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비 딕
허먼 멜빌 지음, 김석희 옮김 / 작가정신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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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아니, 바다에 나갈 때면 나는 돛대 바로 앞에 서 있거나 앞갑판으로 곧장 내려가거나 로열마스트(가장 위에 있는 돛대) 꼭대기로 올라가야 하는 일개 선원으로 간다. 사실 나는 명령에 따라, 오뉴월 들판의 메뚜기처럼 이 활대에서 저 활대로 펄쩍펄쩍 뛰어다녀야 한다. 처음에는 꽤 힘든 일이다.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기도 하다. 특히 오래전에 뭍에서 기반을 잡은 유서 깊은 집안, 예컨대 벤 렌슬러나 랜돌프나 하르디카누트 같은 집안 출신이라면 더욱 그렇다. 타르 단지에 손을 집어넣어야 하는 일반 선원이 되기 직전까지 시골에서 학교 선생으로 위세를 부리며 가장 덩치 큰 학생들까지도 벌벌 떨게 했다면, 어떤 경우보다도 가장 힘들 것이다. 미리 경고해두거니와, 교사에서 선원으로 전업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며, 그것을 씩 웃으면서 견딜 수 있으려면 세네카와 스토아학파의 가르침을 달인 진액이 필요하다. 하지만 이 괴로움도 시간이 지나면 서서히 사라진다.
어느 심술 사나운 늙은 선장이 나에게 비를 들고 갑판을 청소하라고 명령한다 해서, 그게 어쨌다는 말인가? <신약성서>라는 저울에 달아보았을 때, 그게 얼마나 큰 모욕이 된다는 것인가? 내가 그 늙은 선장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른다고 해서 대천사 가브리엘이 나를 조금이라도 멸시할 거라고 생각하는가? 이 세상에 노예 아닌 사람이 있는지 묻고 싶다. 늙은 선장이 아무리 나를 혹사하고 부려먹어도, 아무리 쥐어박고 후려갈겨도, 나는 괜찮다는 것을 알고 거기에 만족한다. 다른 사람들도 모두 어떤 식으로든 - 다시 말해서 육체적인 관점에서든 정신적인 관점에서든 - 비슷한 대우를 받고 있으며, 따라서 모든 사람이 돌아가면서 때리고 맞는다는 것, 그리고 모든 사람이 서로 어깨뼈를 문질러주면서 만족해야 한다는 것을 나는 알고 있다.
거듭 말하지만, 나는 언제나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 선원은 반드시 수고한 데 따라서 대가를 받기 때문이다. 하지만 승객으로 배를 탄 사람이 한 푼이라도 돈을 받는다는 이야기는 들어본 적이 없다. 승객은 돈을 받기는커녕 오히려 돈을 내야 한다. 돈을 내는 것과 받는 것은 천지 차이다. 돈을 내는 행위는 과수원의 두 도둑이 우리에게 물려준 괴로움 중에서도 아마 가장 불쾌한 괴로움일 것이다. 하지만 `대가를 받는 것` - 이것을 무엇과 비교할 수 있을까? 돈이야말로 지상의 모든 악의 근원이고, 부자는 절대로 천국에 들어갈 수 없다고 우리가 진지하게 믿고 있음을 생각하면, 사나이가 멋진 활동으로 돈을 받는 것은 참으로 경탄할 만한 일이다. 아아! 우리는 얼마나 기꺼이 우리 자신을 파멸에 내맡기고 있는가!
마지막으로 말하거니와, 나는 언제나 일개 선원으로서 바다에 나간다. 앞갑판에는 건강에 좋은 운동과 맑은 공기가 있기 때문이다. 세간에서와 마찬가지로 - 피타고라스의 격언을 어기지 않는다면 - 앞에서 불어오는 맞바람은 뒤에서 불어오는 바람보다 훨씬 우세하고, 따라서 뒷갑판에 있는 선장은 대부분 앞갑판의 일반 선원들ㄹ이 마시고 뱉은 공기를 다시 들이마시게 된다. 선장은 자기가 새 공기를 마신다고 생각하겠지만, 사실은 그렇지 않다. 이와 마찬가지로 세상사에서도 지도자가 모르는 사이에 일반대중이 지도자를 이끌어 가는 경우가 많다. 그런데 상선 선원으로서 여러 번 바다 냄새를 맡아본 내가 이제 와서 고래잡이배를 타기로 마음먹은 것은 무엇 때문일까? 이 의문에 누구보다도 정확하게 대답할 수 있는 것은 운명의 여신들이 보낸 경찰관, 끊임없이 나를 감시하고 나를 미행하고 설명할 수 없는 방식으로 나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그 눈에 보이지 않는 경찰관이다. 내가 이 고래잡이 항해에 나선 거ㅅ은 신의 섭리에 따라 오래전에 작성된 웅대한 프로그램의 일부를 이루고 있을 게 분명하다. 그것은 좀 더 긴 연극 사이에 끼여 있는 일종의 짧은 막간극이자 일인극이었다. 그 연극 프로그램에서 이 부분은 이런 식으로 표현되었을 거라고 생각한다.

