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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평점 :
줄거리(스포일)
나는 TV 프로그램 하청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에서 일한다. 아내와 초등학생 딸과 함께 신도시의 아파트에서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장님 방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기하 형이었다. 17년 전 대학 시절에 우상처럼 따르던 그 형. 민주투사였던 기하 형은 오랜 수감생활 끝에 정치권 입문 제의를 거절하고는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가 이제는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17년 전 당시 아내는 44킬로그램의 깡마른 여학생이었고, 기하 형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지금 72킬로그램의 아줌마로 화(化)해 있다. 농촌에 들어간 것을 끝으로 우리 부부는 기하 형의 소식을 모르고 지내왔다. 그동안 기하 형과 함께 운동을 했던 동지들은 잘나가는 정치인으로, 학원가의 유명강사로 변했고, 우리 부부도 전세방 신세에서 신도시의 아파트 자가 소유 세대로 바뀌었으며, 시대 또한 군부에서 문민으로, 민주로 모습을 달리했다. 변하지 않은 건 기하 형뿐인 듯했다.
그런 기하 형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도와달라고 청했다. 나는 기하 형의 전화를 받은 날 밤에 72킬로그램짜리 아내와 섹스를 나누고, 그 살찐 여자가 짐짓 17년 전의 여학생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하 형을 도와주러 농촌에 가기로 결심한다. 여름휴가가 며칠 뒤였다. 원래 계획되어 있던 가족 여행은, 아내와 딸이 제주도로 휴가를 떠나는 동생네에 얹혀 가는 것으로, 그리고 나는 기하 형네로 가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구급약에서부터 등산복, 사냥총에 이르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난생 처음 농촌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기하 형의 공동체에 이르러 기하 형을 만났다. 공동체에는 기하 형 혼자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점차로 악화되는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다들 떠났다는 것이다.
기하 형은 나를 축사로 데려갔다. 젖소들은 며칠 째 젖을 짜내지 못하고 있었다. 축사 기둥에는 비현실적으로 매끈하게 뚫린 구멍이 있었다. 외계인이 습격한다고, 기하 형이 말했다. 처음엔 개가 죽었고, 우주선이 닿았던 자리의 풀들이 누렇게 말라버렸다. 어제는 축사를 공격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 기하 형은 나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나는 마지못해 승낙은 하지만 취재의 대상 때문에 속으로는 꽤 난감해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하루 낮을 보냈다. 농촌은 뭐랄까,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었다. 원반이 나타났다. 나는 캠코더를 들고 기하 형과 함께 원반이 나타난 축사로 갔다. 원반의 중심부에서 빛이 일자로 뻗어 내려가 있고, 젖소 한 마리가 그 빛을 타고 원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캠코더에 녹화했지만 화면은 그저 검을 뿐,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원반이 사라지고, 축사로 들어간 우리는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몸통이 팽팽히 부푼 소들이 네 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채 뒤집혀 죽어 있던 것이었다. 젖소들의 젖통에서 우유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한 마리가 뻥 하고 터졌다. 우리는 숙소로 대피했다. 뻥, 뻥뻥 하고 연이어 소 터지는 소리가 산을 넘지 못하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의 귀로 들어왔다.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만 외계인이라는 얘기에 시원찮은 반응만 얻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텔 노래방에서 딸아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자랑스레 들려줬는데, 어머나 어머나 하고 열창하는 아이의 목소리와 흥분한 아내의 호들갑이 기하 형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커서 창피할 지경이었다. 기하 형은 나보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선물로 자기가 직접 재배한 유기농 쌀을 한 가마니 가져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므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른 새벽, 기하 형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원반들이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괴상한 빛을 내는 7대의 원반들이 무리지어 형의 논으로 갔다. 우리는 원반을 쫓아갔다. 원반들이 논을 빛으로 훑은 자리에는 쌀알은 온데간데없고 쭉정이만 남아 있었다. 나는 분노하며 원반을 향해 총을 겨눴다. 총을 쏘기 직전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살짝 조준을 틀긴 했지만. 원반들은 총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수수 밭으로 날아갔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옥수수 밭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원반들이 춤추듯 옥수수 밭 위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기하 형과 나는 무너지는 옥수숫대에 깔려 넘어지고 말았다. 겨우 무거운 옥수숫대를 헤치고 일어나니 원반들은 사라져 있었다.
옥수숫대들은, 더러는 쓰러져 있기도 하고 더러는 그대로 서 있기도 한 것이, 어떤 기하학적인 규칙에 따라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외계인들이 보내는 메시지가 담긴 크롭 서클일 거라고 기하 형에게 짐작을 말해주었다. 차를 타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보니, 과연 옥수수 밭에는 크롭 서클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무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고도 거대하게 그려진 ‘㉿’ 마크였다. 해는 이미 저만큼 높이 솟아오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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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뻘글)
<안녕 너구리야> 이후로 두 번째 읽은 박민규의 단편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참 재미있게 읽기는 했으나 작가가 정확히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고, 온갖 칭송을 받는다는 그의 작품에 뭔가 없을 리가 없을 텐데, 하면서 나는 이 작품을 다시 펴들었다. 그리고 박민규가 대단한 작가이긴 하다는 생각이, 과연, 하고 들었다.
