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 남쪽의 반공주의를 자극하고 유도하는 행위를 계속하는 북쪽의 저의는 무엇입니까? 모든 정치행위에는 반드시 목적이 있게 마련인데, 저는 오래 전부터 북쪽이 노리고 있는 그 목적이 무엇인지 알고자 하고 있습니다. 남쪽의 반공주의를 강화시켜 가며 북쪽이 정치적으로 얻는 이득이 무엇일까 하고 신경을 집중시켜 왔습니다. 그동안 한 가지 사실은 확실히 알았습니다. 남쪽의 반공주의가 분단을 강화해 나가듯이 남쪽의 반공주의 강화를 유도하고 있는 북쪽도 분단의 벽을 쌓아올리는 데 열중할 뿐 진정으로 민족통일을 이룩할 뜻이 없다는 걸 말입니다.

‘박정희 맹신자들’이라는 말이 있었다. 자나깨나 경제건설을 주창하고, 정치행위의 모든 갈등이나 모순도 경제건설이라는 미명으로 합리화시켜 버리는 것이 ‘박정희교’라는 것이고, 그 논리를 무작정 추종하며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그 타당성을 역설해대는 자들을 맹신자라고 이름붙였다.

"하늘을 나는 새가 허공에 그 발자국을 새기지 못하듯이 인간사 그 무엇이 영겁 속에 남음이 있으랴."
언젠가 읽었던 불경의 말씀이었다. 불경은 역시 진리의 바다고, 석가모니는 비교할 자 없는 지고한 현자였다. 그 허무의 철학은 극점에 이른 미학이고, 이론을 제기할 수 없는 결과론이었다. 그러나 인간 군상들은 나날의 생활 속에 묻혀 현실만 크게 볼 뿐 그 허무의 가르침을 쉽게 망각해 버렸다. 그 허무의 가르침의 핵심은 현실을 작게 보고, 과욕을 줄이라는 것이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순식간에 온몸이 불길에 휩싸인 전태일은 큰길로 뛰쳐나가고 있었다.
「근로기준법을 준수하라!」
불길 속에서 전태일이 외쳐댔다.
「우리는 기계가 아니다!」
노동자들을 향해 뛰는 불길이 외쳤다.
「내 죽음을 헛되이 말라아!」
더 거세게 휘돌고 너울거리는 불길 속에서 울부짖는 목소리가 갈라지고 있었다.
전태일은 불길과 싸우며 무슨 구호를 또 외쳤다. 그러나 입에서는 말 대신 허연 연기가 뿜어져 나왔다. 또 외쳤다. 역시 허연 연기만 한 줄기 뿜어져 나왔다. 그리고 그는 불길과 함께 쓰러졌다.

「꼬트작거리는 게 뭐예요?」
미용사가 해맑게 흘러내리는 개울물에 손을 씻으며 천두만을 쳐다보았다.
「이? 꼬트작이 꼬트작이제 머시여? 가만있거라……, 긍께 그것을 서울말로 머시라고 혀야 쓸끄나?」 천두만은 고개를 갸웃갸웃하며 담배에 불을 붙이고는, 「그것이 긍께로……, 거 머시냐……, 무신 속상허는 일로 맘얼 편케 묵덜 못허고 지 속얼 비비꼬고 비비틀고, 찰떡 방애 찧디끼 지 속을 지가 짓이기는 것이여. 긍께로 지 성질에 몸꺼정 상허는 것이제.」 그는 힘겹게 설명하고는 담배연기를 후우 내뿜었다.

다시 말하면, 우리 경상도가 이렇게 잘살게 된 건 누구 덕이냐? 다 각하 덕이다. 왜냐하면 각하께서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1차, 2차 단행하시면서 덕을 제일 많이 입히신 데가 우리 경상도 아니냐. 부산, 대구를 양대 중심으로 해서 발전시키는 것은 더 말할 것 없고, 울산을 개발했고, 마산에 수출자유지역을 만들었고, 경부고속도로를 개통하지 않았느냐. 다 이런 혜택으로 딴 데보다 더 잘살게 된 것이니 우리가 어떻게 해야 되겠느냐? 폐일언하고 우리가 한 사람도 빠짐없이 똘똘 뭉쳐 또다시 각하를 찍어 대통령으로 받들어야 한다. 만약에 우리가 힘을 합치지 않아 불행한 사태가 벌어지면 어떻게 되느냐. 지금까지 누렸던 그 모든 혜택이 다 전라도땅으로 가버린다. 여러분, 이런 사실들을 명백하게 주지시켜야 한다 그겁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태일은 고생고생하는 어머니를 생각하고, 제대로 배우지 못한 동생을 생각하면 하루라도 빨리 그런 꿈을 이루고 싶기도 했다. 약한 몸으로 행상을 하는 어머니를 편히 모시고 싶었고, 동생도 대학까지 보내주고 싶었다. 중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한 자신처럼 만들고 싶지 않았다.
그러나 그런 마음은 오래가지 않았다. 그동안 자신이 겪어왔던 사람들의 얼굴이 떠오르면서 그런 마음은 뒤집어지고 말았다. 자신은 그 사장들을 사람으로 취급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은 그들을 부러워하고, 그들처럼 되기를 바라고 있었다. 그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그는 순간적으로 유혹에 빠진 자신을 다잡았다.
그는 어떤 때 자신이 그 사장들과 똑같이 공원들을 부려먹을 수 있을까 솔직하게 생각해 보았다. 그러나 그렇게 할 자신이 없었고, 그런 짓을 해서 잘살고 싶지 않았다.
그런 못된 짓을 해서 혼자만 잘살고 싶지 않은 마음. 그 마음은 언제나 다른 마음을 이겨내고 무찔렀다. 서울시청 근로감독관을 만나고 와서도 아무런 효과가 없었지만 다시 노동청을 찾아갔던 것은 그 마음이 시킨 일이었다.
사람은 기계가 아니다. 모두가 사람답게 일하고, 다같이 사람다운 대우를 받아야 한다. 사람은 누구나 평등하다…….
이 변함없는 생각이 노동청으로 발길을 이끌어갔다. 그러나 노동청의 불친절과 냉대도 시청과 다를 것이 없었다. 아니, 조금은 나았다고 할 수 있었다. 노동청에서는 ‘실태조사’라는 것을 한 번 나오기는 나왔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실태조사라는 것이 정반대의 결과로 나타났다. 근로조건을 개선하라는 노동청의 지시는 한마디도 없는 채 평화시장 일대에 ‘위험분자 전태일’이라는 소문이 삽시간에 퍼졌다. 그 소문은 바로 집단따돌림으로 연결되어 더는 일자리를 구할 수 없게 되고 말았다.

