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대학살 - 프랑스 문화사 속의 다른 이야기들 현대의 지성 94
로버트 단턴 지음, 조한욱 옮김 / 문학과지성사 / 1996년 10월
평점 :
구판절판


 

‘장님 코끼리 만지듯’이라는 말은 전체적인 모습은 알지 못한 채로 자신이 알고 있는 일부의 지식이 전부인 양 믿어 버리는 것을 의미한다. 부정적인 의미로 사용되지만, 사실 이 행위는 생소한 세계를 인식하기 위하여 가장 먼저 해볼 수 있는 현실적이면서도 효과적인 방법이기도 하다. 만약에 여러 장님들이 모여서 자신이 만진 모양에 대한 정보를 공유한다면, 그리고 코끼리를 만진 장님의 수가 많으면 많을수록 전체적인 코끼리의 모습에 가까운 형상을 복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왜 이런 것이 가능한가 하면 (좀 인식론적인 문제이긴 하지만) 장님이 만진 코끼리의 각 부분인 코끼리 다리, 코끼리 코, 코끼리 귀 등도 전체 코끼리는 아니지만 엄연한 코끼리를 구성하는 각각의 부분임은 틀림없기 때문이다. 작은 사람의 얼굴 모양을 모자이크로 하여 큰 사람의 얼굴을 만드는 것을 상상하면 될 것 같다.

코끼리 만지는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고, 거창한 의미까지 부여하는 이유는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이 바로 그러한 작업이라는 느낌을 받아서였다. 우리가 18세기 프랑스 사람들에 대해서 궁금하다고 가정해 보자. 우리는 그들의 살아가는 모습과 인식구조를 정확하게 재현할 수 있을까? 대답은 ‘NO'이다. 왜? 가장 큰 이유는 저자인 로버트 단턴과 독자인 우리들 그 누구도 그 시대, 그 장소에 살고 있지 않기 때문이며, 또 다른 중요한 이유는 그들의 의식구조를 재현할 방법이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가 목표로 하는 바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장님이 코끼리 만지는‘ 방법을 활용할 수밖에 없다. 전체를 이루는 각각의 부분을 모아서 모자이크화하는 것인데, 그 시대를 살았던 사람의 역사서술과 함께 다양한 자료를 모으고 해석해 보는 것이다. 그 시대에 대한 이해수준은 크게 높일 수 있을 것이며, 여러 자료를 모으면 모을수록 완전한 상에 한 걸음이라도 다가서게 될 것이다. 

여기서 로버트 단턴의 역사서술이 우리가 익숙한 기존 역사서술과 무척이나 다르다는 점을 알아차렸을지도 모르겠다. 아마 국사책에서 보아 왔던 역사서술에 익숙한 사람이라면 이 책에서 이질감 또는 신선감을 느낄 것이다. 이 책은 두 가지 측면에서 전통적인 역사서술에 반하는 서술로 읽혔다. [고양이 대학살]이 가지고 있는 첫 번째 특징은 역사를 시간의 흐름으로 파악하는 전통적인 수직적(longitudinal) 관점에서 벗어나 특정 시점을 칼로 잘라낸(cross-sectional) 역사를 서술했다는 점이다. 따라서 단턴의 역사서술에 따르면 역사는 흐름이라는 성격 뿐만 아니라 그 순간을 공유하는 다양한 사람들의 집합체라는 의미도 함께 가지게 되는 셈이다.
여기서 [고양이 대학살]의 두 번째 특징이 나온다. 즉, 그 시점의 모든 형태의 자료가 ‘사료(史料)’가 된다는 점이다. 이건 근대 역사학의 아버지라 불리우는 랑케(Ranke)의 방법론에 정면으로 맞서는 이야기다. 언제나 객관적으로 검증 가능하고 보편타당한 자료만을 인정했던 랑케의 방법론과 달리 로버트 단턴은 주관적이고 특수하며 상대적인 자료들을 사료의 영역으로 끌어들인다. [고양이 대학살]에서 활용한 자료만 해도 민담, 일상에서 일어난 이야기, 자신이 살던 도시에 대한 감상문, 지식인들을 감시하던 경찰의 보고서, 책주문서 등등이다. 랑케에게 역사는 ‘과학’이었다면 단턴에게 역사는 ‘민속’이다.

