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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학혁명의 구조 ㅣ 까치글방 170
토머스 S.쿤 지음, 김명자 옮김 / 까치 / 2002년 11월
평점 :
구판절판
고등학생들에게 과학추천 도서목록이 주어질 때 항상 들어있는 책 중 하나가 바로 '과학 혁명의 구조'라 할 수 있다. 지금 소장하고 있는 책도 내가 고등학생이던 2000 년 판형인 것을 보면 어렵지 않게 증명할 수 있다. 하지만 왜 8년이나 지난 지금에 와서야 이 책을 읽게 되었나를 가만히 생각해보면 그 추천도서라는 게 이해가되질 않는다. 당시에도 채 한 장의 에세이도 읽지 못하고 책꽂이에 넣어둔 기억이 있다. 그 이후에도 몇차례나 완독을 시도했지만 쉬이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제 와서야 처음으로 책을 제대로 읽을 수 있었다. 아니, 제대로라는 말을 하긴 힘들 것 같다. 300 페이지 분량의 책을 읽는데 3주나 걸린데다 지금도 책의 내용이 뭔지 헷갈리는 정도라면 설명이될까. 그러면 26살 나이먹고 고등학교 추천도서 읽고 머리에 과부하가 걸려버리는 나는 비정상인가.
예전에 비슷한 일을 경험했을 때는 비정상이라든가 소양이 부족한 탓이라고 결론지었던 기억이 있다. 하지만 책을 적게 읽는 것도 아니고 그 책들이 모두 쉬운 책들도 아닐 뿐더러 책들을 이해하는 데 어려움이 있는 것도 아닌데 왜 유독 이런 류의 책에서만 과부하가 걸리는가에 대해서 다른 생각을 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이른 결론은 결코 나의 소양이 부족함도 아니요, 얇팍한 책읽기를 줄곧해온 덕도 아니라는 것이다.
그 이유야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학자 특유의 고지식함을 꼽고 싶다. 책을 어렵게 쓰는 것이 곧 자신의 지식을 나타내는 잣대는 아니다. 물론 책의 독자층에 따라 여러 전문용어나 쉽지 않은 표현이 나올수는 있지만, 적어도 대중을 위해 씌여진 에세이 형식의 책이라면 자랑삼아 쓰는 책이라는 표시는 낼 필요 없다. 독자들 중에서 몇이나 뉴튼이나 아리스토텔레스,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책을 이해할 수 있는 정도의 기본 지식을 가지고 있는 궁금할 따름이다.
또 다른 이유로는 앞에서도 얘기했지만, 배경지식의 부족함을 들 수 있다. 이 책을 읽기 전에 뉴튼이나 아인슈타인에 대해서 공부를 좀 했다면 그의 생각을 이해하는 데 어렵지 않았을지 모른다. 다만 그 깊이가 고등학교 교육에선 쉬이 알 수 없는 정도에 이르는데다 기본적인 설명없이 당연한 듯 설명하는 태도는 독자로 하여금 오래안 가 책을 덮게 만드는 이유를 제공한다.
마지막 이유는 -개인적으로는 가장 큰 이유라 생각되는데- 번역의 전문성이 부족하다는 거다. 이 책을 번역하신 분은 관련된 학문을 계속 연구하신 학자다. 학자로서의 업적은 어떤지 모르지만 번역자로서의 능력은 최악인 것 같다. 맞춤법을 틀리게 쓰는 것은 예사로 하고 - 내가 읽은 책은 초판도 아닌데다 2쇄까지 된 판본인데 어떻게 밥먹듯 맞춤법이 틀리는지 모르겠다- 앞뒤 문맥이 맞지 않거나 논리적으로 전혀 맞지 않는 서술이 툭툭 튀어 나온다. 과학 책이 아니라 국어 오류사전을 보고 있는 느낌이다. 책의 본문은 이해가 잘 되지 않다가 막바지에 있는 역자 후기에 가서야 책을 이해할 수 있었다면 절반은 원작자의 책임이지만 나머지는 역자의 책임이다. 어쩌면 한글로 의사를 표현하는 것은 자연스러우나 번역에는 자신이 없었을지도 모른다. 이공계처럼 국내 서적보단 원서를 더 많이 봐야하는 학문의 경우, 학생들 사이에선 해석이 안 되는 한이 있어도 원서를 보는 경우가 많다. 오히려 엉터리인 번역을 보는 것보다 잘못된 해석을 하는 편이 낫기 때문이다. 매번 공염불에 그치는 전문 번역인의 양성을 심히 고려해봐야할 시점이 아닌가 생각한다.
첫머리에 얘기했듯이 이 책은 고등학생들의 필독서가 되어버렸다. 쿤이 주창했던 패러다임이라는 개념이 이미 일반화되어 사용되듯이 앞으로 나라를 이끌어갈 고등학생들에 꼭 필요한 책임은 부정할 수 없다. 하지만 대뜸 이런 책을 읽으라고 내어놓는 것은 도대체 이해가 안 된다. 1%도 안 되는 학생만이 이해할 수 있을 정도의 책을 추천도서라 내놓는 건 무슨 생각일까. 어려운 책을 내놓으면 알아서 배경되는 책들은 찾아보라는건가. 교과서에선 F=ma 만 가르치면서 뉴턴 방정식이 나온 배경의 완벽한 이해를 바라는 건 뭔지 모르겠다.
이 책이 그들에게 필요한 책임은 분명하다. 분명 논란이 있는 사상이지만 배울 점이 있다. 그렇다면 번역서만 내놓을 것이 아니라 청소년들이 볼 수 있는 해설서도 내놓아야 한다. (물론 좋은 번역이 선행되어야 한다.) 그리고 책만 추천하고 끝날 것이 아니라 그에 걸맞는 교육을 해야한다. 그런 뒤에야 다른 어려운 책으로 가지를 쳐 나갈 수 있는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