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천천히 읽기 4

내 약점은 직업이다. 지난 십여 년 동안 나는 변변찮은 직업들을 전전했다. 요즘 세상에는 직업이란 것은 자신이 어떤 사람인가를 말해준다. 그래서 자신의 직업을 말할 때, 사람들은 시장에서 채소를 판다고 말하기보다 농산물 유통업에 종사한다고 말하고 도서 물류센터에서 까대기를 한다기보다 대형 인터넷 서점에서 근무한다고 한다. 이런 종류의 포장이 불가능한 직업에 종사하는 사람도 있다. 그런 사람들이 맞선 자리에서 자신의 직업을 음식배달부라고, 또는 택시기사라고 고백하면 상대방의 얼굴은 돌처럼 굳곤 한다. 비록 내 직업이 시장 바닥의 마부에 불과하지만 나는 스스로를 철학자라고 생각한다고 말하면 화석처럼 딱딱했던 상대의 표정에는 공포심마저 서린다. 미친놈인 줄 아는 것이다. 그러나 직업이 무엇이든 간에 신성 따위는 없는 것이다. 대기업 직원이든 잘나가는 전문직종이든 앞으로 나아가지 못한다면 모두 천박하다. 퇴근하고 집에 돌아와서 보면, 아무리 험난하고 긴 여정을 보냈다 하더라도, 아침에 출근할 때보다 한 걸음도 벗어나지 않은 채 제자리에 있는 자신을 발견하곤 한다. 그런 날은 말그대로 ‘공친 하루‘인 것이다.
직업과 자신을 동일시하는 순간 세상 살기는 편해진다. 세간의 평판이라는 나으리가 가리키는 데로만 가면 되기 때문이다. 나는 그 나으리가 가라는 곳이 영 탐탁치 않다. 그래서 노임을 받지 않을 테니 이제 그만 내려주시라고 정중히 요청하고 있다. 그런데 나으리께서는 통 내리시질 않는다. 요지부동이다. 이럴 때 어찌해야 좋을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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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천천히 읽기 3

늘 한계점이다. 더 이상은 버티지 못할 것 같은 상태가 몇 년째인가. 그놈의 빚만 없어도 숨통이 트일 것 같은데, 빚더미는 갚아도 갚아도 줄지 않는다. 왜냐하면 내가 가진 것보다 많은 것을 바라기 때문이다. 내가 감당할 수 있는 한도를 초과한 욕망을 채우려면 ‘타인의 놋쇠‘가 필요하다. 심지어 그 상황에서 미래를 대비한답시고 적금까지 붓는다. 그러니 빚이 줄어들 리가 없다. 욕망을 줄이지 않는 한 이 족쇄를 끊을 길은 없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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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천천히 읽기 2

소로가 콩코드를 돌아다녔듯, 나 또한 마포구 일대를 샅샅이 돌아다녔다. 그런데 어째서인지 내 눈에는 사람들의 고생이 보이지 않았다. 내 눈앞에서 사람들은 여유롭고 행복해 보였다. 소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한 반면 나는 내 삶에 만족하지 않기 때문이었다. 아마 소로의 눈에는 나 또한 목이 비틀리는 고행을 하는 사람으로 비춰졌을 것이다. 내가 생계를 위해 하는 일이 인류를 구원하는 거창한 일일 리 없었다. 헌신적인 조력자가 위기에서 구해주는 드라마 같은 일도 벌어지지 않는다. 다만 끝없이 반복될 뿐이었다. 그런 고행의 쳇바퀴에서 빠져나가기 위해서는 자신의 삶에 만족할 줄 알아야 하는 것이다. 그 방법을 소로는 알고 있었다. 공자도 칠십이 되어서야 터득했고, 부처도 갖은 고행 끝에 이룬 것을 말이다. 나도 어서 고행을 끝내고 싶은 마음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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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든 천천히 읽기 1


필사는 독서의 한 방법이다. 속독이 전력질주라면, 필사는 최대한 천천히 걷는 것이다. 나는 빨리 걸으면 무릎이 시리는 체질이다. 속도를 포기하자 나는 무릎 건강뿐만 아니라 세세한 풍경 또한 얻을 수 있었다.

