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기여 잘 있거라 - 어니스트 헤밍웨이 장편소설 열린책들 세계문학 199
어니스트 헤밍웨이 지음, 이종인 옮김 / 열린책들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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줄거리

 제1차 세계대전이 벌어지자 프레데릭 헨리는 미국인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탈리아군에 입대한다. 그는 중위 계급장을 달고 오스트리아군와 대치 중인 고리치아 마을로 배속되어 앰뷸런스들을 관리한다. 고리치아의 전황은 그리 나쁘지 않았다. 이탈리아군은 느리지만 차근히 전선을 밀어 올렸다. 군인들의 사기도 좋았다. 장교들은 밤마다 모여 술을 마시고 빌라 로사(사창가)에 가서 밤새 쾌락을 즐기곤 했다. 그러다 헨리는 영국 출신의 간호사 캐서린 클라크를 만난다. 그는 게임을 하는 듯한 가벼운 마음으로 그녀에게 접근한다. 만남이 계속되었지만 캐서린은 그에게 좀처럼 마음을, 그리고 특히 몸을 내주지 않았고 어느새 헨리는 그녀를 생각하는 시간이 많아지게 된다. 그러다 한 전투에서 헨리는 박격포탄에 맞아 큰 부상을 입는다. 무릎에 포탄 파편이 박히고 두개골은 골절된다. 그는 밀라노의 미국인 병원으로 후송된다. 마침 캐서린도 밀라노의 미국병원으로 전근을 오게 된다. 헨리는 그 사실을 알고 그녀와 다시 만나기를 고대한다. 마침내 캐서린이 병원으로 오고, 둘은 비로소 한눈에 반한다.

 밀라노에서 그들은 뜨겁게 사랑한다. 두 사람이 사랑에 열중한 결과로, 캐서린은 헨리의 아이를 임신한다. 헨리는 그녀와 결혼하기를 원하지만 캐서린은 전쟁이 끝난 뒤로 결혼을 미루자고 한다. 헨리가 부상에서 회복되는 동안, 그들에게는 전쟁도 전선도 모두 먼 얘기였다. 부상의 대가로 헨리에게 은성무공훈장이 수여되고, 그의 무릎도 차차 나아졌다. 전쟁이 다시 그에게 손짓하고 있었다. 복귀 전 이 주 간의 휴가가 주어졌지만 병실에 술을 몰래 들여와 마신 게 탄로나 휴가가 취소되고, 헨리는 곧바로 전선으로 복귀한다.

 오랜만에 돌아온 고리치아의 분위기는 전과 사뭇 달랐다. 막사는 전과 다름없는 모습이었지만 어딘지 모르게 황폐했다. 전황은 불리하게 돌아갔다. 작년에 숱한 희생을 치르며 울렸던 승전보들이 몇 달간의 패배들로 무효가 되었고, 이제는 전선을 지키는 것마저도 쉽지 않았다. 직속상관인 소령의 얼굴은 늙고 피곤해 보였고, 장교 식당을 가득 메웠던 떠들썩함도 사그라져 있었다. 숙소를 지키는 것은 소령과 그의 룸메이트이자 외과 의사인 라날디 대위, 그리고 사제뿐이었다. 라달니는 자신이 매독에 걸렸다고 끊임없이 의심하면서도 매일 밤 빌라 로사를 찾아가 창녀들에게 몸을 맡긴다. 사제는 여전했지만, 예전처럼 지금도 무력하기는 마찬가지였다. 헨리는 복귀 다음날 최전선의 응급구호소로 배치된다.

 때맞춰 오스트리아군의 공격이 거세진다. 본부에서 퇴각이 결정되고 헨리는 앰뷸런스들에 병원의 물자를 싣고 다음 집결지로 옮기라는 임무가 주어진다. 헨리는 운전병들과 함께 후퇴하지만 퇴각 병력과 피난민들로 도로가 꽉 막혀 움직일 수 없었다. 헨리는 샛길을 뚫어 가기로 결정하지만 결국 차들을 모두 잃고 만다. 몸만 살아서라도 집결지로 향하려 하지만, 같은 이탈리아군 헌병들의 검문에 걸리고 만다. 아무런 잘못이 없음에도 부대에서 이탈했다는 죄로, 또는 이방인 출신이라는 이유로 장교들을 사살하는 장면을 목격하고 헨리는 심문을 받기 직전 강물에 뛰어들어 탈출한다.

