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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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

 여태껏 나는 시()에 대해서 윤동주 아니면 이육사라는 식의 중학 국어 수준의 이해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단순히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황지우의 시집을 이북으로 충동 구매했다. 한자가 너무 많아서 한 편도 채 읽지 못하고 곯아떨어진 밤들이 쌓였다. 하지만 불면의 밤이 시집 한 권보다는 두꺼웠다.


 시들 안에서, 아무 관계없는 삶들이 등우량선(等雨量線)처럼 하나의 선으로 꿰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루하게도 연극 대본의 지문(地文)에 따라 살아가기도 했다. 거기서 황지우는 15층짜리 아파트 거실 소파에 파묻혀서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고향에 내려가면 고향이 지긋지긋해지고 그렇다고 서울에 올라가면 금세 서울생활에 넌더리가 나고 마는 이중적 감정 속에서 산 지가 벌써 십육 년이었다. 하루에 눈곱만큼씩 시를 읽으면서, 나의 집은 황지우의 집처럼 장렬하게 뛰어내릴 수 있는 15층짜리 아파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반지하 창문 아래로라도 한번 뛰어내려볼까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시들 바깥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봉창을 두들겨 맞는 유형의 재수 옴 붙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발 하루가 빨리 저물어서 시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를 바라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해는 뉘엿뉘엿 늑장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온통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일단 밥을 먹어야 했고, 입에서 나는 똥내를 감추기 위해 이빨을 닦아야 했다. 하다못해 편의점에라도 갈라치면 세수를 해야 했다.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하고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으며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귀찮은 일들이 끝나면 곧이어 비루함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내 방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운기조식하며 가래침 끌어올리는 중년 남자, 단열 안 된 내벽 벽지에 붙어 번성하는 곰팡이 냄새, 지하철에서 느닷없이 내게 쌍욕을 퍼붓던 어떤 여자, 점심시간에 식빵에 발라 먹는 벌건 딸기잼,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서 나는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등우량선 하나만 그릴 수 있기를 소망했으나 등우량선은 시와 기상청 홈페이지 안에서만 존재했다. 나는 시인이 될 수도, 기상청에 취직할 수도 없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불면의 밤마다 읽는 황지우의 이야기들을 그리워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 윤동주와 이육사가 전부는 아니었구나. 황지우라는 시인도 있었구나. 죽기엔 아깝고 살기엔 무력한 삶이란 것도 있구나.

   

 그렇게까지 내게 위안을 준 황지우라는 시인을 네이버에다가 쳐 보니 그의 프로필이 맨 처음으로 검색되었다. 어이없게도 사진 속의 그는 무력하기는커녕 통통하고 윤기나는 백발을 휘날리며 밝게 웃고 있었다. 약간 배신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어버리지 말고 시집이나 몇 권 더 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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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걸작선 5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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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바니 메이어슨은 P.P(퍼키 팻) 레이아웃사()의 뉴욕지부 유행 예측 컨설턴트로 일한다. 그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능력자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상류층의 삶을 거머쥐었지만 따지고 보면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도 않은 듯하다. UN의 강제징용 영장이 그에게 발부되었고, 이제 곧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 징용될지도 몰랐다. 정신분석로봇인 닥터 스마일에게 의지해 정신질환 진단을 받아내 강제징용을 피해보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쩡하다. 성공을 위해 아내와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다. 가능한 여러 갈래의 미래 가운데 한 단면을 언뜻 들여다볼 수 있는 예지능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업무는 예지능력을 사용해 퍼키 팻 모형 세트에 들어갈 제품들을 고르는 일이다.

 화성과 이오 등 태양계에 퍼져 있는 식민지의 이주민들은 퍼키 팻 모형 세트에 열광했다. <미미의 공주 침실 꾸미기><바비의 드레스룸> 따위처럼 퍼키 팻 모형 세트는 조그만 인형과 가지각색의 소품들이 설치된 장난감 세트다. 그건 강제로 추방당하다시피 외계 행성으로 이주한 식민지 주거민들로 하여금 지구에서의 추억을 떠올려주고 재생시켜주었다. 특히 불법으로 유통되는 마약인 캔-D를 복용하면 인형 세트 안에서의 지구의 삶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만이지만.

