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토록 아름다운 세 살
아멜리 노통브 지음, 전미연 옮김 / 문학세계사 / 200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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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통의 책을 여러 권 읽으면서 생각한 것이 '다음에 노통의 책을 읽을 때는 최대한 나의 생활에 빗대어보자' 였습니다. 그만큼 그녀의 작품은 하나하나가 매우 단순한 듯 하지만 그 이면에는 매우 난해함이 묻어나는 것이 사실이죠. 그런 한 가지 이유 때문에 노통에 대한 열렬한 팬이 생기는가 하면 노통의 책을 다시는 읽지 않겠다는 무리가 생기기도 하는구나 싶더군요. 물론 저는 전자의 무리에 속하는 사람이지만 가끔 노통의 소설을 읽으면서 '역겹다' 라고 생각할 때가 종종 있습니다. (표현이 적절한지에 대해서는 딱 맞는 표현을 찾을 수가 없어서였다는 핑계를 댈 수밖에 없겠군요.) 이러저러한 이유로 노통의 책을 읽을 때는 -쉽게 생각하기 위해- 개인적인 생활에 노통의 소설에서 나오는 주인공의 생활을 빗댈 수밖에 없더군요. 그게 짧은 지식을 소유한 사람으로서 취할 수 있는 가장 합리적인 방어기재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책도 같은 방식으로 읽어나가기 시작했습니다. 종교를 믿는 입장에서 神에 대해서 너무 쉽게 얘기는 하는 것이 눈에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런 것은 부차적인 것으로 치부하고 넘어갔습니다. (작가가 얘기하려는 게 거기에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그리고 3살까지의 저의 기억을 더듬어 보려고 애썼습니다. 물론 전혀 기억이 나질 않더군요. 인간이 되고 나서 유일한 기억은 세 살 때의 것이었습니다. 노통도 그러한 기억에 기초해서 이 소설을 쓰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듭니다. 자세히 기억나지 않는 3살 이전의 사건은 일종의 인간이 되기 위한 과도기가 아닐까 하고 말이죠.

실제로 아이들은 자궁에서 그 지식이 극에 달하게 발달하며, 그 지식은 인간 세계에 융화되어 가는 중에 쇠퇴한다는 이론이 있다고 들었습니다. 일종의 본능이라고도 설명할 수 있는 일련의 활동들. 예를 들어 누가 나의 부모이고 (혹은 내가 안전하게 업힐 수 있는 사람이고) 어느 걸 먹으면 되고 하는 것들은 오히려 교육을 통해서가 아니고 이미 태어나기 전부터 축적된 것이란 얘기죠. 물론 이 이론이 과학적으로 증명된 것도 아니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증명될 이유도 없어보입니다.

하지만 노통이 생각한 것이 정확하게 이것이다 라고 말하기는 어려울 것 같군요. 분명한 것은 노통은 3살 이전의 세계를 신의 세계로 간주하고 인간 세계에 융화되어 가는 것을 그렸단 것이라는 생각입니다.

또 하나 간과할 수 없는 것이 파이프 혹은 호스로 표현되는 것인데, 소녀가 2살까지 말을 할 필요가 없는 시기는 (신이었던 시기) 파이프로 표현되었고, 잉어의 입은 호스로 표현되었죠. 책의 첫부분에도 '호스는 파이프의 유연한 형태다.' 라고 전제하고 있구요. 이 부분은 결국 (그리도 혐오하는) 붕어와 소녀는 동일 선상에서 생각할 수 있으며, 파이프에서 호스가 되어가는 과정이 3살에서 4살로 넘어가는 '그 시기' 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 소녀는 잉어를 극도로 싫어하지만 결국은 잉어의 모습에서 자신을 발견하고 자신도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것을 알게되는 거죠. 그 과정에서 자살을 시도하는 것이구요.

결국 (비록 매우 어린 나이긴 하지만) 일종의 성장통을 겪는 과정에서 있을 수 있는 일을 그린 것이란 생각이 드네요. 단지 좀 더 독특한 상상력과 표현력을 사용했을 뿐. 생각해 보면 3살 이전의 나의 생각이 저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많이 해보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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