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예전만큼 괴롭지는 않았다. 내가 한 것이 실망도, 절망도, 비관도, 포기도, 체념도 아닌 낙담이었기 때문이다. ‘낙담: 바라던 일이 뜻대로 되지 않아 마음이 몹시 상함‘ 떨어질 落에 쓸개 膽을 쓴다. 쓸개가 떨어지는 기분. 사막의 낙타가 흘리는 눈물인지 땀인지 모를 어떤 뜨듯하고 축축한 액상의 정서가 이 단어에는 배어 있다. [낙땀]. 비슷한 뜻을 지닌 그 모든 단어들 중에서 낙담이야말로 가장 사랑스럽고 대견한 단어다. 시무룩한 얼굴과 축 처진 어깨, 저무는 석양처럼 한쪽으로기울어진 고개를 한 채, 떨어진 쓸개를 주워담으며 하는 말. 에이, 다시 한번 해보자. 쓸개를 떨어뜨린 채 계속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으니까. 이 단어에서 풍기는 한시성은 마음껏 낙담하도록 거대한 자유를 준다. 작은 일을 도모하며 작게 실패한 사람이 금세 딛고 일어나 다시 이뤄낼 그 작은 무언가를, 낙담이라는 단어를 들으며 상상한다. 손에 든 지갑을 실수로 잠시 땅에 떨어뜨린 것처럼 용기와 줏대가 잠시 소강하는 것뿐. 다시 집어올리면 그만이다. 때로는 후두둑 눈물이 떨어질 때도있지만, 손등으로 재빨리 훔치며 슬쩍 웃어본다. 괜찮아. 아무것도 아니야. 정말 아무것도 아니야. 나는 절망하지도 않았고, 비관하지도 않았고, 체념하지도 않았다. 그저 하루치의 낙담을하고, 다음 날이면 다시 하루치의 작은 기대를 품으며 사소하고 한심한 일들을 계속한다. - P14
미학의 정점에는 윤리가 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것은 윤리적이고자 하는 인간의 의지라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게까지 윤리적이지 못한 존재들이 그래도 윤리적이고자 온 힘을 쥐어짤 때, 부끄럽기 싫어서, 차마 부끄러울 수 없어서, 눈 질끈 감고 옳은 일에 자신을 내던지는 어떤 숭고의 순간들을 나는 사랑한다. 누가 보든 말든(봐주면 더 보람차겠지만) 내게 이익이 되든 손해가 되든(이익이 되면 더 좋겠지만) 해야 할 일을 우직하게 하는 사람들, 하기로 약속한 일은 어쨌든 끝내 해내는 사람들. 그런 사람들은 눈에 잘 띄지 않는다. 그들에게는 이렇다 할 보상도 없다. 그 일을 우직하게 계속하고 있을 유인이 언제나 부족하다. 그렇지만 그들은 태생이 우직하므로 그렇게 우직하게 일생을 산다. 그들은 승리하지 못한다. 보상도 없이, 보람도 없이, 패배감 속에서, 그렇지만 그렇게 생겨먹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들은 그렇게 산다. 나는 우직하고 싶지만 마냥 우직하기엔 약아빠진 인간이라서, 언젠가는 흉내 내는 이 짓마저도 때려치울 것 같아 불안한 마음이라서, 이런 사람들을 목격하게 될 때면 울면서 달려가 부둥켜안고만 싶다. 당신들에게 상을 주고 싶은데 내가 가진 것이 없네요. - P52
중요한 건 지금 사람들이 무슨 얘기를 하고 있느냐가 아니다. 지금 사람들이 안 하고 있는 얘기가 무엇인지 알아내는 게 훨씬 더 중요하다. 대체로 진실은 거기에 있다. 불만스런 표정으로 입을 꾹 다문 채 있는 사람들. 그들이 하지 않는말. 모두가 대세를 얘기할 때, 말없이 차곡차곡 포인트를 쌓고있는 사람들. 그러다 찰랑찰랑 컵 위로 넘칠 듯 말 듯한 물이 표면장력 붕괴와 함께 범람하기 시작할 때, 그때가 불멸인 것처럼 보이던 그 승리자의 목을 치는 순간이다. 그들은 당황하며 항변할 것이다. 갑자기 왜 이래? 아니, 갑자기가 아니야. 절대로, 갑자기가 아니야. 하지 않은 말들의 기미를 알아차리려 귀를 쫑긋 세우기를 멈추는 순간, 당신의 몰락은 예정돼 있다. 사람들이 말하기 시작했을 땐, 이미 늦은 것이다. - P60
