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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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뜬금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칼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테제를 생각나게 하는 책이었다.
“이제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여 왔다”라는 테제 말이다.
물론 이 테제는 당시 헤겔 관념론에 빠진 천편일률적 사변철학을 비판한 말이기 때문에 [세계를 재다]라는 책과 관련짓는 것에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과학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는가라는 생각과 연관되어 떠오른 말이었나 보다.

 

 

[세계를 재다]에는 훔볼트와 가우스라는 두 명의 과학자가 등장한다.
이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 방법은 극과 극이었다.


훔볼트는 학자라기보다는 탐험가나 모험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발’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호기심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확인해야 했는데, 반드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근육이 전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직접 자기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을 행하다가 결국 기절해버리는 모습이나
파도의 높이를 재기 위해 뱃머리에 자신을 묶어 놓은 채로 항해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왠지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가우스는 전형적으로 ‘머리’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피하였고, 아내가 아기를 낳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낸 1부터 100까지 더하는 방법은 초등학교 수학책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함수와 표준정규분포를 이용한 가설의 검정 등은 골머리를 썩이며 배워야 하는 통계학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세기 후반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증명되는 공간의 휘어짐에 대한 생각을 내놓은 최초의 학자였으며,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은 가장 ‘현대적인’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철학적 흐름이란 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발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경험주의의 그림자를,
머리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합리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훔볼트와 가우스가 만난다는 설정 자체는 세계를 해석해 온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식이 함께 조우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가끔 ‘칸트’를 등장시키는 것은 보통 장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 책에서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란 윤리학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으나,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독일 관념론의 틀을 잡은 칸트는 훔볼트와 가우스로 대표되는 세계를 재는 두 가지 방법의 종합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흐름을 녹여내기 위한 시도로서 [세계를 재다]를 이해한다면,
마지막이 다소 당황스럽게도 급하게 매듭지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세계를 재다]의 마지막은 가우스의 아들 오이겐이 비밀집회 도중 체포되어 추방명령을 받고 아메리카(미국)에 도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별다른 사건(?)이나 의미없이 끝나버리고 마는 훔볼트와 가우스의 만남은 좀 싱겁다.
머리로 세계를 해석한 가우스의 아들이자 수학자였던 오이겐은 프로이센 황제의 독재를 비판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집회에 실제 참여했다가 발각되어 미국으로 추방된다.
이는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의 흐름이 새로운 해석방법으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와 ‘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연상시킨다.
칸트가 틀을 잡은 관념론은 헤겔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이후 이 세계를 재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차적인 방법은 미국식의 실용주의화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다니엘 켈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세계 독자들은 독일 문학에서 무거움과 진지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독일 문학이 지겹다.
                    묵은 인상을 걷어낼 새로운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였을까?
[세계를 재다]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소설의 고정관념을 깨고
상당히 경쾌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가득하여 속도감있게 잘 읽히는 책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철학적 관점은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무거운 주제의식이 경쾌함을 가지게 된 첫 번째 공은 당연히 저자인 다니엘 켈만에게 있고, 다음으로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번역자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독일문학 = 무겁고 지루한 문학’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리는 관점에 절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실제 인물에 상상력을 더하여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담아낸다는 것이, 그것도 흥미롭게 담아낸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가치는 결코 작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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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 - 책에 살고 책에 죽은 책벌레들의 이야기
김삼웅 지음 / 시대의창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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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나는 왜 책을 읽는가?

아마도 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라면 누구나 스스로에게 던져보았을 질문일 것이다.

책을 읽는 목적을 어떤 효용가치에만 두는 것은 문제가 있다고 여겨지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책을 읽는 목적은 스스로를 고인 물과 같이 썩게 만들지 않고,

스스로를 자신만의 세계에 감금시키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이것은 책이란 자신의 마음과 상상력을 한 군데에 고착화시키지 않고,

마치 이카루스가 끝없는 하늘을 향해 날아오르듯이

자신이 추구하는 세계를 향해 용감하게 뛰어오를 수 있는 힘을 부여한다는 의미이다.