뭐든 처음은 중요하다. 처음 그 자체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 처음의 마음가짐, 처음 시작할 때의 설렘, 세상이 달리 보이는 체험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소로의 첫단락을 밑줄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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척하는 삶 - 개정판
이창래 지음, 정영목 옮김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14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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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마을 사람들은 구로하타를 닥 하타라고 부른다. 닥 하타의 은 닥터, 즉 의사라는 뜻이다. 구로하타는 의사가 아니라 의료기기 판매상인데도 말이다. 그는 일본에서 온 동양인 이민자였다. 이 마을에 정착해서 수십 년 동안 의료기기 가게를 운영해왔고, 이제는 가게를 팔고 은퇴한 몸이다. 그가 하는 일이라고는 노구를 이끌고 천천히 산책을 한다든가 고급 주택가에 자리잡은 자신의 저택 수영장에서 고적하게 수영을 즐기는 게 전부다. 그럼에도 그를 아는 사람들은 여전히 그를 이라 부르며 환대한다.

이 즈음 하타는 리브 크로퍼드의 집요한 연락에 시달렸다. 리브는 부동산 중개인이었다. 그녀는 하타의 집을 매매하고 싶어 했다. 고전적인 양식으로 지어지고 오랜 세월 정성껏 관리된 그의 집은 금전적 가치가 높았다. 리브의 매매 제안은 타당했고, 오래된 단독주택을 관리하기에 하타는 너무 노쇠했다. 하지만 하타는 집을 팔 생각이 없었다. 그에게 있어 이 집은 곧 그의 삶이나 다름없기 때문이었다.

그는 평생 독신이었고 넓은 저택에 혼자 살지만 가족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가족이었던 누군가가 있었다. 서니라는 이름의 딸이었다. 사회복지기관을 통해 입양해 온 한국인 여자아이였다. 그러나 그녀는 하타를 떠나 독립한 지 오래였다. 서니는 커 가면서 새아빠인 하타와의 충돌이 잦아졌고 둘의 사이는 서먹해졌다. 서니는 결국 떠났고 연락도 주고받지 않는다. 그래서 벽난로에 피워 놓은 불이 카펫에 옮겨 붙었을 때 그를 구해내고 구조대에 전화를 걸어준 사람은 서니가 아니라 리브 크로퍼드였다.

유독한 연기를 들이마신 탓에 하타는 며칠간 병원에 입원한다. 히키 부부의 아이가 중환자실에 누워 있는 병원과 같은 곳이었다. 몇 해 전 은퇴할 때 하타는 의료기기 가게를 히키 부부에게 팔았다. 그가 가게를 처분한 뒤 지역 경제가 나빠지고 근처에 의료기기 체인점이 들어섰다. 히키 부부의 가게는 운영난에 시달렸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부부의 아이가 심장질환을 앓았다. 끈질기게 청구되는 병원비와 불어나는 보험료를 감당가기도 벅찬 상황이었다. 히키 씨는 하타를 원망했다. 가게가 예전처럼 잘 돌아가지 않을 거란 걸 숨기고 자기에게 가게를 넘겼다는 의심하는 듯했다. 그러나 히키 부인은 하타를 원망하지 않았고 늘 따뜻하게 대해주었다. 하타는 퇴원하기 전날 밤 아이의 병실에 몰래 찾아간다. 병색이 완연한 아이의 모습을 보면서 그는 전쟁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하타가 전쟁에 나갔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는 전쟁 얘기를 꺼내지도 않았을 뿐더러 전쟁을 떠올리는 힌트조차 내비치지 않았다. 그가 사실은 한국인이고 일본인 부부에게 양자로 들어갔단 걸 비밀로 했듯이. 그러나 그는 늘 그때를 기억했다.

