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승옥의 '환상수첩'은 엄청나게 끔찍하다. 여성을 거침 없이 희생양으로 삼는 남성들을 거칠게 드러낸다. * 『환상수첩』 [幻想手帖]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https://terms.naver.com/entry.naver?docId=5957373&cid=67067&categoryId=67133



사진: UnsplashJosh Withers



집을 나설 때 대문 밖까지 배웅을 나온 아버지와 어머니의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두 분은 분명히 나를 불쌍히 여기고 있었다. 어쩌면 지난날의 자신들을 향하여 응원의 주먹을 휘두르는 기분이었는지도 모른다. 특히 아버지 편이 말이다. 이제 와서 나는 옴쭉달싹할 수 없음을 느꼈다. 애쓰다가 애쓰다가 안 되면 그만이다, 라던 얼마 전까지의 내 생각은 수정을 받아야 했다. 이제는 애쓰다가 애쓰다가 안 되면, 아니 그렇지만 기어코 해내어야만 되었다. 저 덜컥거리던 야행열차의 유리창에 비친 나의 무표정한 얼굴을 들여다보며 세상이 내미는 모든 것을 고분고분히 받아들이자던 나의 약속을—뒤집어보면 그러한 나의 생각에 일종의 비웃음이 섞여 있었지만—이제는 어쩔 수 없이 실천해야만 하게 되었음을 깨달았다.

무엇이었을까? 센티멘털리즘? 센티멘털리즘이라고 해두자. 그러나 몇십 년 후, 코트 깃을 세우고 이 바람찬 항구의 겨울 거리를 비스듬한 자세로 걸어가는 센티멘털리즘이 없다면, 아아, 그런 일은 없으리라, 단연코 없으리라. 아무런 속박도 욕망도 없이 볼을 스치고 가는 바람의 온도와 체온과의 장난을 즐기며 꾸부린 자세가 오히려 편안하다고 느끼며 그리고 내 구두가 아스팔트를 울리는 소리만을 들으며 어디론가 그저 걸어가는 일. 그 순간에 나는 죽어도 좋았다.

김윤식은 적었다. "바다와 죽음의 이미지를 빼면 이 글은 무너진다." 그리고 "바다와 죽음의 두 이미지는 60년대 문학적 특질의 하나를 표시하는 상징물이다." 여기에 덧붙여 나는 ‘눈’과 ‘소금’의 이미지를 빼면 이 글은 무너진다고 말하고 싶다.

이 소설을 쓸 당시 김승옥에게 ‘자살과 속화’라는 양자택일만이 존재했기 때문이고, 자살을 택하는 또래 주인공들에게 깊은 연민을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고, 그 길이 더 순수한 길이라는 생각을 끝내 버리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해설 / 신형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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