이쯤에서 임어당의 말을 한 번 되씹어 보자.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은 시간적 공간적으로 자기세계에 감금되어 있다.

일정한 틀에 박혀 있는 그가 일상에서 접촉하는 것은 소수의 지기일 뿐이므로

보고 듣는 것이 한정돼 있다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은 비블리오필리(Bibliophily)들에 대한 보고서이다.

여기에는 고대로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우리나라에서부터 중국, 일본, 서양 여러 나라들에 이르기까지 시간과 공간을 초월한 책벌레들의 이야기가 담겨 있다.




그런데 이 책에서 가장 인상깊었던 것은 수많은 책벌레들에게 있어서

책이란 단지 ‘읽기’만 하는 대상에서 머무르지 않았다는 점이었다.

이들의 ‘읽기’는 자신의 인격이 묻어나는 ‘글쓰기’와 연관되어질 뿐만 아니라,

이 ‘글쓰기’를 통하여 그들의 삶의 태도와 인생의 철학을 보여주고

현재의 우리들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가를 일깨워준다는 점에서 인상적이었다.

앞서 독서의 이유로서 다른 사람의 경험과 철학을 ‘책’이란 매개체를 통하여 대화하고,

이를 통해 자신을 한 곳에 고착화시키는 것을 극복하여

자유로운 사상과 철학으로 날아오르는 과정을 얻기 위해서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독서와 글쓰기는 어떠해야 할 것인가?

문여기인(文如其人)이라는 말이 있다. 즉, 글은 그 사람과 다를 바가 없다는 의미이다.

진실된 글은 그 진심이 다른 사람을 움직인다.

성실한 마음에서 읽히는 책은 읽는 사람에게 매사에 성실할 수 있는 원동력을 준다.




한국 사람이라면 누구나 제목을 들어봤을 다산의 [목민심서].

송기숙 선생님의 [녹두장군]에는 [목민심서]에 얽힌 전설이 등장한다.

갑오년 한 무리의 동학농민군이 고창 선운사의 암각여래상으로 향했다.

전설에 따르면 이 부처님 배꼽 부분에 신기한 ‘석불비결’이 들어 있는데,

이것을 꺼내는 날에 한양이 망한다는 비기가 전해져 왔기 때문이다.

이들 농민군이 이날 암각여래상에서 꺼낸 책이 바로 다산의 [목민심서]였다고 한다.

그들에게 봉건주의 조선은 변혁의 대상이었고,

백성의 고달픈 삶을 돌보아야 할 목민관들은 오히려 고혈을 빠는 압제자일 뿐이었다.

이러한 봉건주의 낡은 틀을 깨버리고자 일어난 이들에게 [목민심서]가 가진 의미가 무엇이었겠는가?

그런데 이 [목민심서]는 현대에도 또 하나의 어울리지 않는 전설을 낳았다.

전재산이 29만원에 불구하다던 전두환대통령께서는 해외순방 때마다 [목민심서]를 비행기 안에서 기자들 보는 데서 열심히 읽으셨다고 한다.

1980년 광주의 피를 부르고, 이후 수많은 사람들이 피눈물을 흘리게 만들었던,

그리고 재임시의 그 수많은 부정과 비리를 저질렀던

이 사람에게 [목민심서]는 도대체 무슨 의미였단 말인가?




이번에 [책벌레들의 동서고금 종횡무진]을 읽으면서

나의 책읽기가 어떤 자세여야 하며, 나의 글쓰기가 어떻게 되어야 할 것인가에 대해 많은 반성을 하고 많은 배움을 얻는 기회가 되었다.

박은식 선생님은 피눈물나는 우리 역사를 서술하면서 [한국통사]의 ‘통’자를

보통 우리가 쓰는 ‘通史’로 쓰지 않고 가슴 아픈 역사라는 의미의 ‘痛史’라고 썼다고 한다.

