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 박완서 작가 추모를 위한 짧은소설집 '멜랑콜리 해피엔딩'(2019)에 마지막으로 수록된 '그 겨울의 사흘 동안'(함정임)으로부터 옮긴다. 화자는 알베르 카뮈의 딸 카트린 카뮈와 돌아가신 'P선생님'(박완서)의 딸 - 어머니 별세 후 아치울의 노란 집에서 살고 있는 호원숙 - 의 만남을 상상한다.


박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아래 글 속 '저녁식사가 끝난 뒤'(함정임)는 2012년 이상문학상 작품집 '옥수수와 나' 수록작이자 2015년에 나온 개인 소설집 표제작이다. 그리고 산문집 '태양의 저쪽 밤의 이쪽'(2022)에 '카뮈의 루르마랭에서 박완서를 추억하다'란 제목의 글이 실려 있는데 '그 겨울의 사흘 동안'과 거의 같은 내용이다.





아차산 자락 아치울 마을에 새로 지은 P선생님 댁을 생각하면, J는 제일 먼저 박하차가 떠올랐다. 선생님은 새로 가꾼 뜰에 박하를 심었고, 손님들에게 그 박하 잎을 우려낸 차를 내주었다. 선생님은 이사한 뒤 한동안 매일 아침 창가에서 목도하는 일출 장면을 경이롭게 들려주었다. 그러나 선생님이 흥분한 목소리로 들려주던 그 장관을 J가 직접 본 적이 없기에 일출보다는 박하차의 향기가 J에게는 하나의 감각으로 새겨졌다. 가끔 화원에서 허브들 속에 놓여 있는 박하와 마주칠 때면, 선생님의 뜰이 떠올랐다. 선생님이 세상을 떠난 뒤, J는 그 집에 간 적이 없었다. 갈 엄두를 내지 못했고, 딱히 갈 명분도 없었다. J는 카트린 카뮈와 그녀의 만남을 상상하면서, 선생님의 자료를 찾다가 그 집이 노란 집으로 불린다는 것을 뒤늦게 알았다. 7년 전, J가 이곳 루르마랭에 머무는 사흘 동안 선생님은 이 세상에서 저세상으로 떠나는 장례 의식을 마쳤다.

돌아와보니, 더 이상 선생님은 이 세상에 있지 않았다. 선생님의 영전에 작별인사를 드리지 못한 것이 못내 가슴에 맺혀, J는 박하의 추억을 담아 「저녁 식사가 끝난 뒤」 라는 단편소설을 썼다. - 함정임 _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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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라디올러스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77XXXX100172


'아치울의 리듬'(호원숙)의 '2장 마을의 리듬' 첫 글 '백일홍 이해인 수녀님'이 아래 글의 출처이다. 배롱나무로 시작하여 백일홍을 거쳐 글라디올러스로 끝난다. 오늘은 정말 덥다.

Woman with Gladioli - Charles Blackman - WikiArt.org







배롱나무가 붉다. 시야를 가리며 점점 커지는 나무를 잘라도 기본 키가 유지되고 꽃이 핀다. 한편에 씨앗을 심었던 백일홍이 꽃대가 올라왔다. 느리게 느리게. 작년에 피었던 자리에서 저절로 올라온 것인데 햇빛이 아주 뜨거운 날에는 꼬부라진다. 거기서 물을 따로 주고 눈길을 주니까 건실하게 올라온다.

이해인 수녀님의 해인글방 앞뜰에서 받아온 씨앗이었다.

수녀님은 어머니에게도 위로자였고 어머니도 수녀님의 위로자였다. 어머니의 기일에 오셔서 어머니의 침대에 누우신 편안한 모습이 잊히지 않는다.

인터넷에서 산 글라디올러스 하나가 꽃을 피웠다. 그것만으로 만족한다. 서너 개가 더 피울 준비를 하고 있다. 여린 핑크빛이다. 그래도 이십 프로는 건진 것이 아닌가? 다행히 튼실하다.
 
여름이여.
어찌 되었든 가고 말 여름이여.
내 눈에 눈물이 어린다.
꽃이 피면 웃고 꽃이 지면 가슴이 쓰라려지는 그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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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멜랑콜리 해피엔딩' 수록작 '그 겨울의 사흘 동안'(함정임)에서 필자의 분신인 화자는 박완서의 딸(호원숙)과 알베르 카뮈의 딸(카트린 카뮈)을 겹쳐본다. 

루르마랭에 있는 알베르 카뮈의 묘비(위키미디어커먼즈)


'나눔의 세계 : 알베르 카뮈의 여정'(김화영 역)을 출간한 카뮈의 딸 카트린은 아버지의 미완성 유고 '최후의 인간'을 정리하여 펴냈다. 불문학자 김화영의 산문집 '김화영의 번역수첩'과 '여름의 묘약'에 카트린 카뮈를 만난 일화가 담겨 있다.





카트린은 아버지가 남긴 모든 글의 전문 에디터였다. 동시에 카뮈라는 작가의 생애와 작품을 전문적으로 정리하고, 배열하고, 쓰는 작가였다. 『홀로 그리고 함께』 『나눔의 세계』는 알베르 카뮈의 사진들로 구성한 카트린 카뮈의 저작이었다. 엄밀히는 아버지 카뮈와 딸 카뮈의 공동 저작이었다. 카뮈에게 카트린이 있다면, P선생님에게는 그녀가 있었다.

