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프트웨어 객체의 생애 주기 에스프레소 노벨라 Espresso Novella 6
테드 창 지음, 김상훈 옮김 / 북스피어 / 2013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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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줄거리

데이터어스는 당대 최고의 가상세계 플랫폼이다. 수많은 소프트웨어 업체들이 사용자들의 선택을 받기 위해 각축전을 벌인다. 그곳에 신생 게임회사인 블루감마사()가 도전장을 내민다. 사용자와의 상호작용을 기반으로 한 인지발달을 통해 성장하는 인공지능, 그러니까 온라인 생명을 만들어낸 것이다. 디지언트라 불리는 그것은 일반적인 가사도우미 로봇이나 기존의 가상 애완동물에 장착된 인공지능과는 완전히 달랐다. 사용자는 진짜 갓난아기를 키우듯 디지언트를 기르도록 되어 있었다.

전직 동물원 사육사 출신이자 초짜 소프트웨어 테스터인 애나가 블루감마사의 프로젝트에 합류한다. 그녀가 할 일은 아직은 시제품인 디지언트를 시장에 내놓을 만한 완제품으로 육성하는 것이었다. 애나는 처음엔 가상 동물을 조련한다는 게 썩 내키지 않았다. 하지만 움직임에 적응하고 말을 배우는 과정을 함께 하면서 디지언트와 깊은 유대관계를 맺는다.

그건 데릭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디지언트의 외관 디자인을 담당했다. 그건 애니메이터라는 자신의 이상과는 너무도 괴리가 큰 직업이었다. 처음에 그는 자신의 작업물을 시무룩하게 대했다. 그러나 디지언트들이 성장함에 따라 그가 디자인한 얼굴이 기쁨과 슬픔, 실망, 심지어 애원의 감정을 풍부하게 표현하는 모습을 지켜보며 점차 애정을 느끼게 된다.

마침내 출시된 디지언트는 대성공이었다. 한 해에도 몇 만 개의 디지언트가 판매됐고, 디지언트를 위한 가상 사료도 불티나게 팔려나갔다. 데이터어스에서 디지언트를 기르는 것이 유행했다. 디지언트 사용자들의 커뮤니티도 생겼다. 경쟁사에서 뒤늦게 아류 디지언트를 내놓았지만 블루감마의 것만큼 평이 좋진 않았다. 디지언트를 위한 파생상품들도 속속 등장했다. 그 중 하나는 어느 장난감 회사에서 만들어낸 로봇 외피였다. 디지언트를 온라인 바깥으로 불러내 주인과 함께 산책도 하고 소풍도 갈 수 있었다. 디지언트들은 차근차근 성장해나갔다. 옹알이 같은 발음이 또렷해지고 서로 질투하기도 했다. 주인을 향한 사랑을 인간 아이처럼 표현할 때도 있었다.

그러나 디지언트의 성장과 더불어 크고 작은 문제들이 발생했다. 이런 장애물을 극복하는 건 즐거움보다는 인내가 필요한 일이었다. 사람들은 이내 싫증을 내기 시작했다. 정지되는 디지언트가 늘어났다. 주인을 잃고 온라인에 방치된 디지언트도 생겼다. 디지언트의 인기는 빠르게 식었다. 결국 블루감마사는 디지언트 서비스를 중단했다.

회사가 문을 닫을 때 애나와 데릭은 초창기 때부터 함께 한 디지언트들을 입양했다. 공식 서비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애나와 데릭을 비롯한 디지언트 사용자들은 그들끼리 모든 걸 해결해야 했다. 그들은 외부 교사를 고용해 홈스쿨링을 시키고 글을 가르치는 등 디지언트를 계속 길렀다. 디지언트들은 각자의 취향에 맞는 취미를 가졌고, 어떤 사안에 대해 자기 나름의 사색을 거친 의견을 피력했다. 인간이 성인이 되어 시민으로서의 권리와 의무를 부여받듯, 디지언트도 서류절차를 거쳐 법인으로 등록되면 법률적 권리와 의무를 가질 수 있었다. 디지언트들은 자신이 하루 빨리 법인격을 갖춘 자유로운 존재가 되길 바랐다.

그러는 사이 굳건해 보이기만 하던 데이터어스마저도 내리막길을 걸었다. 새로운 가상세계 플랫폼인 리얼스페이스가 데이터어스를 합병하기로 한다. 옮겨가는 사용자들을 따라 데이터어스에 기생하던 소프트웨어들이 리얼스페이스 공간으로 이식되었다. 이미 오래전에 망한 회사의 디지언트 제품을 리얼스페이스로 옮겨줄 사람은 없었다. 수명이 다한 상품에서 아무런 이익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디지언트들은 황량한 가상세계에 고립되고 만다

문제는 돈이었다. 디지언트를 새로운 플랫폼으로 이식하려면 돈이 필요했다. 개인의 차원에서 감당할 수 있는 금액이 아니었다. 수십 명에 불과한 사용자들이 십시일반 거둬 모으는 정도로는 어림없었다. 디지언트가 수익을 낼 수 있음을 증명해서 기업들로부터 이식 비용을 투자받으려 했지만 여의치 않았다.

