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든 천천히 읽기 9

소로의 경제학에는 흔한 공식 하나 없다. 잉여, 즉 이익을 어떻게 극대화할 것인가를 논하지 않기 때문이다. 소로에게 중요한 것은 그 잉여를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이다.
돈 좋아하는 사람은 이의를 제기한다. ˝자발적 가난이니 뭐니 하는 건 옛날이고, 요새는 현자들이 더 부자인뎁쇼? 머스크니 주커버그니 마윈이니 하는 사람들을 보시라고요.˝ 물론 그들은 돈이 많다. 하지만 그들이 돈을 버는 목적이 노후에 대비하기 위해서라거나 냉난방이 빵빵한 대저택에 살기 위해서라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러므로 이런 지적은 포인트가 살짝 빗나갔다고 할 수 있다.
돈 자체가 목적인 사람은 별로 없다. 돈을 가지고 무엇을 할 것인가가 중요한데, 돈을 벌다 보면 어쩐지 돈 버는 기계가 되어버린 듯한 기분이 든다. 내가 돈을 버는 이유는 무엇인가, 즉 돈을 벌어 마련한 잉여자원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를 생각해야 한다.
나는 무엇을 하고 싶은 걸까. 나는 책을 읽고 독후감을 쓰고 싶다. 잠들기 전에 일기를 쓰고, 또 머릿속에 떠오르는 것이 있으면 그것들도 마음껏 쓰고 싶다. 중1 과정부터 수학을 다시 공부해보고 싶고 밤하늘의 별을 들여다보고 싶다. 큰 돈 들어갈 일은 별로 없다. 쥐똥만큼의 돈과 넉넉한 시간이 필요할 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천천히 읽기 8

소로의 ‘생필품‘은 음식과 집과 옷과 연료뿐이다. 멋지다. 나는 생필품을 뭐라고 정의할 수 있을까. 왠지 더 가난해져도 될 것 같다.




* 김석희 번역은 원문에 충실하다기보다 읽고 이해하기 쉽게 번역했다는 장점이 있지만 가끔은 다른 번역본과 대조해봐야 할 때가 있다.

˝따라서 ‘동물의 생명‘이라는 표현은 ‘동물의 열‘이라는 표현과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음식은 우리 몸속의 불을 유지시켜주는 연료라고 생각할 수 있지만, 연료는 그 음식을 조리하거나 외부에서 열을 가하여 우리 몸을 더욱 따뜻하게 해줄 뿐이고, 집과 옷도 그렇게 발생하여 흡수된 열을 유지하는 데 도움을 줄 뿐이기 때문이다.˝ (김석희 역)

˝위에서 볼 때 ‘동물적 생명’이란 표현은 ‘동물적 열’이란 표현과 거의 같은 의미를 지닌다고 하겠다. 왜냐하면 음식은 우리 몸속의 불을 유지시켜주는 연료로 볼 수 있는 데 비해서, 실제의 연료는 음식을 장만하고 외부로부터 열을 가해서 우리 몸을 더 따뜻하게 해주는 역할만을 하고 있고, 가옥과 의복 역시 그렇게 해서 발생되고 흡수된 열을 단지 유지하는 데만 도움을 주기 때문이다.˝ (강승영 역, 은행나무)

강승영의 번역은 가장 원문에 충실하다. 하지만 문장 맛이 덜한 단점이 있다. 원문 저작권료도 없는데 김석희 번역본은 가격도 비싸다. 위의 문장은 오역이라고 볼 수는 없겠지만 김석희 씨답지 않게 불분명하고 오독의 소지가 다분한 문장이다. 돈값과 명성값을 해주었으면 좋겠다. 아무튼 더 이상은 번역에 대해 비평하지 않겠다. 영어 못해서 공짜 원문을 읽지 못하는 내 죄가 제일 크니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천천히 읽기 7