J가 뤼베롱산 자락 고원 마을 루르마랭에서 그녀를 떠올리는 것은 아주 뜬금없는 일은 아니었다. 카뮈가 살았던 그 집에 장녀 카트린이 살고 있다면, P선생님이 살았던 아차산 자락 아치울 마을 그 집에는 선생님의 장녀인 그녀가 살고 있었다. - 함정임 _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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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26-08-03 20: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박완서 작가님의 따님인 호원숙 작가의 책도 에세이 읽어보면 좋더라고요. 유명한 작가들의 작품은 이후에 가족들이 자료를 정리한 예가 적지 않을 것 같네요.
서곡님, 날씨가 너무 더워요. 폭염에 건강 조심하시고, 시원한 하루 보내세요.^^

서곡 2026-08-03 20:22   좋아요 1 | URL
네 호원숙 님의 글 잘 읽히더군요 그러게요 작가의 유산을 보존유지하려면 자손들이 할 일이 많을 거 같아요 카뮈 남매는 쌍둥이더라고요 감사합니다 서니데이님도 건강히 여름 잘 나시길 바랍니다~
 

전에 읽은 '소르본 철학 수업'이란 책은 소르본대 철학수업가이드나 철학개론 같은 건가 했으나 예상과 달리 우리 나라 학교가 싫어 프랑스 파리에서 철학을 공부하기로 결심한 저자의 체험기로 부제는 '세상을 바꾸기엔 벅차지만 자신을 바꾸기엔 충분한 나에게'이다. 글로부터 남들과 달리 살고 싶다는 열망이 엿보이는데 그런 면을 지렛대 삼아 멀리 뛰어올라 날아갔으리라.

소르본 대학교의 대강의실 (사진:Arnaud 25 출처:위키미디어커먼스)






마침 베르그손은 <정신적 에너지>에서 ‘사실의 선들‘에 관해 이야기한다. 어떤 목적으로 향하는지 인식을 찾을 수 있는 방향 말이다. 사실의 선을 개인에게 접목시켜 본다면 ‘개연성의 축적은 우리가 확실성으로 향하고 있음을 느끼게‘ 해줄 것이다.

그러니 각자의 삶을 떠맡았다면 과거에게 물어보기를, 나의 경향성은 어디서 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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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완서 추모집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전에 읽은 책인데 오늘 어떤 연유로 인해 수록작 중 함정임 작가의 '그 겨울의 사흘 동안'을 다시 읽게 되었다. 형식은 콩트 그러니까 짧은 소설이지만 내용은 회고담에 가깝다.

Sweet Peas, 1922 - Eleanor Fortescue-Brickdale - WikiArt.org


* '멜랑콜리 해피엔딩'은 '나의 아름다운 이웃 - 박완서 짧은 소설'과 세트로도 판매되고 있다.

UnsplashAnnie Spratt


cf. 고 박완서 작가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1980)은 '환각의 나비 - 우리가 꼭 읽어야 할 박완서의 문학상 수상작'과 '대범한 밥상|문학동네 한국문학 전집' 에 실려 있고 영어판과 불어판이 출간되었다. '행복'(1998)은 함정임 작가의 자전적 장편소설이다.




테라스에는 보라색 스위트피가 아침 햇살을 받아 생기롭게 피어 있었다. 한겨울에 스위트피라니. J는 집주인 노부부의 얼굴을 떠올려보다가 문을 열고 테라스로 나가 테이블에 놓인 스위트피 향을 맡았다.

그 시절 선생님은 홀로 기다리고 있다가 J를 맞이하곤 했다. 선생님은 J를 거실보다는 부엌 식탁으로 데리고 갔다. 다과를 가운데 놓고, 원고와 책 이야기 이외에, 살아가는 이야기를 나누느라 시간 가는 줄 몰랐다. J가 선생님 댁으로 들어갈 때는 환한 오후였는데, 나올 때는 어둠이 내린 저녁이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J는 선생님과의 식탁에서의 장면을 꿈결인 양 되짚어보곤 했다. 편집자와 작가, 까마득한 후배 작가와 대작가와의 만남이라기보다는 연애 중인 딸과 엄마, 갓 시집간 딸과 친정 엄마 사이의 애틋하면서도 흥미진진한 수다의 향연이었다. J만이 그렇게 느낀 것이 아니었음을 훗날 선생님이 쓴 글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지금 생각하니 그때 우리는 동업자끼리나, 저자와 기자 사이로 만난 게 아니라, 엄마 말 안 듣고 고생길로 들어선 딸이 겨우 행복해진 걸 보고 대견하게 여기는 엄마와 딸처럼 마주 앉았던 게 아니었나 회상됩니다."

이 글의 제목은 박완서의 「그 가을의 사흘 동안」을 오마주한 것이고, 본문에 인용된 글은 박완서의 「『행복』에 부치는 글」(함정임, 『행복』, 중앙M&B, 1998. 발문)임을 밝힌다. - 함정임 _ 그 겨울의 사흘 동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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