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금강산
유홍준 외 / 학고재 / 1998년 9월
평점 :
유홍준 엮음, <금강산>, 학고재, 1998.

중국 문인들 가운데 '금강산이 있는 고려국에 태어나고 싶다'라고 노래한 가십이 종종 등장했다고 한다. 1894년부터 4차례 11개월에 걸쳐 한국을 방문하고 글을 남긴 영국의 작가이자 지리학자였던 이시벨라 버드 비숍마저도 "확실히 일본에서, 심지어 중국에서도 이토록 아름답고 장엄한 광경을 단 한 번도 보지 못했다"라고 말했을 정도다.
그래서인가 신라 최치원 이래 고려, 조선, 그리고 근현대에 걸쳐 금강산을 찾는 사람들의 발걸음은 끊이지 않았으며 그에 따라 그들이 남긴 글과 그림도 많다. 그러나 그 아름다움을 그대로 담아낼 순 없었나 보다. 書不盡畵不得. 글로도 다할 수 없었고 그림으로도 얻을 수 없었다는 것이다.
나는 여러 복잡한 심사 때문인가 금강산이 그저 그렇게 다가왔을 뿐이다. 아직은 마음의 여유가 없어서였나, 아니면 금강산을 살짝 맛만 보았기 때문일까. 그냥 '괜찮은데' 이상은 아니었다. 19세기 <동행산수기>를 남긴 이상수는 "마음의 감동이 없는 자는 보는 바가 출중해서가 아니라 반드시 그의 가슴 속이 옻칠한 듯이 캄캄한 때문일 것이다"라고 했다.
곰공히 생각하니 맞는 말이다. 내 마음이 캄캄해서 그렇다. 그 아름답다는 금강산에 돈으로 떡칠이 되어가면서 그 맑은 기운도, 그 곱던 마음도 모두 돈에 환장한 모습처럼 변하고 있는 현실을 보았기 때문이다.
이미 금강산도 예전의 금강산 같지가 않다. 죽어 박제되어 있다는 느낌이었다.
근데, 이런 나의 평가는 시대의 산물이겠다. 조선시대 유학자들의 기행문엔 어떻게든 불교적 가치를 깎아내리는 모습이 종종 등장하는데, 그 역시 시대의 산물일 게다. 그렇게 본다면 위안이 되기도 한다. 금강산은 그냥 말 없이 앉아 있는데, 인간들이 이러쿵 저러쿵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일단은 금강산에 대한 기초적 상식을 적는다. 풍악산이라고 많이 불렸는데 가을 단풍을 강조하며 형상에 중심을 둔 이름이다. 특히 유학자들이 불교적 명칭인 금강산을 애써 무시하면서 강조했던 이름이다.
봉래산은 신선 사상의 발로다. 여기서 금강산 사람 양사언을 빼고 갈 순 없겠다. 16세기 인물로 자신의 호를 봉래라고 지었을 정도로 금강산을 사랑했던 인물이다. 개골산은 산 전체가 바위산으로 되어 있어 그렇게 이름 붙은 것이다.
금강산이라는 이름은 <화엄경>에서 나온 것이라 한다.
4대 사찰은 유점사, 장안사, 표훈사, 신계사를 일컫는다. 여기서 유점사는 53불 동해 전래설과 관련이 있다. 커다란 쇠종을 타고 53불이 동해로 들어와 유점사에 자리잡았다고 한다. 신라 남해왕 때의 일이라고 하니, 불교의 공식 전파보다 아주 이르다. 가야 허황옥 전설이나, 제주 영실 발타라 존자 전설과도 맥이 비슷하다. 이 53불은 본래 그 곳에 있던 9룡을 내쫓는다. 내쫓긴 아홉 용이 자리 잡은 곳이 구룡폭포라고 한다.
장안사는 고려 때 기황후가 중창불사를 적극 지원했다는 절이다. 제주 원당사가 떠오른다. 비슷한 모티브로 연결된다.
이 책은 금강산을 찾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아주 잘 마련되었다는 생각이 든다. 유홍준이 전체를 개괄했고 뒤에는 내금강, 외금강, 해금강으로 나누어 현재 답사 가능한 지역을 중심으로 소개했다. 그리곤 옛 문헌 속의 금강산을 소개했으며 마지막엔 논문 두 편을 붙였다. 금강산을 다룬 문학과 미술에 대한 내용이다.
그런 만큼 앞 부분은 실용적으로 읽었고, 뒷 부분은 공부 재미로 읽었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조선 성리학자들의 의도적인 불교 폄훼 발언들이었다. 또한 도교적 심취에도 빠지지 말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산수를 보는 것은 좋으나 그 산수의 노예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비숍은 금강산 승려들의 학식 낮음을 말하면서도 "그 꼴꼴난 공자의 후예들이 가진 교만함과 거만함, 오만방자함이나 자만심과 아주 좋은 대조를 이루는 것"이라고 말하며 승려들의 비교 우위를 말했다. 동감이다.
청음 김상헌의 증손자인 17세기 사람 김창협의 <동유기>에서도 그가 만난 금강산 승려가 "오직 맑은 물 한 주전자와 솔잎 가루 한 주머니"로 살아가고 있더라며 그 공력을 높이 사기도 했다. 하긴 서쪽에서 금강산으로 처음 들어가는 고개 이름이 '단발령' 즉 들어가면 머리깎게 된다는 산의 입구 고개라는 데 더 말해 무엇하리.
근데 그렇게 고승을 높이 평가한 김창협도 금강산 기행을 할 때는 스님들이 멘 가마를 타고 등산을 했던 모양이다. "산세가 점점 가파르고 길이 또 미끄러워 남여를 메고 가는 중이 열 보에 한 번씩은 미끄러지므로"
과연 조선은 성리학 양반들의 세상이었다. 괴씸한 건지, 한심한 건지, 그런 좋은 산에 가서 가마를 타고 다녔으니. 물론 시대의 한계 때문이긴 하겠다. 그래도 지금 내가 보니 가엾다. 가마를 멘 승려보다 거기에 탄 양반 사대부가.
글 마치기 전에 그냥 눈에 들어왔던 표현 둘 만 옮긴다.
"더불어 술을 마시며 이별을 아꼈다." 17세기 김창협의 <동유기> 중에서
"구름이 실오리처럼 난간과 살창 사이를 날고 있었다."17세기 이만부의 <금강산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