마를 추동하고 클라이맥스를 이루고 감정적 스펙터클과 카타르시스를 제공하는 예술의 역사. 우리의 사랑은 이 오래되고 화려한 역사의 자장 안에 있다.
헤밍웨이의 엽총이나 데이비드 포스터 윌리스의 가죽 벨트는 남성지에 패션 아이템으로 소개되지 않을 것이다. 은은한 달빛이 포치 위에 곱게 내려앉은 밤에 월리스가 목을 매는장면으로 시작해서 목을 매는 장면으로 끝나는 영화, 그 장면의 미적인 요소가 아련하고 가슴을 휘젓는 슬픔을 증폭하도록 구성되고 배치되는 영화는 상상되지도, 만들어지지도 않을 것이다. 이 사실의 함의는 결코 사소하지 않다. 제정신이 아니고(죽었기에) 의식이 없고 행위할 수 없고 모든 통제력을 잃고 운명에 찢긴 여성을 향한 매혹은 여성 혐오의 극단이다. 여성의 수동성과 고통과 죽음에서 미학을 발명한 가부장제 사회의 도착이다. 그리고 우리가 이런 여성 희생자의 초상을 놓지 못한다는 건 어쩌면 우리 자신이 의식하고 있는 것보다 훨씬 더 끔찍하고 자기파괴적인 일인지 모른다. - P176

인생 후반에 그의 하루는 대개 이랬다. 오전에 세 시간의 글쓰기, 오후엔 원고 타이핑, 편지와 일기 쓰기, 손님 만나기, 모임과 외출, 독서, 그리고 무엇보다 산책. 아침에 몇백 단어를 종이 위에 쏟아낸 버지니아는 날씨에 아랑곳하지 않고 나가서 몇 시간씩 활보하며 머릿속으로 문장들을 곱씹고 지어냈다. 단단하게 조직된 일상은 오르내리는 기분과 신체를 붙잡아두는 안정의 앵커였고, 그가 병자이면서 그 밖의 많고도 많은 것일 수 있었던 풍요의 근간이었고, 그 자체로 만족의 원천이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지, 얼마나 평온한지. L과 함께 지금 이곳에서의 삶이 얼마나 달콤한지, 규칙적이고 정돈된 생활, 정원, 밤의 내 방, 음악, 산책, 수월하고 즐거운 글쓰기." 이렇듯 병을 포함해 자신이 마주한 상황들과 씨름하면서도 자신에게 딱 맞는 공간과 시간과 인간관계를 끈질기게 마련해가고 누린 사람에게 허약하다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병에 시달리며 살았다는 말 역시 환자의 무력함을 지나치게 강조하며, 울프가 평범하게 -다른 이들처럼 바쁘게 자기 일을 하며, 좋은 기분과 나쁜 기분과 보통인 기분을 오가며- 보낸 대부분의 날을 지운다. - P189

취약함을 비하하지 않을 것이다. 단어들을 재정의할 것이다. 가령 강인함은 무너진 적 없는 것이 아니라 계속 돌아오는 것이 될것이고, 행복은 괴로움의 유무에 관한 것이 아니라 곤경을 수용하고 통과하는 기술에 관한 것이 될 것이며, 충만함은 즐거움만 가득하다는 뜻이 아니라 아픔도 기쁨도 전부 온전히 살아낸다는 뜻이 될 것이다. 또한 취약함을 결함으로 고정해두지 않는 그런 언어는 현상의 양가적인 이면을 함께 이해할 것이다. ‘진짜 멋지고 높은 파도와 지옥같이 깊은 심연‘을 오가는 흔들림은 고통스러운 부침일 뿐 아니라 경험의 넓은 진폭일 수 있다. 남들보다 커다란 삶의 용량capacity이고, 인간에 대한 깊은 이해의 기반일 수 있다. - P191

"1913년 이후로 이렇게 내 감정의 절벽에 가까이 있었던 적이 없다"고 버지니아가 고백했으며 "무서운 시기"였다고 레너드가 회고했을 만큼 힘겨운 일 년이었다. 그러나 또 한 번의 위기를 울프는 완전히 무너지는 일 없이 통과한다. 수십 년간 쌓아온 자기 몸과 정신의 작동에 관한 지식, 참조할 수 있는 과거 경험들, 개발하고 축적해온 대응책 등 병자로서의 숙련은 그가 버티는 데 핵심적이었을 것이다(돌보는 사람으로서 레너드의숙련 역시 당연히 중요했을 것이다). 이듬해 출간 직전, 울프는 한번 더 일기에 두려움을 고백한다. "노출된 순간들은 무섭다"고그러면서 이런 말을 한다. "이렇게 뜨거운 벽돌 위에서 춤추는일을 죽을 때까지 계속해야 한다는 걸 안다." 죽을 때까지 계속 이렇겠지. 지금까지 앓아온 역사에 근거해 미래의 자기 상태를 예상해보는 외삽 추정은 만성적인 병이 있는 환자라면 누구나 하는 일이다. 이 문장에 담긴 수십 년의 시간, 반복, 어느 정도의 체념, 어느 정도의 각오는 존경스럽고, 또한 가슴 아프다.