불현듯 초등학교에 입학한 날이 떠올랐다. 운동장에서 선생님들이 아이들을 몇 개의 무리로 나누어 모이게 했다. 나는 4반에 편성되었다. 교실에 들어가서 받은 첫수업은 연습장에 동그라미를 그리는 것이었다. 그냥 단순한 동그라미가 아니고, 중심에서부터 시작해서 나선형으로 바깥으로 퍼져 나가는, 이른바 ‘동글뱅이‘였다. 나는 누구보다 다양한 동그라미와 나선들을 그렸다. 생애 첫 수업(나는 유치원을 다니지 못했다)에서 선생님의 첫 칭찬을 받았다. 이런 수업이라면 고등학교 때까지 문제없이 다닐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나 그런 즐거운 시간은 딱 한 시간뿐이었고 나는 이내 열등생으로 추락하고 말았다. 더 이상의 동그라미는 없었다. 우리는 유클리드적이고 기하학적인 원을 배우기 시작했고 거기에는 원주율이라는 불변의 수와 각종 공식들만이 있었다. 다 같이 다 같은 것을 배웠는데도 나중에 어떤 아이는 서울대에 갔고 더러는 지방대에 갔고 나 같은 아이는 대학 대신 군대에 갔고 또 어떤 아이는 자살을 했다.
나는 다시 연습장에 동글뱅이를 그려본다. 어쩐지 그 시절보다 삐뚤빼뚤하고 영 볼품없다. 하지만 이것도 이것 나름대로 동글뱅이인가 보다. 종이가 허락되는 한 계속 원을 그려나가야겠다. 빙글빙글 동글뱅글.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천천히 읽기 6

우리 각각이 저마다의 삶을 제각각 살아간다면 인생은 얼마나 외로울까? 그러나 우리에겐 기적이 있다. 자신 곁의 연인을 도대체 어떻게 만났으며 어쩌다 이토록 사랑하게 됐는지를 떠올려보면, 기적이라는 것이 그리 먼 얘기는 아님을 깨닫는다.
물론 나에겐 그런 기적이 벌어지지 않았으므로 나는 조금 다른 방법으로 기적을 느껴보기로 한다. 나는 창을 열고 남쪽 밤하늘에 밝게 빛나는 시리우스를 바라본다. 바로 그 순간 이 세상의 어딘가에서 자기처럼 시리우스를 바라보고 있을 사람들을 상상해본다. 그리고 추우니까 창문을 닫고 이불 속으로 돌아와 읽던 책을 펼친다. 거기에 또 다른 기적이 펼쳐져 있다. 작가가 바라본 세상이 내 머릿속에 펼쳐지는 것이다.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서 벌어지는 이 기적같은 공감이 내겐 참으로 위안이 되고 용기가 되어준다.


* ‘우리는 한 시간 동안 세상의 모든 시대를, 아니 모든 시대의 모든 세상을 살아야 한다‘는 번역은 독서의 흐름을 방해했다. 원문의 ‘should‘ 때문에 ‘살아야 한다‘고 번역한 모양인데 문맥상 맞지 않다. 그렇게 번역하니까 문장과 문장 사이에 깊은 균열이 생기는 느낌이다. 크레바스처럼 깊은 균열이 앞문장과 뒷문장을 단절시키는 것이다. 그냥 ‘사는 것이다‘ 또는 ‘살게 된다‘ 정도로 번역했다면 더 좋았을 것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월든 천천히 읽기 5

‘젊다‘는 형용사이고 ‘늙다‘는 동사다. 나는 늙어가고 있는가 아니면 다만 ‘덜 젊어지고‘ 있을 뿐인가. 인생이라는 실험에 몇 번 성공도 해보고 내 나이에 맞게 제대로 ‘늙어갔으면‘ 좋겠다.

내일을 살아본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살배기 꼬마든 여든 먹은 노인이든 내일이란 시간을 처음 겪는다. 그런 의미에서 더 젊고 덜 젊고 하는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누구나 젊은이라고도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루하루가 새로운 실험이기 때문에 인생을 어떻게 살아야 한다는 식의 말들은 무의미하다. 결혼하고 애를 낳고 돈을 모아 아파트 평수를 늘리는 삶은 모범답안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나같은 사람에게는 지옥불에 들어가는 것처럼 내키지 않은 일이다. 어떻게 살아야 내 맘에 쏙 들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