[고양이 대학살]에는 모두 6편의 논문이 실려 있다. 그리고 그 배경은 모두 18세기 중후반기의 프랑스이다. 18세기 중후반, 그것도 프랑스라면 조건반사적으로 떠오르는 사건이 있다. 바로 ‘프랑스 대혁명’이다. 로버트 단턴은 다양한 사료들을 활용하여 당시 프랑스의 귀족, 부르주아, 도제 및 장인, 일반 농민들이 어떻게 자신 주위의 세계를 구성하였으며, 그것이 프랑스 대혁명과 어떻게 연결되는지를 탐색한다. 결국 그는 사람들의 ‘기저의식’이나 ‘집단의식’을 의미하는 말인 망탈리테(mentalité)의 역사를 탐구한 셈인데, 책의 표제이기도 한 두 번째 논문, <고양이 대학살>에서 그의 논리전개를 짚어 보자.

<고양이 대학살>은 1730년대 파리의 생-세브랭 가의 한 인쇄소에서 일어났던 해프닝을 소재로 하고 있다. 당시 파리의 가내 수공업장은 주인-장인-직인-견습공의 체제로 움직이고 있었는데, 이들의 생활 여건은 무척이나 달랐다. 대부분 부르주아 계급이나 귀족 계급에 속했던 주인들은 호의호식하는 생활을 영위했다. 그들이 기르던 고양이들마저 등따숩고 배부른 처지였는데 비해 최하층인 직인들과 견습공들은 온갖 차별과 비위생, 고양이보다 못한 영양상태, 과도한 업무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어느 날 밤 한 견습공이 주인의 침실 위 지붕에서 고양이 울음을 흉내낸다. 놀란 주인은 이것이 악마의 출현이라고 믿고 직인과 견습공들을 동원하여 주위의 모든 고양이를 학살하도록 한다. 단, 주인 마님이 애지중지 키우던 ‘그리스’라는 고양이는 학살에서 제외였다. 그렇지만 일부러 이런 일을 꾸민 견습공들이 주인의 고양이를 그대로 둘 리가 있겠는가? 대대적인 고양이 대학살 속에서 그들은 ‘그리스’도 죽인 후에 시체를 홈통 속에 숨긴다. 주인 마님은 ‘그리스’가 없어진 사실에 대경실색하며 견습공들을 추궁하지만, 이미 수많은 고양이들이 학살당하여 시체들이 처리된 후라 ‘그리스’는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주인 마님의 비통함과 견습공들의 통쾌함 속에 대학살은 마무리되었지만, 이 사건은 그냥 끝나지 않고 노동자들에게 ‘복사(copie)’로 남게 된다. 고양이 대학살은 견습공들이 모인 곳에서 무언극으로 재연되었고, 이것은 주인들에 대한 조롱과 자신들의 단합을 강조하는 수단으로 활용되었다.

로버트 단턴은 당시의 임금 장부와 길드의 서류를 검토하여 당시 견습공들과 직인(journeyman)들이 얼마나 비참한 상황이었는지를 보여준 후, 당시 이들이 구성하고 있었던 일종의 공동체 의식을 강조한다. 요즘 식으로 말하면 견습공들은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있었던 셈인데, 지금처럼 경제적 동기가 강조된 조합이 아니라 특징적인 의례와 일종의 종교적 신념이라고까지 할 수 있을 정도의 높은 결속력을 가진 공동체였다.
노동자들은 자신들의 비참한 상황을 내면화하면서 호의호식하던 다른 집단, 특히 주인인 부르주아(또는 귀족)에 대한 복수심을 보인다. 그렇다고 주인을 직접 잡아다 매질을 가하거나 목을 날릴 수는 없는 일. 따라서 견습공들은 자신들의 공동체가 가지고 있던 ‘의례’ 속으로 주인이 소중하게 생각하던 것(여기서는 고양이)을 끌어 들여 심판함으로써 울분을 해소하는 과정으로 삼았던 것이다.
이것이 단순히 파리의 한 거리에서 발생한 해프닝으로 끝났다면 불쌍한 고양이들에게 추모비를 세워주는 것으로 충분했으리라. 그렇지만 로버트 단턴이 보기에 중요한 것은 이런 학살이 ‘복사(copie)’되었다는 점이다. 처음에는 단순한 울분풀이 또는 주인 골탕먹이기로 시작했던 이런 행위들이 노동자들의 의식 속에서 확대재생산되면서 당시 경제제도와 체제에 대한 저항으로까지 나아가게 되었고, 종국적으로는 프랑스대혁명으로까지 이어지는 집단의식이 되었다는 것이다.

