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 필립 K. 딕 걸작선 5
필립 K. 딕 지음, 김상훈 옮김 / 폴라북스(현대문학)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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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바니 메이어슨은 P.P(퍼키 팻) 레이아웃사()의 뉴욕지부 유행 예측 컨설턴트로 일한다. 그는 미래를 내다볼 수 있는 예지능력자다. 열심히 노력한 끝에 상류층의 삶을 거머쥐었지만 따지고 보면 상황은 그리 좋아지지도 않은 듯하다. UN의 강제징용 영장이 그에게 발부되었고, 이제 곧 화성이나 다른 행성으로 징용될지도 몰랐다. 정신분석로봇인 닥터 스마일에게 의지해 정신질환 진단을 받아내 강제징용을 피해보려 하지만 그의 정신은 그 어느 때보다도 멀쩡하다. 성공을 위해 아내와 이혼한 것을 후회하지만 과거를 돌이킬 수는 없다. 가능한 여러 갈래의 미래 가운데 한 단면을 언뜻 들여다볼 수 있는 예지능력으로 미래를 바꿀 수 있는 것도 아니다. 그의 업무는 예지능력을 사용해 퍼키 팻 모형 세트에 들어갈 제품들을 고르는 일이다.

 화성과 이오 등 태양계에 퍼져 있는 식민지의 이주민들은 퍼키 팻 모형 세트에 열광했다. <미미의 공주 침실 꾸미기><바비의 드레스룸> 따위처럼 퍼키 팻 모형 세트는 조그만 인형과 가지각색의 소품들이 설치된 장난감 세트다. 그건 강제로 추방당하다시피 외계 행성으로 이주한 식민지 주거민들로 하여금 지구에서의 추억을 떠올려주고 재생시켜주었다. 특히 불법으로 유통되는 마약인 캔-D를 복용하면 인형 세트 안에서의 지구의 삶을 직접 체험할 수도 있었다. 물론 약효가 지속되는 동안만이지만.

 P.P 레이아웃사는 퍼키 팻 모형 세트 시장을 독점하고 있었고, 또한 캔-D의 생산과 유통의 은밀한 공급자였다. UN은 캔-D를 근절시키려고 노력하지만 이주민들의 캔-D에 대한 의존도가 높아 섣불리 P.P 레이아웃사의 사장이자 캔-D의 생산 및 공급자인 레오 뷸레로를 검거하지는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명왕성에 우주선 한 대가 불시착한다. 그곳엔 십 년 전 프록시마 항성계로 여행을 떠났던 사업가 파머 엘드리치가 타고 있었다. 파머 엘드리치의 귀환과 동시에 캔-D 시장은 묘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파머 엘드리치가 프록시마에서 돌아오면서 캔-D의 원료와 흡사한 지의류 생물체를 갖고 왔다는 소문이 돌았던 것이다. 소문은 사실이었다. 파머 엘드리치는 캔-D의 대항마인 츄-Z라는 이름의 약을 개발하고 식민지 행성들에 공급하려 한다. -D를 박멸하고 싶었던 UN은 파머 엘드리치와 손잡고 츄-Z를 정식 의약품으로 인가한다. P.P 레이아웃사의 사장 레오는 그런 사업적 계략을 파쇄하기 위해 파머 엘드리치를 만나러 가지만, 오히려 함정에 빠져 강제로 츄-Z를 투여 받게 된다. 파머 엘드리치가 만든 츄-Z의 환상 세계 속에서 레오는 시공을 넘나들다가 천신만고 끝에 현실로 돌아온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목적이 사업적 번창을 위한 것이 아니라 지구 침략이라는 사실을 깨닫는다. 이제 그는 외계인의 침공으로부터 인류를 지켜내기 위해 파머 엘드리치를 몰아내기로 결심한다.

 메이어슨은 덫에 걸린 레오를 구하려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해고당한다. 전처에게 찾아가 재결합을 요구하지만 받아들여지지 않고, 메이어슨은 레오를 구하지 않았다는 자책감과 전처와의 관계를 더 이상 회복할 수 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결국 화성행 우주선에 스스로 몸을 맡긴다. 화성의 열악한 환경 속에서 이주민들은 토굴이라 불리는 지하 주거지에 틀어박혀 캔-D를 씹을 뿐이다.  그리고 이제 파머 엘드리치의 신제품 츄-Z를 복용하기로 한다. -D보다 훨씬 저렴하기 때문이었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제품이 심각한 신체적 부작용을 야기하는 것처럼 보이게 만듦으로써 츄-Z가 시장에 진출하는 것을 막으려 한다. 그는 메이어슨에게 간질병을 일으키는 물약과 츄-Z를 같이 복용한 다음 부작용에 대한 소송을 걸라고 제안한다. 메이어슨은 그에게 참회하는 심정으로 그 제안을 받아들인 다음, -Z를 복용한다.

 츄-Z는 퍼키 팻이라는 인형 세트를 필요로 하는 캔-D와는 전혀 달랐다. 그것은 <실제 지구에서의 자신의 삶>을 완벽히 구현했던 것이다. 게다가 츄-Z의 세계는 단순한 환각이 아니었다. 환상과 실재가 결합된 형태의 세계인 것이었다. 환각 속의 세계는 실제의 현실이기는 하지만 자신의 환상에 불과했다. 환각은 엄연히 실재했고, 실재하는 환각의 입장에서 보면 츄-Z를 복용한 자신은 정작 유령 같은 환상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메이어슨은 과거로 돌아가서 전처와의 관계를 회복하려고 노력하지만 실패로 돌아가고, 미래의 자신과도 조우한다. 환각 속에서 그는 파머 엘드리치가 사람들의 환상을 넘나들면서 전생(轉生)함으로써 영원불멸의 삶을 취하려는 외계 생명체라는 사실을 알아챈다. 외계 생명체는 가까운 미래에 죽음이 예정된 파머 엘드리치의 육체를 버리고 메이어슨의 육체를 취하려 하지만, 시공을 넘나든 수 세기 간의 숙고 끝에 메이어슨을 놓아주고 자신은 파멸을 선택한다.