그 반면에 정신까지도 외세에 팔아버린 친일파들의 글쓰기,

궤변으로 점철되었던 소피스트들과 ‘아테네의 잠을 깨우기 위한 한 마리 등에가 되겠다’던 소크라테스의 말과 글....

무엇보다 곡학아세(曲學阿世)한 사람들의 이야기가 내게 반면교사(反面敎師)가 되었다.

진실을 왜곡하여 자신의 영달만을 추구한 사람들과 사대사상과 봉건사상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글쓰기들...

내가 쓰고, 내가 생각하는 것에도 혹시 이렇게 자신과 다른 사람을 속이는 것은 없는지를 반성해 보는 계기가 되었다.




베르나르 베르베르의 [개미]를 보면서 평상시에도 더듬이를 예민하게 다듬는 개미들의 모습에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던 기억이 난다.

그래... 역시.... 그렇다면 내가 책을 읽는 것에 한 가지 목적이 더 추가될 듯 하다.

결정적인 순간에 나의 양심을 배신하지 않도록 자신의 더듬이를 갈고 닦는 도구로서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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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 속의 거미 블랙 캣(Black Cat) 4
아사구레 미쓰후미 지음 / 영림카디널 / 2004년 7월
평점 :
절판


참 특이하고 별난 소설이다.

이 책은 표면적으로 ‘일본 추리소설’이다.

그러나 요즘 사람들이 많이 읽는 일본 추리소설을 생각하고 책장을 펼쳤다가는 낭패를 보기 십상이다.

물론 이 책에도 사건이 나온다.

그러나 이 책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내용은 사건을 풀어가는 이야기가 아니라,

주인공이 “듣는” 환경, “듣는” 사물을 어떻게 “그리고” 있는가이다.

따라서 여러 가지 사물과 특히 소리의 미묘한 차이를 시각적으로 그려내는 묘사가 아주 절묘하다.




다치바나는 이사 첫 날 뺑소니 자동차 사고를 당하고 그 이후 청력이 비정상적으로 예민해진다.

자신을 친 자동차를 찾던 중 다치바나는 자기가 이사오기 직전에 살던 여자가 행방불명이 되었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단지 그 여자가 이곳저곳 남겨놓은 소리의 반향을 따라서..

다치바나는 여자에 대하여 아무 것도 모른다.

이름도, 나이도, 생김새도, 목소리도... 어떤 정보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

다치바나가 처음으로 여자에 대한 정보를 얻은 것은 그 방에 남겨진 여자의 ‘소리’였다.




다치바나가 웅크린 자세에서 일어서려고 할 때였다. 발밑에서 마룻바닥이 울렸다.

삐꺽하는 조금 깊은 반향.

벽을 주먹으로 두드릴 때는 조금 얕은 소리로 바닥이 울렸었는데,

이번 소리는 바닥의 다른 부분보다 더 깊게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었다.

소리는 그곳에서만 두텁게 마룻바닥에서 연기처럼 피어오른다.

목재가 일그러지는 것같이 희미한 소리의 연기가 먼지처럼 공간에서 춤을 추었다.

                                         (중략)

다치바나의 발바닥이 바닥을 밟으면, 일정한 버릇을 지닌 부분만 먼지처럼 소리의 연기가 피어오르고,

그 소리와 함께 천천히 움푹 패는 듯이 일그러져 보이는 것이었다.

                                         (중략)

누군가 밟은 흔적이다.

계속해서 바닥의 똑같은 자리를 밟은 것이 버릇처럼 되어 이런 소리를 내게 된 것이다.

이 방안을 걸어다닌 사람이 습관적으로 밟은 장소와 그렇지 않은 장소의 차이가 바닥의 반향에 버릇을 남겨 놓은 것이다.

즉, 이것은 전에 있었던 사람이 걸었던 흔적이다.




인간이 얻는 정보의 대부분은 시각에 의존한다고 한다.