미합중국 대통령 선거전
이슈메일 아무개의 고래잡이 항해
아프가니스탄에서 벌어진 피비린내 나는 전투

다른 사람들은 고상한 비극에서 당당한 역할으르 맡거나 우아한 희극에서 짧고 쉬운 역할을 맡거나 익살극에서 유쾌한 광대 역할을 맡는데, `운명`이라는 무대감독이 왜 나한테는 고래잡이 항해의 이 초라한 역할을 맡겼는지, 그 정확한 이유는 나도 알 수 없다. 정확히 무엇 때문이었는지는 나도 알 수 없지만, 이제 와서 모든 상황을 돌이켜보면 교활하게도 다양하게 변장하고 내 앞에 나타나 그 역할을 맡게 한 여러 가지 동기와 원인을 조금은 알 수 있을 것 같다. 게다가 그것들은 나를 속여서, 내가 확고부동한 자유의지와 뛰어난 판단력으로 그 역할을 선택했다는 망상에 빠뜨렸다. - pp. 34~36

노인의 광기는 어디로 보나 혼 곶의 파도와 함께 사라진 것처럼 보였다. 선장은 어두운 소굴에서 축복받은 햇빛과 공기 속으로 나왔다. 그는 창백하긴 했지만 단호하고 태연한 표정으로 다시 침착하게 명령을 내렸고, 그래서 항해사들은 마침내 무서운 광기가 사라졌다고 생각하여 신에게 감사까지 드렸다. 그러나 에이해브의 은밀한 자아는 여전히 미쳐 날뛰고 있었던 것이다. 인간의 광기란 참으로 교활하고 음흉할 때가 많다. 겉보기에는 광기가 사라진 것 같지만 사실은 훨씬 포착하기 어려운 형태로 변형되어버린 것에 불과할 때도 있는 것이다. 에이해브의 광기는 가라앉기는커녕 점점 심해지고 깊어졌다. 그것은 저 고상한 북쪽의 강인 허드슨 강이 산악지방의 골짜기를 지날 때 폭은 좁지만 깊이를 잴 수 없을 만큼 깊게 흐르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에이해브의 경우, 좁게 흐르는 편집증의 물줄기 속에 그의 넓은 광기가 하나도 빠짐없이 그대로 남아 있었다. 그 지성은 전에는 살아있는 주체였지만, 지금은 살아 있는 도구가 되었다. 이렇게 격렬한 비유가 허락된다면, 에이해브의 특별한 광기는 전반적으로 온전한 그의 정신을 공격하여 사로잡고, 중심에 모인 모든 대포를 자신의 무분별한 표적 쪽으로 돌려놓았다. 그래서 에이해브는 힘을 잃기는커녕, 그가 지금까지 제정신으로 합리적인 목표에 쏟아 부었던 것보다 수천 배가 더 많은 잠재력을 그 한 가지 목표에 집중하게 되었다. - pp. 243~244

에이해브는 다른 문제도 잊지 않았다. 강한 감정에 사로잡혀 있을 때면 인간은 모든 천박한 생각을 경멸하지만, 그런 순간은 금세 덧없이 사라져 버린다는 것이다. 신이 만든 제품인 인간의 본질적 상태는 바로 천박함이고, 그것은 영원히 변치 않는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설령 흰 고래가 이 야만적인 선원들의 마음을 충분히 자극하여 그들의 야만선 주위에 너그러운 의협심까지 만들어낸다 해도, 그래서 그 때문에 모비 딕을 추적한다 해도, 그들은 좀 더 평범하고 일상적인 시기욕을 채워줄 음식도 먹어야 한다. 숭고한 기사도 정신에 불탔던 옛날의 십자군도 성지를 되찾으러 가는 도중에 절도나 소매치기를 저지르고 그 밖에 종교를 빙자한 부수입을 얻지 않고는 2천 마일이 넘는 산천을 가로지르려 하지 않았다. 만일 그들이 궁극적이고 낭만적인 하나의 목적에만 엄격하게 묶여 있었다면, 그 궁극적이고 낭만적인 목적에 진저리가 나서 등을 돌린 자가 많았을 것이다. 이 뱃놈들한테서 돈벌이의 희망을 빼앗지는 않겠다고 에이해브는 생각했다. 그렇다. 돈이다. 그들은 지금은 돈을 경멸할지 모르지만, 몇 달이 지나도 돈을 벌 가망이 없으면 잠잠하던 돈이 당장 그들 속에서 반란을 일으켜 에이해브를 해치워 버릴 것이다. - pp.274~275

그런데도 태양은 버지니아의 대습지도, 로마의 저주받은 황야도, 광막한 사하라 사막도, 달빛 아래에 있는 수백만 마일의 사막과 비애도 감추지 않는다. 따라서 내면에 슬픔보다 기쁨을 더 많이 가진 인간은 진실할 수 없다. 진실하지 않거나 아직 인간이 다 되지 않았거나 둘 중 하나다. 책도 마찬가지다. 모든 인간 중에서 가장 진실한 사람은 `슬픔의 인간`이고, 모든 책 중에서 가장 진실한 책은 솔로몬의 책이며, 그중에서도 특히 <전도서>는 정교하게 단련된 비애의 강철이다. `모든 것이 헛되다.` 이 완고한 세계는 그리스도가 출현하기 이전인 솔로몬의 지혜조차 아직 파악하지 못했다. 하지만 병원과 감옥을 살짝 피하고, 묘지는 재빠른 걸음으로 가로지르고, 지옥보다는 오페라에 대해 이야기하기를 더 좋아하는 사람은 쿠퍼나 영이나 파스칼이나 루소를 모두 불쌍한 병자라고 부르고, 라블레는 지극히 현명하기 때문에 명랑하다고 단언하면서 태평한 인생을 보낸다. 그 사람은 묘석 위에 앉아서 깊이를 알 수 없는 위대한 솔로몬과 함께 축축한 초록빛 이끼를 뜯을 자격도 없다.