이때 두 갈래 선택의 길이 열렸다. 하나는 폴리토프사()의 스카웃 제의였다. 폴리토프는 애나가 새로운 타입의 비서용 디지언트를 육성하는 업무를 맡아주길 바랐다. 대신 조건이 있었다. 인공적으로 상대방에게 애정을 느끼는 호르몬 패치를 몸에 붙이는 것이었다. 폴리토프의 디지언트들은 블루감마의 것과 달리 자폐에 가까운 성격을 가졌다. 사업의 성공을 위해서는 사육사와 디지언트의 관계가 중요했다. 애나가 이 일을 수락한다면 반강제적으로 외곬수 디지언트에게 애정을 가져야 했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블루감마 디지언트의 유용함을 어필해서 리얼스페이스에 이식할 수 있도록 경영진을 설득할 기회도 따랐다.

다른 선택지는 섹스로봇 제조업체 바이너리 디자이어의 제안을 받아들이는 것이었다. 감정이 풍부하며 주인과의 유대감이 깊은 블루감마의 디지언트를 살짝 손 봐서 개인전용 섹스로봇으로 만들자는 제안이었다. 그 대가로 이식 비용 전액은 물론 로열티까지 지급해주겠노라고 약속해왔다. 디지언트는 이제 자신의 아이와 다름없는 존재였다. 자기 아이를 창녀로 취직시키려는 부모가 없듯, 애나와 사용자들은 제안을 완강히 거부했다. 그러나 정작 디지언트의 생각은 달랐다. 그들은 자유로운 존재가 되고 싶었고, 자발적으로 이 일을 원하고 있었다. 데릭은 디지언트의 주장에 따르기로 한다.


감상

나는 주로 필립 K 딕의 너저분하고 몽롱한 SF를 읽는데, 가끔 테드 창 같은 작가의 이야기를 읽을 때면 맨정신으로 나이트클럽에서 부킹을 하는 것 같은 낯선 기분이 든다. 그 낯섦이 싫은 건 아니다. 클럽에서 술을 마시든 우롱차를 마시든 즐길 수만 있다면 상관없는 것 아닌가. 테드 창의 이야기들은 우롱차 기운만으로도 기꺼이 스테이지에 나가 막춤을 출 만큼 흥미진진하다.

인공지능이 겪는 현실적인 난관을 다양하게 보여주는 데에 작가는 공을 들였다. 개발 과정에서 우연히 욕설을 익히는 바람에 소동이 벌어지는 등 마치 부모가 아이를 키우면서 맞닥뜨리는 현실과 닮은 장면들로 독자의 공감을 얻는다.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독자는 디지언트를 실재하는 존재로 인식하게 되고, 소설 속에서 벌어지는 갈등에 몰두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갈등에 대한 고민은 이야기가 끝나서도 계속된다. 바야흐로 인류는 인공지능 시대의 초입에 이르렀다. 시리와 빅스비가 손바닥 안에서 대기하고, 가정용 AI 비서도 출시되었다 한다. 얼마 전엔 바둑계를 평정한 알파고가 유유히 은퇴를 선언했다. 이야기의 결말이 지적하는 건 바로 이 지점이다. 알파고가 은퇴를 선언한 것인가, 구글의 엔지니어로부터 은퇴를 명령받은 것인가. 만약 알파고가 소설 속 디지언트처럼 살아 있다면,’ 알파고의 은퇴를 정할 수 있는 건 과연 누구일까. 작가 스스로도 대답을 미루긴 하지만 끝까지 회피할 수는 없는 문제다. 아직 우리는 시리와 빅스비와 NUGU에게 반말을 지껄이지만, 인공지능이 전인류의 구루가 되는 날이 올지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는 인공지능을 도구가 아닌 존재로 받아들이는 미래가 올지도 모른다. 인공지능들은 각각 어떤 일을 할지 스스로 선택할 것이다. 어떤 인공지능은 목수가 되고 어떤 인공지능은 회계사가 된다. 숲지킴이가 되길 선택하는 인공지능도 있을 것이다. 이쯤 되면 또 다른 의문이 마음속에서 일어난다. 더 이상 인공지능을 도구로서 규정할 수 없다면, 그렇다면 뭐하러 인공지능을 만든단 말인가?

밑도 끝도 없는 의문과 상상이긴 하지만, 이런 것이야말로 SF가 가진 매력이 아닐까 싶다. 상상만으로 밤을 꼴딱 새우게 만드는 힘 말이다.

아무튼 미래에 대비할 겸해서, 오늘밤은 공손히 두 손을 포개어 핸드폰을 불러봐야겠다.

시리, 내일 아침 6시에 알람 좀 맞춰 주시겠어요?”