(고양이에 대한) 유죄 판결은 주인에서 주인집으로, 그리고 체제 전체로 확대되었다. 아마도 반쯤 죽은 고양이 한 무리를 재판하고 자백을 받고 목을 매닮으로써 노동자들은 법 질서와 사회 질서 전체를 조롱하려고 의도하였을 것이다. (중략) 반세기 후에 파리의 직공들은 같은 방식으로 폭동을 일으켜 무차별의 학살과 즉성의 인민재판을 결합시켰다. (p.143)

글의 첫 부분에 [고양이 대학살]의 특징 중의 하나가 역사를 단면적(cross-sectional)으로 파악했다는 점을 말한 바 있다. 그래서 [고양이 대학살]에 실린 6편의 논문은 각각 서로 다른 계급과 서로 다른 상황을 그리면서 18세기 중후반 다양한 프랑스인들을 다룬다. 그리고 출발점이 다른 도로들이 한 지점에서 만나듯이 각각의 논문들은 집단의식이 프랑스 대혁명에서 어떻게 발현되었는지를 설명한다.

앞서 본 바와 같이 책의 두 번째 논문인 <고양이 대학살>은 비참한 상황에 처해 있던 노동자들(직인 및 견습공)이 어떻게 자신의 세계관에 체제에 대한 저항을 녹여내게 되었으며, 장기적으로는 19세기 프롤레타리아화하는 맥락 속에 놓이게 되었는지를 보여주고자 하였다.

첫 번째 논문인 <마더구스 이야기>는 프랑스인의 인식구조가 영국이나 독일과 어떻게 다른지를 민담을 가지고 설명한다. 이것은 왜 대혁명과 같은 피비린내 나는 사건이 프랑스에서 일어났는가에 대한 일종의 답변일 수도 있겠다. 로버트 단턴이 논하고 있는 유럽 각 국의 민담이 가지고 있는 특징을 나름대로 정리해 보자면 프랑스 민담이 ‘교활’ 또는 ‘기지’라면 독일 민담은 ‘환상’ 또는 ‘경건’, 영국 민담은 ‘얌전’ 또는 ‘유머’라고 할 수 있다. 권선징악이라든가 ‘착한 사람은 언젠가 복을 받는다’라는 교훈은 프랑스 농민의 민담에서는 거의 인정받지 못한다. 프랑스 농민들은 사회적 약자가 착하고 도덕적으로 사는 것을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던 것이다. 사회적 약자일수록 기지를 발휘하여 윗 계급을 속이거나 뒤통수를 치고, 교활함으로 위기를 벗어나야 함을 가르친다. 유명한 <빨간 모자>이야기의 프랑스 판본의 결말은 늑대가 빨간 모자를 삼켜버리는 것으로 끝난다. 우리가 흔히 아는 해피 엔딩은 후세 사람이 첨가한 것인데, 빨간 모자 소녀는 교활하거나 지혜롭지 못하였기 때문에 죽음이라는 위험에 그대로 노출되어 버린 것이다.

세 번째 논문인 <텍스트로서의 도시>는 1768년 몽펠리에 시에 거주하는 한 부르주아가 자신이 사는 도시에 대해 쓴 일종의 ‘도시 소개서’를 소재로 삼는다. 도시 소개서의 저자는 먼저 몽펠리에 시에서 벌어졌던 가두행진(퍼레이드)에서 각각의 사회적 계급이 어떤 모습으로 나타났는지를 꼼꼼히 서술한다. 여기서 우리는 급부상하던 부르주아가 당시 시대를 어떤 시가에서 보고 있는지를 가늠할 수 있다. 주지하다시피 대혁명 이전 프랑스 사회는 3개의 신분으로 구성되었다. 즉, 제1신분인 성직자와 제2신분인 귀족, 제3신분인 시민이 그것이다. 그런데 저자는 몽펠리에 시를 소개하면서 제1신분인 성직자를 의도적으로 누락시키거나 무시하고 있다.

그는 성직자를 완전히 제외시켰다. (중략) 그런 뒤 그는 귀족을 ‘제1신분’의 지위로 격상시켰다. (중략) 부르주아들은 비록 사법적으로는 ‘제1신분’ 내부의 두 번째 등급으로 분류될 수 있었지만 그들은 일상 생활을 살아가는 방식에 있어서 다른 부유한 시민들과 다를 바가 없었다. (중략) 저자는 전통적으로 귀족들이 위치하였던 ‘제2신분’에 부르주아를 위치시켰다. (p.180)

그럼 제3신분은 누가 되는가? 노동자들인가? 도시의 설명서를 작성한 부르주아는 그냥 제3신분을 ‘장인(artisan)’과 ‘평민’이라고만 서술한다. 이것은 당시 부르주아들의 이중적 태도를 드러내 보이는 것이었다. 즉, 신흥 부르주아들은 자신들의 신분을 귀족에까지 격상시키는 것에는 관대하였던 반면, 노동자들의 성장과 시민으로의 편입에 대해서는 극도의 반감을 가졌던 것이다. 프랑스대혁명의 역사적 가치에 비해, 그 열매가 부르주아에게 거의 일방적으로 돌아갔다는 일부의 평가의 근저에는 어쩌면 이러한 의식적 차별화가 내재되어 있었을지도 모른다.