하지만 솔로몬도 말하고 있다. "깨달음의 길을 떠나 헤매는 자는 (살아 있는 동안에도) 죽은 자들 속에 있으리." 그러므로 여러분은 한때 내가 그랬듯 불빛에 자신을 내맡겨 불이 당신을 거꾸로 돌려놓거나 무감각하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비애인 지혜도 있지만, 광기인 비애도 있다. 어떤 영혼 속에는 캐츠킬의 독수리가 한 마리 살고 있는데, 이 독수리는 캄캄한 골짜기로 급강하할 수도 있고, 그곳에서 다시 하늘 높이 솟아올라 햇빛 찬란한 창공으로 자취를 감출 수도 있다. 그리고 그 독수리가 영원히 깊은 골짜기 안에서만 날아다니더라도, 그 골짜기는 산속에 있다. 그래서 독수리가 아무리 낮게 급강하해도, 산속의 독수리는 평야에 사는 다른 새들이 높이 솟아오를 때보다 더 높은 곳에 있다. - pp. 512~513

이봐, 금화.여기 있는 너의 12궁도는 인간의 일생을 처음부터 끝까지 그려놓은 거야. 이제 곧 이 책을 끝까지 다 읽어봐야지! 덤벼라, 달력! 우선 백양궁의 수양 - 음란한 개, 이놈이 우리를 낳아. 그 다음은 금우궁의 황소 - 이놈이 맨 먼저 우리를 들이박지. 그다음은 쌍자궁의 쌍둥이 - 즉 선과 악이야. 우리는 선에 도달하려고 애쓰지만, 거해궁의 게가 와서 우리를 도로 끌어가지. 그러면 으르렁거리는 사자궁의 사자가 선에서 나와 길바닥에 엎드려 있다가, 우리를 사납게 물어뜯고 앞발로 오만하게 때리는 거야. 그러면 우리는 달아나면서 처녀궁의 처녀를 큰 소리로 부르지. 그건 우리의 첫사랑이야. 우리가 결혼해서 행복하다고 생각할 때, 별안간 천칭궁의 저울이 나타나 행복을 저울에 달아보고는 무게가 모자란 것을 알게 되지. 우리가 그것을 몹시 슬퍼하고 있을 때 천갈궁의 전갈이 나타나 궁둥이를 찔러서 우리는 펄쩍 뛰어오르지. 우리가 상처를 치료하고 있을 때 사방에서 쌩쌩 화살이 날아와. 사수궁의 궁수가 우리를 쏘면서 즐기고 있는거야. 그 화살을 뽑고 있을 때, 길을 비켜라! 하고 마갈궁의 염소가 전속력으로 달려오는 바람에 우리는 곤두박질하지. 그러면 보병궁의 물병이 홍수를 쏟아 부어서 우리를 익사시키지. 결국 우리는 물에 빠져 쌍어궁의 물고기와 함께 잠드는 거야. 이것이 높은 하늘에 쓰여 있는 설교인데. 태양은 해마다 그곳을 통과하고도 항상 생기 있고 기운차게 빠져나오곤 하지. 태양이 저 높은 곳에서 온갖 고생을 다 겪으면서도 저렇게 유쾌하게 돌아다닌다면, 여기 밑에 있는 유쾌한 스터브도 꼭 마찬가지라고. 오오, 유쾌해야지. 영원히 말이야. 잘 있거라, 금화여! 하지만 잠깐. 저기 왕대공 녀석이 오는군. 기름솥 뒤에 숨어서 저 녀석이 무슨 말을 하는지 들어보자. 그래, 앞에 와 섰구나. 이제 곧 뭐라고 지껄일 거야. 그래, 그래, 시작했어." - pp. 520~521

나뭇잎 레이스 사이로 보이는 거대한 태양은 영원히 시들지 않을 신록을 짜는 베틀의 북처럼 보였다. 오오, 분주한 직공이여! 눈에 보이지 않는 직공이여! 잠깐 멈추어라! 한 마디만 물어보자! 그 피륙은 어디로 흐르는가? 어느 궁전을 장식할 것인가? 무엇을 위해 끊임없이 일하는가? 말하라, 직공이여! 손을 잠깐 멈추어라! 너에게 한 마디만 하고 싶다! 아니, 북이 다시 움직인다. 베틀에서 무늬가 흘러나오고, 홍수가 콸콸 흐르는 융단은 영원히 미끄러지듯 흘러간다. 베 짜는 신이 베를 짠다. 베 짜는 소리 때문에 그는 귀머거리가 되어 인간의 목소리를 전혀 듣지 못한다. 베틀을 바라보는 우리도 역시 그 윙윙거리는 소리 때문에 귀머거리가 된다. 그곳을 빠져나와야만 비로소 그곳에 울려 퍼지는 수천 개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이다. 현실 세계의 공장에서도 마찬가지다. 방추가 시끄럽게 돌아가는 곳에서는 아무 말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열린 창문에서 튀어나오는 말소리는 아무 장애도 없이 또렷이 들린다. 그것으로 온갖 악행들이 발각되었다. 오오, 인간들아! 그러니 조심하라. 거대한 세상의 베틀이 내는 이 소음 속에서도 가장 은밀한 네 생각을 멀리서도 엿들을지 모르니까. - p. 540

그들은 서른 명이 아니라 한 사람이었다. 그들을 모두 태우고 있는 한 척의 배는 온갖 잡다한 것 - 참나무, 단풍나무, 소나무, 쇠, 역청, 삼베 - 이 모인 것이고, 그것들이 복잡하게 서로 얽혀서 하나의 구체적인 배가 만들어지는 것이지만, 중앙에 긴 용골이 배치되어 균형과 방향성을 부여해야만 물 위에 뜰 수 있게 된다. 이와 마찬가지로, 선원들의 다양한 개성 - 이 사람의 용기, 저 사람의 두려움, 죄와 결백 - 이 하나로 융합되어 그들의 주재자이며 용골인 에이해브가 가리키는 대로 그 숙명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고 있는 것이다.