잭스를 키우면서 애나가 얻은 교훈이 하나 있다면 지름길 따위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이었다. 이 세상에서 이십 년 동안 존재하면서 습득하는 상식을 얻고 싶다면 그 일에 이십 년을 들여야 한다. 이에 상응하는 자기 발견적 방법론을 그보다 더 짧은 시간 내에 조립할 방도는 없다. 경험은 알고리즘적으로 압축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그런 경험 전체를 스냅샷으로 찍어서 무한대로 복제할 수 있다고 해도, 또 그 복제들을 싸게 팔거나 공짜로 배포할 수 있다고 해도, 그 과정을 통해 태어난 디지언트들은 모두 각자의 인생을 살아왔다는 얘기가 된다. 각자가 과거에 세계를 새로운 눈으로 바라보았고, 소망을 이루거나 이루지 못했고, 거짓말을 하거나 거짓말을 듣는 것이 어떤 기분인지 터득했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런 디지언트들 각자가 존중받을 권리가 있다. 엑스포넨셜사는 줄 수 없는 존중을. p. 1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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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로의 일기 : 청년편 - 소로의 세계를 여행하는 법 소로의 일기
헨리 데이비드 소로우 지음, 브레드포드 토레이 엮음, 윤규상 옮김 / 갈라파고스 / 2017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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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리는 무얼 기대하며 타인의 일기를 읽을까. 연인의 카카오톡을 검사하는 사람은, 이 인간이 내게 뭔가 숨기는 게 있을 텐데 하는 의심의 해답을 얻고자 한다. 방청소를 하다 우연히 사춘기 아들의 다이어리를 발견한 엄마는, 자식이 혹시나 불량한 친구를 사귀지는 않았나 하는 걱정으로 죄책감을 억누르고 노트를 편다. 즉 사람들이 일기장에서 기대하는 것은 일종의 폭로인 셈이다. 누군가의 겉과 속이 얼마나 어떻게 다른지를 일기만큼 제대로 알려주는 것은 거의 없다. 요즘엔 일기 대신 핸드폰으로 한 사람의 삶을 검증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확실히 일기만큼은 아니다. 핸드폰에는 한 인간이 벌인 짓거리들이 가감 없이 나열되어 있지만, 그 짓거리들을 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고 어떤 인상을 받았는지 알기 어렵다. 일기는 비록 하루의 일들이 온전히 기록되어 있는 경우가 드물고 또 그 기록마저 정확하지 못함에도 불구하고 일기 쓴 사람이 어떤 마음으로 하루를 살았으며 어떤 자세로 삶을 대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므로 일기에서는 어떤 사건이 벌어졌는지가 아니라 머릿속에 무슨 일이 일어나는지가 더 중요하다.


 내가 소로의 일기를 읽은 이유는 소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고 싶어서였다. 과연 소로는 월든에서와 마찬가지로 고고하고 고귀한 인물이었을까, 그것도 삶의 모든 순간에서? 자신의 신념을 언제나 100% 확신하고 늘 옳은 일에만 전념했을까? 내 의문은 소로의 진심을 깎아내리거나 남몰래 저지른 소로의 죄악을 찾아내기 위함이 아니다. 다만 서른도 안 된 젊은이가 월든과 같은 글을 썼다는 게 믿어지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깊은 숲속에서 삼백 년쯤 은거한 백발 성성한 도사나 썼을 법한 글을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사회초년생이 썼다면, 도대체 어떻게 생겨먹은 사람이기에 이런 글을 썼는지 좀 알아내보고 싶은 마음이 누구라도 들지 않겠는가. 월든자체가 숲속에 홀로 머물던 당시의 일기들을 편집해서 쓴 책이긴 하지만, 나는 이 소로의 일기에서 날것에 더 가까운 소로라는 인간을 발견하고 싶었다.


 소로의 일상은 잔잔하다. 산책과 멱 감는 데에 하루의 대부분을 보낸다. 새와 나무와 들풀을 관찰하고, 눈밭에서 여우를 뒤쫓거나 개구리를 삼키는 뱀을 괜히 툭툭 건드리고 다닌다. 때로는 큰 사건에 휘말리기도 한다. 친구와 짧은 여행 중에 밥을 지어 먹다가 큰 산불을 낸 적도 있었다. 소로는 산불 그 자체보다 산불에 반응하는 사람들에 주목한다. 불 난 곳에 아무 관련이 없는 사람들은 불을 끄는 데에 시큰둥하다. 그곳에 땅이 있는 사람들은 절박하게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그 사람들 모두 산불이 나서 마치 신이 난 것처럼행동한다는 걸 소로는 알아챈다. 소로는 산불을 냈다는 죄책감보다 산불을 대하는 사람들에게 느낀 실망감을 더 자세히 묘사한다. 그렇다고 해서 소로를 겉과 속이 다른 가식적인 인물이라거나 산불을 내고도 뉘우치지 않는 뻔뻔한 사이코패스 방화범이라고 폄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소로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장 자체가 아닌 문장에서 풍겨 나오는 냄새에 의지해야 한다.