그래서일까? 시각이 주는 정보의 불완전함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재미있는 놀잇거리가 되었다.

착시를 이용해 똑같은 길이의 선을 다른 길이로 보이게 한다던가, 곧은 직선을 굽은 곡선처럼 보이게 한다던가,

이렇게도 저렇게도 보일 수 있는 그림(토끼-오리 그림)이 등장한다던가...

숨은그림찾기 역시 주위와 유사하게 사물을 배치함으로써 눈을 속이는 놀이가 아닌가.

 

그러나 [돌속의 거미]는 정보의 원천으로서 가지는 시각을 거의 배제하고,

‘청각’이라는 다른 감각으로 시각을 대체하고, 청각을 통해 얻는 정보의 미세한 차이를 구별해 내는 과정을 풀어낸다.

[돌속의 거미]의 주인공인 다치바나의 청각은 너무나 예민해져서 세상의 모든 소리가 귀에 쏟아져 들어오기 때문에 약이 없이는 견딜 수 없을 정도이다.

뿐만 더 나아가 이제 귀로 들어오는 소리는 시각적인 형태로 변화한다.

소리가 기하학적인 모양을 갖출 뿐만 아니라, 다양한 색채를 가진 것으로 나타난다.

예를 들어 전철에서 들리는 차임벨 소리는 원뿔과 삼각뿔, 구체가 이루는 화음으로 보이고,

새가 우는 소리는 ‘가느다란 천을 개울에 흘려보내는 것 같은 새빨갛게 늘어나는 소리가 매끄러운 디가 되어서 바람같이 흐르는 것’으로 보여진다.

이제 시각은 흐릿한 윤곽만 겨우 보여줄 뿐이며, 오히려 다치바나의 행동에 거추장스러운 감각이 되고,

다치바나가 보고, 느끼고, 생각하는 모든 것은 근원은 귀로 듣는 청각으로 변한다.

저자인 아사구레 미쓰후미는 절대적인 시각에 대하여 우리가 일상적으로 사용하고는 있지만 그 중요성을 간과해 왔던 청각을 중심된 감각에 배치함으로써 세상을 인식하는 새로운 면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이 책이 지속적으로 말하고 있는 ‘고독’, ‘갇힘’, ‘출구없음’과 같은 이미지들은 현대 사회와 그 속의 사람들에 대한 슬픈 형상화이기도 하다.

제목인 [돌속의 거미]는 일본 아이치현의 특산물인 ‘다카시 동자승’이란 돌멩이를 말한다.

이 돌은 암석 내부에 공간이 생겨서, 흔들면 속에 들은 이물질로 인해 소리가 발생한다.

이 소리를 다치바나는 돌속에 갇힌 거미가 발로 돌 내부를 긁어대는 소리로 듣는다.

결국 돌속에 갇힌 거미는 나갈 곳을 찾으나, 나갈 수 없다.

계속 돌 내부를 긁어대며 죽을 때까지 돌아다닐 뿐이다.

어쩌면 이런 거미의 모습은 우리가 살아가는 모습을 나타내주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또한 책의 앞부분에는 다치바나가 꾸는 꿈이 자세하게 묘사된다.

‘단지속에 꼼짝없이 들어 있는’ 상태로 자주 묘사되는 ‘갇혀 있는 이미지’는 사방으로 막힌 현실과 그 속에서의 탈출을 기원하는 마음을 읽을 수 있도록 해 준다.




개인적인 생각인데... 그냥 술술 읽어내려가는 책을 원하는 분이라면 이 책을 좀 지루하게 여길 수도 있을 것 같다.

하지만 세밀한 소리의 차이를 시각적으로 표현하는 것과 같은 문장력은 정말 대단하다.

어딘지 특이하면서도 기묘한 점에 중점을 두는 분이라면 좋아할 듯 싶다.

 

뱀꼬리....