 P.P 레이아웃사는 퍼키 팻 모형 세트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고, 또한 캔-D의 생산과 유통의 은밀한 공급자였다. UN은 캔-D를 근절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주민들의 캔-D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섣불리 P.P 레이아웃사의 사장이자 캔-D의 생산 및 공급자인 레오 뷸레로를 검거하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명왕성에 우주선 한 대가 불시착한다. 그곳엔 십 년 전 프록시마 항성계로 여행을 떠났던 사업가 파머 엘드리치가 타고 있었다. 파머 엘드리치의 귀환과 동시에 캔-D 시장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파머 엘드리치가 프록시마에서 돌아오면서 캔-D의 원료와 흡사한 지의류 생물체를 갖고 왔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파머 엘드리치는 캔-D의 대항마인 츄-Z라는 이름의 약을 개발하고 식민지 행성들에 공급하려 한다. -D를 박멸하고 싶었던 UN은 파머 엘드리치와 손잡고 츄-Z를 정식 의약품으로 인가한다. P.P 레이아웃사의 사장 레오는 그런 사업적 계략을 파쇄하기 위해 파머 엘드리치를 만나러 가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강제로 츄-Z를 투여 받게 된다. 파머 엘드리치가 만든 츄-Z의 환상 세계 속에서 레오는 시공을 넘나들다가 천신만고 끝에 현실로 돌아온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목적이 사업적 번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 침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외계인의 침공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기 위해 파머 엘드리치를 몰아내기로 결심한다.

 메이어슨은 덫에 걸린 레오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전처에게 찾아가 재결합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메이어슨은 레오를 구하지 않았다는 자책감과 전처와의 관계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결국 화성행 우주선에 스스로 몸을 맡긴다. 화성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주민들은 토굴이라 불리는 지하 주거지에 틀어박혀 캔-D를 씹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파머 엘드리치의 신제품 츄-Z를 복용하기로 한다. -D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제품이 심각한 신체적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츄-Z가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는 메이어슨에게 간질병을 일으키는 물약과 츄-Z를 같이 복용한 다음 부작용에 대한 소송을 걸라고 제안한다. 메이어슨은 그에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Z를 복용한다.

 츄-Z는 퍼키 팻이라는 인형 세트를 필요로 하는 캔-D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실제 지구에서의 자신의 삶>을 완벽히 구현했던 것이다. 게다가 츄-Z의 세계는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환상과 실재가 결합된 형태의 세계인 것이었다. 환각 속의 세계는 실제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환상에 불과했다. 환각은 엄연히 실재했고, 실재하는 환각의 입장에서 보면 츄-Z를 복용한 자신은 정작 유령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메이어슨은 과거로 돌아가서 전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미래의 자신과도 조우한다. 환각 속에서 그는 파머 엘드리치가 사람들의 환상을 넘나들면서 전생(轉生)함으로써 영원불멸의 삶을 취하려는 외계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외계 생명체는 가까운 미래에 죽음이 예정된 파머 엘드리치의 육체를 버리고 메이어슨의 육체를 취하려 하지만, 시공을 넘나든 수 세기 간의 숙고 끝에 메이어슨을 놓아주고 자신은 파멸을 선택한다.

 약에서 깬 메이어슨은 파머 엘드리치가 비록 죽음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츄-Z를 복용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파머 엘드리치의 흔적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파머의 번쩍거리는 의수(義手)와 강철로 만들어져 턱에 박인 의치(義齒), 정상적인 눈 대신 인공 카메라 렌즈가 삽입된 공허한 의안(義眼)은 모든 사람들에게 잠복해 있었다. 그리고 파머 엘드리치의 그 세 가지 성흔은 츄-Z를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마저도 깃들어 있었다. 메이어슨은 화성에서의 삶을 살아내며 파머의 흔적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성흔이 자신과 부하들의 몸에 모두 깃들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파머 엘드리치가 탄 우주선을 요격하기 위해 떠난다.

 


감상

 공상 1: 인류는 캔-D니 츄-Z니 하는 약물을 투여 받지 않아도 되는 굳건한 환상이자 동시에 실재하는 세계를 창조해냈다. 바로 인터넷이다. 이불 밖이 무서워 오들오들 떨면서도 만렙을 찍은 캐릭터로 게임에 접속해 용맹하게 몬스터를 휩쓸고, 나와 닮은, 그러나 나보다 훨씬 예쁜, 그러므로 내가 아닌 나의 셀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좋아요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인터넷이라는 츄-Z에 중독되어 버렸다. 스마트폰, 와이파이, 네이버 아이디라는 인터넷의 세 가지 성흔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장면을 어디에서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나는 틈틈이 독서를 중단해야 했다. 아니면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퍼져나가는 과정을 상상한다든지. 혹은 어릴 적에 있었던 신비롭지만 사소한 체험들이 불쑥 기억난다든지.