그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이를테면 독특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쉼표를 여기저기에 찍어댐으로써 문장들을 거의 분절하다시피 하는 그의 문체였다. 그 전까지 나는 이것이 - 갑작스러운 문단 바꾸기의 행태와 함께 - ‘장식적 요소’의 하나로 치부하고 말았었는데, 필사를 하면서 보니 그의 쉼표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입말’처럼 문장을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적 요소’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글로 읽히게끔 쓴 게 아닌, 말로 들리는 것처럼 이야기를 썼단 것이다. 그의 이런 의도는, 서사와 대화를 행갈이도 하지 않은 채 문장들을 주욱 붙여 쓴 것에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박민규가 문장을 쓸 때, 마치 콘서트장에서 쿵팍쿵쿵팍, 하면서 입으로 자신의 리듬을 소리 내며 드럼을 두들기는 드러머처럼, 자신의 문장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서 자판을 두들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둘째는 ‘기만적인’ 캐릭터다.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 으레 그러듯이 이 작품도 ‘나’가 말하는 대로 졸졸 따라가다가는 맥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왜 그런고 했더니,. ‘나’가 자신의 감정을 자꾸만 숨기고 위장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섹스를 하고 난 뒤 비대한 아내가 소녀처럼 앵앵거리는 모습을 보고 창밖에서 스포츠카가 부앙 지나는 걸 목격한 주인공이, 스포츠카가 지나갔기 때문에 기하 형을 도와주러가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대목이 있었다. 사실은 아내가 지긋지긋하고 팍팍한 도시가 징글징글해서 아내와 딸로부터 좀 떨어져 있고 있다는 속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지나간 게 청소차가 아니라 스포츠카여서 기하 형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는 등의 변명으로 독자를 속이는 것이다. 아무튼 다른 소설들에건 보기가 힘든, 독특한 캐릭터였다. 이상이 무기력한(또는 무력한) 캐릭터로 독창적인 소설들을 여럿 지어낸 적이 있는 만큼 박민규도 아마 이런 캐릭터를 다른 작품들에도 분명히 심어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른 소설들을, 그래서 나는 읽고 싶어졌다.
세 번째는 비유의 적절함인데, 이건 그저 독특한 점이라기 보단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처럼’, ‘~같은’ 따위의 비유를, 직업에 맞게, 상황에 맞게, 심리에 맞게 적절히 사용한 데에는 정말 감탄했다. 이를 테면, TV 프로그램 제작회사의 직원답게, 농촌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6시 내 고향>이라고, 운동권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이라고 대답을 내놓는 여직원들이라든지, 외계인을 캠코더로 찍을 때는 빨간 녹화등이 평범한 지구인의 심장처럼 깜박였다든지 하는 표현들은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래서 박민규의 황당무계하다시피 한 스토리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읽혀졌다. 박민규를 그냥 읽어서는, 신춘문예 낙선작 정도의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거나 세밀히 읽어야만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래서 박민규가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데뷔했구나, 하고 수긍이 되었다.
그런데 주제에 대해선?
박민규가 황당한 알레고리로 이야기를 풀어갔으니 나도 좀 딴소리를 풀어내야겠다는 필요성을, 나는 이쯤에서 느낀다.
그러니까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몇 시간만 가면 완전히 다른 대자연이 펼쳐지듯, 나는 집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목욕탕에 갔다. 옷가지들을 단지 몇 꺼풀 벗겨냈고,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낯선 알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뜨거운 한증막에 들어가 앉았더니, 자연스레 으어, 시원하다, 는 말이 입속에서 소젖 짜듯 뿜어져 나왔다.
뿌연 수증기에 온몸이 잠긴 김에, 그래서 나는 내 마음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내 마음 속에는 참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었다. 이제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그 기억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원반들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더니 내 마음 속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어린 시절의 다짐이며 꿈들이 모두 원반 아래쪽에서 뿜어져 나온 빛을 쪼이더니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나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넋 놓고 원반이 가는 대로 죽어라 뛰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원반들은 내게 크롭 서클을 남기고 떠났다.
크롭 서클에는, 도형도 그림도 무늬도 외계어도 아닌,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모래시계 뒤집어라.’
몸이 달궈질 대로 달궈져서 나는 명상에서, 그리고 한증막에서 뛰쳐나왔다. 한증막 안에는 나보다 약간씩, 또는 한참씩이나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마음속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치 외계인의 습격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어차피 황폐해진 기하 형의 이웃 농가들처럼.
그들의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어보면 정수리 어딘가에 선명히 찍혀 있는 ㉿ 마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기념품과도 같은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는 등허리를 헹구러 샤워기로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