네 번째 논문인 <문필공화국의 해부>는 혁명 직전에 파리의 문필가들의 동향을 감시하였던 한 경찰관의 보고서를 분석한다. 이 경찰관의 목표는 프랑스 왕정을 위협할 수 있는 문필가들을 감시함으로써 자신의 세계를 유지하고자 하는 보수적인 것이었다. 이 감시 목록에는 우리에게도 익숙한 루소, 볼테르 등의 계몽사상가들과 달랑베르, 디드로 등 소위 ‘백과전서파’가 등장한다. 여기서 중요한 점은 비록 한 경찰관의 눈이었을망정 국가라는 최고 권력기관의 눈에 이들이 ‘현실의 존재’로 포착되었다는 점이다. 계몽사상가들은 체제를 위협하는 아주 위험한 인물들로 그려지고 있는데(물론 그들의 재능은 경찰조차도 인정하고 있다), 그 의미는 작은 것이 아니다. 이전까지 생산과 변화는 거의 대부분 ‘육체노동’을 통한 것이었고 ‘지식’은 수도원 또는 일부 귀족계급에 한정되어 향유하던 것이었다. 그러나 계몽사상의 등장은 지식을 시민계급에까지 확장시켰고, 희미하기만 하던 지식인이란 계층을 실재로 만들고 영향력을 발휘하는 존재가 되도록 하였다. 당시 지배층들은 사람들이 계몽사상에 ‘오염’될 경우 자신의 기득권이 사라져 버릴 것이란 점을 직감적으로 이해하였던 것 같다. 문필가들에 대한 경찰관의 감시 기록은 대격변을 앞둔 시기의 새로운 사상계층의 등장을 반증하는 것이었다.

다섯 번째 논문인 <‘백과전서’의 인식론적 전략>은 달랑베르와 디드로가 주도하여 만들어진 계몽사상의 대표적인 작품인 [백과전서]의 서문을 분석한다. 이 논문은 계몽사상가들을 외부의 눈으로 관찰했던 앞의 논문과 반대로 계몽사상가들 본인이 프랑스 사회속에서 스스로 인식하고 있던 사명감과 역할을 보여준다. [백과전서]의 항목들은 단순히 알파벳 A부터 Z까지 순서대로 서술한 것이 아니라 명확한 원칙 속에서 작성된 것인데, 그 원칙이 바로 ‘지식의 나무’였다. 주목할 점은 지식의 나무에서는 이전 시기까지 가장 중요한 영역이었던 ‘신성의 영역’이 학문에서 배제되었다는 점이다. 이건 단순한 편집 상의 문제였을 뿐만 아니라 지식의 혁신이었다. 왜냐하면, 항목을 어떻게 배치하고, 어떤 것을 넣고 빼느냐는 결국 세계에 새로운 질서를 부여하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은 지식의 영역을 이성을 통해 증명가능하고 경험할 수 있는 현실로 제한하였고, 예술과 과학 등의 영역이 신의 섭리나 비과학적인 재능이 아니라 인식과 추론과 같은 정신적 능력에서 비롯되었음을 역설하였다. 그리고 그 주역은 바로 자신들, 즉 백과전서파였다.

(백과전서파인) 디드로와 달랑베르는 세계 속에 작용하는 신의 손을 찾았던 것이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행복을 만들어가며 일하던 사람들을 연구하였던 것이다. (중략) 백과전서파는 그 세계의 발전이 전적으로 자신들과 같은 지식인들의 영향력 덕분이라고 주장하였다. (p.281)

마지막 논문인 <낭만적 감수성 만들기>에서 활용된 자료는 한 시민의 도서주문서이다. 여기서 재미있는 것은 당시 독자들이 가졌던 루소에 대한 절대적인 애정을 엿볼 수 있다는 점이다(루소에게 보낸 당시 독자들의 팬레터를 보면 그야말로 노골적이 애정공세도 무척 많았다). 베스트셀러를 보면 그 당시 사람들의 관심사가 어디에 있느냐를 짐작해 볼 수 있듯이, 당시 사람들이 어떤 책을 읽었느냐는 그들의 인식을 알 수 있게 해주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루소의 책은 당시에 대단한 인기를 끌었는데, 로버트 단턴은 그 비결은 루소의 책이 독자들의 일상생활에서 완전히 ‘소화’되었기 때문이라고 지적한다. 그는 18세기 중반까지 독서가 ‘집중적(intensively)'이었다고 하였다. 성경이나 신앙서적, 싸구려 이야기 책 등 극소수의 책을 읽고 또 읽으면서 명상하거나 친목모임에서 크게 낭송하였던 것이 독서행태였다. 그에 비해 18세기 후반부터 독서는 ’광범위(extensively)'해졌다. 인쇄물도 광범위해지고, 소설과 저익 간행물이 생겼으며, 한 번의 독서에 흠뻑 빠지고 난 후 곧 다른 책으로 옮겨갔다. 그리고 이런 독서행태의 변화가 의미하는 바는 이것이다.