나는 할 수 있을 것이다. 할 수 있을 것이다.
침착하고 강인하고 담대하게.
용기와 끈기만 있으면 끝낼 수 있을 것이다. - P199

무엇이 날 떠내려가지 못하게 했더라. 무엇이 날 여기까지 데려왔더라. 십몇 년이 지나도록 내 발은 가끔씩 지면에 닿지 않는다. 내가 왜 아직도 지구에 붙어 있었더라.
바다 위에 백만 개의 다이아몬드로 부서지는 빛, 신나서 못견디겠다는 듯 부풀어오른 적란운, 반짝반짝하는 손동작처럼 바람 속에서 흔들리는 플라타너스 나뭇잎들, 내가 만지면 몸을 떨며 오줌을 싸는 바보 같은 강아지, "너 짐 아니야. 짐인 적 없었어", 구름처럼 뭉치고 퍼지고 나와 함께 흘렀던 음악들, 그의 머리칼 사이에 코를 묻었던 기억, 이 이야기의 끝을 보고 싶다는 마음, "죽음은 어찌되었든 올 테니까, 중요한 건 죽는 게 아니라 살아남는 것이고 그건 기적일 거야"(이사벨 아옌데), 마침내 돌아갈 거라는 믿음 혹은 망상, 누군가와의 약속, 누군가의 편지, 말, 문장들, 내 안의 속삭임. 누군가에게 상처를 주지 않기 위해 죽지 않은 적도 있고, 할 일이 있다고 생각해서 살기도 했다. 할 일. 그래, 일도 중요했지. 나는 농담하곤 했다. "그 고통에 관한 책만 번역하고 죽자고 생각했는데, 너무 두꺼운 책을 골랐지 뭐야!"
기적의 시간이라고 생각했던 생존의 시간을 뒤늦게 재평가한다. 어쩌면 나는 그 오랜 시간을 그저 가짜 미끼를 쫓아 질주하는 경주견처럼 산 게 아닐까. ‘그곳‘은 늘 바로 눈앞에 있었기에. 그리고 고통스러운 여정의 끝에서 듣고 싶지 않았던 말, 사실은 이게 전부야. 달리던 중에 게임의 규칙을 깨닫고 멈춰 낑낑댄 개가 한 마리라도 있었을까.
무엇이 날 일으켜주는지 아니?
만물이야 Anything.
일몰 후에도 무더위가 가시지 않는 날들이 이어지고, 그래도 매일 강가를 걷고 또 걷는다. 물을 가르는 보트의 모터 소리를 듣는다. 수상스키에 올라탄 이의 즐거운 몸을 본다.

무엇이 날 잡아주는지 아니?

풀 냄새가 내 몸을 물들이지 못한다. 다시 산책할 수 있다는 사실에도, 윤슬에도, 적란운에도, 플라타너스에도 나는 자꾸 무감하다.

만물이야.

