치매를 앓는 시어머니와 한 집에 사는 며느리가 나오는 박완서 작가의 단편 '해산바가지'(소설집 '저녁의 해후' 수록)로부터
박꽃 By Shizhao - Own work, CC BY-SA 2.5, 위키미디어커먼즈
[네이버 지식백과] 해산바가지 (낯선 문학 가깝게 보기 : 한국현대문학, 2013. 11., 김동현, 정선태)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2411850&cid=41773&categoryId=50391
그분의 망가진 부분이 육신보다는 정신이었다는 걸 알아차린 건 그후였다. 우리는 그걸 서서히 알아차리게 됐다. 처음엔 아이들 이름을 헷갈려 부르는 정도였다. 노인들이 흔히 그러는 걸 봐온지라 대수롭지 않게 알았다. 그러나 바로 가르쳐드려도 믿지를 않고 한사코 자기가 옳다고 주장하는 건 묘하게 신경에 거슬렸다.
하루 이틀도 아니고 허구한 날 같은 말에 같은 대꾸를 해야 된다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더구나 그 빈도가 하루하루 잦아지고 있었다. "쌀 씻어놓았냐?" "네." "쌀 씻어놓아라. 저녁때 다 됐다." "네, 씻어놓았다니까요." "쌀 씻어놓았냐?" "씻어놓았대두요." "쌀 씻어놓았냐?" "쌀 안 씻어놓으면 밥 못 할까 봐 그러세요. 진지 안 굶길 테니 제발 조용히 좀 계세요." 이렇게 짜증이 나게 마련이었다. 그렇다고 그 줄기찬 바보 같은 질문이 조금이라도 뜸해지거나 위축되는 것도 아니었다.
나는 내가 숨쉬기 위해 매일 밤 그분을 죽였다. 밝은 날엔 간밤의 내 잔인한 소망을 부끄러워했지만 내 잔인한 소망은 매일 밤 살쪄갔다. 그 기운을 조금이라도 죽일 수 있는 방법은 신경안정제밖에 없었다. 은밀히 먹던 그 약을 남편 앞에서 당당히 입에 털어넣었고 분량도 여봐란듯이 늘려갔다. 그가 약을 빼앗으려는 시늉을 하면 마귀처럼 무섭게 이를 갈며 덤볐다.
"괜히 이러지 말아요. 이 약 없으면 내가 당신 어머니를 죽일거예요. 그래도 좋아요? 그것보다는 당신 어머니가 나를 죽이는게 나을걸요. 그게 낫다는 걸 알기 때문에 이 약을 먹는단 말예요. 이래도 당신 말릴 수 있어요?"- 해산바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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