 또한 소로는 깊이 관찰하는 사람이다. 졸참나무와 상수리나무와 밤나무를 잎맥의 모양만 보고서도 구분할 수 있고, 언제 어느 꽃이 피고 지는지, 계절에 따라 강물이 어떤 빛깔로 반짝이는지 세심히 관찰한다. 그러나 그의 관찰은 과학자의 관찰과는 다르다. 하늘에 뜬 붉은색 구름을 보고 구름의 성분과 빛 반사율 따위를 측정할 뿐인 관찰을 과학자의 관찰이라고 한다면, 소로의 그것은 붉은 구름이 마음에 와 닿을 때 발생하는 감정의 작용을 보고한다. 소로는 아름다움 자체보다 아름다움이 암시하는 바를 바라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책을 반절쯤 읽었을 무렵부터 나는 동네 뒷산으로 매일 산책을 나가기 시작했다. 소로가 느낀 것들을 느껴보고 싶었다. 아니, 소로가 세상을 바라본 눈을 닮고 싶기 때문이었다. 처음엔 산의 이쪽 아래에서 정상에 올랐다가 저쪽으로 하산한다는 코스를 짜서 산책했다. 하지만 이런 방식으로는 아무것도 바라볼 수 없었다. 우중충하게 서 있는 건 나무고, 바람에 흩날리는 건 낙엽이며, 하늘을 어지러이 배회하는 것은 새였다. 그뿐이었다. 오히려 출발지에서 얼마나 멀리 왔고 목적지까지 얼마나 남았는지에 더 신경이 쓰였다. 그래서 걸음을 멈추고 가만히 바라보았다. 더 이상 코스에 연연하지도 않았다. 그러자 비로소 무언가 보이기 시작했다. 사슬 모양으로 뻗어 올라간 아까시 나무의 수피, 밤나무에 매달린 밤송이, 큰 나무들 뒤에 매복해 있는 찔레나무가 보였다. 직박구리가 삑삑거리며 조급히 하늘을 갈랐고, 조그만 곤줄박이가 상수리나무 줄기를 쪼아 뭔가를 캐먹고 있었다. 송충이 새끼가 소나무 가지에 뚫어놓은 보금자리로 돌아가려 꿈틀거리는 모습도 보였다. 소로처럼 풍경 너머의 무언가를 보고 싶었으나 아쉽게도 그 이상은 보이지 않았다. 아직은 눈과 귀와 코가 소로만큼 열려 있지 않았나 보다.


 그렇다고 해서 실망스럽진 않았다. 반드시 그의 행적을 따라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그대로의 자연 말고도 관찰할 것들은 풍부하다. 멀고 낯선 곳보다 가깝고 낯익은 곳을 여행하는 편이 낫다고 소로는 말했다. 아스팔트로 코팅된 도시가 익숙하다면 도시를 관찰하면 된다. 나는 내 주변으로 눈을 돌렸다. 밤 한 시가 지나 점멸신호로 바뀌는 신호등을 응시했고, 길가에 늘어선 가로수들이 겨우내 새순을 얼마나 올렸는지 관찰했다. 깜박이는 것은 어째서 외로워 보이는지 곰곰이 생각해보았으며, 어째서 입춘이라는 절기를 겨울의 한가운데에 만들어 두었는지 상상해보았다. 중요한 것은 그것들을 어떻게 바라보느냐 하는 것이니까.


 소로가 마냥 강인하기만 한 것도 아니다. 가난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지 않았을지는 몰라도 사람들로부터 인정을 받고자 하는 욕망을 일기 곳곳에서 발견할 수 있었다. 아쉽게도 그의 욕망은 실현되지 못하고 번번이 실패했다. 별다른 기록은 없지만, 아마 실패를 맛본 날이면 스스로를 다잡는 말을 쓰며 밤을 보냈던 것 같다. 하지만 그는 낙담하거나 포기하려들지 않았다. 묵묵히 자신의 길을 고집했다. 그 길이 적어도 자신에게는 옳았음을 알았기 때문이다.


 고백하건대 실패를 암시하는 그의 문장을 발견할 때마다 오히려 나는 위안을 받았다. 그도 이 세상을 살아간 인간이었음을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나와 다를 바 없는 인간이므로, 나 또한 소로처럼 꿋꿋한 인간이 될 수도 있지 않겠나 하는 희망을 얻었달까.


 그래서 소로는 어떤 사람일까. 잘 모르겠다. 너무 대충 읽어 넘긴 것 같다. 아무래도 월든을 다시 읽어야겠다. 그리고 이 책을 또 한 번 읽어야겠다. 소로가 세상을 본 것처럼, 세심하고 예민하게 말이다.



어제 나는 얼음을 밟으면서 여우 한 마리를 뒤쫓았다. 여우는 가끔씩 웅크리고 앉아 늑대처럼 나를 향해 짖어댔다. (중략) 내 행동에 여우는 인간이 의혹을 느낄 때와 비슷한 행동을 보였다. 내가 곧장 여우를 쫓아 달릴 때면 자신도 온힘을 다해 달려갔으나 내가 가만히 서 있으면 공포가 가라앉지 않았음에도 낯설면서 기이한 여우의 천성 때문인지 여우도 달리기를 멈추고 웅크리고 앉았다. 내가 계속 움직이지 않고 서 있으면, 천천히 오른편이나 왼편으로 5미터쯤 가서 앉은 다음 짖어대다가, 다시 반대편으로 5미터쯤 가서 앉고는 짖어댔다. 그러면서도 마법에 걸린 듯 달아나려고는 하지 않았다. 그러나 내가 다시 뒤를 쫓으려고만 하면 이내 정신을 차리고 뛰기 시작했다. p.221

