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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 - 명문가 고택 편 ㅣ 이용재의 궁극의 문화기행 시리즈 3
이용재.이화영 지음 / 도미노북스 / 2011년 8월
평점 :
품절
나는 온 동네가 일가 친척인 서부 경남의 이씨 집성촌에서 태어났다. 우리 집은 종가도 아니고 더구나 아버지가 둘째 아들이라 제사도 없었다. 그렇지만 큰집이 종가여서 자주 큰집으로 제사를 지내러 갔다. 어린마음에 제삿날은 축제날이었다. 평소에 잘 먹을 수 없는 음식들을 먹을 수 있고, 손님도 많이 오기도 했으니말이다. 그리고 설날이나 추석엔 큰집에서 처음으로 제사를 지내고 나면 다음 다음집으로 옮겨다니면서 가장 먼 친척집까지 온동네를 돌면서 제사를 지냈다. 어린 마음에 정말 재미있는 놀이가 아닐 수 없었다. 그리고 마을에 있던 제실은 우리들의 호기심을 한껏 자극하는 집이었다. 제실 주위의 나무들 화단, 담벼락 등은 숨바꼭질을 할때에 숨기에는 참 좋은 장소였다. 그러나 제실은 무서운 장소이기도 했다. 마을에서 제일 신성한 곳이기도 했으니 어른들이 일부러 귀신 나온다며 아이들의 접근을 막았던 것같기도 하다. 산에 올라가 마을 전체를 조망하면 기와집 초가집들이 옹기종기 아늑하게 자리잡아 또 하나의 자연이 된 듯한 모습이었다. 도시로 이사를 하고 마을도 새마을 운동이다 뭐다 하면서 예전의 모습을 많이 잃어버렸지만 아직도 제실은 그대로 남아있다.
이용재의 [고택에서 빈둥거리다 길을 찾다]를 읽으면서 향수에 젖었다. 작가가 빈둥거린 고택들은 세월을 더하면서 많은 풍파를 겪어냈고 이야기를 보탰을 것이다.
고택들은 절집이나 고궁처럼 화려한 단층이 없어서 한결 더 단아하고 자연스러우면서 아름답게 느껴진다. 우리조상들은 예로부터 집을 지을때는 풍수지리를 많이 따진다. 이것이 바로 자연과의 조화를 존중하고 순리를 거스러지 않는 조상들의 정서가 아니겠는가. 이러한 우리 조상들의 생각이 고택에 고스란히 남아있는 것 같다. 거기에다 고택엔 그 집을 짓고 살다간 조상들의 숨결이 남아있으니 더욱 정이가는 가보다.
이용재 작가의 [딸과 함께하는 건축여행]을 읽을때도 참 재미있게 읽었다. 작가의 유머가 글에 잘 녹아있었고 건축에 관련된 역사나 인물들을 상세하게 기술해 줘서 건축물을 보는 눈을 다르게 만들어줬다. 이 책에서 작가는 고택에서 빈둥거렸다고 했는데 내가 보기에는 절대 빈둥거리지 않았다. 집을 이룬 아주 사소한 것까지 아주 세밀하게 살피고 기록하고 찾아본 것이 눈에 읽힌다. 더구나 집에 관한 것뿐아니라 그 집에 살았던 인물들의 면면이나 이력이나 사상뿐아니라 후손에 관한 것까지 헛투루 본 것이 없다. 독자들을 위해서 집주변의 잡기들까지도 상세히 기술해 줘서 끝까지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작가가 일부러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말을 아주 짧게 해서 처음엔 메모를 읽는 느낌이었다. 그런데 짧은 말 덕분에 좀더 많은 정보들이 머리에 팍팍 박히는 느낌도 들었다.
작가는 선비들이 살다간 선비정신이 깃든 고택에서 빈둥거리다 어느새 선비가 되어가고 있는 듯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