책표지에 나온 '판타지와 하드보일드가 결합된....' 이 말은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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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 딜런 평전 역사 인물 찾기 25
마이크 마퀴스 지음, 김백리 옮김 / 실천문학사 / 200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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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해가 있을수도 있는데, 밥 딜런은 현재 생존해 있는 인물이다.
아직 살아있는 인물에 대한 전기가 나온다는 것은 사실 그리 흔한 일이 아니다.
게다가 밥 딜런은 사회적 활동을 모두 마치고 은퇴한 상태의 사람이 아니다.
단적인 예로 2006년 65세의 나이로 발표한 ‘모던 타임즈(modern times)’가 빌보드 차트 1위를 기록한 것에서도 알 수 있듯이, 현재에도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고 있는 사람이다.
또한 그의 활동영역은 포크라는 영역에만 국한되어 있지 않아서,
블루스, 컨트리, 가스펠, 재즈 등 다양한 형식으로의 끊임없는 변신을 가져왔던 사람이며,
뮤지션으로서의 활동 이외에도 작가와 화가라는 새로운 예술 영역에서도 두각을 나타낸 바 있는 사람이다.

간단히 말해 밥 딜런은 ‘현재 진행형’의 인물로서,
‘평전’이라는 명칭을 붙일 정도로 평가가 가능한 시점에 서 있는 사람이 아닌 것이다.
‘평전’이란 말 그대로 ‘개인의 일생 전반에 걸쳐 평론을 곁들여 적은 전기’가 아닌가.
또한 지금까지 밥 딜런의 살아온 인생을 보건데,
그는 앞으로 더 변화하고, 더 새로워지며, 지금과 더욱 다른 삶을 살 것이 분명한 사람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밥 딜런의 평전이 나왔고, 번역되어 내 손 안에 들어왔다.
그렇다면 현재 진행형인 사람의 전기는 왜 출판되었을까.
나는 개인적으로 밥 딜런으로 대표되는 미국의 1960년대 전후의 시대상황에 대한 보고서라고 생각한다.
즉, 밥 딜런은 한 명의 뮤지션이나 포크 가수가 아니라 1960년대를 관통하던 시대의 아이콘이었을 뿐만 아니라,
그와 같은 ‘불의 시대’를 지나온 아이콘이 어떤 변화의 모습을 보였고,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이다.

1960년대와 1970년대를 살아온 밥 딜런을 통하여 주의하여 생각해 볼 점은
첫째는 ‘진정성’이며, 둘째는 ‘거대 담론 속의 개인’이라 측면이다.
밥 딜런을 비롯하여 저항을 노래한 수많은 뮤지션들을 추동한 동기는 ‘진정성(authenticity)’이었다.

포크 싱어들에게 있어 ‘진정성’은
역사와 전통, 포크와 민중에 대한 이해를 공유하는 방향으로 나아가는
실존적인 요구였고, 그 기준은 바로 ‘정직’이었다.

제2차 세계대전 이후로 발전의 본궤도에 오르기 시작하는 자본주의는
이 시기에 산업적 생산물을 급격히 증가시켜 자신의 생산물에 대한 노동의 소외를 본격화시키기기 시작하였다.
광풍처럼 불어닥친 ‘매카시즘’이란 red complex는 어떤 종류의 비판적인 외침에도
‘반체제적’, ‘비애국적’, ‘빨갱이’란 딱지를 붙여가며 때론 목숨에 대한 탄압도 서슴치 않았다.
특히 미국 사회에 여전히 잔존해 있던 인종차별은 하나의 인습이 되어 흑인을 비롯한 소수인종들의 인권 따위는 아랑곳 하지 않는 사회분위기를 만들어냈다.

따라서 밥 딜런의 음악에 담긴 진정성이란
기본적으로 그동안 억압되어 있던 민중의식의 분출을 의미하는 것이었으며,
자유와 평등을 억누르는 경제적 속박(자본주의)과 정치적 속박(반공주의, 매카시즘), 제도적 속박(온갖 인습과 구세대의 규제)을 끊고자 하는 노력으로 평가할 수 있다.