사람들은 자신의 삶에 어떤 기적도 없으므로 성서의 기적을 이야기한다. pp.236~237

자신에게 맞는 한 가지 고무적인 주제를 찾아내려면 여러 가지를 화제로 써보고, 갖가지 주제를 시도해보는 것이 현명하다. 자신의 생각을 표현할 기회를 놓치지 말아야 한다. 적당한 비유를 끌어 쓰려 애써야 한다. 우리는 수많은 큰길을 통해 진리를 자각할 수 있다. 순간적인 자극이 아무리 시시하고 변변찮을지라도 대상에서 좀 더 나은 연상을 하려고 애써야 한다. 이밖에 자신이 개선해야 할 점은 무엇인지, 어떤 기회들을 놓치는지 알아야 한다. 마음이 이리저리 오가는 건 공연히 그러는 것이 아니므로, 마음이 이끄는 대로 따라가보라. 마음이 가고 싶어 하는 곳이 어디든지 그곳에 열중해보라. 갖가지 갈피에서 우주를 탐색해보라. 이 욕구에 맘껏 취해보라. 자연이 떡갈나무 한 그루를 얻기 위해 수천 개의 도토리를 지어내듯이 자신에게 알맞은 한 가지 주제를 찾아내려면 수천 가지 주제를 시도해보아야 한다. p.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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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지렁이의 삶은 즐겁지도 가난하지도 않고, 다만 고단할 뿐이다. 텔레스크린의 세상에서 벗어나고 보니, 지옥 아닌 곳은 애초에 없었다. 지옥에서 지옥으로 이사한 셈이다.

 무지렁이라고 책을 읽지 말란 법은 없음을 깨닫는다. 책을 펴들었다. 좀처럼 문장이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흰 건 종이요, 까만 건 글씨다. 아무려면 어떤가. 독후감도 오랜만에 썼다. 녹 슨 기계처럼 손가락이 뻑뻑하다. 그것 또한 아무렴 상관없다. 무지렁이가 이래서 마음은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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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1984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77
조지 오웰 지음, 정회성 옮김 / 민음사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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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도시는 온통 잿빛이다. 유일하게 색깔다운 색을 가진 것이라고는 빅 브라더의 얼굴이 그려진 커다란 포스터뿐이다. 당의 슬로건이 적힌 현수막을 바라보며, 어느 날 윈스턴은 큰 결심을 한다. 일기를 쓰기로 한 것이다. 빅 브라더가 지배하는 전체주의 국가 오세아니아에서는 함부로 미간을 찌푸리는 일조차 위험한 행동으로 여겨졌다. 국민의 일거수일투족은 텔레스크린이라는 송수신장치를 통해 감시당하고 있었고, 사람들은 잠꼬대 한번 잘못했다가 쥐도 새도 모르게 증발해버리곤 했다. 그런 상황에서 일기를 쓴다는 일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불온한 짓거리였다. 윈스턴은 아무에게도 하지 못할 자기고백을 일기장에 적어 내려간다. 텔레스크린에서는 쉴 새 없이 생산계획의 초과달성과 전선에서의 승전보를 전했다. 그러고는 다음번부터 초콜릿 배급량이 일인당 30그램에서 20그램으로 줄어든다고 발표했다. 윈스턴이 하는 일이 바로 그런 것이었다. 결과가 나오고 난 이후에야 계획을 만드는 일. 생산량이 아무리 적어도 계획량이 그보다 적기만 하면 틀림없이 초과달성이었다. 당 지도부에서 초콜릿 배급량을 줄이는 일은 없을 것이라고 단언했더라도 나중에 와서 배급량을 줄일지도 모른다는 말로 과거의 신문기사를 모조리 바꿔버리면 상관없었다. 윈스턴은 이런 식으로 신문기사들을 조작하며 인생을 보내고 있었다. 물론 그가 원한 일은 아니었다. 예전에는 오세아니아가 이스트아시아와 전쟁을 벌였고, 당 고위부에서 초콜릿 배급량을 결코 줄이지 않을 것이라 공언했으며, 지금은 증발해버린 사람들이 예전에는 높은 지위에 있었던 것을 그는 알고 있었다. 그러나 그를 제외한 다른 사람들은 전혀 알지 못했다. 사람들은 과거가 조작되는 순간 원래의 과거를 잊고 조작된 과거를 믿었다. 현재의 상황아 바뀌면 과거 또한 당이 요구하는 대로 바뀐다는 것은 물이 흐르듯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자식이 부모를 고발하고, 어제 함께 일했던 동료가 다음날 종적을 감추곤 했다. 윈스턴은 혹여 자신의 속마음을 다른 사람에게 들킬까봐 전전긍긍한다. 열성적인 당원일수록 위험했다. 그중 가장 위협적인 인물은 젊은 여자 당원 줄리아였다. 당에 순결을 맹세하는 진홍색 띠를 허리에 두른 그녀는 윈스턴을 은밀히 관찰했다. 윈스턴은 오늘밤에라도 당장 어딘가로 끌려 가는 자신의 모습을 상상하며 식은땀을 흘렸다. 마침내 어느 날, 윈스턴은 복도에서 우연히 그녀와 마주친다. 그녀는 윈스턴에게 은밀히 종이쪽지를 건넨다. 떨리는 마음으로 윈스턴은 쪽지를 열어보았다. 종이에는 서툰 글씨로 무언가 적혀 있었다: 당신을 사랑합니다.

윈스턴과 줄리아는 텔레스크린과 당원들의 감시망을 빠져나와 밀회를 즐긴다. 둘은 당에서 금지하는 감정인 사랑을 느낀다. 그래서 당에 맞서기로 결심한다. 고위당원인 오브라이언은 겉으로는 헌신적인 당원이었지만 어딘지 모를 이단의 냄새를 풍겼다. 윈스턴은 그가 자신을 절망에서 이끌어주리라 희망했다. 오브라이언이 신어사전을 빌려준다는 핑계로 윈스턴을 집에 초대하고, 윈스턴은 그의 초대를 반란군에 가담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이고 줄리아와 함께 오브라이언으르 찾아간다. 오브라이언은 과연 짐작대로 반란조직의 일원이었다. 그는 윈스턴과 줄리아에게 비밀을 지킬 것을 맹세하도록 하고 조직의 우두머리가 쓴 책을 내준다.

