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프크네히트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b06r3465a


By Post of India 1983






파리 시절 이래로 마르크스의 학문적 욕구는 감퇴한 적이 없었다.

그는 엄밀한 학문 연구가 옳다고 믿었고, 그다지 가고 싶어 하지 않는 자신의 지지자들을 단호하게 대영박물관 열람실로 끌고 갔다. 리프크네히트는 자신의 회고록에서 어떻게 ‘인간 쓰레기들’이 마르크스가 지켜보는 가운데 날마다 대영박물관 열람실 책상에 순순히 앉아 있을 수 있었는지에 대해 적고 있다.[리프크네히트에 따르면, 마르크스는 자신들에게 공부하라고 계속 다그쳤고 직접 모범을 보였다. 그래서 다른 망명자들이 세상을 뒤집을 계획을 세우고 날마다 술과 대마초에 취해 있는 동안, 자신들은 대영박물관 열람실에 앉아 미래의 전투를 위한 무기와 탄약을 준비했다. 리프크네히트는 이런 자신들을 가리켜 스스로 ‘강도떼’, ‘지상의 쓰레기들’이라고 부르고 있다. 자신들의 처지에 대한 자조와 자부심이 뒤섞인 표현으로 해석할 수 있다.]

지금까지의 사회 운동이나 정치 운동 가운데 이 정도로 연구와 학식을 강조한 것은 없었다. 마르크스가 얼마나 많은 책을 읽었는지는 『자본』의 참고문헌 목록만 봐도 알 수 있다. 거기에는 고대, 중세, 현대를 가리지 않고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저술과 자료들까지 들어 있다. - 10 붉은 테러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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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스트 2023 1/2월호에 실린 장혜령 시인의 에세이 '장소를 잃어버린 사람들을 위해 — 유미리'로부터 옮긴다.


낙성식 당시의 우에노역사 (1932년 4월 3일) By 『歴史寫眞』昭和七年五月號 1932  우에노 - Daum 백과 https://100.daum.net/encyclopedia/view/87XX37400161


재일작가 유미리 '버클리 일본상' 수상(2022) https://www.yna.co.kr/view/AKR20220913115900073?input=1195m





유미리는 2003년 단편 「야마노테선 순환 내선」을 기점으로, 같은 해 『다카타노바바역 도야마 출구』, 2007년 『고탄다역 히가시 출구』, 2012년 『시나가와 역 다카나와 출구』, 2014년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 근작 『고탄다역 니시구치』 『야마노테선 외부순환선』 『조반선 요노모리역』에 이르기까지 20여 년간 도쿄 지하철의 역과 출구 이름을 제목으로 하는 야마노테선 시리즈 여덟 권의 소설을 집필했다.

이 시리즈들 가운데 유일하게 한국에 번역된 『도쿄 우에노 스테이션』은 죽은 노숙자의 시점에서 전개되는 독특한 소설이다. - 장혜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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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의 오늘 https://blog.aladin.co.kr/790598133/15083163에 이어 '부에노스아이레스 : 남미의 파리'(고부안 지음)로부터


부에노스아이레스 2020년5월-사진: UnsplashNestor Barbitta


루이사 발렌수엘라의 중단편집 '침대에서 바라본 아르헨티나'를 함께 담아둔다.







세계에서 최고로 넓다는 이 길 위에 있는 67.5m 높이의 오벨리스끄는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상징물이 되어온 기념탑이다. 이것은 1936년 5월에 건축가 알베르또 쁘레비치(Alberto Prebisch)가 부에노스아이레스 시 건설 400주년 기념물로 만든 것이다. 이것이 건설되었을 때는 엄청난 비판을 받았다. 이런 상징물이 부에노스아이레스의 이미지를 얼마나 높이게 될 지를 예상치 못했던 사람들의 비판이었다. 오벨리스끄는 철근 콘크리트로 만들어졌다. 그 내부에는 200개의 계단이 있고 꼭대기에는 작은 창이 하나 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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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790598133/15082244 와 함께:


아르헨티나의 수도 부에노스아이레스 2017년5월 - 사진: UnsplashSasha • Stories







전성기 시절에는 아르헨티나인들의 자부심도 대단해서 아르헨티나가 미국 같은 나라가 될 수 있으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면서 처음에는 유럽 문화를 갈망했다. 아르헨티나의 유일한 콤플렉스는 미국과 마찬가지로 자신의 나라가 ‘역사 없는 나라’, ‘문화 없는 나라’라는 것이었다. 얼마나 유럽 문화를 동경했는지, 유럽의 문화 수도 혹은 예술 수도라고 일컬었던 파리의 도시계획을 그대로 부에노스아이레스에 적용하기도 했다. 부에노스아이레스를 남미의 파리로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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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blog.aladin.co.kr/790598133/15082192 작년 오늘 아르헨티나에 대해 읽고 있었다. 아래 발췌글의 출처는 '디코딩 라틴아메리카 - 20개의 코드'.

Morning Sun, Buenos Aires, 1930 - Benito Quinquela Martin - WikiArt.org


경제난 아르헨티나, 美트럼프에 '투자지원 구애' 나서나 | 연합뉴스 https://www.yna.co.kr/view/AKR20241113005400087?input=1179m






1870년대 하나의 ‘사소한’ 발명과 또 하나의 ‘굉장한’ 발명이 아르헨티나의 국운을 바꾸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했다. ‘사소한’ 발명품은 가시철조망이다. 미국의 한 목장에서 어떤 사람이 그냥 밋밋한 철조망을 쳐두니까 자꾸 가축이 도망가서 골머리를 앓다가 아이디어를 내어 만든 것이 가시철조망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1870년대에 가시철조망이 도입되면서 아르헨티나에서 대규모 목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굉장한’ 발명이란 냉동 설비이다. 이 발명 덕분에 아르헨티나는 쇠가죽이나 육포 대신 쇠고기를 유럽에 대량 수출하게 되었다. 1880년대에 개막된 아르헨티나의 전성기는 이 두 가지 발명으로 가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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