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다는 것은 무엇인가. 이 본질적인 물음에 답하기 위해 지난 수십 년 동안 신경과학자들은 눈의 구조와 직동원리를 연구했다. 그 결과 우리는 이제 우리 눈에 달린 것이 사실은 매우 민감한 주파수 수신장치의 일종이며, 미세한 주파수의 변화를 감지함으로써 세상을 구별한다는 것임을 알게 되었다.

이 놀라운 메커니즘에 대하여 이야기할 거리는 무궁무진하다. 하지만 이 화제는 다음으로 미루도록 하자. 지금 시점에 나는, 동물 인지과학 분야의 전문가인 알렉산드라 호로비츠가 품었던, 이를테면 <본다>라는 행위의 인문학적인 의문에 더 강렬한 호기심을 품고 있기 때문이다. 호로비츠는 `내가 세상을 보는 대로 다른 존재도 동일하게 세상을 볼까?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은 어떤 방식으로 세상을 보며,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은 어떤 모습일까?`라는 의문을 풀기 위해 산책을 시작한다.

그녀의 다소 존재론적으로까지 보이는 이 질문은 사실 인문학과 관련되어 있다기보다는 개개의 종이 갖고 있는 <움벨트(umwelt)>에서 출발한 것이다. 야곱 폰 웩스쿨이라는 생리학자가 처음 정의한 이 용어는, 간단하게 말하자면 각각의 생명체마다 자신만의 고유한 경험 세계를 말한다. 호로비츠는 전작 『개의 사생활』에서 움벨트의 예로 야생진드기의 삶을 들었다. 진드기는 풀잎 위에 가만히 앉아서 따뜻한 피를 지닌 것이 다가오기만을 기다린다고 한다. 진드기에게는 눈도 없고 귀도 없고 코도 없고, 다만 적외선 감지 장치 비슷한 기관을 지니고 있어서 온혈동물의 존재를 인지한다고 한다. 아무도 나다니지 않는 풀숲에서 가만히 기다리는 일은 진드기에게 있어서 아무 문제도 되지 않으며, 심지어 군만두도 케이블텔레비전도 없이 18년 동안 `핏덩어리`를 기다릴 수도 있다. 진드기가 경험하는 세계를 우리 인간의 경험과 비교하는 것은 무의미하다. 그래서 같은 잔디밭에 서 있어도 인간의 세계와 진드기의 세계는 완전히 다른 무언가일 것이다. 움벨트는 바로 그걸 말하고자 하는 용어다. 개인적으로 나는 움벨트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며 움벨트가 마치 물리학에서 말하는 초끈이론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는데, 지금 이 책과는 별로 관련이 없으므로 관두어야겠다.

호로비츠는 일단 혼자 동네 한 바퀴를 돌아보고, 다음엔 자신의 어린 아들을 데리고 동네를 산책한다. 그녀는 이어서 지질학자와, 타이포그라퍼와, 일러스트레이터와, 곤충박사와, 도시사회학자와, 의사와, 시각장애인과, 음향 엔지니어와, 반려견과 차례로 산책을 시도하고 그 후기를 정성스레 남겼다.

과연 그들은 제각각 세상을 보고 있었으며, 그들의 세상 역시 그들이 보는 방식만큼이나 제각각이었다. 예를 들어 호로비츠로서는 미처 존재조차 감지하지 못하던 간판 속 글씨체와 글씨크기, 장평, 자간 따위를 타이포그라피의 눈은 세세하게 살펴본다. 지질학자는 고개를 푹 숙이고 길바닥에 깔린 콘트리트에서 고대의 해양세계를 들여다본다. 이제 막 걸음마를 뗀 아들은 누구의 시선으로부터도 소외되어 있던 소화전의 기하학적 패턴을 발견하고 기뻐한다. 또 그녀의 반려견인 피니건의 콧속에 맺힌 세상은 호로비츠의 망막에 비친 세상과 완전히 다르다.

새로운 것을 발견하는 데에 있어 가히 천재적인 그녀의 아이에서부터 냄새맡기의 전문가 피니건에 이르는 여러 전문가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은, 그들의 세상, 즉 그들의 움벨트를 반영하는 듯했다. 혹은 그들의 움벨트가 그들이 세상을 보는 방식을 결정하는 것이든가.

그렇다면, 타인의 - 혹은 타 존재의 - 움벨트를, 즉 그들의 눈에 비친 세상을 이해하는 것은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일까? 에필로그에 나온 대로 경이감을 느끼기 위해서일까? 자세히 살펴보는 행위에 가치를 두는 문화의 일원이 되기 위해서? 이런 결론은 어딘지 성에 차지 않는다. 그녀의 책을 읽고 나서 나에게는 새로운 의문이 생겼다. ˝내가 얼마나 많은 것을 놓치고 있었는지를 깨닫는 것은 어째서 중요한 일인가?˝

그 의문을 풀기 위해, 그리고 최종적으로 이 책의 독서를 마치기 위해, 나는 나만의 산책을 나섰다. (책 속의 곤충박사처럼) 벌레 먹은 자국을 살펴보기 위해 나뭇잎을 들춰보기도 하고, (지질학자가 하던 대로) 평범해 보이는 건물을 빙빙 돌면서 혹시 외벽에 조개껍데기가 파묻혀 있나 살펴보기도 하면서 말이다. 그러나 책 한 번 슥 읽은 걸로 그 모든 것들을 확연하게 느끼기는 무척 어려웠다. 약간 시무룩해진 나는 집으로 발길을 돌렸다.