그의 부대는 버마 전선의 최전방으로 투입됐다. 그는 소위였다. 진료소에서 근무하며 군의관 오노 대위의 일을 보조했다. 전황은 좋지 않았다. 영국군이 곧 공습할 거란 불안이 퍼지고 있었다. 불안과 두려움이 절정으로 치달을 때 여자들, 그러니까 지원자들이 보급됐다. 여자들이 오는 날 부대는 들떠 있었다. 엄격하고 냉정한 오노 대위도 그랬던 모양이었다. 군의관은 여자들 가운데 한 명을 빼돌렸고, 하타에게 여자를 가두고 감시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위안부들은 하루에도 수십 명의 굶주린 남자들을 받아내느라 만신창이가 되어갔다. 그러나 K라는 이름의 그 여자만은 진료소 뒤편의 창고에 숨겨져 하타의 보살핌을 받았다. 하타는 그녀를 사랑하게 된다.

그러나 운명은 마치 파도처럼 그들을 덮쳐왔다. 오노 대위에게 K를 내줘야 할 때가 다가온 것이었다. K는 하타에게 자신을 죽여 달라고 부탁한다. 하타는 그럴 수 없었다. 그는 K에게 전쟁이 끝나면 어디로든 함께 떠나자고 말한다. 그러나 K는 단호히 거부한다. K의 입장에서 하타와 다른 군인들은 별 차이가 없었다. 하타는 K를 사랑한다고 믿고 있었지만, 사실은 K의 몸을 원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위안소를 들락거리는 다른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말이다. 하타의 사랑 고백은 K의 운명 앞에서는 공수표에 불과했다. 결국 하타는 K를 구할 수 없었다.

퇴원하던 날 그는 우연히 딸 서니의 소식을 들었다. 서니는 도시의 빈민가에서 그녀의 아이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하타는 딸을 찾아가보기로 결심한다. 세월이 많이 지났기 때문에 둘의 감정은 많이 누그러져 있었다. 하타는 서니와 조심스럽게 왕래하기 시작한다. 서니가 직장에 나가야 했기 때문에 서니의 아들 토마스를 종종 돌봐주었다. 하타는 토마스의 존재에 기쁨을 느끼고 서니와의 관계가 좋아질 거란 희망에 부푼다.

어느 날 하타는 토마스와 야외 수영장으로 놀러갔다가 사고를 당한다. 토마스가 수심이 깊은 곳에 빠진 것이다. 하타의 친구 레니가 급히 물속에 뛰어 들지만 갑작스럽게 심장마비가 와서 물에 가라앉는다. 레니가 잘못됐다는 걸 알아챈 사람은 하타뿐이었다. 그러나 하타는 토마스를 먼저 건져낸다. 토마스를 안전 요원에게 맡기고 나서야 하타는 레니를 구한다. 토마스는 금세 먹은 물을 토해내고 일어나지만 레니는 상태가 좋지 않았다. 다행히 구급대가 일찍 도착해 준 덕분에 레니는 죽지 않았다. 레니는 하타를 생명의 은인으로 여긴다.

마침내 하타는 집을 팔기로 결심한다. 집을 팔고 히키 부부의 가게를 다시 매입해서 딸에게 물려줄 것이다. 그리고 하타 자신은 먼 여행을 하기로 결심한다. 아무런 계획도 세우지 않고 떠나는 멀고 긴 여행. 그리고 여행을 끝내고 이곳, 고향으로 돌아오리라고 말이다.



감상

요즘 개그맨 안일권의 유튜브 영상을 즐겨 본다. 영상 속에서 그는 자신이 연예계 싸움 1위이자 건달이며 동시에 무도가라고 주장한다. 그러면서 건달의 말투와 행동 따위를 흉내낸다. 결국 그는 진짜 실력자를 만나 참교육당한다. 그러곤 다음번 영상에서 거만하게 팔을 흔들면서 카메라가 꺼진 뒤에 제대로 상대방을 손봐주었다고 떠벌린다. 그의 개그 포인트는 건달인 척하는 데에 있다기보단, 건달인 척하는 사람인 척하는 것에 있다고 생각한다. ‘척하는 인간은 눈꼴 시리지만 척하는 인간인 척하는 사람은 코믹하다는 게 얄궂었다. 안일권 씨의 영상을 보면서 나는 이라는 것에 흥미가 생겼고, 이내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문학적인 척하려고 샀다가 책장에 처박아 둔 이창래의 척하는 삶을 떠올렸다.

