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먼 자들의 국가' - 시각장애인들을 생각하면 잘못된 비유가 아닐 수 없다 - 중 황정은의 글 '가까스로, 인간'(문학동네 2014 가을호 수록)으로부터. 



눈을 감으면 물에 잠긴 선창이 보이고 그 속에 누군가 있어 그것을 보지 않으려고 눈을 뜨고 다시 감고 도로 뜨기를 반복하는 형태로 꾸는 꿈, 도무지 꿈이 아니라서, 꿈에서 깨고도 달아나지 못하는 꿈.

봄엔 벚꽃을 환영하고 여름엔 복숭아를 환영하고 가을엔 사과를 환영하고 겨울엔 옷을 두껍게 입고 봄을 기다리면서 살자, 너무 많은 걸 걱정하지 말고, 소중한 사람들이 집에 돌아오면 반갑고, 그들을 여전히 반길 수 있는 내가 스스로 대견하고, 그렇게 살자, 엉겁결 살게 된 인생, 그 정도로 퍽 만족스럽겠다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불시에, 그런 생각을 하며 사는 게 부끄럽게 되었다.

얼마나 쉬운지 모르겠다. 희망이 없다고 말하는 것은. 세상은 원래 이렇게 생겨먹었으니 더는 기대도 하지 않겠다고 말하는 것은. 내가 이미 이 세계를 향한 신뢰를 잃었다고 말하는 것은. – 황정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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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3-04-16 11:00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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