삭구는 살아 있는 생명체였다. 돛대 꼭대기에는 키 큰 야자수의 우듬지처럼 팔과 다리가 주렁주렁 매달려 있었다. 어떤 자는 한 손으로 활대를 잡고 매달린 채, 다른 손을 앞으로 뻗어 초조하게 흔들고 있었다. 어떤 자는 눈 위에 그늘을 만들어 강렬한 햇볕을 가린 채 흔들리는 활대 위에 앉아 있었다. 모든 활대는 각자의 운명을 기다리는 인간들로 가득 차 있었다. 아아! 그들은 자신을 파멸시킬지도 모르는 고래를 찾아 끝없이 넓고 푸른 바다를 어디까지 헤치고 가려는 것일까! - pp. 660~6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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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달이 지났고, 휴면계정 같은 이곳에 인기척이 돌 때까지 부산히 이것저것을 클릭해본다.
다른 사람들 페이퍼를 보면 책표지 사진들을 좌르륵 올려놓고 거기다 링크까지 걸어두곤 하는데, 나는 이걸 어떻게 하는 건지 도무지 모르겠다.

이제 먼지만 겨우 털었을 뿐인데, 나는 또 몇 달 간 이곳을 비워놓겠지. 고래잡이라도 떠나는 심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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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년의 밤
정유정 지음 / 은행나무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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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스포일)
7년 전 세령 마을에서 무시무시한 살인 사건이 벌어졌다. 범인은 당시 세령 마을의 세령댐 보안팀장으로 막 부임한 최현수였고, 그는 사건 직후 검거돼 사형 판결을 받고 교도소에 수감됐다. 그리고 그의 아들 서원은 살인마의 아들이라는 이유로 세상으로부터 따돌림을 받으며 살아간다. 1년도 채우지 못하고 전학을 되풀이해야 했고, 친척들로부터도 버려진 그에게 유일한 의지처가 되는 사람은 승환 뿐이다. 세령 마을에 살던 시절 아버지의 부하 직원이자 자신과 같은 방을 썼던 그가 없었더라면 서원은 사형 집행을 기다리는 아버지보다 더 간절히 세상을 떠나기를 바랐을 것이다. 승환과 서원은 계속해서 세상으로부터 떠밀려 나다가 바닷가의 조그만 마을에 표류하듯 정착한다. 잠깐이지만 평화가 찾아든다.
그러던 어느 날 승환이 사라지고, 서원에게 연이어 충격적인 우편물들이 날아든다. 하나는 승환의 글과 자료들이었다. 대필 작가로 근근이 생계를 유지하던 승환이 남몰래 그동안 7년 전 그날의 일을 소재로 해서 소설을 썼던 것이다. 곧이어 어렸을 적 아빠가 사주었던 나이키 운동화가 서원에게 배달되었다. 서원은 도망가려 발버둥쳤던 과거가 통째로 눈 앞에 와 있다는 사실을 받아들이고 싶어하지 않는다. 그러던 와중에 또 다시 전보가 그에게 날아든다. 아버지의 사형이 집행되었다는 소식이었다. 엎친데덮친 격으로 유일한 자기 편이자 버팀목이던 승환마저 행방불명 상태였다. 서원에게 남겨진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소설의 형식으로 된, 7년 전 그날에 대한 승환의 기록을 읽어보는 것...
사건의 진상을 알게 된 서원에게 마지막 과제가 남아 있었다. 그날의 음모를 계획했던 사람의 손아귀로부터 빠져나가야 하는 것이었다. 7년 전의 원한은 사그러지기는커녕 지금껏 서원의 목숨을 시시각각 노리고 있었던 것이다.


감상(뻘글)
줄거리를 쓸까 말까 고민하다가 결국 애매하게 적을 수밖에 없었다. 이런 류의 소설이 지니는 가장 큰 장점은 독후감을 쓰는 입장에서는 여간 곤란한 점이 아닐 수 없다. 그래서 무슨 <씨네21>의 영화 프리뷰도 아니고 이렇듯 시시하게 줄거리를 요약할 수밖에 없는 노릇이다. 500여 페이지에 달하는 긴 이야기지만 지루함이라곤 전혀 없었을 정도로 흥미진진하게 읽었다는 짤막한 감상으로 '스토리의 흥행적 면모'를 설명하는 데에 충분할 것이다. 스토리를 밝히기 찜찜하니 스토리 자체에 대한 감상도 이 정도로 끝내는 것이 옳겠다.