‘거대 담론 속의 개인’이란 측면에서 밥 딜런을 바라보는 것은
한 개인의 변화라는 측면에서 흥미로우면서도 어딘가 서글픈 구석이 남아 있는 지점이다.
더욱이 이런 밥 딜런의 변화는
우리나라의 김지하, 박노해, 김광석, 안치환, 정태춘 등의 모습과 오버랩되어 남의 나라 일 같지 않은 감상을 준다.
밥 딜런은 1965년 전자기타를 들고 연주회에 나타나 ‘변절자’라는 말을 들어야 했으며,
베트남 전쟁을 비롯한 민감한 정치적 사안들에 대해 침묵함으로써, 그의 ‘진정성’이 어디에 있는지를 의심받아야 했다.
생각해보면, 밥 딜런은 그 시대의 아이콘은 되었으되, 그가 스스로 원하여 된 부분은 극히 일부분이었다고 여겨진다.
그가 반대하고 거부한 것은 개인의 자유를 억누르는 여러 가지 ‘거대 담론’들의 억압...
즉, 자본주의, 인종차별, 반공주의 등이었으되,
이러한 것들에 대한 반대가 다시 개인의 자유를 침해하고, 그 담론의 입맛대로 재단하는 것이란 느낌이 들 때에 밥 딜런은 또다시 그 틀을 벗어나 버렸다.
그는 한 세대를 대변하는 목소리였지만, 그는 그 상태를 싫어했던 것이다.

                    내가 대변자가 될 것으로 여겨졌던 동시대 사람들과 소통은 커녕
                                    심지어 그들을 아는 바도 전혀 없었으며..... 
                반체제 문화가 어떤 모습을 하고 있었든지 간에, 알 만큼은 알고 있었다. 
                                   내가 쓴 가사들, 내 노래에 담긴 의미들이 
                             논쟁으로 인해 파멸되는 것을 보면서 가슴이 아팠다.


[밥 딜런 평전]을 보면서 역시 우리나라의 ‘불의 시대’였던 1980년대를 살아온 사람들의 현재 모습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유신에 저항하는 아이콘이었던 김지하 시인.
사회주의 혁명에 기여하고자 분주했던 [노동의 새벽]의 박노해 시인.
‘노래를 찾는 사람들’에서 제도권으로 나와 여전히 활동하는 안치환... 그리고 김광석...
그리고 김남주, 정태춘 등등....
아직 본인의 영역에서 활동하는 이들도 있고,
이제는 다소 간의 방향전환을 통해 새로운 앞길로 진출하는 이도 있고,
또 이제 고인이 되어 더 이상 그 얼굴을 볼 수 없는 이들도 있지만,
1970년대 후반과 1980년대의 시대를 살아온 그들의 불꽃과 같았던 저항의 역사와
이제 다소간 진정(?)되어 나름대로 다른 목소리를 내는 그들의 변화..
또 그 저항과 변화가 우리들에게 남겨준 것이 무엇인지를 진지하게 생각해 볼 때이다.

다시 밥 딜런의 “바람만이 아는 대답(Blownin' in the Wind)”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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까칠마녀 2008-09-06 17: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인 '딜런 토마스'를 넘 좋아하여 이름을 '답 딜런'이라고 지었다던가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로 시작하던 그 노래 다시 한번 들어봐야겠네요~~
 
우부메의 여름 백귀야행(교고쿠도) 시리즈
쿄고쿠 나츠히코 지음 / 손안의책 / 2004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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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딸랑, 하고 풍경이 울렸다"

적막을 깨는 한밤중의 소리가 얼마나 사람에게 공포감을 주는지는 경험해 본 사람은 안다.
뭔가에 익숙해 있을 때, 특히 고요함에 익숙해져 있을 때 갑자기 들리는 '딸랑' 소리는
우선 청각을 곤두세우게 하고, 다음으로 촉각을 자극하여 표현하기 어려운 공포감을 주는 것이다.