 약에서 깬 메이어슨은 파머 엘드리치가 비록 죽음을 선택하기는 했지만 츄-Z를 복용했던 모든 사람들에게 파머 엘드리치의 흔적이 깃들어 있음을 깨닫는다. 파머의 번쩍거리는 의수(義手)와 강철로 만들어져 턱에 박인 의치(義齒), 정상적인 눈 대신 인공 카메라 렌즈가 삽입된 공허한 의안(義眼)은 모든 사람들에게 잠복해 있었다. 그리고 파머 엘드리치의 그 세 가지 성흔은 츄-Z를 복용하지 않은 사람들에게마저도 깃들어 있었다. 메이어슨은 화성에서의 삶을 살아내며 파머의 흔적을 지우기로 결심한다. 레오는 파머 엘드리치의 성흔이 자신과 부하들의 몸에 모두 깃들어 있는 모습을 바라보면서 파머 엘드리치가 탄 우주선을 요격하기 위해 떠난다.

 


감상

 공상 1: 인류는 캔-D니 츄-Z니 하는 약물을 투여 받지 않아도 되는 굳건한 환상이자 동시에 실재하는 세계를 창조해냈다. 바로 인터넷이다. 이불 밖이 무서워 오들오들 떨면서도 만렙을 찍은 캐릭터로 게임에 접속해 용맹하게 몬스터를 휩쓸고, 나와 닮은, 그러나 나보다 훨씬 예쁜, 그러므로 내가 아닌 나의 셀카 사진을 페이스북에 올리고 좋아요를 얻는다. 우리 모두는 인터넷이라는 츄-Z에 중독되어 버렸다. 스마트폰, 와이파이, 네이버 아이디라는 인터넷의 세 가지 성흔이 깊이 각인되어 있는 장면을 어디에서든 심심치 않게 볼 수 있다.

 

 이런 식으로 공상의 나래를 펼치느라 나는 틈틈이 독서를 중단해야 했다. 아니면 문화적 유전자인 밈이 사람들의 머릿속에 퍼져나가는 과정을 상상한다든지. 혹은 어릴 적에 있었던 신비롭지만 사소한 체험들이 불쑥 기억난다든지.

 그러다가 왜 필립 K 딕이 나를 그토록 매혹시키는지 깨달았다. 그는 이야기들의 원형을 제시하기 때문이다. 호메로스가 서사의 원형을 창조해냈듯이 말이다. 그의 소설들을 끊임없이 재생산하는 할리우드 영화들은 물론이고, 수많은 SF소설들과 SF적 요소가 차용된 문학작품들 또한 필립 K 딕을 참조하고 있는 것을 보면 내 추측이 틀리진 않은 듯하다. 이제 그의 소설들은 마치 파머 엘드리치처럼 우리(심지어 그의 이름조차도 들어보지 못한 사람들도 포함해서)의 머릿속에 깊숙이 들어앉아 있다. 나는 그래서 그의 작품들에 열광한다. 공상과 망상과 마침내는 대()망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연쇄반응이 벌어지는 경험은 언제나 나에게 활력을 준다. 그런 점에서 필립 딕은 나의 우울증 특효약이나 다름없다.

 필립 딕의 많은 작품들이 그렇듯이 이 소설도 <>이라는 소품을 중심으로 진행된다. 흔히 <약 빨고 썼다>는 표현이 정확하게 들어맞지 않나 싶을 정도다. 이 소설은 그의 다른 소설 작년을 기다리며와 설정 상 비슷한 면이 많은데, 작년을 기다리며에서는 이 소설에서 슬쩍 언급되었던 프록시마 항성계와의 갈등이 본격적으로 다루어지고 복용자가 평행우주의 여러 가지 미래로 타임워프하는 약도 등장한다. 파머 엘드리치의 세 개의 성흔작년을 기다리며를 묶어서 읽으면 더욱 흥미진진한 독서 경험이 될 것 같다.

 

 공상 2: 나에게는 <이게 꿈이냐 생시냐>를 의심케 하는 순간을 경험한 적이 적어도 서너 번은 있다. 그리고 이게 생시이든 꿈이든 간에 상관없이, 계속 이 세계에 머물렀으면 하고 바란 적도 한두 번쯤 있었던 것 같다. 그러나 환상 속이든 현실 속이든 어떻게든 삶을 살아내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결론을 얻곤 한다. 그 결론이 의미하는 것은 무엇일까. 나를 부정한 존재로 만드는 성흔들을 지워내려 애쓰면서 살아야 할까, 아니면 내게 주어진 것들에 만족하고 긍정하며 살아야 할까. 나는 소설 나부랭이를 읽고 너무 진지해지지는 말아야겠다고 생각하며 책을 덮었다. 그 해답은 책 속에서는 결코 찾을 수 없으며, 아마도 책 바깥에서도 영원히 구하지 못할 것이라는 예감에 휩싸인 채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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