삼각산으로 들어서며 전태일은 거대한 바위로 된 두 개의 봉우리를 응시하고 있었다. 저 봉우리의 단단함으로……, 저 봉우리의 굳건함으로……, 저 봉우리의 불변함으로……, 그는 이 다짐을 스스로의 가슴팍에 새겨넣고 있었다. 그러면서 그는 전신이 떨리는 이상한 예감에 사로잡히며 절실하게 기도하고 있었다.
나를 버리고, 나를 죽이고 가게 하여주십시오. 약한 저를 도우소서.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6·25 참전 16개국 중에서 아직도 태국군과 터키군과 미군들이 주둔하고 있는 우리의 현실에서 미군들의 횡포는 너무나 심합니다. 최근 2년 동안에만 해도 린치사건이 대여섯 건이 넘었습니다. 신문에 난 것만 이런데 신문에 나지 않고 덮인 것들까지 다 합하면 그 수가 얼마이겠습니까. 이건 보통 심각한 문제가 아닙니다. 우리는 더 이상 이 문제를 묵과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예, 미군들의 린치사건은 우리 국민 전체를 모독하는 행위이고, 우리 민족의 자존심을 짓밟는 만행이 아닐 수 없습니다. 그 문제를 묵과해서도 안 되고, 방관해서도 안 되는 건 분명한데, 우리 앞에 가로놓인 큰 난관이 문제입니다. 그건 다름이 아니라 미국이나 미군 문제로 항의를 하거나 데모를 하게 되면 그 이유는 불문하고 무조건 반미로 몰고, 반미는 곧 용공으로 둔갑하는 게 우리의 현실입니다. 쿠데타 이후 미국과의 관계를 우방으로는 모자라 혈맹이라고 강조해 대고 있는 상황에서 이 난관을 어떻게 피하면서 우리의 목적을 달성할 수 있을지 문제 아니겠습니까? 무슨 묘안이 없을까요?」
「예, 그 견해는 백 번 옳습니다. 그러나 반공을 국시의 첫 번째로 삼고 있는 한 그 그물을 무사히 피해갈 수 있는 묘책이나 묘안은 아마 없지 않을까요. 우리의 주장이 옳고 명분이 당당하면 정면으로 밀고 나가는 길밖에 없을 것입니다. 모든 저항과 투쟁에는 억압이 따르게 마련이고, 거기서 야기되는 고통과 상처는 오히려 더 영광스러울 것입니다. 그 교훈은 4·19혁명이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우리는 4·19정신으로 재무장하고 투쟁에 나서야 할 것입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늘에 걸고 마음을 다짐하던 여자는 마침내 스스로를 개딸년으로까지 낮추었다. 그건 가난한 시골사람들이 자기 진실을 나타내는 가장 강하면서도 최후 단계의 말이었다.

여러 가지 열매들 중에서 가을빛을 가장 민감하게 빨리 드러내는 것이 유자였다. 대나무와 잎차가 그렇듯이 유자도 무덥고 습기 많은 남도 특유의 과실 중의 하나였다. 유자의 그 향기가 짙고 깊으되 고상하고 담백하여 예로부터 무척 귀하게 여겼으나 그 생김은 지극히 소박하다 못해 볼품이 없을 지경이었다. 그래서, ‘유자는 얽었어도 선비 손에 놀고, 탱자는 잘생겨도 거지 손에 논다’는 말이 생기기도 했다. 유자의 뒤를 이어 탱자·모과·석류·감이 9월 중순의 가을빛에 서서히 물들어 가고 있었다. 그 즈음부터 새를 쫓는 아이들의 긴 외침과 돌 담긴 깡통들이 짤랑거리는 소리가 들녘에 가득했다.

「베풀고 베풀어라. 그리고 베풀었다는 그 일 자체를 잊어버려라.」
이 세상을 참답게 살고 다음에 극락왕생하려면 물질이든 마음이든 끝없이 베풀어야 하는데, 그 자비행이 참으로 결실을 맺게 하려면 도와준 일을 다 잊어버리라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도움받은 사람이 도움받은 것을 잊고 있을 경우 도와준 사람이 도와준 것을 기억하고 있으면 당연히 배신감을 느끼게 되고, 그 배신감은 미움이 되고, 미움은 새로운 번뇌가 되어 지난날의 순수한 자비까지 망치게 되기 때문이라 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