조지 클루니는 보드카를 한 모금 마시고 말했다. "그래, 계속 가봤자 뭐할 거야. 살아봤자 뭐하겠어. 그렇지만 일단 가기로 마음먹는다면 계속 해봐야지." 무엇이 날.
깨달음과 결단으로 이어지는 익숙하고 바람직한 서사로 글을 끝맺고 싶지만 그럴 수가 없다.
점점 작아지는 엄마의 몸, 그럼에도 여전히 나를 미치게 하는 엄마의 잔소리("간절히 기도하고 성령 받아라"), 잇몸 퇴축과 치간 칫솔과 홍대 근처 좋은 치과가 주요 주제인 전화 통화, 아이허브 사이트에서의 영양제 쇼핑, 초등학생들의 머릿속에 영어 현재완료 시제를 쑤셔 넣으려는 나의 닦달, 장마철에 집으로 들어온 돈벌레와 에프킬라, 눈이 아파 급격히 줄어든 트위터 사용 시간, 돈 걱정, 허리 걱정, 녹아버린 빙하, 욕실 청소, 과탄산소다, 조카의 입시 준비, ‘점심에 뭐 먹지‘, 양파 다듬기, 코로나 백신, ‘계속할 수 있을까‘와 ‘계속해야 한다‘를 오가는 글쓰기, 바로 이 글, 자신에게조차 감추고 싶은 이 우울한 병자의 글. 내 사랑은 더 낮고 넓어져야 하는지 모른다. 만물이야. 이번엔 이것들 사이에 발을 꽂아 넣을 순 없을까. 나를 여기 이 흙에 심을 순 없을까. 마침내 그럴 순 없을까. - P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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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그 짧지 않은 시간 동안 내가 배우고 익히고 알게 된 것들이 있다. 자신에게 관대해지는 법. 숨만 쉬고 있어도 박수 칠 일이다. 기다리는 법. 그게 할 수 있는 일의 전부인 때가 있다. 제한 속의 자유로움. 내 몸이 정해준 한계 위에서 내가 할 수 있는 일, 하고 싶은 일, 해야 하는 일은 같은 것이다. 자신에 대한 앎. 나는 내가 어떻게 견뎠는지 안다. 내 몸부림을 안다. 다짐과 맹세를 안다. 내 밤의 꿈과 악몽과 기도를 안다. 무엇이 나를 지탱하는지 안다. 내가 끝까지 놓지 못하는 게 무엇인지 안다. 그렇게나 커다란 공포와 아름다움, 그게 모두 내 안에 존재할 수 있으며 내 마음이 그걸 버틸 수 있다는 걸 안다. 혹은 산산조각난 마음으로도 살 수 있다는 걸 안다. 지침이 된 기억. 미래에 대한 불안과 조바심, 과거에 대한 향수나 후회로 질식되지 않은 현재를 살아야 한다. 나의 최선이 닿은 곳이 여기임을, 여기, 오직 여기임을 믿는다. 쓰기의 기술 몇 개. 그건 앓기의 기술과 그리 다르지 않았다. 고독 속에 번창하기, 두 현실을 살기, 나만의 속도로 나아가기, 자신에게 분명해질 때까지 실험하기, 두려움 속에 계속하기, 불확실성 속에 계속하기, 더이상 못 할 것 같다고 생각하며 계속하기..…………
그 어떤 아름다움도 경이도 배움도 무의미해지는 밑바닥의 시간을 충분히 많이 겪고 난 지금, 이중 어떤 것은 더이상 내 마음을 밝히지 못한다. 한때 자부심을 가졌던 앎에도 무감해졌다. 병이 계속 악화되었다면 할 수 없을 소리라고 여기게 된 것도 있다. 그럼에도 이것들이 내 삶에서 가장 놀랍고 중요한 변화였다는 사실에는 변함이 없다. 내게 미미하게나마 존재하는 끈기와 단단함과 자신에 대한 믿음은 전부 아팠던 시간에서 왔다. 내 언어와 비밀과 사랑의 수원. 병의 시간은 내게 그렇게 남을 것이다.

나는 되고자 했던 게 되지 못한 것인가, 꿈을 이루지 못한 것인가, 원했던 삶을 놓친 것인가, 시간을 버리고 낭비한 것인가, 기회와 청춘을 빼앗겼는가, 상실뿐인가 뒤처진 것인가, 그 일이 없었다면 지금 나는 더 행복했을 것인가. 그래서, 다시 이 질문. 선택할 수 있다면 이 병이 없었길 원해?

답을 해보자면, 그렇다, 병이 없었으면 좋았을 것이다. 건강했으면 좋았을 것이다. 시간을 되돌려 한 번 더 겪으라고 한다면 그냥 안 살고 말 것이며(우리가 인생을 한 번만 산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아무리 눈이 번쩍 뜨이는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고 해도 다시는 그런 식으로 얻고 싶지 않다. 하지만 그렇다라는 답이 지금의 내가 사라져야 한다는 뜻이라면 대답을 못 하겠다. 다른 방식으로는 내게 오지 않았을 변화들 때문이다. 예기치 못했던 방식으로, 원하지 않았던 방식으로, 나는 태산이 시작된 곳과 대양의 가장자리를 보았다. 삶의 아이러니와 농담에 의해 나는 내가 되고 싶었던 사람이 되었다. 그렇다면 지금의 나를 만든 그 시간이 없었길 내가 어떻게 원할 수 있겠는가. 어릴 때 꿈꾼 대단한 인물이 아니라 그저 내 자신을 조금 더 잘 견디는 사람이 되었을 뿐이지만, 그럼에도 인간으로서 계속 살아야 한다면 나는 이 나로, 내가 겪어야 했던 모든 일을 겪은 바로 이 나로 살고 싶다.
‘이 단체에서 오 년만 더 해보고 우리끼리 새로 단체를 만들어 키우자!‘라고 루미-세상을 떠난 내 친구-와 의기투합했던 날을 생각한다. 그 나라에서 우리가 꾸었던 꿈을 생각한다. 내가 갔을지도 모르는 섬들, 건넜을지도 모르는 바다들, 배웠을지도 모르는 외국어들을 생각한다. 비행기에서 내려다보는 구름의 뒷면, 사랑하는 그 풍경을 지겨울 정도로 자주 봤을지도 모른다. 이 모든 것 대신 나는 질병의 왕국을 오래 떠돌았으며 고통의 언어를 익혔다. 그러나 내가 과거의 꿈과 계획을 돌아보는 때는 드물고, 돌아본다고 해도 회한의 감정이 아니다. 내 작은 세계 안에서 내가 출 수 있는 가장 큰 춤을 췄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리고 난 이 춤이 남긴 내가 마음에 든다. - P1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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