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르스나르는 사후에 출간된 자서전 '뭐? 영원이라고 Quoi? L'éternité'에서 유년시절 자아 형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 것으로 독서와 박물관 견학을 꼽고 있다. 

 

유르스나르는 규칙적인 박물관 견학을 통해 앞으로 작품 창작의 모티프이자 주요 테마가 될 세 가지, “색채와 형태에 대한 취향, 그리스의 나신상, 삶의 기쁨과 영광”을 발견했다고 고백한다.

 

이로부터 우리는, 작가의 고대 그리스 로마의 대리석 나신상에 대한 매혹, 다빈치로 대표되는 이탈리아 르네상스 미술에 대한 찬탄, 푸생과 로랭이 상징하는 프랑스 후기 르네상스에서 고전주의 미술에 대한 선호가 이미 아주 어린 시절부터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본인도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 작가의 삶을 인도했던 이 ‘어떤 빛’은 “역사에 대한 위대한 꿈”으로 이어졌고, 실제 유르스나르의 작품 창작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유년기부터 각인된 미술에 대한 매혹은 유르스나르가 평생에 걸쳐 다양한 화가들에 대한 미술 비평을 꾸준히 발표했다는 점에서도 잘 드러난다. 


그녀는 소설가로서 명성이 높았지만, 또한 미술, 문학, 음악, 기타 여행 및 환경보호에 대한 70여 편의 에세이를 발표한 에세이스트이기도 했다.] 출처:유르스나르의 1930년대 소설에 나타난 예술의 역할, 예술가의 초상, 프랑스문화예술연구(ECFAF), 2019, vol.68, pp.81 - 111, 오정숙 https://www.kci.go.kr/kciportal/landing/article.kci?arti_id=ART002466596




내가 쇼팽이었거나 모차르트였거나 혹은 페르골레즈였다 하더라도 나는 단지, 시골의 어느 음악가가 겸허하게 나날이 최선을 다할 때 실현하는 것만을, 아마 불완전하게, 표현할 것이오.

나는 최선을 다했소. 나의 첫번째 콘서트는 실패보다 훨씬 못한 것, 반쪽 성공이었소.

내가 콘서트를 하기로 결심하기 위해서는 온갖 물질적 이유들과 사교계 인사들이 우리를 도와주겠다고 나설 때 그들이 우리에게 갖는 그 권위가 필요했었소.

우리 집안은 비엔나에 꽤 먼 친척들이 여러 명 있었소. 그들은 내게 있어서 거의 후원자들이자 또한 완전한 이방인들이었소. 내 가난이 그들에겐 조금 모욕적이었소. 그들은 내가 유명해지기를 바랐소. 사람들이 내 얘기를 할 때 거북스러워하지 않을 수 있도록 말이외다.

나는 그들을 어쩌다 간간이 만났소. 그들은 나를 싫어했는데 아마 내가 도움을 청하질 않아 그들에게 거절할 기회를 안 주었기 때문이었을 게요. 그럼에도 그들은 나를 도와주었소. 그것은, 나도 잘 아는데, 그들에겐 그다지 부담이 될 것도 없는 도움이었소만, 여보 무슨 권리로 우리가 후의를 요구할 수 있을지 나는 모르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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