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지렁이의 삶은 즐겁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다만 고단할 뿐이다. 텔레스크린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보니, 지옥 아닌 곳은 애초에 없었다. 지옥에서 지옥으로 이사한 셈이다.
무지렁이라고 책을 읽지 말란 법은 없음을 깨닫는다. 책을 펴들었다. 좀처럼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흰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다. 아무려면 어떤가. 독후감도 오랜만에 썼다. 녹 슨 기계처럼 손가락이 뻑뻑하다. 그것 또한 아무렴 상관없다. 무지렁이가 이래서 마음은 편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