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2년의 유르스나르 By Bernhard De Grendel - Own work, CC BY-SA 4.0, 위키미디어커먼즈


마르그리트 유르스나르의 '알렉시'를 읽는다. 어제 밤 오르페우스와 에우리디케에 관해 찾아보다가, 유르스나르가 '새로운 에우리디케'라는 제목으로 쓴 작품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고(https://www.yourcenariana.org/content/la-nouvelle-eurydice 참고) 유르스나르가 생각난 김에. 문학동네에서 새로 나왔지만 내가 읽는 책은 열림원 구판. 

음악, 강한 자의 기쁨인 음악은 약자에겐 위안이오. 음악은 내가 먹고 살기 위해 종사하는 생업이 되었소. 어린이들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일이 고역인 것은, 기교가 그들을 영혼으로부터 멀어지게 하기 때문이오.

맨 먼저 아이들에게 영혼을 음미케 해야 한다고 나는 생각하오. 어떻든 재래 교수법이 그러지 못하게 막는데, 학생들도 학부모들도 교수법을 바꿀 생각은 없었소. 나는 그래도 나중에 나한테 배우러 와서 무엇인가 표현하지 않으면 안 된다고 믿고 있었던 나이 든 사람들보다는 아이들이 더 좋았소.

그러고 아이들한테선 위화감을 덜 받았소. 내가 그럴려고 했다면 수강생을 더 많이 가졌을 것이오만, 하는 중인 레슨들만으로도 살아가기엔 충분했소. 그것들만 해도 일은 너무 많았소.

나는, 일의 결과가 자기 자신하고만 상관 있는 경우, 일을 위해 살 만큼 일을 숭배하진 않소. 분명, 몸을 혹사시키는 것은 몸을 훈련시키는 하나의 방법이지만, 그러나 체력의 고갈은 영혼을 무디게 만들고 마오. 숙고해볼 일은, 모니크, 불안에 젖은 영혼이 마비된 영혼보다 가치가 없는가, 하는 점이오.

침묵은 인간이 쓰는 말들의 무능만을 보충하는 것이 아니라 또한 재능 없는 음악가들에게 악상의 빈곤을 보상한다오. 음악은, 내 생각에, 스스로를 표현하려고 애쓰는 침묵이어야, 침묵의 신비이어야 하는 것 같았소.

예를 들어, 분수를 보시오. 무언의 물이 수로를 채워, 그곳에 모여들어, 그곳에서 넘쳐나고, 그래서 떨어지는 맑은 물방울은 청랑하오. 음악은 거대한 침묵의 범람이어야 하리라 나는 항상 생각해왔소.

어렸을 때 나는 영예를 동경했소. 그 나이에 우리는 사랑을 동경하듯 영예를 동경하오. 우리는 우리 자신을 우리에게 알리기 위해 다른 사람들이 필요하오. 야심이 쓸모없는 악덕이라고는 말하지 않겠소. 영혼을 독려하는 방편이 될 수 있을 거요.

문제는 그것이 영혼을 탈진시킨다는 점이오. 성공이 반 거짓으로 구매되지 않는 경우를 못 본 것 같소. 우리에게 무엇인가를 제외하도록 혹은 과장하도록 강압하지 않는 청중은 못 본 것 같소.

나는 자주 슬픔과 함께, 진정으로 아름다운 영혼은 영예를 얻지 못하리라고, 그런 영혼은 영예를 탐하지 않기 때문이라고 생각했소. 이 생각은 나를 영예욕에서 탈피하게 했고 또한 재능에서 탈피하게 했소. 나는 재능이란 특별한 웅변이라고, 우렁차게 타고난 표현력이라고 생각했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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