붓다, 나를 흔들다 - 붓다를 만나 삶이 바뀐 사람들, 2006 올해의 불서
법륜 지음 / 샨티 / 2005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오랫만에 불교 서적을 읽었다. 동양 사람이라 그런지 예전서부터 불교 교리에 관심이 많았다. 하지만 작년 이후 내 모태신앙이던 가톨릭에 돌아오면서 불교 서적을 많이 보질 못했다. 그러다 구입해 본 책이 이것이다.




법륜 스님, 그를 처음 알게 된 건 오래다. <한겨레>신문 주말판에 그의 글이 연재된 적이 있었다. 10년 전쯤 되겠나. 그때 그 글을 보고 인상이 남았다. 역시, 그 뒤 그 스님의 행적을 보니까 감동적이었다. '정토회'를 만들어 대중과 함께 수행하는 모습이나, 북한 돕기 운동 등에서 확실히 돋보이는 스님이셨다. 그런 신뢰가 있었기에 고른 책이다.




불교 방송에 나갔던 것을 일부 추려 엮은 것이라고 한다. 그래서 그런지 대중적이다. 물론 불교 교리라는 것 자체가 사실 대중적이기는 쉽지 않다. 번뇌가 있고 해탈이 있고, 욕망이 있고 집착이 있고 등등 솔직히 어려운 점이 많다. 게다가 실천하기는 더욱 어렵다. 근데 어쩌면 이 어려움이 지식인들을 끌어들이는 매력일 수도 있다.




암튼 그래도 생활 속에서 쉽게 풀었다. 그래서 읽기 편했다. 하지만 이게 읽기 편하다고 마구 진도 나갈 책은 사실 아니다. 근데 그렇게 읽어 버렸다. 묵상을 하면서, 내 삶에 새기면서 가야 하는데, 그렇지를 못했다. 아쉽긴 하다. 그래도 몇 가지만이라도 다시 묵상하기 위해 이 글을 쓴다.




불교적 관점에서 삶은 고(苦)다. 이건 가톨릭 관점과 다르다. 가톨릭 관점에선 삶이 은총이다. 하느님께서 주신 삶이니 기뻐야 한다. 이렇게 출발부터 다른 점이 많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불교적 가르침이 잘못된 것은 아니다. 분명 하느님이 창조하신 세상에 고통은 많다. 물론 그 고통의 의미를 깨닫고 나면 그것 역시 축복이었음을 알게 되긴 하겠지만. 불교에서도 마찬가지다. 공즉시색 색즉시공, 고통이 곧 환희일  수 있다. 놓을 때면 말이다. 일체의 집착을 놓으면 그렇게 된다. 근데 그게 쉽지 않다. 특히 수행을 통해 자력으로 그 경지에 도달하는 것은 무척 어려워 보인다. 솔직히 나도 그게 매력으로 다가왔다. 기독 교리에서처럼 무조건 하느님께 의탁하는 것보다 인간인 내가 나 스스로의 힘으로 그 경지에 도달한다는 게 멋있어 보았다. 하지만 이젠 그게 최소한 나의 입장에선 불가능함을 안다. 싯달다 같은 분은 특별해서 그게 가능했을지 모르지만, 나는 못한다. 도저히. 이젠 그렇다.




암튼 여기선 비구라는 게 색에도 명에도 집착하지 않는 사람, 모든 집착을 놓아버린 사람이라고 한다. 그러기에 탁발을 할 수 있는 것이다. 나는 예전에 탁발을 부정적으로 보았다. 그래서 자력 노동을 하는 박중빈의 원불교를 타당한 입장이라고 생각했다. 근데 이 책을 읽어보면 탁발을 통해 겸손을 배울 수 있다 하니 그 말도 타당해 보인다. 밥 빌어 먹는 주제에 뭘 내세울 게 있겠는가. 그저 감사할 뿐, 다른 것은 있을 수 없다. 주는 밥, 가리지 않고 감사할 수 있어야 한다. 이건 경지에 이른 사람이 할 수 있을 것이다.