 그러다가 왜 필립 K 딕이 나를 그토록 매혹시키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야기들의 원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서사의 원형을 창조해냈듯이 말이다. 그의 소설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SF소설들과 SF적 요소가 차용된 문학작품들 또한 필립 K 딕을 참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추측이 틀리진 않은 듯하다. 이제 그의 소설들은 마치 파머 엘드리치처럼 우리(심지어 그의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포함해서)의 머릿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나는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 열광한다. 공상과 망상과 마침내는 대()망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쇄반응이 벌어지는 경험은 언제나 나에게 활력을 준다. 그런 점에서 필립 딕은 나의 우울증 특효약이나 다름없다.

 필립 딕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이라는 소품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흔히 <약 빨고 썼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 작년을 기다리며와 설정 상 비슷한 면이 많은데, 작년을 기다리며에서는 이 소설에서 슬쩍 언급되었던 프록시마 항성계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복용자가 평행우주의 여러 가지 미래로 타임워프하는 약도 등장한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작년을 기다리며를 묶어서 읽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공상 2: 나에게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를 의심케 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적어도 서너 번은 있다. 그리고 이게 생시이든 꿈이든 간에 상관없이, 계속 이 세계에 머물렀으면 하고 바란 적도 한두 번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환상 속이든 현실 속이든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곤 한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부정한 존재로 만드는 성흔들을 지워내려 애쓰면서 살아야 할까, 아니면 내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긍정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소설 나부랭이를 읽고 너무 진지해지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 해답은 책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으며, 아마도 책 바깥에서도 영원히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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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기여 잘 있거라 -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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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프레데릭 헨리는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에 입대한다. 그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오스트리아군와 대치 중인 고리치아 마을로 배속되어 앰뷸런스들을 관리한다. 고리치아의 전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탈리아군은 느리지만 차근히 전선을 밀어 올렸다. 군인들의 사기도 좋았다. 장교들은 밤마다 모여 술을 마시고 빌라 로사(사창가)에 가서 밤새 쾌락을 즐기곤 했다. 그러다 헨리는 영국 출신의 간호사 캐서린 클라크를 만난다. 그는 게임을 하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만남이 계속되었지만 캐서린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그리고 특히 몸을 내주지 않았고 어느새 헨리는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다 한 전투에서 헨리는 박격포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는다. 무릎에 포탄 파편이 박히고 두개골은 골절된다. 그는 밀라노의 미국인 병원으로 후송된다. 마침 캐서린도 밀라노의 미국병원으로 전근을 오게 된다. 헨리는 그 사실을 알고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마침내 캐서린이 병원으로 오고, 둘은 비로소 한눈에 반한다.

 밀라노에서 그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열중한 결과로, 캐서린은 헨리의 아이를 임신한다. 헨리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캐서린은 전쟁이 끝난 뒤로 결혼을 미루자고 한다. 헨리가 부상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들에게는 전쟁도 전선도 모두 먼 얘기였다. 부상의 대가로 헨리에게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고, 그의 무릎도 차차 나아졌다. 전쟁이 다시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복귀 전 이 주 간의 휴가가 주어졌지만 병실에 술을 몰래 들여와 마신 게 탄로나 휴가가 취소되고, 헨리는 곧바로 전선으로 복귀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리치아의 분위기는 전과 사뭇 달랐다. 막사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황폐했다.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작년에 숱한 희생을 치르며 울렸던 승전보들이 몇 달간의 패배들로 무효가 되었고, 이제는 전선을 지키는 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직속상관인 소령의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고, 장교 식당을 가득 메웠던 떠들썩함도 사그라져 있었다. 숙소를 지키는 것은 소령과 그의 룸메이트이자 외과 의사인 라날디 대위, 그리고 사제뿐이었다. 라달니는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매일 밤 빌라 로사를 찾아가 창녀들에게 몸을 맡긴다. 사제는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지금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헨리는 복귀 다음날 최전선의 응급구호소로 배치된다.