그러나 주인공 구로하타는 척하는 인간도 아니고 척하는 사람인 척하는 인간도 아니었다. 그는 조곤조곤 자신의 삶을 고백한다. 그의 고백들은 진심이었고 한 치의 거짓도 없었다. 그런데 왜 나는 마지막 장을 덮고 나서도 찝찝한 것일까. 그는 자신이 척하는 줄도 모르고 척하는 사람이었다. 나는 비난할 수도 웃어넘길 수도 없었고, 다만 그가 가련할 뿐이었다.

하타는 K에 대한 자신의 사랑을 굳게 믿는다. K를 부드럽게 응시하는 하타의 눈길은 그러므로 결백하다. 그러나 사랑하는 척하는 스스로에게 속아 있었다면, 그게 속임수였음을 마침내 깨달아버렸다면, 그는 유죄인가 무죄인가. 위안부를 물건처럼 마구 겁탈하는 저열한 짐승과 K를 정중히 대하는 자신이 방식만 다를 뿐 사실은 같은 마음이란 걸 알게 된다면, 그는 강간죄인가 사기죄인가. 나는 모르겠다. 왜냐하면 나 역시도 스스로에게 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으므로.

그래서 소설의 결말은 참 얄궂다. 하타는 히키씨가 파산해 은행에 압류된 가게를 사들이기로 한다. 아마 그 가격은 자신이 가게를 팔았을 때보다 훨씬 저렴했을 것이다. 개이득이다. 그러나 그의 계획은 장삿속으로 세운 게 아니었다. 딸 서니와 손자 토마스를 위한 것이었으니까. 어쩌면 그는 또다시 자기 자신에게 속는 줄도 모르고 속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아무리 길고 먼 여행을 한다고 해서 그의 삶이 과연 달라질 수 있을까. 그는 여전히 척하는 삶을 살 것이고, 여행에서 돌아온 그의 정든 마을과 서니는 여전히 그를 환대하거나 냉대할 것이다. 그는 고향이 아닌 이민지에서 영원한 이방인으로 머물 것이다. 정말 그뿐일까?

그러나 이야기에는 완전히 다른 측면도 존재한다.

하타가 어린 서니를 공항에서 처음 만나던 날, 그의 마음은 의심의 여지없이 행복과 기대로 부풀었다. 그러나 후에 서니는, 자기가 당신의 마음에 전혀 들지 않는 것 같았다고 그날을 회상한다. 하타는 서니가 낯선 환경에 겁을 먹었다고 짐작했지만 서니가 겁먹은 상대는 다름 아닌 하타였다.

그러므로 하타는 어쩌면 정말로 K를 사랑한 것인지도 몰랐다. 정말로 순수한 마음으로 파산한 히키의 가게를 재인수한 것인지도 모른다. 다만 상황이 그에게 누명을 씌웠던 것인지도 모른다. 진실은 무엇일까. 진실을 가려낼 수 있는 건 자기 자신도, 그를 마주하고 있는 상대방도 아닌 것 같다. 진실은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과 상대방의 관계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르는 것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므로 애인에게 나 이러려고 만나는 거야?”하고 따지지는 말자. 혹시나 묻게 되거든, 모텔 카운터 앞에서 단호히 아니라고 잡아떼는 남자를 단죄하자. 능청스럽게 사랑하는 사람끼리 이러는 게 어때서?”라고 반문하는 남자로부터 돌아서자. 그러나 어쩔 줄 몰라 하며 허망하게 서 있는 남자에게는 손을 내밀어주자. 그는 당신을 사랑하거나, 혹은 가련하게도 사랑한다고 믿고 있기 때문이다. 어쩌면 그 믿음은 사랑보다 더 단단했는지도 모른다. 당신이 사기라고 귀띔해주기 전까지는 말이다.