 이탈리아군에게도, 오스트리아군에게도, 독일군에게도 모두 쫓기는 탈영병의 신세가 된 헨리는 오직 캐서린을 보겠다는 일념으로 밀라노에 도착한다. 캐서린은 밀라노를 떠나 스위스 근처의 호반도시에 있었다. 헨리는 그곳에서 캐서린과 재회하고, 둘은 호수를 건너 스위스로 도주한다. 스위스에서 그들은 누구와도 관계 맺지 않고 둘만의 시간을 보낸다. 전쟁이니 전선이니 하는 것들은 모두 먼 얘기였고, 멀 뿐만 아니라 오래된 얘기였다. 둘은 산골에서 겨울을 나고 아이를 낳기 위해 도시로 나간다. 평온한 날들의 끝에 기다리고 있는 출산이 그들은 다시 초조하게 만들었지만, 이번에야말로 두 사람을 가르는 것은 없으리라고 믿었다. 진통이 시작되고 캐서린은 병원에 입원한다. 난산 끝에 제왕절개수술로 아이를 낳는 데에는 성공하지만, 아이는 탯줄에 질식한 뒤였고 캐서린 역시 출혈이 멎지 않아 숨을 거둔다. 헨리는 병원을 나와 홀로 비를 맞으며 호텔로 향한다.

 


감상

 유난히 힘든 연말을 보냈고, 해를 넘겨 처음 집은 책이 하필이면 헤밍웨이였다. 정초부터 헤밍웨이를 읽고 허무해지는 마음을 다잡을 수 있을까, 걱정하면서 나는 책장을 넘겼다. 사실 그리 허무할 것도, 허망할 것도, 그러므로 무너질 건덕지도 애초에 없었다. 어렸을 때는 헤밍웨이가 뭐 그리 대단하다는 것인지 알 수 없었다. 소설은 재미있었지만, 읽는 재미로만 치면 그에 못지않은 작가들도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제 나이를 먹어가면서 불가해의 영역이었던 헤밍웨이가 서서히 이해되기 시작한다. 어쩌면 나이를 먹어서가 아닌지도 모르겠다. 나이가 헤밍웨이를 이해하고 이해하지 못하고의 기준일 리는 없을 터이다. 아마도 헤밍웨이가 전혀 이해되지 않던 시절, 나는 승리하고 있는 이탈리아군의 심정을 느끼고 있었던 것 같다. 지금은 어서 빨리 빌어먹을 놈의 전쟁이 어떤 식으로든 제발 끝나기만을 바라는 패잔병의 입장이기 때문에 그의 작품을 이해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패배해야만 이해할 수 있는 것, 그것이 헤밍웨인가보다.

 이 소설을 읽으면서 나는 내 삶이 파멸했다는 사실을 진심으로 인정하기 시작했고, 그러자 놀라운 일이 벌어졌다. 패배한 삶은 곧 죽음이나 다름없을 것이라는 이전의 짐작과 달리, 놀랍게도, 정말 놀랍게도 삶은 파멸하기 전이나 후나 다를 바 없이 계속되었던 것이다. 나의 이런 고백이 어쩌면 <문학적 허영>처럼 들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건 진심어린 고백이고, 허영과는 거리가 먼 <생물학적 진실>에 가깝다. 그렇지 않다면, 헨리는 어째서 캐서린의 죽음 이후에 삶을 향해(정확히는 호텔을 향했지만) 걸어갔겠는가? 세상은 무너지지 않는다. 왜냐하면 패배하기 위해선 다른 한 편에 승자가 있어야 하는데, 승자의 삶은 굳건하기 때문이다. 헨리의 대척점에 서 있는 승자가 누구인지는 분명치 않지만, 어쨌든 삶은 승자에게도 패자에게도, 혹은 전쟁을 땡땡이치고 몰래 빠져나온 헨리 같은 사람에게도 계속되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어떤 방식으로든 삶을 살아내기로 결심했다. 물론 그것은 긍정적인 마음가짐에서 우러난 것은 아니다. 오히려 체념에 가까울 것이다. 그저, 살아갈 뿐이니까. 그러나 살아갈 뿐인 삶이라고 해도 <살아가야할 삶>이나 <살아가고 싶은 삶> 따위와 다른 삶은 아닐 것이다. 그것들은 모두 삶이라는 이름 속에서는 보잘것없는 차이점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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