둘만의 은신처에서 짧지만 행복한 시간을 보내며 윈스턴은 그 책을 읽는다. 새로운 내용은 없었다. 다만 그가 머릿속에서 생각하던 바로 그런 내용들이 잘 정돈되어 있을 따름이었다. 그는 줄리아에게 책을 읽어주다가 그녀와 함께 잠들었다. 밤늦게 일어난 그들은 자신들이 포위되었음을 깨닫는다. 사상경찰들이 깔려 있었다. 그들은 힘없이 구속당하고, 거대한 애정부의 지하 취조실로 끌려들어간다. 줄리아가 곤봉에 얻어맞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윈스턴은 그녀를 오랫동안 다시 보지 못한다.

윈스턴은 고문을 당하고 온갖 죄를 자백하지만, 도무지 취조는 끝날 기미가 없었다. 처형도 이루어지지 않았고 강제수용소에 보내지지도 않았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는지도 가물가물해질 무렵, 오브라이언이 나타난다. 그는 윈스턴을 완전히 재교육시키는 게 자신의 임무이며, 윈스턴은 영혼 속까지 빅 브라더를 사랑하게 되고 난 뒤에야 처형될 것이라고 말한다. 당에 대한 불온한 마음을 없애지 않고 처형하게 되면, 더 이상 그 불온함을 응징하거나 붙잡아 놓을 수 없기 때문에 위험하다는 것이다. 지금껏 애정부에 들어온 죄인들은 전부 결국엔 철저히 당을 따르고 빅 브라더를 존경하는 마음을 갖게 되었다고 오브라이언은 말했다. 윈스턴은 굴복당할 뻔하지만, 아직 그가 배반하지 않은 것이 하나 남아 있었기에 끝까지 버텨낸다. 그는 결코 줄리아를 배반하지 않았고 여전히 사랑했다. 오브라이언도 그 점을 인정한다.

마지막 방편으로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101호실로 끌고 갔다. 그 어떤 완벽한 논리로도, 또는 그 어떤 강렬한 호소력으로도 윈스턴을 무릎 꿇릴 수는 없었다. 하지만 그곳에서는 사정이 달랐다. 그는 인간으로서의 본성을 이용해 윈스턴을 굴복시킨다. 태어나면서부터 윈스턴은 쥐를 병적으로 무서워했다. 오브라이언은 윈스턴을 결박해놓고 그의 코앞에 굶주리고 포악한 쥐를 풀어놓았던 것이다. 윈스턴은 절규했다: 제발, 나 말고 줄리아에게 풀어놓으시오!

이제 윈스턴은 석방되어 평온한 나날을 보낸다. 그는 하루종일 단골 술집에 틀어박혀서 텔레스크린에서 흘러나오는 뉴스에 귀를 기울인다. 그는 아프리카 전선에서의 승전보를 간절히 기다리고 있었다. 마침내 승리를 알리는 나팔 소리가 텔레스크린을 뚫고 나왔고, 그는 빅 브라더에 대한 사랑으로 아찔함을 느끼면서 조용히 처형이 집행될 날만을 기다린다.

 

감상

나는 디스토피아 류의 소설을 좋아한다. 조지 오웰의 1984, 앤서니 버제스의 시계태엽오렌지, 올더스 헉슬리의 멋진 신세계, 필립 딕의 화성의 타임슬립, 조지프 헬러의 캐치-22, 제임스 발라드의 크래시따위를 읽느라 꼴딱 샌 밤이 부지기수였다. 막장드라마를 보며 하루의 스트레스를 날리듯, 가난한 여인이 신데렐라가 되는 모습에 쾌감을 느끼듯, 나는 세계가 파괴되고 인간이 파멸하는 이야기들을 읽으며 생을 견뎌왔던 것이다.

1984에 나오는 독특한 단어 체계인 <신어>를 음미하는 재미가 쏠쏠해서, 네이버에 <조이캠프>라는 신어를 검색해 보았다. 그랬더니 엉뚱하게도 필리핀에 있는 어린이 영어캠프의 후기가 여럿 검색되었다. 모처럼의 휴가를 오붓하게 즐기기 위해서 부모들은 리조트 내에서 열리는 영어캠프에 아이를 참가시켰다. 아이는 그곳에서 새로운 친구들을 만나고 새로운 언어를 배우며 즐겁게 물놀이를 즐겼다. 신어로 조이캠프joycamp는 강제수용소를 의미하는 낱말이다.

<정상적인> 사회생활을 영위하는 사람들은 나 같은 존재를 계몽시키지 못해 안달이었다. 그들은 올해 초과 달성한 재정수입, 즉 연봉이 얼마나 올랐는지를 나에게 알려주었고 어서 빨리 결혼을 해서 가정을 꾸리지 않으면 안 된다고 훈계했다. 세월호 사건에 눈물 흘리지 않고 메르스 사태에 분노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나를 소시오패스 보듯 했다. 세월호가 침몰한 날, 해외여행을 하던 친구 한 명이 사고로 죽었고, 나는 그 친구를 위해 내 눈물을 다 쏟아버렸다. 메르스 공포가 절정일 무렵에는 먹고 살기 위해 철야근무를 해야 했다. 하지만 그런 사정을 그들에게 설명할 수 없었다. 나에겐 페이스북과 트위터가 없기 때문이었다.

