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계를 재다
다니엘 켈만 지음, 박계수 옮김 / 민음사 / 2008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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뜬금없는 말일지도 모르겠는데, 개인적으로 칼 맑스의 포이어바흐에 관한 마지막 테제를 생각나게 하는 책이었다.
“이제까지 많은 철학자들은 세계를 해석하여 왔다”라는 테제 말이다.
물론 이 테제는 당시 헤겔 관념론에 빠진 천편일률적 사변철학을 비판한 말이기 때문에 [세계를 재다]라는 책과 관련짓는 것에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이제 막 과학이 피어나기 시작하던 시기에 얼마나 많은 과학자들이 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왔는가라는 생각과 연관되어 떠오른 말이었나 보다.

 

 

[세계를 재다]에는 훔볼트와 가우스라는 두 명의 과학자가 등장한다.
이들이 세계를 이해하고 해석한 방법은 극과 극이었다.


훔볼트는 학자라기보다는 탐험가나 모험가에 가까운 인물이다.
그는 자기의 ‘발’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호기심이 생기면 무엇이든지 확인해야 했는데, 반드시 자기 눈으로 직접 보고, 자기 몸으로 직접 경험해야만 하는 것이었다.
근육이 전기를 어떻게 전달하는가를 알기 위해서 직접 자기 몸에 전류를 흘려보내는 ‘전기고문’을 행하다가 결국 기절해버리는 모습이나
파도의 높이를 재기 위해 뱃머리에 자신을 묶어 놓은 채로 항해한 모습은 매우 인상적이면서도 왠지 쓴웃음을 짓게 만든다.


가우스는 전형적으로 ‘머리’로 세계를 해석했다.
그는 집밖으로 나가는 것을 극도로 피하였고, 아내가 아기를 낳다 죽었다는 사실조차 몰랐던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가 생각해낸 1부터 100까지 더하는 방법은 초등학교 수학책에도 등장하는 유명한 이야기가 되었고,
함수와 표준정규분포를 이용한 가설의 검정 등은 골머리를 썩이며 배워야 하는 통계학의 가장 중요한 출발점이 되었다.
그러면서도 그는 20세기 후반 아인슈타인에 의하여 증명되는 공간의 휘어짐에 대한 생각을 내놓은 최초의 학자였으며, 천체의 운행을 수학적 법칙으로 모두 설명할 수 있다고 믿은 가장 ‘현대적인’ 수학자이기도 하였다.


 

이 책을 통하여 철학적 흐름이란 것을 읽어낼 수 있다고 하면 지나친 비약일까?
발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경험주의의 그림자를,
머리로 세계를 해석하는 훔볼트에게서는 합리주의의 그림자를 볼 수 있었다.
따라서 훔볼트와 가우스가 만난다는 설정 자체는 세계를 해석해 온 두 가지의 대표적인 방식이 함께 조우하게 됨을 보여주었다.
그렇다면, 이 소설에 가끔 ‘칸트’를 등장시키는 것은 보통 장치가 아니라는 생각이다.
물론, 이 책에서 칸트는 정언명령(定言命令)이란 윤리학적 측면이 보다 강조되어 있으나,
합리론과 경험론을 종합하여 독일 관념론의 틀을 잡은 칸트는 훔볼트와 가우스로 대표되는 세계를 재는 두 가지 방법의 종합적 인물이기 때문이다.


철학적 흐름을 녹여내기 위한 시도로서 [세계를 재다]를 이해한다면,
마지막이 다소 당황스럽게도 급하게 매듭지어지는 것도 이해할 수 있다.
[세계를 재다]의 마지막은 가우스의 아들 오이겐이 비밀집회 도중 체포되어 추방명령을 받고 아메리카(미국)에 도착하는 것으로 그려진다.
별다른 사건(?)이나 의미없이 끝나버리고 마는 훔볼트와 가우스의 만남은 좀 싱겁다.
머리로 세계를 해석한 가우스의 아들이자 수학자였던 오이겐은 프로이센 황제의 독재를 비판하는 생각을 가지고 그런 집회에 실제 참여했다가 발각되어 미국으로 추방된다.
이는 세계를 해석하는 두 가지 방법의 흐름이 새로운 해석방법으로 ‘미국’으로 대표되는 ‘다원주의’와 ‘실용주의’, ‘프래그머티즘’으로 나아가는 흐름을 연상시킨다.
칸트가 틀을 잡은 관념론은 헤겔에 이르러 극성을 이루지만,
어떻게 보면 그 이후 이 세계를 재는 가장 중요하면서도 일차적인 방법은 미국식의 실용주의화 되었다고 볼 수도 있는 것이다.


 

이 책의 저자인 다니엘 켈만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전세계 독자들은 독일 문학에서 무거움과 진지함이라는 단어를 떠올려 왔다.
                             그러나 나는 그런 독일 문학이 지겹다.
                    묵은 인상을 걷어낼 새로운 문학을 하겠다고 결심했다.


그래서였을까?
[세계를 재다]는 정말 우리가 흔히 생각하는 독일 소설의 고정관념을 깨고
상당히 경쾌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위트가 가득하여 속도감있게 잘 읽히는 책이 되었다.
그렇지만 그 내면에 흐르는 철학적 관점은 결코 가볍기만 한 것은 아니었다.
이 무거운 주제의식이 경쾌함을 가지게 된 첫 번째 공은 당연히 저자인 다니엘 켈만에게 있고, 다음으로 고심한 흔적이 역력히 보이는 번역자에게서 찾아야 할 것 같다.
물론 개인적으로 ‘독일문학 = 무겁고 지루한 문학’이라고 일반화시켜버리는 관점에 절대 동의할 수는 없지만,
실제 인물에 상상력을 더하여 하나의 시대적 흐름을 담아낸다는 것이, 그것도 흥미롭게 담아낸다는 것이 보통 어려운 작업이 아닌 것을 알기에 이 책의 가치는 결코 작다고만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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