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사 한 사람이 책을 보다가 반도 못 보고는 땅에 던지며 말했다.

"책만 덮으면 바로 잊어버리는데, 본들 무슨 소용인가?"

현곡 조위한이 말했다.

"사람이 밥을 먹어도 뱃속에 계속 머물려 둘 수는 없다네. 하지만 정채로운 기운은 또한 능히 신체를 윤택하게 하지 않는가.

책을 읽어 비록 잊는다 해도 절도 진보하는 보람이 있을 것일세" 말을 잘 했다고 할 만하다.

 

이익 <성호사설> 중 - 조현곡(趙玄谷) - 에서

 

 

밥을 먹으면 입을 거쳐 위장과 대장을 지나는 동안 영양분은 몸으로 스며들고 찌꺼기는 대변으로 배출된다.

책을 읽으면 눈과 입을 통해 머리와 가슴을 거치는 동안 그 의미를 곱씹고 되새긴다. 나머지는 기억의 창고에서 흔적도 없이 지워진다.(...중략...)

육신의 기름기만 생각하고 영혼의 허기는 돌아보지 않는다.

배고프면 아무데나 주둥이를 들이미는것은 짐승도 다 그렇다. - 본문 41~42쪽

 

 

 

 

 

 

"책만 덮으면 까먹는 데 뭐하러 읽나?" 라는 말을

"돌아서면 배고픈데 밥은 왜 먹냐"라는 말로 비유한 글입니다.

밥을 먹으면 영양분은 몸으로 스며들고 찌꺼기가 대변으로 배출되듯이

책을 읽으면 곱씹은 뜻은 머리와 가슴에, 나머지는 기억에서 잊혀집니다.

제대로 먹지 못하면 몰골이 초라해지는 데 반해, 책은 읽지 않아도 겉으로 드러나는 게 없습니다.그래서 사람들은 읽지 않습니다.

특히나 요즘같이 뭔가를 "보여주는"세상에는 더욱 더 그러하지요.

 

독서는 학창시절의 공부와 많이 다릅니다.

순수한 몰입입니다. 정민 작가는 무엇을 위한 독서가 될 때, 목적을 전제로 하는 독서로는 거둘 것이 없다고 말합니다.

그 독서는 입만 열면 현하(懸河)의 열변을 토해내도, 산지식이 아니라 죽은 지식이고 내 가슴속에 아로새겨지지 않는다고 합니다. 그러니까 삶을 변화시키지 못한다고 합니다.

우리 사회에서 학습능력이 좋은 사람들이 얼마나 그 무기를 엉뚱한데 썼는가를 돌이켜 보면

학습능력과 인성이니 덕성은 반대로 가기 일쑤지요.

 

 

 

 

책을 읽는 이유에 대해 고금의 작가들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많은 의견을 내놓습니다.

몇 가지의 이유로 압축되지요.

그런데요. 

여러가지 이유 중에 전 솔직히  "순수한 몰입에의 쾌감"보다 더 큰 이유는 없었던 것 같습니다.

지금도, 앞으로도요. 여러분은 어떠신가요? 아마도 공감하시는 분도 아닌 분도 계실껍니다.

마치 영양가 있고 맛있는 음식이 입안으로 들어오면 쾌감을 느끼고 서서히 배가 부르듯이,

깊고 중후한, 아주 논리적이고 흡입력 있는, 때론 경쾌하고 산뜻한 문장들을 만나면 짜릿한 쾌감을 느끼고 뿌듯해집니다.

그 문장이 내가 당장 써 먹을 수 있는 실용적 지식이 아니더라도 뭔가 충만한 느낌을 얻지요.

이처럼 성호 이익선생이 말씀하신 "영혼의 허기"는 목적이 없는 순수한 몰입의 독서로만 채울 수 있을 것 같네요.

 

 

 

 

 

 

 

 

 

 

 

아래는 김정운 교수의 책 <에디톨로지>를 읽다가 정민 교수 이야기가 나오는 대목을 발췌했습니다.

