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릴라가 원하고 예상했던 대로 남자아이라면 잠자리를 준비해둔 부엌방에 재워도 되었을 것이다. 하지만 아무리 깨끗하고 단정하게 정리가 되어 있다고 해도 여자아이를 재우기에는 적당치 않아 보였다. 그렇다고는 해도 이런 고아 아이에게 손님방을 내주는 것도 당치않은 일이었다. 그래서 2층에 있는 박공널 창이 난 동쪽 방을 주기로 했다. 마릴라가 촛불을 들고 앤에게 따라오라고 말하자 앤은 힘없이 시키는 대로 했다. 복도를 지나가면서 탁자에 놓인 모자와 가방을 집어 들었다. 복도도 오싹할 정도로 깨끗했지만 작은 동쪽 방은 더 깨끗했다.
마릴라가 가버리자 앤은 쓸쓸한 마음이 되어 방 안을 둘러보았다. 회칠이 된 벽에는 아무것도 붙어 있지 않았다. 너무 벌거벗어 벽이 아파하고 있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이 집 전체에 말로는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경건함이 배어 있는 듯해 앤은 뼛속까지 전율이 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