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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산도 하늘길
한승원 지음 / 문이당 / 2024년 11월
평점 :
시절이 하수상하고 늦은 김장을 하려다보니 이제야 서평을 쓴다. 손암 정약전 선생에 대해서는 익히 알고 있었다. 소설[자산어보]도 읽었고, 영화도 보았다. [정약용과 그의 형제들]과 [파란]에서도 소개 되었으니 모를 수가 없다. 하지만 양심상 [흑산도 가는길]을 읽지 않고 서평을 쓸 수는 없었다.
오늘에서야 [흑산도 가는길]을 다 읽었다. 정약전은 정약용의 둘째 형이다. 세째 형 약종은 신유박해 때 순교했다. 정약종은 우리나라 자랑스러운 천주교 성인이 되었다. 정약전과 정약용도 천주교를 믿었지만 배교했다. 정조가 죽고 대왕대비가 수렴청정을 하면서 조선의 천주교를 박해했다. 유교의 나라에서 부모의 신주를 불태우고, 제사도 지내지 않겠다고 하는 천주교를 받아들일 수 없었을 것이다.
우리나라의 천주교는 [서학]이라는 학문으로 먼저 받아들였다. 지배층에서부터 믿기 시작해서 민중에게 퍼져나갔다. 더구나 선교사가 와서 전파한 것이 아니라 서학을 공부한 선비들에 의해서 자생적으로 신앙이 일어나서 자리잡았다. 전 세계에 유래를 찾아볼 수 없는 경우다. 그래서 우리나라 신부님이나 수녀님들은 바티칸에 가면 어깨가 으쓱해진다고 한다. 자발적으로 믿었다는 것은 엄청난 것이다. 더구나 여러차례의 박해를 거치면서 순교자들이 넘쳐났다. 목숨을 바쳐서 신앙을 지켜낸 것이다.
정약전는 초기 천주교를 받아들여 전파시킨 선비들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물론 살기위해 배교하고 흑산도에 유배되었지만 말이다. 신학문으로 공부했던 [서학]이 온 집안을 풍비박산나게 하고 자신 또한 절해 고도에 귀양가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않았을 것이다.
다산 정약용은 귀양지 강진에 자리잡고 학문연구와 후학을 양성하는데 집중했다. 다산과 여러 면에서 더 자유로운 영혼이었던 손암 정약전은 훨씬 서민적인 삶을 살았다. 물론 서울에서 더 먼곳인 흑산도로 유배되어 그곳 아전들과 수군들의 시야를 벗어날 수 없었지만.
중국 송나라의 유학자 정호(程顥)와 정이(程頥) 형제와 비슷했던 것 같다. 형인 명도선생(정호)는 호방하고 여러 학문을 두루 연구하였지만, 동생 이천선생(정이)은 매우 꼼꼼하게 정통 학문만 판 경우이다.
정약전이 명도선생과 비슷하여 흑산도 사람들과도 격이없이 어울리고, [현산어보]를 집필한 것이 정통 학문에 벗어났지만 매우 값진일이다.
첩으로 맞아들인 거무라는 여인에 대해서는 자세한 내막을 모르겠다. 하지만 절해고도에 혼자 남겨진 정약전이 얼마나 외로웠겠는가? 첩을 맞아 들인 것은 그 시대에는 부끄러운 일이 아니었으니 내가 평할 일은 아닌 것 같다.
다만 죽음의 원인 된 술과 더불어 살았다니, 어린 자식들과 젊은 첩에게는 정말 무책임한 가장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천주교 신자인 나는 천주교라는 명품 종교를 우리나라에 받아들여준 정약전 같은 선조들에게 감사할 따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