그렇다면 도대체 무얼 가지고 이 책의 독후감을 쓸 것인가? 정유정의 이 작품에서 가장 인상적인 것은, 사실 스토리도 주제 의식도 아니다. 그녀의 당찬 문장에 있다. 그 당차고 저돌적인 문장들로 그녀는 이야기를 이끌어간다. 때로는 무모할 정도로, 때로는 황당할 정도로 유치하고 뜬금 없는 문장들을 그녀는 뻔뻔하게도 툭 내던진다. 그러고는 한 치의 망설임 없이 다음 문장으로 넘어가 버린다. 도망가듯 넘어가는 게 아니라 당당하게 행진하듯 말이다. 쓰기 전에는 수백 번 망설였을지 어쨌을지는 몰라도, 일단 쓰고 나면 그녀는 일백 퍼센트의 확신으로 내 눈 앞에 문장들을 부려 놓는다. 그걸 가지고 내가 무어라 무어라 불평불만할 사이도 주지 않고는 곧바로 다음 문장을, 그 또한 일백 퍼센트의 확신으로 가득찬 몸짓으로, 또 내 앞에 부려 놓는 것이다. 나는 바닥에 길게 늘어뜨려 놓인 낱알들을 하나하나 부리로 콕콕 쪼아가며 주인의 모이 주는 손을 쫓아가듯 그저 부리나케 그녀의 문장을 쫓아갈 도리 뿐이었다. 그녀의 소설의 힘은 바로 이런 문장에 대한 작가의 확신으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책을 덮고 나니 뒷면에 소설가 밤범신의 추천평이 눈에 들어왔다. '정유정 작가를 생각하면 그리스 신화 속의 여전사인 아마존이 떠오른다.' 내 생각은 좀 다르다. 용맹하기로 치자면 굳이 남녀 작가를 가릴 것 없이 최고이니 '한니발의 코끼리 부대' 정도는 되지 않을까.
그러나 이런 류의 소설이 또 늘 그렇듯 플롯 상의 치명적인 약점들이 간혹 보였다. 소설을 죽 읽어 나가면서 어느 부분에 이르러 '어라, 이건 좀 이상한데'란 생각이 본능적으로 들었다면, 그리고 그 '이상한 부분'에 대한 설명 혹은 해명이 부족하거나 없었다면, 그것은 독자의 입장에서는 분명 소설에 문제가 있다는 얘기이다. 이 작품에서도 그런 부분이 분명 있었다. 한 군데만이라도 짚어 넘어가고 싶지만, 스포일은 정말 하기가 싫은 관계로 그냥 넘어가야겠다. 이 소설을 쓰면서 작가가 엄청난 취재를 했다는 얘기도 들었고 이야기 곳곳에 그 역력한 흔적도 많이 보였지만, 내가 단언할 수 있는 것은 작가가 대목대목에서 '소설로서의 리얼리티'는 무시한 채 그저 '풍부한 현장 지식'만을 자랑한, 그야말로 겉핥기 식 리얼리티라고 해도 좋을 오류에 빠진다는 것이다.
자글자글하게 소설 곳곳에 퍼져 있는 실수들에도 불구하고, 정유정은 다음 작품이 기대되는 작가임에 분명하다. 우유부단한 나를 단호하게 이끌어나가는 여장부의 귀환을, 언제든지 환영한다(<28>이라는 제목의 신간이 나왔다 한다. 기대해 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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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Book] 코틀로반 - 세계문학전집 03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39
안드레이 플라토노프 지음, 김철균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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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줄거리)
공산주의 체제로 혁명이 이루어진 소련. 공장 노동자로 일하던 보셰프는 딴생각을 하느라 멍하니 업무시간을 보내는 경우가 잦다며 공장에서 해고당한다. 그는 자신의 삶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가 내내 의문스러웠다. 해고당한 그는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돌다 어느 건설 현장에 발길이 닿고, 거기에서 코틀로반을 파는 일을 시작하게 된다. 건물을 짓기 전의 기초 공사로 지반을 파내 들어간 구덩이를 코틀로반이라 한다. 설계자인 프루솁스키는 공사를 지도 감독 하면서 한편으로는 자기 삶의 무의미함에 지쳐 죽음만응 생각하곤 한다. 프롤레타리아가 최고의 계급인 이때, 구덩이를 파는 일꾼들은 그저 아무 생각 없이 작업 지시에 따라 일을 하고 쉬고를 반복할 뿐이다. 치클린은 베테랑 노동자로, 코틀로반 공사를 진두지휘한다. 공산주의의 이상을 실현시키고, 후대에게 밝은 세상을 넘겨주겠다는 신념 하에 치클린과 일꾼들은 노동에 매진한다. 그러던 중 그곳에서 함께 일하던 코즐로프는 사프로노프와 함께 코틀로반을 떠나 근처의 집단농장사업에 힘을 보태지만, 그곳에서 목숨을 잃고 만다. 시신을 수습하러 집단농장에 간 치클린은 부농들을 뗏목에 실어 먼 바다로 추방해서 계급을 해방시키는 등 틈틈이 집단농장사업의 일을 돕는다. 한편 집단농장의 지도자인 열성분자는 당의 노선을 충직하게 따르고자 하루종일 집단농장사업에 매달리지만, 오히려 과도한 사업추진을 아유로 당에서 제명당한다. 치클린과 일행은 코틀로반 현장으로 되돌아와 다시 구덩이를 파내려간다. 그 와중에 어린 소녀 나스탸가 열병으로 죽고, 공산주의의 밝은 미래를 넘겨줄 어린 소녀의 죽음으로 치클린과 일행은 상심에 젖는다. 그리고 눈물을 흘리며 말 없이 땅을 파내려갈 뿐이다.


