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간병을 통해서야 나는 알았다. 아이에 대한 나의 감정이 상호호혜적인 사랑에 기반한다는 것을. 내 돌봄이 모성에서 발현된 헌신이 아니라 상대에 대한 의리와 도덕에 더 가깝다는 것을. 의도치 않고 실현하게 된 이 모종의 윤리가 사실은 이 세상을 지탱하고 있다는 것을. 나는 누구와도 이런 종류의 사랑을 다시 하기 어려울 것이다. 윤이가 아닌 그 누구도 나를 이렇게 사랑해주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이 감정을 모성이라 부르지 않기로 했다.

결국 사랑은 내가 아닌 누군가의 필요를 내 필요보다 중요시하는 것이다. 눈사람 올라프도 말했다. "Some people are worth melting for." 당신을 위해서 녹는 것쯤이야. 나보다 그 사람을 먼저 생각하는 것이 바로 사랑이라고. 그리고 사랑의 이러한 속성이 바로 컴패션(compassion)의 토대일 것이다.
compassion, 흔히 하듯 연민이나 동정이라고 번역하기에는 무척아쉬운 이 단어는 문자 그대로 누군가의 고통(passion)을 함께한다(com)는 뜻이다. 대가 없는 간병, 조건 없는 돌봄이 바로compassion의 이데아이자 눈에 보이는 실재다. 그리고 누군가를통해 이 compassion을 한번 경험한 이는 인생을 살면서 다른 이에게 다시 그것을 되돌려주게 된다. 그렇게 마음을 다해 사랑하는 법, 누군가를 돌보는 법을 배우는 것이다.

윤이 역시 그랬으면 좋겠다. 사람과 사랑을 두려워하지 않고, 엄마인 내게 그랬던 것처럼 솔직하고 당당하게 누군가를 사랑할 줄 아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투병하는 동안 더 크고 풍부하며 섬세한 형태의 사랑을 경험하고 배우기를, 다시 그 사랑을 베풀어 아프고 약한 너라도 거절당하지 않고 환대받는 경험을 하기를 기대한다. 어린이라면 응당 그렇듯 놀고 자고 낄낄거리면서도 키가 크고 마음이 자라는 아주 당연한 시간을 희망한다. 이것이 내가 윤이를 돌보며 주고싶은 전부다. 그래서 나는 윤이가 이 시간을 모조리 잊기를 바라면서도 잊지 않기를 바란다.
돌봄에 있어 생물학적 친연성은 그다지 중요한 조건이 아니다. 피가 섞이지 않으면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단한 일이라고들 하나, 이는 그만큼 돌봄의 노동 가치가 내내 평가절하 되어왔단 뜻이다. 또한 돌봄의 의무를 여성 가족구성원에게 손쉽게 전가하기 위한 것이란 혐의를 지울 수 없다. 어쩌면 간병은 기술적 측면에서 엄마가 아닌, 혈연으로 묶이지 않은 다른 이가 더 전문적으로 잘해낼지 모른다. 신사임당이 병원에 가면 나이팅게일이 될 것이란 환상을 버려야 한다.

오늘 나의 노력은 아이의 치료 성과만을 성적표로 삼지 않는다. 돌봄을 매개로 축적된 경험과 감정은 나의 삶, 그리고 아이의 삶을 통해서 오래도록 천천히 진가를 드러낼 것이다. 나와 아이의 관계를 재정립할 것이다. 이것은 마땅히 여성에게 있으리라고 믿어온 선천적 자질이나 본능에 의한 것이 아니고, 국가가 여성에게만 당연하듯 부과해온 암묵적 의무에 따른 것도 아니다. 물론 지금껏 사회에 순응하며 살아온 나는 여전히 그 의무감으로부터 완전히 자유롭지 않다. 아픈 아이를 책임지고 돌보겠다는 결심은 자발적이면서도 비자발적이었다. 돌봄 부담을 분담할 수 있다거나 하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있었더라면 나는 더 고민했을지 모른다. 그러나 아이와 함께한 시간 동안 극한의 고통과 온전한 행복을 동시에 느끼며 비로소 확신할 수 있었다. 적어도 나의 헌신은 모성 신화에 등떠밀린 것이 아니다. 나와 윤이의 사랑은 그렇게 전형적이거나 일방향적이지 않다. 내가 아이에게 받은 과분한 사랑, 계산 없이 돌격하는 순정에 나는 내 시간과 자유를 기꺼이 희생한다. 여기에 굳이 이름을 붙이라면 의리 정도가 적당하겠다. - P62