 때맞춰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거세진다. 본부에서 퇴각이 결정되고 헨리는 앰뷸런스들에 병원의 물자를 싣고 다음 집결지로 옮기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헨리는 운전병들과 함께 후퇴하지만 퇴각 병력과 피난민들로 도로가 꽉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헨리는 샛길을 뚫어 가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차들을 모두 잃고 만다. 몸만 살아서라도 집결지로 향하려 하지만, 같은 이탈리아군 헌병들의 검문에 걸리고 만다.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부대에서 이탈했다는 죄로, 또는 이방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장교들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헨리는 심문을 받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탈출한다.

 이탈리아군에게도,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독일군에게도 모두 쫓기는 탈영병의 신세가 된 헨리는 오직 캐서린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밀라노에 도착한다. 캐서린은 밀라노를 떠나 스위스 근처의 호반도시에 있었다. 헨리는 그곳에서 캐서린과 재회하고, 둘은 호수를 건너 스위스로 도주한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전쟁이니 전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먼 얘기였고, 멀 뿐만 아니라 오래된 얘기였다. 둘은 산골에서 겨울을 나고 아이를 낳기 위해 도시로 나간다. 평온한 날들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출산이 그들은 다시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을 가르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진통이 시작되고 캐서린은 병원에 입원한다. 난산 끝에 제왕절개수술로 아이를 낳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아이는 탯줄에 질식한 뒤였고 캐서린 역시 출혈이 멎지 않아 숨을 거둔다. 헨리는 병원을 나와 홀로 비를 맞으며 호텔로 향한다.

 


감상

 유난히 힘든 연말을 보냈고, 해를 넘겨 처음 집은 책이 하필이면 헤밍웨이였다. 정초부터 헤밍웨이를 읽고 허무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나는 책장을 넘겼다. 사실 그리 허무할 것도, 허망할 것도, 그러므로 무너질 건덕지도 애초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헤밍웨이가 뭐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설은 재미있었지만, 읽는 재미로만 치면 그에 못지않은 작가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먹어가면서 불가해의 영역이었던 헤밍웨이가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헤밍웨이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의 기준일 리는 없을 터이다. 아마도 헤밍웨이가 전혀 이해되지 않던 시절, 나는 승리하고 있는 이탈리아군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서 빨리 빌어먹을 놈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든 제발 끝나기만을 바라는 패잔병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헤밍웨인가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이 파멸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패배한 삶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이전의 짐작과 달리,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삶은 파멸하기 전이나 후나 다를 바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고백이 어쩌면 <문학적 허영>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진심어린 고백이고, 허영과는 거리가 먼 <생물학적 진실>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헨리는 어째서 캐서린의 죽음 이후에 삶을 향해(정확히는 호텔을 향했지만) 걸어갔겠는가?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패배하기 위해선 다른 한 편에 승자가 있어야 하는데, 승자의 삶은 굳건하기 때문이다. 헨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승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삶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혹은 전쟁을 땡땡이치고 몰래 빠져나온 헨리 같은 사람에게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것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체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저, 살아갈 뿐이니까. 그러나 살아갈 뿐인 삶이라고 해도 <살아가야할 삶>이나 <살아가고 싶은 삶> 따위와 다른 삶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삶이라는 이름 속에서는 보잘것없는 차이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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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87
나쓰메 소세키 지음, 윤상인 옮김 / 민음사 / 200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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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줄거리

다이스케는 예민한 사람이다. 심장이 조금만 벌렁거려도 꼼짝 못하고, 꽃향기가 독하다며 얼굴을 찌푸리기 일쑤다. 그는 자신의 집에 얹혀 사는 서생 가도노를 보며, 저런 무위도식하는 자와 자기는 다르다고 생각한다. 문학과 예술에 대해 깊은 안목을 지니고 있으며 여러모로 봐서 교양 있는 신사라는 자부심을 가졌다. 그는 서른이 되도록 변변한 직업도 없이 전적으로 아버지의 경제적 도움을 받아 안온한 삶을 영위한다. 사업가인 아버지와 형은 다이스케를 못마땅히 여긴다. 아버지는 지방의 탄탄한 유지인 사가와의 딸에게 다이스케를 장가들게 하려 하지만 다이스케는 결혼 제도 자체를 못마땅하게 여긴다.