뻘글(감상)
공산주의의 허구와 실상을 파헤친 소설이지만, 나는 이 소설이 단지 공산주의에 대해서만 적용되는 것이 아니란 생각이 든다. 모두가 모든 것을 이룰 수 있는 자본주의의 최첨단에서 땀 한 방울 흘리지 않고 사는 내 눈앞에는 어째서 온몸이 부서져라 삽을 들고 코틀로반을 파는 듯한 환상이 자꾸 펼쳐지는 것일까. 우리의 아이들에게 깨끗한 지구를 물려 주세요, 당신의 노후는 안전하십니까, 당신의 꿈이 바로 미래입니다 등등의 표어로 물든 나는, 정작 나 자신의 현재의 삶에 대해선 도무지 어떻게 다루어야 할지 감이 오지 않는 것이다. 나는 더 풍요로운 후대를 위해, 더 발전된 대한민국을 위해, 혹은 더욱 행복한 나의 미래를 위해 언제까지라도 고통을 견디며 현재를 열심히 살아야만 하는 것일까? 내가 파는 코틀로반 위에 거대한 건물이 세워져 그곳에 입주하는 날이 과연 찾아오기는 할까? 결국 끝없이 구덩이만 파내려가다 죽을 것이란 예감이 강하게 드는 것은 왜일까. 죽어가는 나를 마지막 순간까지 부려먹기 위해 누군가는 '기억하세요, 당신도 누군가의 영웅입니다' 운운 하는 표어를 내걸 것이다. 견디고 견뎌서 결국 맞는 것이 죽음이라면, 죽음을 위해서 삶을 견디는 것이라는 말인데, 죽음이란 것은 견디든 견디지 않든 상관없이 찾아오는 법이므로 정말이지 견디고 싶지 않아진다. 그러나 견디지 않으면 다른 도리가 없기 때문에 어쨌든 견디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차라리 삶의 의미나 목적 따위를 애초에 생각한 것부터가 잘못이었다는 후회가 밀려든다. 시청 광장에 거대하게 펼쳐진 현수막의 문구처럼 그냥저냥 속는 셈치고 산다면 마음은 편할 텐데 말이다.(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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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테라
박민규 지음 / 문학동네 / 200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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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스포일)
나는 TV 프로그램 하청 제작을 전문으로 하는 프로덕션에서 일한다. 아내와 초등학생 딸과 함께 신도시의 아파트에서 산다. 그런데 어느 날, 부장님 방으로 나를 찾는 전화가 걸려왔다. 기하 형이었다. 17년 전 대학 시절에 우상처럼 따르던 그 형. 민주투사였던 기하 형은 오랜 수감생활 끝에 정치권 입문 제의를 거절하고는 노동현장으로 뛰어들었다가 이제는 농촌운동에 투신했다. 17년 전 당시 아내는 44킬로그램의 깡마른 여학생이었고, 기하 형의 애인이었다. 그녀는 지금 72킬로그램의 아줌마로 화(化)해 있다. 농촌에 들어간 것을 끝으로 우리 부부는 기하 형의 소식을 모르고 지내왔다. 그동안 기하 형과 함께 운동을 했던 동지들은 잘나가는 정치인으로, 학원가의 유명강사로 변했고, 우리 부부도 전세방 신세에서 신도시의 아파트 자가 소유 세대로 바뀌었으며, 시대 또한 군부에서 문민으로, 민주로 모습을 달리했다. 변하지 않은 건 기하 형뿐인 듯했다.
그런 기하 형이 내게 전화를 걸어와 도와달라고 청했다. 나는 기하 형의 전화를 받은 날 밤에 72킬로그램짜리 아내와 섹스를 나누고, 그 살찐 여자가 짐짓 17년 전의 여학생처럼 행동하는 모습을 보고는 기하 형을 도와주러 농촌에 가기로 결심한다. 여름휴가가 며칠 뒤였다. 원래 계획되어 있던 가족 여행은, 아내와 딸이 제주도로 휴가를 떠나는 동생네에 얹혀 가는 것으로, 그리고 나는 기하 형네로 가는 것으로 변경되었다.
나는 구급약에서부터 등산복, 사냥총에 이르는 완벽한 준비를 갖추고 난생 처음 농촌 속으로 진입해 들어갔다. 기하 형의 공동체에 이르러 기하 형을 만났다. 공동체에는 기하 형 혼자밖에 남지 않아 있었다. 점차로 악화되는 상황을 이기지 못하고 다들 떠났다는 것이다.
기하 형은 나를 축사로 데려갔다. 젖소들은 며칠 째 젖을 짜내지 못하고 있었다. 축사 기둥에는 비현실적으로 매끈하게 뚫린 구멍이 있었다. 외계인이 습격한다고, 기하 형이 말했다. 처음엔 개가 죽었고, 우주선이 닿았던 자리의 풀들이 누렇게 말라버렸다. 어제는 축사를 공격해서 이 모양이 되었다. 기하 형은 나에게 취재를 부탁했다. 나는 마지못해 승낙은 하지만 취재의 대상 때문에 속으로는 꽤 난감해했다.