윤이가 노래를 부른다. 레이스가 달린 반스타킹을 목이 긴 장갑처럼 손에 끼고 팔딱팔딱 춤을 춘다. 자기가 제알 좋아하는 르세라핌의 노래 「이브, 프시케 그리고 푸른 수염의 아내라고 한다. 윤이가 브레이크 댄스를 추듯 가슴에 바운스를 주며 I‘m a mess, mess, mess‘ 하고 첫 소절을 시작하는데 순식간에 사로잡혔다. 요즘의 나는 워낙 엉망진창인 상태니까. 그런데 ‘괜찮겠지, 뭘 해도, 착한 얼굴에 니 말 잘 들을 땐. 괜찮지 않아, 그런 건, 내 룰은 나만 정할래‘라고도 한다. 신난다. 정말로 ‘Get itl ike boom, boom, boom‘이다. 노래가 워낙 짧은 데다 몇 소절 안되는 가사가 거의 선전 구호 수준으로 반복되니 부르기도 좋다. 아이돌이 노래하는 세계관이 이렇게 넓고 깊은 줄 몰랐다. 역시 세상은 변한다. ‘이것 봐, 나를 한번 쳐다봐, 나 지금 예쁘다고 말해봐‘라고 노래하던 시절은 진작에 지났다. 윤이는 푸른 수염의 아내 이야기를 이렇게 처음 듣는다. 노래하고 춤추며 프시케를 만난다. 바로 그렇게, 사람은 오로지 자기 스스로의 힘으로 행복할 수 있으며, 아무리 가족이라도 타인의 행복을 내가 보장해줄 수는 없다는 것을 아이가 자연스럽게 깨달았으면 좋겠다. 책으로 배우고 시행착오로 복습하는 대신, 춤추는 몸이 먼저 체득하길 바란다. 그 무대에서 인정투쟁의 연대기가 마침내 막을 내리기를 간절히 기대한다. - P116

일본처럼 돌봄화폐를 시도하는 경우도 있다. 일찌감치 고령화사회에 진입한 일본이 1970년대부터 시도한 방법인데 ‘후레아이 키푸‘(3九切符, Caring Relationship Tickets)라고 한다. 평소 노인들을 도와 시간 점수를 얻고, 이 점수를 나이가 들었을 때 본인이 스스로 상환받거나 다른 도시에 사는 더 나이가 많은 가족구성원에게 선물할 수도 있다. 심지어 점수는 현금으로 지급될 수도 있다.
평범한 사람들의 참여가 늘어날 수밖에 없다.
돌봄은 시설에 갇혀서도, 가족에 전유되어서도 안 된다. 아직 헌법으로 성문화되지는 않았지만 돌봄을 받을 권리는 인간의 기본권이다. 돌봄은 인간이 인간의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보루다. 우선 돌봄의 가치를 재정립하는 것이 선행되어야 한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돌봄이 구현하는 가치가 효율, 성공, 개인적 성취보다 중요하다는 점을 모두가 긍정할 때, 지역사회돌봄이 가능하다. 기꺼이 서로를 돌보겠다는 개인 간의 친밀한 관계에 대해서 사회가 등가교환을 할 준비가 되었을 때 비로소 돌봄화폐를 도입할 수 있을 것이다. - P1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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