나는 가린다. 체면도 생각하고, 가난한 집엔 미안해서 못한다. 그러나 그런 분별 자체가 어리석다고 한다. <성경>에도 남을 판단하지 말라고 했는데, 여기서도 그런 이야기가 나온다. 나로서는 참으로 지키기 어려운 가르침이다. 그래도 많이 노력할 생각이다. 묵언이라는 게 그냥 말을 하지 않는다는 뜻이 아니라 분별하는 마음을 내지 말라는 뜻이라 한다. 누가 옳다 그르다, 이런 것 하지 말라고 한다. 그건 입으로 업을 짓는 행위라고 말이다. "잘못은 거친 말을 한 사람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시비삼는 나에게 있는 겁니다."라고까지 한다. 내 생각이 옳다고 여기면 진보는 있을 수 없다고 한다. 그래봐야 나는 짜증만 나게 된다. 다른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 사람의 처지를 이해해주는 게 훨씬 옳은 일이다. 나로부터 해방되어야지, 상대방을 뜯어 고쳐서 내가 편해지려는 이기적 관점으로는 문제 해결이 어렵다. 문제는 기준을 내 기준으로 갖다 놓는 데서 출발한다. 자기 기준을 내려 놓는 것, 我相을 버린다는 것이다.




아무리 좋은 가르침도 그것을 상대방에게 적용하면 비수가 된다고 한다. 오직 자신에게만 적용하라고 한다. "나는 어떻게 할 것인가, 나는 어떤 마음을 가질 것인가. 어떤 마음을 가질 때 나는 행복해지는가. 내가 나를 가장 사랑하는 법이 어떤 것인가" 이런 걸 고민해야지, 남을 어떻게 바꾸겠다고 생각지 말라는 것이다. 그래서 그들의 수행 공동체 정토회에서는 '남을 가르치려 들지 말라'는 게 하나의 계율이라고 한다. 정말 나로서는 새겨들을 일이다. 얼마나 내가 잘난 체 하면 살아왔는가. 남을 가르치려고만 했지, 남의 말을 듣거나 남을 이해하려고 해보진 않았다. 왜? 내가 옳다고 생갃했으니까. 나를 포기하는 것은 굴종이요, 줏대 없음이라고 생각했으니까.




남을 훈계하고 평가하지 말 것. 어렵더라도 조금씩 실천해 봐야겠다. 이런 것은 기본적인 생활 습관으로 만들어야 한다.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는 집착을 놓는 것이다. 사실 수도자와 내가 다른 것은 그들은 놓을 수 있는 사람들이고 나는 붙잡고 사는 사람이라는 데에 있다. 죽을 때까지 먹고, 자고, 입을 것에 대해 집착하며 산다. 물론 그것이 필요 없다는 것은 아니다. 다만 "생존 이상의" 그것에 매달리는 것, 이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당당함과 비굴함, 겸손함과 오만함도 버릴 수 있을 때 나온다. 집착이 없으면 항상 당당할 수 있다. 자유롭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당당함이 오만함으로 되어선 안 된다. 비굴하지 말라고 해서 남을 배척하라는 뜻은 아니다. 빈부, 성별, 인종, 지위를 막론하고 그냥 사랑해야 한다. 대통령이라고 해서 무조건 배척하는 것은 당당한 게 아니라 예의가 없는 것이다. 내가 예의 없이 그렇게 산 삶이 많다. 지위와 관계 없이 그대로 사랑해 줘야 한다. 누구에게나 똑 같이. 그럴 때 당당하고 겸손할 수 있다. 당당함과 겸손함은 얼마든지 같이 갈 수 있다. 아니 같이 가야 그게 진짜다. 보시를 청하지 않는 것도, 자존심 때문에 청하지 않는 게 아니라 청할 것이 없기 때문에 청하지 않는 것, 이게 진짜다. 보시를 받고 안 받는 것에 대한 주도권을 수행자가 잡고 있어야 한다. 수행에 합당하면 받고, 그렇지 않으면 받지 않음이 정도다. 그래야 자유롭고 기쁘다.









그 외에도 새겨들을 글이 많았다. 그걸 여기 다 쓰다가는 책보다 분량이 많아질 것 같아 생략한다. 암튼 불교의 가르침, 생활 속에서 정말 배울 게 많은 가르침이다. 오늘부터 하나만이라도 챙기자. 남에 대해서 이러쿵 저러쿵하지 말자. 아무리 좋은 것이라 해도 오직 나 자신에게만 적용하자. 그러면, 남의 부정과 잘못에 대해선? 그건 하느님의 영역이지 내 영역이 아니다. 왜 그런 말 있지 않는가? "너나 잘하세요" 그래 맞다. 나나 잘해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