하룻밤을 보내고, 하루 낮을 보냈다. 농촌은 뭐랄까, 지긋지긋했다.
그리고 다시 저녁이 되었다. 원반이 나타났다. 나는 캠코더를 들고 기하 형과 함께 원반이 나타난 축사로 갔다. 원반의 중심부에서 빛이 일자로 뻗어 내려가 있고, 젖소 한 마리가 그 빛을 타고 원반 속으로 빨려 들어가고 있었다. 나는 그 장면을 캠코더에 녹화했지만 화면은 그저 검을 뿐, 아무것도 찍히지 않았다. 원반이 사라지고, 축사로 들어간 우리는 참혹한 광경과 마주했다. 몸통이 팽팽히 부푼 소들이 네 다리를 하늘로 치켜든 채 뒤집혀 죽어 있던 것이었다. 젖소들의 젖통에서 우유가 분수처럼 뿜어져 나왔다. 한 마리가 뻥 하고 터졌다. 우리는 숙소로 대피했다. 뻥, 뻥뻥 하고 연이어 소 터지는 소리가 산을 넘지 못하고 메아리가 되어서 우리의 귀로 들어왔다.
경찰에 전화를 걸었지만 외계인이라는 얘기에 시원찮은 반응만 얻고 말았다. 그 와중에 아내에게서 전화가 왔다. 호텔 노래방에서 딸아이의 노래 부르는 모습을 자랑스레 들려줬는데, 어머나 어머나 하고 열창하는 아이의 목소리와 흥분한 아내의 호들갑이 기하 형의 귀에까지 들리도록 커서 창피할 지경이었다. 기하 형은 나보고 서울로 돌아가라고, 선물로 자기가 직접 재배한 유기농 쌀을 한 가마니 가져가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밤이 늦었으므로 우리는 잠자리에 들었다.
그런데 이른 새벽, 기하 형이 나를 흔들어 깨웠다. 원반들이 다시 등장한 것이었다. 괴상한 빛을 내는 7대의 원반들이 무리지어 형의 논으로 갔다. 우리는 원반을 쫓아갔다. 원반들이 논을 빛으로 훑은 자리에는 쌀알은 온데간데없고 쭉정이만 남아 있었다. 나는 분노하며 원반을 향해 총을 겨눴다. 총을 쏘기 직전 두려운 마음이 들어서 살짝 조준을 틀긴 했지만. 원반들은 총소리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옥수수 밭으로 날아갔다. 우리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음을 알면서도 옥수수 밭으로 달려갔다. 이번엔 원반들이 춤추듯 옥수수 밭 위 허공을 맴돌았다. 그리고 기하 형과 나는 무너지는 옥수숫대에 깔려 넘어지고 말았다. 겨우 무거운 옥수숫대를 헤치고 일어나니 원반들은 사라져 있었다.
옥수숫대들은, 더러는 쓰러져 있기도 하고 더러는 그대로 서 있기도 한 것이, 어떤 기하학적인 규칙에 따라 무늬를 이루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이것이 외계인들이 보내는 메시지가 담긴 크롭 서클일 거라고 기하 형에게 짐작을 말해주었다. 차를 타고 높은 언덕에 올라가보니, 과연 옥수수 밭에는 크롭 서클이 있었다.
그들이 남긴 무늬는, 한 치의 오차도 없이 정밀하고도 거대하게 그려진 ‘㉿’ 마크였다. 해는 이미 저만큼 높이 솟아오른 아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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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상(뻘글)
<안녕 너구리야> 이후로 두 번째 읽은 박민규의 단편소설이었다. 이 소설을 처음 읽었을 땐, 참 재미있게 읽기는 했으나 작가가 정확히 무얼 말하고자 하는 건지가 막연하게만 느껴졌다. 한국 문학을 대표하고, 온갖 칭송을 받는다는 그의 작품에 뭔가 없을 리가 없을 텐데, 하면서 나는 이 작품을 다시 펴들었다. 그리고 박민규가 대단한 작가이긴 하다는 생각이, 과연, 하고 들었다.
그의 소설에는 다른 작가들과 다른, 이를테면 독특한 점이 몇 가지 있었다.
첫 번째는 쉼표를 여기저기에 찍어댐으로써 문장들을 거의 분절하다시피 하는 그의 문체였다. 그 전까지 나는 이것이 - 갑작스러운 문단 바꾸기의 행태와 함께 - ‘장식적 요소’의 하나로 치부하고 말았었는데, 필사를 하면서 보니 그의 쉼표의 의도는 무엇보다도 ‘입말’처럼 문장을 표현하고자 하는 ‘형식적 요소’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러니까 글로 읽히게끔 쓴 게 아닌, 말로 들리는 것처럼 이야기를 썼단 것이다. 그의 이런 의도는, 서사와 대화를 행갈이도 하지 않은 채 문장들을 주욱 붙여 쓴 것에서도 충분히 드러났다. 박민규가 문장을 쓸 때, 마치 콘서트장에서 쿵팍쿵쿵팍, 하면서 입으로 자신의 리듬을 소리 내며 드럼을 두들기는 드러머처럼, 자신의 문장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면서 자판을 두들기지 않을까 하는 상상이 들었다.
