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Book] 어느 날 나는 흐린 酒店에 앉아 있을 거다 -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문학과지성 시인선 220
황지우 지음 / 문학과지성사 / 2023년 1월
평점 :
판매중지


감상

 여태껏 나는 시()에 대해서 윤동주 아니면 이육사라는 식의 중학 국어 수준의 이해도를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어느 날 단순히 밤에 잠이 오지 않는다는 이유로 황지우의 시집을 이북으로 충동 구매했다. 한자가 너무 많아서 한 편도 채 읽지 못하고 곯아떨어진 밤들이 쌓였다. 하지만 불면의 밤이 시집 한 권보다는 두꺼웠다.


 시들 안에서, 아무 관계없는 삶들이 등우량선(等雨量線)처럼 하나의 선으로 꿰어지는가 하면, 어떤 사람들은 비루하게도 연극 대본의 지문(地文)에 따라 살아가기도 했다. 거기서 황지우는 15층짜리 아파트 거실 소파에 파묻혀서 베란다 아래로 뛰어내릴까 말까 고민하고 있었다. 나로 말하자면, 고향에 내려가면 고향이 지긋지긋해지고 그렇다고 서울에 올라가면 금세 서울생활에 넌더리가 나고 마는 이중적 감정 속에서 산 지가 벌써 십육 년이었다. 하루에 눈곱만큼씩 시를 읽으면서, 나의 집은 황지우의 집처럼 장렬하게 뛰어내릴 수 있는 15층짜리 아파트는 아니지만, 그래도 일단은 반지하 창문 아래로라도 한번 뛰어내려볼까 싶은 마음이 자꾸만 들었다.

 시들 바깥에서, 나는 가만히 서 있어도 봉창을 두들겨 맞는 유형의 재수 옴 붙은 인물로 정평이 나 있었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이란 제발 하루가 빨리 저물어서 시 안으로 기어들어가기를 바라는 것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하지만 해는 뉘엿뉘엿 늑장부리기 일쑤였다. 게다가 온통 귀찮은 일투성이였다. 일단 밥을 먹어야 했고, 입에서 나는 똥내를 감추기 위해 이빨을 닦아야 했다. 하다못해 편의점에라도 갈라치면 세수를 해야 했다. 이빨을 닦고 세수를 하고 편의점에서 사온 도시락을 먹으며 나는 하루를 시작했다. 귀찮은 일들이 끝나면 곧이어 비루함이 찾아왔다. 하필이면 내 방 창문 앞에서 걸음을 멈추고 운기조식하며 가래침 끌어올리는 중년 남자, 단열 안 된 내벽 벽지에 붙어 번성하는 곰팡이 냄새, 지하철에서 느닷없이 내게 쌍욕을 퍼붓던 어떤 여자, 점심시간에 식빵에 발라 먹는 벌건 딸기잼, 이런 것들에 둘러싸여서 나는 나를 꿰뚫고 지나가는 등우량선 하나만 그릴 수 있기를 소망했으나 등우량선은 시와 기상청 홈페이지 안에서만 존재했다. 나는 시인이 될 수도, 기상청에 취직할 수도 없는 무지렁이에 불과했다. 그래서 불면의 밤마다 읽는 황지우의 이야기들을 그리워했다.

 그러다가 깨달았다. , 윤동주와 이육사가 전부는 아니었구나. 황지우라는 시인도 있었구나. 죽기엔 아깝고 살기엔 무력한 삶이란 것도 있구나.

   

 그렇게까지 내게 위안을 준 황지우라는 시인을 네이버에다가 쳐 보니 그의 프로필이 맨 처음으로 검색되었다. 어이없게도 사진 속의 그는 무력하기는커녕 통통하고 윤기나는 백발을 휘날리며 밝게 웃고 있었다. 약간 배신감이 느껴지긴 했지만, 이왕 이렇게 된 거 죽어버리지 말고 시집이나 몇 권 더 내주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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