실금이 가지 않는 관계라는 게 가능할까. 오래 사용한 모든 것들엔 실금이 간다. 지속적 관계와 실금이 없는 관계라는 건 상호 모순적인 개념이다. 우리는 이제 시간의 횡포한 위력을 안다. 『문학과 예술의 사회사』에서 아르놀트 하우저가 플로베르의 소설 『보바리 부인』과 『감정교육』에 대해 논하면서 말했듯, "우리가 두려워할 것은 큰 재난이 아니라 작은 재난들"이다. 하우저는 이 소설들의 진정한 주인공은 마담 보봐리와 프레데릭이 아니라 ‘시간‘이라며, "우리는 우리 생애의 가장거창하고 충격적인 좌절들로 인해 파멸하는 것이 아니라 우리의 희망과 야심이 시들면서 함께 시들어간다"고 말한다. 세계문학전집의 저 지루한 명작들은 "삶을 좀먹어 들어가는 시간의 개념"에서 양태된 것이기에, "인간을 단 한 번의 결정타로 파멸시키는 초시간적 운명의 개념"에서 빚어진 고대 그리스 비극과 본질적으로 판이하다. "[이런] 인식이야말로 우리 삶의 가장 서글픈 사실이다. 이러한 점진적이고 눈에 안 띄고 그러면서도 막을 길 없는 쇠진의 경험, 거창한 파국이 지닌 놀라운 효과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조용한 삶의 침식의 경험은 감정교육을 비롯한 거의 대부분 현대소설의 중심을 이루고 있다." 나는 하우저의 이 문장을 20년이 넘도록 잊지 않고 있다. 쓰고나면 언제나 울 것 같은 기분이 드는 문장. 거창한 파국이 지닌놀라운 효과조차 만들어주지 않는 조용한 삶의 침식. - P83
전형적인 백인 상류층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하버드 로스쿨에 다니고 있던 25세의 미남 청년이 우울증과 투쟁을 벌여왔고, 새해 전야에 한 장의 짧은 노트를 남긴 채 떠나갔다는 팩트는 흔히 보던 부고 기사의 내용이었다. 그런데 그 짧은 유서가 나를 무너뜨렸다. "부디 저를 용서하세요. 오늘은 병이 저를 이겼어요. 저를 위해 서로를, 동물들을, 세계의 가난한 사람들을 돌봐주세요. 모든 사랑을 담아, 토미." 한 문장이 목에 가시처럼 걸렸다. 읽고 또 읽고 가만히 소리내 따라 읽어보았다.
오늘은 병이 저를 이겼어요.
그가 가까스로 병을 이겼던 많은 나날들. 그 전쟁을 치르는 동안 그가 입었을 무수한 부상과 상처들. 용맹하게 싸웠으리라. 부단히도 싸웠으리라. 헌신적으로 사랑해주는 가족이있고, 지지해주는 많은 친구들이 있고, 남 보기엔 남부러울 게 하나도 없는 인생인데도 그는 그날 지고 말았다. 병이란 그런 것이다. - P103
타인의 고통에 대한 척도로서가 아니라면 자기연민은 얼마나 추잡한 감정이란 말인가. - P124
삶이란 게 타인을 오해하고 또 오해하다가 곰곰 다시 생각해본 후 역시 또 오해하는 것이라고 필립 로스가 <미국의 목가>에 썼었지. 오해도, 이해도 하지 않고, 그냥 좀 살아볼 순 없을까? 의미를 추출하려는 의지는 아마도 미래를 예측하려는 욕망에서 비롯된 것일 테다. 투자에 앞서 수지타산을 맞춰보려는 것. 아닌 것 같은 기미가 보이면 재빨리 손절해버리려는 조급함. 손해 보지 않으려는 얄팍한 계산속. 그런 마음으로 보면될성불러 보이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자꾸 의미를 찾으려는병증은 내 가난한 마음의 소산이었다. 손해 보지 않으려는, 최종적인 무의미의 나락으로 떨어지지 않으려는 너무도 성급한조바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의미의 씨앗도 심기 전에 의미의 과실을 예측하려는 태도로 삶을 살아왔다. 의미란 그렇게 사전 예측되는 것이 아닌데, 매사 실행하기보단 예측하려고만 들었다. 이야기가 모두 끝난 후에야 우리는 그 이야기에 진정한 의미를 부여할 수 있다. 「너의 의미」는 너와의 여정이 모두 끝난 후에나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지금 부여하는 의미는 그저 오해일 뿐이다. 의미는 우리가 지금 이 순간 부여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 시작도 하기 전에 의미부터 찾으려는 이런 삶의 태도 역시 과대망상증이라는 걸 나는 기타교습소에서 뒤늦게 배웠다. 의미를 예측하려는 모든 시도는 무모하다. 의미란 사후적으로 추출되는 것이다. 지금 하는 이 일의 의미는 이 일을 다한 이후에야 파악할 수 있다. 다 할 때까지는 그냥 하는 것이다. 그래, 의미 같은 건 생각하지 말자. 나는 그동안 의미에 대해 너무 많이 생각했다. 이제 그런 인문적 게으름은 내다 버리도, 공학적 성실을 몸에 익히고 싶다. - P148