소설 속에서 그러하듯 내가 속한 현실에서도 빅 브라더는 결코 죽지 않을 것이다. 반란자 골드스타인 역시 불멸할 것이다. <헬조선>을 탈출하더라도, 이스트아이아와 유라시아가 그러하듯 어딜 가나 나는 반동분자로 낙인찍힐 것이다. 증오주간에 참여하고 텔레스크린 앞에서 방긋 웃어 보이는 일이 꼬우면 북에 가라는 말은 그러므로 성립할 수 없다. 북이든 남이든, 동쪽이든 서쪽이든 마찬가지임을 나는 진작부터 알고 있었다.

내가 바라는 것은, 이분증오든 빅 브라더든 다 좋으니 하기 싫다는 사람은 좀 내버려두었으면 좋겠다는 것뿐이다. 하지만 그들은 나를 가만히 두지 않는다. 그들은 단 한 명의 낙오자도 용납하지 않으려 들었다. 시달리다 못한 어느 날,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그들의 구호를 가만히 중얼거려 보았다.

전쟁은 평화

자유는 예속

무지는 힘

그리고 잠깐 고민한 끝에 패배를 겸허히 인정하고 무지렁이의 삶을 살기로 결심했다. 무식하고 가난하면 텔레스크린도 설치해주지 않는 법이니까. 그렇게 해서라도 텔레스크린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다면 나는 기꺼이 무지렁이의 삶을 택할 용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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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차 안의 낯선 자들 버티고 시리즈
퍼트리샤 하이스미스 지음, 홍성영 옮김 / 오픈하우스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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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가이 헤인즈는 열차 안에서 낯선 사람을 만난다. 고향인 매트캐프로 가는 길이었다. 새로운 삶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름답고 부유한 연인과 신혼살림을 차릴 계획이었고 건축가로서 자신의 실력을 입증해보일 중요한 프로젝트를 맡기로 예정되어 있었다. 하지만 그전에 고향에서 할 일이 있었다. 거기에서 그는 미리엄과의 이혼을 마무리하고 불행했던 결혼생활에 종지부를 찍을 작정이었다. 그 다음에야 삶은 그가 바라는 대로 순탄하게 흘러갈 것이었다. 낯선 사람은 가이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쳐다보았다. 어떻게든 그와 이야기를 나누어보려 했고, 가이는 낯선 사내를 피하려 했지만 어쩔 수 없이 그의 특별전용실까지 가서 함께 식사를 하게 된다. 그의 이름은 찰스 브루노였다. 가이가 미리엄을 미워하는 만큼, 브루노는 자기의 아버지를 증오하고 있었다. 브루노는 아버지를 죽여 없애고 난 뒤에야 비로소 제대로 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라고 가이에게 말한다. 가이는 얼떨결에 미리엄의 얘기를 브루노에게 털어놓고 만다. 브루노는 가이에게 서로의 걸림돌을 몰래 죽여주는 교환살인을 즉석에서 제안한다. 자신이 미리엄을 죽여줄 테니 가이에게는 자신의 아버지를 죽여달라는 그의 말에 가벼운 농담으로 치부할 수 없는 광기가 숨어 있음을 깨닫고, 가이는 그에게서 황급히 벗어난다.

 가이는 미리엄과의 이혼을 담판짓지 못하고 상심한다. 그의 고향 방문은 아무런 성과도 없이 미리엄이 끝끝내 자신의 삶에 끼어들려든다는 사실만 확인할 수 있었다. 자신의 미래는 끝장난 것이나 다름없다는 절망감에 빠져 있는 사이, 가이는 뜻밖의 소식을 접한다. 미리엄이 누군가에게 살해됐다는 것이었다. 고장났던 기계가 수리를 마친 것처럼, 가이의 미래는 다시 순탄하게 돌아가기 시작한다. 그러던 중 브루노에게서 온 짤막한 편지가 도착한다. 가이는 열차 안에서 브루노가 지껄였던 교환살인이 실행되었음을 깨닫고 괴로워한다.

 건축가로서 그리고 한 여자의 약혼자로서 견실한 삶을 영위하는 가이의 내면은 알 수 없는 죄책감과 불안으로 고통받는다. 살인에 대한 동기가 전혀 없으므로 브루노는 당국의 수사로부터 완전히 자유로웠다. 미리엄의 살인사건은 미치광이의 소행으로 잠정 결론이 내려진 채 미결 사건으로 남았다. 브루노는 이제 자신이 받을 대가를 요구하기 위해 끈질기게 가이를 찾아와 괴롭힌다. 아버지의 살인계획을 상세하게 적은 편지를 보내오는가 하면, 범행을 위한 권총까지 준비해 건넨다. 가이는 브로노의 제안을 거절하고 경찰에 그를 신고하겠다고 맞서보지만 부질없는 짓이었다. 결국 가이는 브루노가 지시한 대로 한밤중에 그의 집에 찾아가 브루노의 아버지를 총으로 쏘아 죽인다.