 

 

"나는 요즘 한양대 국문과의 정민 교수가 그렇게 부러울 수가 없다. 신문에 연재하는 내용이나 출간하는 책을 보면, 참 고수다. 틀에 박힌공자, 맹자 이야기가 아니다. 내 연배에서 그 정도 수준을 유지하는 이는 드물다. 그에 비하면 내 성과물은 참 우울하다. 그다지 겸손할  이유가 없는 나지만 그의 저작물을 보면 기가 많이 죽는다. 그에게는 동양고전이라는 해석의 근거가 무한하다. 고전을 다룰 줄 아는 이는 기본적으로 한 자락 깔고 들어가는 거다."

- 7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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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다이제스터 2021-01-11 23:22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독서 후 내용이 기억나지는 않지만 내용은 무의식으로 간다고 생각합니다. 무의식이 무의식적으로 의식을 결정한다고 생각합니다. ^^

북프리쿠키 2021-01-12 20:10   좋아요 1 | URL
오~ 좋은 문장이네예..ㅎㅎ
우리 의식의 상당부분을 차지하는 무의식이라는 놈을.무시해선 안되겠네요..^^;

페넬로페 2021-01-11 23:39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네이버 열린연단에 정민선생이
강의자로 나오셨어요~~
직접 가서 강의 들었는데
그분의 박학다식에 너무 놀랐어요^^
그 어떤 질문에도 어쩜 그렇게 대답을 잘 하시는지^^
팬이 됐어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11   좋아요 2 | URL
아..정민 선생 강의는 한번도 들어본적 없는데..강의 잘 하시나봐요..
페넬로페님이 팬이 되셨다니..저도 궁금한걸요..추천 감사드립니다. 한번 들어봐야겠습니다..^^;;

han22598 2021-01-12 02:4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의 독서의 형태는 몰입이 아닌 산만형이긴 하지만, 책을 읽는 시간이 그저 좋더라고요.^^

북프리쿠키 2021-01-12 20:12   좋아요 2 | URL
훔..한님..말씀도 참 멋지네요..
꼭 몰입이 안되더라도..그 시간이 그저 좋다는 말씀..
근사한 말입니다..^^:;

cyrus 2021-01-12 10: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읽은 책 내용이 생각나지 않으면 그 책을 다시 읽으면 됩니다. 기억이 나지 않는다면서 내 기억력을 탓하기 보다는 새로운 마음으로 책을 읽으려고 해요. ^^

북프리쿠키 2021-01-12 20:14   좋아요 1 | URL
그러네요..시루스님.
블라디미르 나보코프 옹께서 재독의 중요성을 깨우쳤는데..
그 실천이 참 어려운 것 같아요..
까먹으면 또 새로운 마음으로 읽자는 마음가짐이 좋으네요..^^:

레삭매냐 2021-01-14 11:0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 전에 땡겨 놓은 정민 선생님의
책, 읽어야 하는데... 어디에 두었는
지도 모르겠네요 에휴 -

북프리쿠키 2021-01-14 11:32   좋아요 1 | URL
저도 킵해놓은지 어언 몇년된건데 무심코 펼쳐보다가
저 꼭지가 마음에 들어 포스팅했네예. 이런거보면 책은 재놓고 읽는게 맞네예 ~ 언능 찾아내시길^^

페크pek0501 2021-01-15 12:5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가 요즘 재독하고 있는 소설- 세계문학이 있는데 진짜 처음 읽는 것 같아서 황당하더라고요.
결말 부분만 기억 나고 전부 처음 읽는 것 같았어요.

북프리쿠키 2021-01-17 10:24   좋아요 1 | URL
개인적으로 재독 중에서도 소설을 재독하는 게 제일 어려운 거 같아요..ㅎㅎ
전부 처음 읽는 것 같아 신선했겠습니다..~
상당수 문학은 제목도 정확히 기억 안나는게 많았습니다..^^;;

재독에 관해서 제가 좋아하는 문장 그대로 옮겨놓겠습니다.

나보코프가 말했다 ˝이상한 말이지만 사람은 책을 읽을 수 없다. 다시 읽을 수 있을 뿐이다. 좋은 독자, 일류 독자, 능동적이고 창의적인 독자는 재독자다˝ - 문학동네판 <롤리타 545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