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래 사진들은 남프랑스 루시용. 김소임 교수의 '베케트 읽기'로부터 아래 옮긴 글에 나오듯이, 전쟁 중에 베케트 부부가 피난 간 곳.
[사랑할 수밖에 없는 루시용] http://www.tournews21.com/news/articleView.html?idxno=20408 이 기사에 따르면 루시용의 황토 길들을 보자 감탄이 나왔다고.
사진: Unsplash의Miguel Picq
사진: Unsplash의Auriane Clément
걸어서 세계 속으로 - 루시용 https://youtu.be/9fPASqYBc0o
베케트는 비평가들이 자신의 작품에 대해서 길고 복잡한 분석과 해설을 하는 것에 대해서 당혹스러워했다.
여러 질문을 던지는 비평가, 연출가 등에게 그는 "내 작품의 키워드는 ‘아마도’이다"라고 말하기도 하였다.
‘길’은 서양 문학에서 종종 인생길, 진리나 구원을 찾는 전진의 길, 순례의 길을 상징해왔으며 나무는 성경에 나오는 생명나무나 십자가와 연관을 지어왔다. 하지만 『고도』에서 길과 나무는 서양 문학의 긴 전통을 배반한다. 길은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을 어디에도 데려다 주지 못한다. 도리어 이 극에서 길은 멈춤이다. 디디와 고고는 이 길을 따라 어디로 가지 않는다. 아니 갈 수가 없다. 그들은 길에 멈춰 서서 고도를 기다려야만 한다. 길은 디디와 고고에게는 길이 아니다. 나무 또한 생명도 죽음도 주지 못한다.
비평가들은 이 낯선 시골길을 베케트와 그의 처 쉬잔이 독일군을 피해서 루시용으로 걸어가던 시골길과 비교한다. 베케트와 쉬잔은 초겨울 악천후를 뚫고 루시용을 향해 걸어갔으며 목적지에 도착했다. 하지만 블라디미르와 에스트라공은 걸어가지 않으며, 목적지에 도착하지도 않는다. 베케트의 경험이 시골길 위의 두 사람의 모습에 투영되었을지 모르지만, 이 길은 루시용으로 가는 길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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