어떤 사람이 왜 어떤 방식으로 살아왔는지, 어떻게 해서 이런 행동은 하고 저런 행동은 하지 않게 되었는지, 과거를 기쁜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아니면 평정한 마음 또는 후회하는 마음으로 돌아보는지, 내 생각에 이런 것들은 다른 사람이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자신의 성공이나 실패를 생각할 때조차 완벽한 진실성을 추구하는 것은 대단히 어려운 일인 것 같다. 다 아는 일이지만, 과거란 결국 매우 불안정한 거울이어서 너무 가혹하면서도 동시에 지나치게 비위를 맞추어 주기 십상이며, 따라서 사람들이 믿고 싶어 하는 것과는 달리 절대 진실을 비추어 주지 않기 때문이다. -p.13

"난 상어한테는 뼈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귀에 익은 목소리가 들린다. 레니 바네르지가 문으로 들어오고 있다. 부드러운 초콜릿빛 얼굴에 익살맞은 표정이 걸려 있다.
"하하."
리브는 그렇게만 대꾸할 뿐이다. 기습을 당한 데다, 그가 나타난 것이 미묘하지만 분명하게 즐거움을 주었기 때문이다. 레니가 나타난 것은 갑작스럽지만, 동시에 충분히 예상할 수 있었던 일이다. -p.174

후지모리는 어두운 감수성을 지녔는데, 나로서는 그것을 이해하는 것이 늘 쉬운 일은 아니었다. (중략) 그러나 그의 성격 때문에 그와 함께 있다 보면 늘 어떤 일의 가장 괴상한 측면을 생각하게 되었다. (중략) 예를 들어 이렇게 히키 부인에게 그녀의 죽어 가는 아들과 시간을 보내는 일을 피하는 것에 대해 양해를 구한 뒤에는, 그가 나를 어떤 눈으로 볼지 생각해 보아야 한다. 내가 시드는 꽃다발을 들고 상쾌한 기분으로 이 널찍한 주차장을 가로지를 때 그는 나를 어떻게 묘사할까? 내가 결혼한 적이 없다고 말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내가 양녀로 들인 아이가 나와 함께 편하게 살기보다 달아나는 쪽을 택했다고 하면 그는 뭐라고 할까? 네가 가장 귀중하게 여기는 집에서 벽난로에 불을 때면서 왜 그렇게 부주의했느냐, 혹시 스스로 불을 질러 모든 것을 파괴하고 싶었던 것은 아니냐고 악마처럼 묻지 않을까? -p.183

"당신 도움은 필요 없어요!"
그녀는 소리를 질렀다.
"한 번도 필요했던 적이 없어요. 내 말 못 알아듣는 거예요? 그냥 내버려 둘 수 없는 거예요? 당신은 나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당신이 정말로 뭘 원했는지 아직도 모르고 있어요. 아직 젊고 점잖으니까요. 하지만 이제 말해 주죠. 그건 내 섹스예요. 내 섹스라는 물건이에요. 나한테서 그것만 떼어 내서 털가죽이나 좋아하는 돌처럼 지니고 다닐 수 있다면 그것으로 끝일 거예요. 당신은 점잖은 사람이에요. 하지만 사실은 당신도 다른 사람들과 조금도 다를 것이 없어요. 당신한테 내 몸을 준 것이 안타까워요. 나 때문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안타까워요. 순간적인 희망이었겠죠. 그것 때문에 나는 죽을 때까지 아쉬울 거예요. 하지만 나를 사랑한다면, 진정으로 나를 사랑한다면, 나와 함께 있는 걸 견딜 수 없을 거예요. 이런 나를 볼 수 없을 거예요. 내가 살아 있다는 생각조차 한순간도 더 견딜 수 없을 거예요." -p. 415

"...저는 그것이 늘 궁금했어요. 저는 늘 제가 오기를 바라지 않으셨다고, 사실 저를 보내 달라고 하신 적도 없었던 걸 거라고 생각했어요."
"나는 그런 생각을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는데. 단 한 순간도."
"생각하셨다 해도 상관없어요."
서니는 평온하고 상냥한 태도로 덧붙인다.
"우리는 지금 여기 있잖아요, 안 그래요? 지금까지 무슨 일이 있어났든 간에." -pp.463~4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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