둘째는 ‘기만적인’ 캐릭터다. 다른 소설들을 읽을 때 으레 그러듯이 이 작품도 ‘나’가 말하는 대로 졸졸 따라가다가는 맥을 놓치기 십상이었다. 왜 그런고 했더니,. ‘나’가 자신의 감정을 자꾸만 숨기고 위장하려 들기 때문이었다. 예를 들어 섹스를 하고 난 뒤 비대한 아내가 소녀처럼 앵앵거리는 모습을 보고 창밖에서 스포츠카가 부앙 지나는 걸 목격한 주인공이, 스포츠카가 지나갔기 때문에 기하 형을 도와주러가기로 마음을 굳혔다는 대목이 있었다. 사실은 아내가 지긋지긋하고 팍팍한 도시가 징글징글해서 아내와 딸로부터 좀 떨어져 있고 있다는 속셈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때 지나간 게 청소차가 아니라 스포츠카여서 기하 형을 도와주기로 결심했다’는 등의 변명으로 독자를 속이는 것이다. 아무튼 다른 소설들에건 보기가 힘든, 독특한 캐릭터였다. 이상이 무기력한(또는 무력한) 캐릭터로 독창적인 소설들을 여럿 지어낸 적이 있는 만큼 박민규도 아마 이런 캐릭터를 다른 작품들에도 분명히 심어놓았을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의 다른 소설들을, 그래서 나는 읽고 싶어졌다.
세 번째는 비유의 적절함인데, 이건 그저 독특한 점이라기 보단 이 소설의 장점이라고 말하는 편이 나을 듯하다. ‘~처럼’, ‘~같은’ 따위의 비유를, 직업에 맞게, 상황에 맞게, 심리에 맞게 적절히 사용한 데에는 정말 감탄했다. 이를 테면, TV 프로그램 제작회사의 직원답게, 농촌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6시 내 고향>이라고, 운동권이 무어냐는 질문에는 이라고 대답을 내놓는 여직원들이라든지, 외계인을 캠코더로 찍을 때는 빨간 녹화등이 평범한 지구인의 심장처럼 깜박였다든지 하는 표현들은 이야기에 더욱 몰입할 수 있게끔 도와주었다.
그래서 박민규의 황당무계하다시피 한 스토리는 오히려 자연스럽게 읽혀졌다. 박민규를 그냥 읽어서는, 신춘문예 낙선작 정도의 수준으로밖에 보이지 않는다. 그의 작품을 많이 접해보거나 세밀히 읽어야만 그의 진가가 드러난다. 그래서 박민규가 단편이 아닌 장편으로 데뷔했구나, 하고 수긍이 되었다.

그런데 주제에 대해선?
박민규가 황당한 알레고리로 이야기를 풀어갔으니 나도 좀 딴소리를 풀어내야겠다는 필요성을, 나는 이쯤에서 느낀다.
그러니까 어느 날이었다. 서울에서 몇 시간만 가면 완전히 다른 대자연이 펼쳐지듯, 나는 집에서 수십 미터 떨어진 목욕탕에 갔다. 옷가지들을 단지 몇 꺼풀 벗겨냈고, 그랬더니 신기하게도 낯선 알몸이 모습을 드러냈다. 시원함과는 전혀 거리가 먼, 뜨거운 한증막에 들어가 앉았더니, 자연스레 으어, 시원하다, 는 말이 입속에서 소젖 짜듯 뿜어져 나왔다.
뿌연 수증기에 온몸이 잠긴 김에, 그래서 나는 내 마음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내 마음 속에는 참 여러 가지 기억들이 있었다. 이제는 따분하기 그지없는 그 기억들은 한 곳에 모여 있었고, 나는 그 한가운데에 있었다. 그런데 원반들이 낯선 모습으로 다가오더니 내 마음 속을 모두 파괴해버렸다. 어린 시절의 다짐이며 꿈들이 모두 원반 아래쪽에서 뿜어져 나온 빛을 쪼이더니 말라 비틀어져 버렸다. 나는 어떻게 손 쓸 도리가 없었다. 그래서 그냥 넋 놓고 원반이 가는 대로 죽어라 뛰었을 뿐이었다. 드디어 마지막, 원반들은 내게 크롭 서클을 남기고 떠났다.
크롭 서클에는, 도형도 그림도 무늬도 외계어도 아닌, 한국어가 쓰여 있었다.
‘모래시계 뒤집어라.’
몸이 달궈질 대로 달궈져서 나는 명상에서, 그리고 한증막에서 뛰쳐나왔다. 한증막 안에는 나보다 약간씩, 또는 한참씩이나 나이가 많은 어른들이 눈을 감고 앉아 있었다. 평온한 얼굴이었다. 그러나 나는 그들의 마음속도 나와 별반 다르지 않음을 직감할 수 있었다. 마치 외계인의 습격을 굳이 받지 않더라도 어차피 황폐해진 기하 형의 이웃 농가들처럼.
그들의 젖은 머리카락을 헤집어보면 정수리 어딘가에 선명히 찍혀 있는 ㉿ 마크를 발견할 수 있으리라 생각하면서, 나는 기념품과도 같은 식은땀이 흥건히 배어 있는 등허리를 헹구러 샤워기로 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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