고통이란 속인주의가 아닌 속지주의가 적용되는 영역이라, 지금 그 고통의 강에 한 발이라도 담그고 있지 않다면 함부로 입을 놀릴 수 없다. 고통의 속지주의. 나는 그것을 신봉한다. - P181
그러나 두 번째 성찰은 나 같은 범인도 삶의 태도로 한번 도전해봄직하다. 베토벤의 약한 이행부들처럼 삶의 시시한 순간들은 지복의 순간을 위해 반드시 필요하다는 깨달음. 이것은 단지 예술 작품의 구성 원리인 것만은 아니다. 삶의 자세로 익히고 기억해두면 살아가는 데 도움이 된다. 나는 지금 베토벤의 약한 이행부들을 연주하고 있는 중이라고 생각하면서, 삶의 시시하고 지루한 부분들을 묵묵히 통과해가는 거다. 클라이맥스로만 구성된 이야기는 놀랍기는커녕 아마도 포르노처럼지루하기 짝이 없을 것이다. 일에서도 마찬가지다. 늘 잘하는사람의 이야기에는 흥미로운 구석이 없다. 그가 잘하는 것은 당연한 일이기 때문이다. 본인으로서도 딱히 성취감을 느끼기 어렵다. 일말의 자부심은 있을지언정, 내려앉는 순간에 대한 불안과 전전긍긍으로 지루한 고공곡예를 계속해야 한다. 슬프게도 늘 잘하는 사람은 끝내 가장 잘하는 사람이 되지 못한다. 그에게는 치고 올라가는 반전의 동력이 확보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잘하기 위해서는 못해야 한다는 것. 행복하기 위해서는 지루하고 시시해야 한다는 것. 이런 생각은 우리에게 놀랍도록 큰 해방감을 준다. - P213
클로저란 단어를 어떻게 번역하는 게 적절할지 모르겠다. 마무리, 결말, 종료, 결론...... 모두 어딘가 부족하다. 느닷없이 비극이 나를 찾아와 가격할 때, 왜 내게 이런 일이 일어났는지 납득하는 것. 사태의 원인을 찾아내고 직면하는 것. 왜 하필 나란 말인가, 라는 끝도 없이 솟구치는 질문에 마침내 ‘그럴수도 있다‘며 세계의 부조리를 수용하는 것. 고통스럽지만 이것이 돌이킬 수 없는 최후의 결말이라고 인정하는 것. 이만하면 되었다, 울면서 나직이 중얼거리는 것. 그러나 살아야 하므로 두 발 파묻힌 콘크리트 바닥을 가차 없이 곡괭이로 내리치는 것. 더 이상은 ‘왜‘와 ‘만약‘에 시달리지 않으며, 슬프지만 현명해진 얼굴로 깨진 콘트리트 속에서 한 발씩 꺼내 마침내 기우뚱거리며 앞으로 걸음을 내딛는 것. 그렇게 지속되는 삶 속으로 걸어들어가는 일련의 과정이 클로저라는 저 한 단어에 모두 응축돼 있을 것이다. - P227
종결감sense of closure. 내가 느낀 기쁨이 그것이었다. ‘종결‘이 클로저의 가장 그럴듯한 번역어일 것이다. 종결 없이 끝내버린 생애사의 주요 사건들은 어딘가에 매복해 있다 돌연 우리를 가격한다. 억압된 것은 반드시 귀환한다는 프로이트의 말은 참으로 진리이다. "표현되지 않은 감정은 결코 죽지 않는다. 산채로 묻혀 있다 훗날 더 추악한 형태로 나타날 것이다." 비겁하게 도망친 관계, 제대로 애도하지 않은 상실, 직면하지 않고 회피한 생의 진실은 원한 서린 귀신처럼 어느 모퉁이에서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원혼을 달래는 진혼굿처럼 우리에게는, 아무리 힘겨울지라도, 클로저의 여정이 필요하다. - P235
무엇이 사라지지 않고 축적되는 것일까. 잃게 될까봐 전전긍긍하지 않아도 되는 것, 누구도 내게서 빼앗을 수 없는 것은 무엇일까. 덕성과 지성이다. 우는 이도 웃게 하는 유머와 함께 울어주는 눈물이다. 타인의 환난을 외면하지 않는 착한 마음과 부당함에 함께 맞서는 용기다. 자신의 오류를 끊임없이 발견하고 수정하는 성찰과 타인의 말에 귀 기울이는 겸손, 지성을 흠모하고 진리를 수행하는 지혜다. 한마디로 좋은 사람의덕성이다. - P29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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