그러던 중 학창 시절의 절친이었던 히라오카가 다이스케를 찾아온다. 은행에서 해고를 당한 히라오카는 도쿄로 상경해 재취업을 해서 새로운 삶을 살고자 한다. 히라오카의 아내 미치요는 유산을 하고 심장병이 악화되는 등 건강이 좋지 않다. 경제적 어려움과 건강상의 문제에 더해, 결정적으로 그들 부부의 관계가 시들해졌음을 다이스케는 알아차린다. 미치요와 히라오카의 결혼을 주선했던 입장에서 다이스케는 그들 부부의 화목이 예전 같지 않음을 안타까워한다.

옛 친구를, 그리고 옛 연인을 마주하면서 다이스케는 <그 전>의 기억을 되살린다. 원래 미치요와 깊은 사이였던 것은 다이스케 자신이었다. 그런데도 친구를 위해 그녀를 양보했고, 양보로도 모자라 손수 발벗고 그들의 결혼을 성사시켰던 것이다. 다이스케는 불행한 미치요의 모습을 보고 연민을 느낀다. 연민은 과거의 기억과 결합하며 그녀에 대한 사랑으로 발전하게 된다.

사가와의 딸과의 혼인 절차는 서서히, 그러나 확실히 한 단계씩 진행되고 있었다. 다이스케는 미치요와 정략결혼 상대자 사이에서 고민한다. 미치요를 택하면 지금까지의 안락한 생활은 끝날 것이었다. 사회적으로도 완전히 평판을 잃고 내일의 세끼 식사를 위한 돈벌이에 뛰어들어야 할 것이었다. 사가와의 딸을 택하면 앞으로도 지금처럼의 안락한 생활이 보장될 것이었다. 안정된 생활도 견고한 가정의 토대 위에서 그는 예전과 다름없이 심장 고동 소리에 귀 기울이고 꽃핀 정원을 감상할 것이었다.

결국 다이스케는 미치요를 택한다.


2. 감상

소세키의 소설은 『마음』 이후로 두 번째인데, 『마음』을 읽을 때보다 이 작품을 읽으면서 비로소 소세키에게 완전히 반하고 말았다. D.H. 로렌스의 흙탕물 튀기는 듯한 질펀함도 없고 모파상의 허를 찌르는 반전이 있는 것도 아니었지만, 소세키의 이 소설은 왠지 로렌스와 모파상을 떠올리게 했다.

다이스케는 과연 어떤 인간이었는가. 소설을 이해하기 위해서 나는 다이스케에 대한 입장을 확실히 해둘 필요성을 느꼈다. 작가가 다이스케의 생활을 비꼬고 있는 것인지 옹호하고 있는 것인지 그도저도 아니고 그저 무미건조하게 바라만 보고 있는 것인지 혼동됐기 때문이다. 출판사의 책 소개에 의하면 소세키는 `게으를 권리`를 옹호했다고 나와 있는데, 내가 보기엔 석연치 않았다. 다이스케를 어떻게 바라봐야 할지 작가가 그 방향을 제대로 가리키고 있질 않았기 때문이다. 해설대로라면 소설의 결말은 다이스케가 이제껏 그래왔듯 사가와의 딸과의 혼인을 흔근슬쩍 얼버무리는 동시에 미치요와의 관계도 아무것도 아닌 것처럼 시치미 떼는 장면으로 끝났어야 자연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는 <그 전> 답지 않게 누군가를 선택했다. 요컨대 행동에 나선 것이다.

찜찜한 의혹을 풀기 위해 내가 주목한 것은 시점이었다. 어째서 소세키는 다이스케를 3인칭으로 그려냈을까? 소설은 거의 대부분 다이스케가 보고 경험한 것들을 서술하고 있었다. 즉 1인칭 시점으로 서술해도 충분한 것을 굳이 3인칭을 사용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와 `그`의 차이. 결국 소세키는 독자와 다이스케가 어느 정도의 거리를 두길 바란 것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게으를 권리의 옹호자`로서의 다이스케가 옳다 그르다를 판단할 메인 주제는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러므로 미치요를 히라오카에게 보내고 나서 그가 얻은 미래는 파멸이 아니었다. 과거 다이스케는 `남을 위해` 자신의 미래를 양보했던 바 있었다. 그 후 다이스케가 마주한 것은, 자신의 인생에 대해 다시 한 번 선택해야 하는, 응암 루프적인 상황이었다. 그리고 마침내 그는 자기자신을 솔직하게 들여다볼 수 있었다.