'구온지' 가문의 데릴사위였던 한 남자가 홀연히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그의 부인은 임신한지 20개월이 되도록 아기를 낳지 못하고 있는 상태이다.
삼류소설가인 '나(세키구치)'와 고서점을 운영하는 교고쿠도는 '구온지' 가문의 대대로 내려오는 저주와 아기를 낳다 죽은 원념을 가리키는 '우부메'의 정체를 쫓는다.

[우부메의 여름]은 뭐라고 말하기 힘든 독특함을 가진 소설이었다. 마치 어두운 밤의 풍경소리처럼 말이다.
먼저 이 소설은 우리가 얻는 정보의 90% 이상을 차지한다고 하는 시각에 대해 의심하도록 하며,
우리가 본다고 생각하는 것, 실재로 존재하거나 존재하지 않는다고 보는 것에 얼마나 허구가 들어 있는지를 말해준다.
이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감각'이란 고요함을 깨는 첫번째 풍경소리이다.
그리고 '우부메'라는.... 아기를 낳다가 죽어 그 원념이 아기를 찾아 떠도는 요괴의 전설을 내세우고,
이 전설이 궁극적으로 인간의 공포와 헛된 야욕에서 발생한 것임을 통렬하게 밝힘으로써
우리가 생활중에 체득하고 있는 과학과 합리는 통념을 정면에서 뒤엎어 버린다.
이는 우리가 익숙해 있는 '이성'이란 고요함을 깨는 두번째 풍경소리이다.
교고쿠 나츠히코는 좌우에서 울리는 이 풍경소리들을 통해 우리가 당연하게 생각하고 익숙해져 있는 것에 의문을 제기한다.
사실 생각해 보면..... '음양사'라는 존재가 어떻게 보면 허무맹랑하다고 할 수 있지 않겠는가.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허무맹랑함이 묘한 현실감 가운데 살아있다는 점이다.
이건 무엇보다도 사실과 허구, 이성과 감각, 과학과 민속이 나누어지지 않은 시기...
즉, 지금에 비해 보다 인간의 원형에 가깝던 시기(그래봤자 50년 전이지만)인 1952년을 배경으로 하면서,
황량한 언덕길에서 만나게 되는 끈적끈적한 일본의 여름 날씨... 또 갑작스레 퍼부어대는 빗줄기 등이 정치하게 배치되거 있기 때문일 것이다.
또한 이 책의 현실감은 전반부에 나오는 교고쿠 나츠히코의 그 유명한 '장광설'에서도 일정 부분 비롯한다고 보여진다.
감각을 어디까지 믿어야 할 것인가, 영혼이란 무엇인가, 뇌는 어떻게 활동하는가 등과 같은 과학의 근본적이고 사변적인 질문과 더불어
민속학, 양자역학, 카오스 이론, 나비효과가 버무려져 펼쳐지는 지식의 장광설.
이것은 교고쿠 나츠히코가 배치한 양쪽의 풍경소리가 그렇게 허무맹랑한 것은 아니라는 의식을 독자들의 머리와 가슴속에 심어준다.


사실 개인적으로 일본 소설을 그렇게 많이 읽은 편이 아니었고, 교고쿠 나츠히코란 작가의 책을 처음 읽은 것이었으며,
아무래도 과학과 이성에 찌든 머리를 가진 내게는 다소 억지스런 설정도 있는게 아닌가 하는 의문도 들게 하였지만
하여튼 특이하면서도 보통 공력을 가진 작가가 아니라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서평을 쓰면서 교고쿠 나츠히코의 원작을 TV 애니매이션으로 제작한 것이 있다고 하는데...
제목은 [항간에 떠도는 100가지 이야기(巷說百物語)]라고 한다나....
교고쿠 나츠히코를 좋아하는 분들은 구해서 보면서 더운 여름을 잊어보는 것은 어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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