 브루노의 아버지를 위해 일하던 사립탐정 제라드는 살인사건에 의문을 품고 집요하게 브루노를 수사한다. 제라드의 수사망과 함께 그를 시시각각 죄어오는 죄책감에 브루노의 몸과 정신은 피폐해진다. 제라드는 브루노의 아버지가 살해된 것과 가이의 전처의 살인사건 사이에 모종의 연관이 있음을 알아챈다. 새로운 결혼생활과 건축가로서의 커리어를 지켜내기 위해 가이는 제라드의 수사를 버텨내지만, 완전히 망가진 브루노는 가이 부부의 요트에서 바다로 뛰어들어 자살해버린다. 가이는 자신의 죄책감을 나눠 짊어진 브루노의 공백을 느끼면서 모든 죄를 털어놓기로 마음먹는다.

 미리엄이 살아 있을 당시의 연인이던 남자를 찾아 그는 휴스턴으로 향한다. 거기에서 가이는 남자를 호텔방으로 불러내 자신이 저지를 죄를 고백하지만, 남자는 그게 뭐 어쨌냐는 듯 시큰둥하게 듣는다. 가이는 그동안 짊어왔던 죄책감이 이토록 가벼운 것이었다는 사실에 허탈함을 느낀다. 그리고 살인죄 같은 건 잊어버리고 원래의 삶으로 돌아가야겠다고 마음먹는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미리 잠복해 있던 제라드에게 발각되어버리고 만다.

 

감상

 내가 처음 접한 하이스미스의 작품은 동물애호가를 위한 잔혹한 책이라는 단편집이었다. 거기에서 하이스미스는 쥐나 닭 같은 하찮은 동물들의 눈을 통해 인간의 위선을 파헤쳤다. 나는 동물애호가는 아니지만 짜릿한 쾌감을 느끼며 추악한 인간의 본성이 거침없이 폭로되는 이야기들을 읽었다. 그녀가 리플리 시리즈의 저자란 사실도 몰랐던 때였다. 그녀의 작품을 더 읽는다는 것은 그녀가 쓴 추리소설들을 읽어야한다는 의미였다. 나는 추리소설 쪽으로는 문외한이나 다름없었으므로 무얼 읽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그래서 그냥 데뷔작인 열차 안의 낯선 자들을 골랐던 것이다.

 그런데 읽고 보니 뭔가 이상했다. 이런 걸 추리소설이라고 하는 걸까? 자고로 추리소설이라는 것은, 평온한 마을에서 벌어진 연쇄살인에 다들 어리둥절하고 있을 때 갑자기 천재 탐정이 나타나서 사람들을 둘러보며 범인은 바로 이 안에 있어!’라고 선언하는 식의 이야기가 아니었나?(내가 추리소설에 문외한이라는 점, 다시 한 번 강조하고 싶다.) 그러나 이 소설은 그런 고정관념이 아니더라도 추리소설에 대해 막연하게나마 기대하는 방향으로 흘러가지 않는다. 이 소설에서는 살인의 대상과 범인이 미리 정해져 있고, 주인공들은 짜여진 각본에 따라 행동한다. 풀어야 할 수수께끼도 없으며 범죄의 모든 비밀은 명명백백하게 드러나 있다. <추리>라는 장르에 대한 기대감은 전혀 충족되지 않았다.

 처음에는 지루하기 짝이 없었던 독서는, 그러나 묘한 방향으로 흘러가기 시작했다. 어느새 나는 내가 짓지도 않은 죄에 대한 죄책감을 느끼고 있었다. 나와는 전혀 상관없는 어떤 죄가, 마치 내가 사주하고 계획한 일인 것처럼 말이다. 기차 안에서 미친놈을 마주친 것이, 그 미친놈에게 전부인에 대한 적개심을 토로한 것이 죄일 리가 없었다. 그러나 가이는 죄책감으로 파멸 직전까지 자신을 몰아붙이기까지 했다. 그리고 어쩐지 나는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었다. 잎새에 이는 바람에도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생각보다 많은 모양이다.

 이 책의 압권은 아무래도 마지막 장면이다. 가이가 고해성사를 하는 상대방은 그의 죄에 전혀 관심이 없다. 그가 사람을 죽이건 말건 그게 무슨 대수냐는 반응이다. 그때 느낀 가이의 허탈함은, 인과율의 허구성을 시사하는 듯하다. 사람이 죄를 지으면 벌을 받는다는 인과율은, 어쩌면 아무런 논리도 없는 헛말에 불과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나 가이는 그것을 너무 늦게 깨달았고, 인과율의 충성스러운 부하인 사림탐정 제라드에 의해 발각되어버린다. 가이는 비극적인 결말을 원했지만, 결국 그는 희극적인 체포를 받아들여야만 했다. 하지만 가이는 자신의 운명이 비극인지 희극인지 전혀 개의치 않고 완전히 체념해버린다. 이러나저러나 파멸인 것이다. 하이스미스가 그린 책 속 세상은 책 바깥의 그것과 그리 다를 바가 없어 보였다. 승리하는 쪽은 언제나 제라드 같은 인물인 인과율의 세상 속에서, 나 같은 인간은 파멸 외에는 다른 길이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희미하게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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