어느 편을 선택하는 것이 옳은가 하는 것은 그다지 중요치는 않은 듯하다. 어느 쪽이든 상관없다. 다만, 다신의 마음이 기우는 쪽으로 선택해야 한다. 왜냐하면 그것이 인간이기 때문이다. 나는 이 소설을 이렇게 읽어냈다.

인간은 제각각이다. 누구는 하루종일 집 안에 틀어박혀 가만히 시간을 보낼 때 만족감을 느끼고, 누구는 단 일 초라도 무언가를 하지 않고서는 견디지 못한다. 혼자 있음을 편안하게 생각하는 누군가가 있는가 하면, 화장실조차도 친구의 손을 붙들고 들어가지 않으면 소변도 못 누는 누군가도 있다. <나에게 맞는 인생은 무엇일까.> 그것을 발견해내고 실천하는 일이야말로 나의 `그 전`과 `그 후`를 가르는 경계가 될 것이다. 독자로서 내가 이 소설을 읽고 생각해야 하는 것은 바로 이런 화두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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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신경과학자들은 눈의 구조와 직동원리를 연구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우리 눈에 달린 것이 사실은 매우 민감한 주파수 수신장치의 일종이며, 미세한 주파수의 변화를 감지함으로써 세상을 구별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놀라운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 화제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 시점에 나는, 동물 인지과학 분야의 전문가인 알렉산드라 호로비츠가 품었던, 이를테면 <본다>라는 행위의 인문학적인 의문에 더 강렬한 호기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호로비츠는 `내가 세상을 보는 대로 다른 존재도 동일하게 세상을 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산책을 시작한다.

그녀의 다소 존재론적으로까지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인문학과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개개의 종이 갖고 있는 <움벨트(umwelt)>에서 출발한 것이다. 야곱 폰 웩스쿨이라는 생리학자가 처음 정의한 이 용어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각각의 생명체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 세계를 말한다. 호로비츠는 전작 『개의 사생활』에서 움벨트의 예로 야생진드기의 삶을 들었다. 진드기는 풀잎 위에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피를 지닌 것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진드기에게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다만 적외선 감지 장치 비슷한 기관을 지니고 있어서 온혈동물의 존재를 인지한다고 한다.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풀숲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일은 진드기에게 있어서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군만두도 케이블텔레비전도 없이 18년 동안 `핏덩어리`를 기다릴 수도 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를 우리 인간의 경험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같은 잔디밭에 서 있어도 인간의 세계와 진드기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움벨트는 바로 그걸 말하고자 하는 용어다. 개인적으로 나는 움벨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움벨트가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초끈이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이 책과는 별로 관련이 없으므로 관두어야겠다.

호로비츠는 일단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다음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네를 산책한다. 그녀는 이어서 지질학자와, 타이포그라퍼와, 일러스트레이터와, 곤충박사와, 도시사회학자와, 의사와, 시각장애인과, 음향 엔지니어와, 반려견과 차례로 산책을 시도하고 그 후기를 정성스레 남겼다.

과연 그들은 제각각 세상을 보고 있었으며, 그들의 세상 역시 그들이 보는 방식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호로비츠로서는 미처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하던 간판 속 글씨체와 글씨크기, 장평, 자간 따위를 타이포그라피의 눈은 세세하게 살펴본다. 지질학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길바닥에 깔린 콘트리트에서 고대의 해양세계를 들여다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들은 누구의 시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던 소화전의 기하학적 패턴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또 그녀의 반려견인 피니건의 콧속에 맺힌 세상은 호로비츠의 망막에 비친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 가히 천재적인 그녀의 아이에서부터 냄새맡기의 전문가 피니건에 이르는 여러 전문가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그들의 세상, 즉 그들의 움벨트를 반영하는 듯했다. 혹은 그들의 움벨트가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든가.

