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나키즘 이야기 - 자유.자치.자연
박홍규 지음 / 이학사 / 2004년 8월
평점 :
절판


박홍규, <아나키즘 이야기>, 이학사, 2004.

우연한 계기로 관심을 가지게 된 아니키즘. 물론 예전부터 기회가 다으면 한 번 보고 싶긴 했던 테마다. 다만 그것을 꼭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까 하는 변명과 게으름으로 미뤘던 주제다.
생각보다 아나키즘에 대한 공감이 컸다. 특히 이 책은 외국 학자의 것을 번역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충분히 소화한 한국의 학자가 쓴 글이라 더욱 이해가 쉽다. 영남대 박홍규 교수가 바로 그 사람이다. 이 양반의 오지랖은 참으로 넓다. 법을 전공한 학자이면서도 예술에도 밝다. 내가 그를 처음 접했던 건 아마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을 번역한 사람으로이거나 혹은 푸코의 <감시와 처벌>을 번역한 사람으로의 인연일 것이다. 암튼 대단한 사람이다.
박홍규는 아나키즘이 무정부주의라고 번역되어 불필요한 오해를 불러일으키고 있다며 더욱 정확한 명명을 요구한다. 그렇다고 해서 딱히 우리말로 대응시킬 단어가 있는 것도 아니다. '자치적 조합주의'정도가 그나마 어울릴까? 하지만 그것으로는 한참 부족이다. 그럴 경우 그냥 아나키즘으로 부르는 게 낫다.
하지만 그는 아나키즘이 그런 오해를 불러일으킨 데에는 그동안 아나키스트들 자체의 책임도 있다고 말한다. 반성을 촉구한 것이다. 아나키즘은 "인간 본연의 자연스러운 모습으로 살고자 하는 것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그러나 "무작정 자연으로 돌아가자고 외친다고 해서 돌아가지는 것도 아니"기 때문에 과도한 낭만주의적 치장은 없애야 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일부 아나키즘의 농촌 지향성, 자연에 대한 과도한 신비화, 성선설적 인간성론, 상호부조론, 국가의 전면적 부정 따위는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전략이 필요하다는 얘기다. 전략이 없이는 사회주의가 아나키즘을 공상이라고 매도한 것이 정당화되어 버린다.
그래서 그가 제시한 핵심어는 자유.자치.자연이다. 물론 이것도 어떤 정형을 갖거나 권위를 갖는 것은 아니다. 누구의 아나키즘도 절대적인 진리라고 할 수 없다. 아나키즘은 자유롭게 사고하고 행동하는 하나의 방법이고, 아나키스트들은 그것을 보여준 선배들에 불과하다. 그런 고로 '자신만의 아나키즘'을 가질 필요와 의무가 주어지게 된다.
그런 점에서 박홍규는 확실한 아나키스트다. 그러나 그는 그런 말을 말라고 손을 젓는다. "아나키스트라는 이름은 중요하지 않다. 나도 분명히 말한다.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나는 그 무엇도 아니다. 나는 나다. 아나키즘은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않는 만큼 자신의 권위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라며 스스로 아나키스트가 아니라고 강변한다.
하지만 그 말을 액면 그대로 받아들일 건 아니다. 그가 한 말의 취지는 '나는 아나키스트요"하면서 거들먹거리는 순간 그것은 아나키즘의 가치관과 배치된다는 의미다. 그러니 어떤 규정 없이 아나키즘적 삶을 살아가는 게 좋다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이다. 쉽게 말해 어깨에 실린 그 힘을 빼라는 것이다. 말로, 권위로, 폼으로 하는 운동이 아니라 자연스런 일상 생활에서 실천하는 아나키즘적인 삶, 그것이 정답이라는 말이다.
어쩌면 지난 우리의 시대는 이념의 과잉, 아니 구호의 과잉이었는지도 모르겠다. 구호보다는 생활이 중요하다. 새롭게 만나는 아나키즘, 결코 도그마에 빠지거나 겉멋으로서 내게 감겨오지 않길 생각한다. 성찰 속에서의 아나키즘 수용.
나는 아나키스트다 혹은 나는 아나키스트가 아니다 라는 따위의 이야기는 필요치 않다. 권위에 반대하며, 자연으로, 자치로 조화 속에 만들어 가는 생활 그 자체가 진정 아나키스트들의 삶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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