그리고 나에게도 놀라운 순간이 찾아왔다. 횡단보도 앞에 서서 보행 신호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나는 멍하니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내 시선은 길 건너편의, 어느 건물을 신축하는 공사현장에 가 닿았다. 무심코 눈에 들어온 그 장면을 나는 찬찬히 살펴보기 시작했다. 처음엔 뼈대만 앙상한 건물 꼴조가 하늘 높이 솟아 있는 모습과, 공사장을 보도로부터 안전하게 차단시키는 1층반 높이의 차단벽밖엔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시간을 들여 그곳을 응시하자, 공사현장 곳곳에서 무언가가 눈앞에 불쑥불쑥 솟아나기 시작했다. 인부들이 벗어놓은 빨간 목장갑이 튀어나오고, 노란색 안전띠가 구석에 쳐져 있는 모습도 보였다. 철골의 마디 이음새가 선명해졌고, 바싹 말라 식은 시멘트 가루 냄새가 콧속을 후벼들었다. 차단벽도 처음엔 그저 우중충한 회색일 뿐이었지만, 공사 책임자의 정보가 적힌 안내문, 그 옆에 게시되어 있는 도로전용허가증, 야밤에 누군가 포스터 따위를 붙여놓았다가 다음날 관리자에 의해 뜯겨져나간 뒤의 흔적인 듯 벽에 덕지덕지 붙어 있는 초록색 접착테이프, 구석진 곳에 예술혼에 불탄 한 청년이 스프레이로 갈겨 놓은 그라피티 따위가, 마치 민무늬의 회색 바탕에서 스며나오듯이 내 눈에 들어오기 시작한 것이다. 정말 놀라운 순간이었다. 어째서 나는 이 수많은 디테일들을 모른 척하고도 살아왔던 것일까.

집으로 돌아온 뒤 나는 스마트폰을 집는 대신 창가에 놓아두었던, 그러나 놓여 있었던지조차 기억이 희미했던, 화분 하나를 발견했다. 가뭄에 강해보이는 단단하고 두꺼운 잎을 가진, 납작한 식물 한 포기가 자라고 있었다. 줄기는 땅바닥에 붙어 있다시피 했고, 다만 잎을 내뻗는 잔가지만이 잎사위 사이로 언뜻언뜻 보였다. 이파리를 살짝 뒤집어보자, 놀랍게도 좁쌀만 한 하얀색 알갱이들이 다닥다닥 붙어 있었다. 그리고 나는 깨달았다. 요사이 집안에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날파리들의 고향이 바로 그곳이란 것을. 나는 물티슈를 쥐고 정성스레 잎들 하나하나를 닦아주었다. 그래도 내가 놓친 화분의 음습한 구석 어딘가에 날파리의 알들이 숨어 있을 것이긴 하겠지만, 그래도 뭐랄까 해충 탐지에 성공한 세스코 직원의 뿌듯함이 밀려왔다. 나도 모르게, 나는 어느덧 소소한 것에도 기쁨을 느낄 줄 아는 사람이 되어가고 있었다.

세계를 알아간다는 것에 대한 희열, 기쁨. 그것은, 결국 자신의 움벨트를 넓힌 데서 생기는 감정이 아닐까. 물론 내가 보는 세계를 아무리 확장시킨다 한들 지금 당장 내 월급이 오르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그전보다는 이 세상에서 살아간다는 일을 조금이나마 더 잘 견딜 수 있을 것 같은 여유가 찾아왔다. 오랜만에 나는 와이파이 수신범위보다 더 넓은 세상을 들여다볼 수 있었다.

아니면 오랜만의 단속운동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눈꺼풀이 열려 있으면 우리는 자동으로 주변 환경을 훑어보고 시선을 전후로 빠르게 움직이는 단속운(saccade)을 해 중심 시야를 50도 정도 전방에 고정한다. 또한 시선을 던져 풍경 전체를 훑어보고 다시 한 번 시선을 던져 코앞에 있는 물체를 계속 바라본다. 이런 단속운동을 안구가 마취된 상태가 아니라면 계속해서 일어난다. 멈춰서는 안 되고 멈출 수도 없는 운동이다. 만약 시선을 앞뒤로 움직이지 않고 한 점만을 쳐다보고 있으면 시선을 받고 있던 물체가 어느 순간 사라지는 것처럼 보일 것이다. 지속적인 자극을 받은 감각수용체가 무뎌져서 더는 흥분하지 않기 때문이다. 이처럼 우리는 계속되는 감각적 자극에 적응한다. 방안의 지독한 악취에도 둔해지고 한증탕 공기의 열기에도 익숙해진다(그러나 당신 다음으로 방 안에 들어온 사람들의 얼굴 표정이 말해주듯 냄새가 사라진 것은 아니고 온도도 여전히 높다). 입을 떡 벌린 사자를 마주치고 공포에 질려 그 자리에 얼어붙은 사람이 사자의 이미지가 시야에서 지워져버리는 비극을 면할 수 있는 것도 단속운동 덕분이다. - p.146˝

모든 자극은 적응되는 순간 무뎌지고, 점점 무뎌지다가 종국에는 사라져버린다. 우리 앞에 나타난 백마 탄 왕자님의 모습을 놓치지 않기 위해서 우리의 안구는 단속운동을 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움벨트도 익숙해진 채로 방치해두다보면 결국 점점 쪼그라들어서 나중엔 눈뜬 장님 신세가 될지도 모른다. 우리 고유의 세계를 확장하기 위해서뿐만 아니라 지켜내기 위해서라도, 어쩌면 우리는 새로운 시각으로 세상을 바라보는 연습을 해야할지도 모르겠다. 이게 저자가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인지 그저 나 혼자만의 견해인지는 모르겠다. 어쨌든 이 책을 읽고 나서, 오랫동안 너무나 익숙하고 지겨워서 그만 사라지고 말았던 것들을 <움벨트적 단속운동>을 통해서 다시 되살려낸 느낌이 들었다. 그리고 그 느낌은 몹시 달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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