그렇다면, 타인의 - 혹은 타 존재의 - 움벨트를, 즉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에 나온 대로 경이감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자세히 살펴보는 행위에 가치를 두는 문화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이런 결론은 어딘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는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째서 중요한 일인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책의 독서를 마치기 위해, 나는 나만의 산책을 나섰다. (책 속의 곤충박사처럼) 벌레 먹은 자국을 살펴보기 위해 나뭇잎을 들춰보기도 하고, (지질학자가 하던 대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을 빙빙 돌면서 혹시 외벽에 조개껍데기가 파묻혀 있나 살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책 한 번 슥 읽은 걸로 그 모든 것들을 확연하게 느끼기는 무척 어려웠다. 약간 시무룩해진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도 놀라운 순간이 찾아왔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길 건너편의, 어느 건물을 신축하는 공사현장에 가 닿았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그 장면을 나는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뼈대만 앙상한 건물 꼴조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과, 공사장을 보도로부터 안전하게 차단시키는 1층반 높이의 차단벽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그곳을 응시하자, 공사현장 곳곳에서 무언가가 눈앞에 불쑥불쑥 솟아나기 시작했다. 인부들이 벗어놓은 빨간 목장갑이 튀어나오고, 노란색 안전띠가 구석에 쳐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철골의 마디 이음새가 선명해졌고, 바싹 말라 식은 시멘트 가루 냄새가 콧속을 후벼들었다. 차단벽도 처음엔 그저 우중충한 회색일 뿐이었지만, 공사 책임자의 정보가 적힌 안내문, 그 옆에 게시되어 있는 도로전용허가증, 야밤에 누군가 포스터 따위를 붙여놓았다가 다음날 관리자에 의해 뜯겨져나간 뒤의 흔적인 듯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초록색 접착테이프, 구석진 곳에 예술혼에 불탄 한 청년이 스프레이로 갈겨 놓은 그라피티 따위가, 마치 민무늬의 회색 바탕에서 스며나오듯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 수많은 디테일들을 모른 척하고도 살아왔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스마트폰을 집는 대신 창가에 놓아두었던, 그러나 놓여 있었던지조차 기억이 희미했던, 화분 하나를 발견했다. 가뭄에 강해보이는 단단하고 두꺼운 잎을 가진, 납작한 식물 한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줄기는 땅바닥에 붙어 있다시피 했고, 다만 잎을 내뻗는 잔가지만이 잎사위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이파리를 살짝 뒤집어보자, 놀랍게도 좁쌀만 한 하얀색 알갱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요사이 집안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날파리들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란 것을. 나는 물티슈를 쥐고 정성스레 잎들 하나하나를 닦아주었다. 그래도 내가 놓친 화분의 음습한 구석 어딘가에 날파리의 알들이 숨어 있을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해충 탐지에 성공한 세스코 직원의 뿌듯함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나는 어느덧 소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에 대한 희열, 기쁨. 그것은, 결국 자신의 움벨트를 넓힌 데서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 물론 내가 보는 세계를 아무리 확장시킨다 한들 지금 당장 내 월급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전보다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일을 조금이나마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나는 와이파이 수신범위보다 더 넓은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니면 오랜만의 단속운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눈꺼풀이 열려 있으면 우리는 자동으로 주변 환경을 훑어보고 시선을 전후로 빠르게 움직이는 단속운(saccade)을 해 중심 시야를 50도 정도 전방에 고정한다. 또한 시선을 던져 풍경 전체를 훑어보고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져 코앞에 있는 물체를 계속 바라본다. 이런 단속운동을 안구가 마취된 상태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일어난다. 멈춰서는 안 되고 멈출 수도 없는 운동이다. 만약 시선을 앞뒤로 움직이지 않고 한 점만을 쳐다보고 있으면 시선을 받고 있던 물체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속적인 자극을 받은 감각수용체가 무뎌져서 더는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계속되는 감각적 자극에 적응한다. 방안의 지독한 악취에도 둔해지고 한증탕 공기의 열기에도 익숙해진다(그러나 당신 다음으로 방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말해주듯 냄새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온도도 여전히 높다). 입을 떡 벌린 사자를 마주치고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이 사자의 이미지가 시야에서 지워져버리는 비극을 면할 수 있는 것도 단속운동 덕분이다. - p.146˝

모든 자극은 적응되는 순간 무뎌지고, 점점 무뎌지다가 종국에는 사라져버린다. 우리 앞에 나타난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안구는 단속운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움벨트도 익숙해진 채로 방치해두다보면 결국 점점 쪼그라들어서 나중엔 눈뜬 장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고유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그저 나 혼자만의 견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너무나 익숙하고 지겨워서 그만 사라지고 말았던 것들을 <움벨트적 단속운동>을 통해서 다시 되살려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몹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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