텍스트에 수동적으로 반응하는 대신에 책 속에 자신을 던져넣고 그 의미를 포착하여 자신의 삶에 적용시켜야 한다.(p.355)

대혁명 이전에 루소에게 열광했던 독자들은 이전의 ‘점잖은’ 사람들이 아니었다. 문자와 지식의 독점을 해체함으로써 사람들에게 세계에 대한 인식틀을 제공해 준 것이 계몽주의자들의 공헌이었다면, 텍스트에 몰입하고 현세계에서의 적용 가능성까지 나아가도록 한 것은 루소와 새로운 풍토를 담은 책의 공헌이었던 셈이다.

마무리하며....
로버트 단턴의 [고양이 대학살]은 무척 재미있는 책이다. 어렵다는 평가도 많지만 음식을 꼭꼭 씹듯이 찬찬히 보면 그 논리전개에 신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단턴의 책이 일종의 ‘결과론적 추론’이라는 한계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느낌을 받았다. 개별적인 사실들에서 보편성을 이끌어내기 보다는 이미 존재하는 역사적인 사건에 개별적인 사실들을 ‘끼워 맞춘 것’이 아닌가 하는 것이다. 이건 거의 무한대로 존재하는 과거의 사실 가운데 어떤 것에 초점을 맞추느냐에 따라 해석이 달라지는 상대주의로 회귀할 가능성을 내포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이미 프랑스대혁명 과정에서 왕족(귀족)-시민(부르주아)-노동자(프롤레타리아)의 대립구도를 알고 있다. 단턴의 작업을 조금 폄하하여 말하자면, 이런 대립구도를 보여줄 수 있는 ‘특수한’ 사건들을 찾은 것이다. 고양이 학살 사건에서 대립구도의 단초를 본 것인데, 만약 다른 역사가가 18세기 중후반 프랑스에서 주인과 견습공이 평화롭게 살아가는 모습을 발굴하여 제시한다면 어떻게 대답할 것인가.
사람들의 일상사는 분명 의미있는 작업이다. 그렇지만 랑케가 주장한 바 사료의 객관성과 보편타당성 역시 무시해 버리기에는 어려운 가치라는 점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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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네사 2011-08-17 20: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이고, 정말 공들여 쓰셨네요. 책을 아니 볼 수 없게 만드시는데요?
추천 하나 꾹 누르고 갑니다.^^*
 
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1.
‘앎’을 정원에 비유한 책제목부터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라고 하면 계절에 따라 다르게 피어나는 꽃들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선 나무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지식도 이와 같이 다양한 너비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에 넓고도 깊은 ‘앎의 정원’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적 제약도 있지만, 누구의 눈에나 잘 뜨이는 꽃과 나무가 있는 반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거나 다른 식물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앎의 정원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이든 동료든 ‘배움의 동반자’를 만나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가 그랬다. 그들은 함께 본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고 배우면서 넓고도 깊은 정원을 거닌다.

[知의 정원]은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 두 사람의 대담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책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원을 거니는 두 사람의 발자취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즉자적으로 피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들의 의견은 독서라는 정련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칸트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에서부터 신(神)에 대한 입장,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최강대국의 허점과 제국주의적 이면,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현대 정치와 정치 사상, 최신 과학의 성과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하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화합하면서 깊이 천착하는 두 사람의 의견은 역시나 책과 독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뿐인가. 책은 지식의 담지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가꾸어 온 꽃과 나무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본연의 기능과 함께 연령의 차이는 물론이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상이한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공간을 만들고, 뜻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기능하다. 이런 점에서 새삼 책의 위력에 감탄하게 된다.

2.
[知의 정원]은 다양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모든 주제를 이 자리에서 리뷰해 볼 수는 없겠으나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몇 군데 뽑아 보았다. 두 사람이 힘들게 탐구해 온 ‘앎의 정원’에 노력없이 숟가락 하나 얹어두고 달려드는 것 같아서 미안스럽지만 그래도 그 여정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앞으로 개인적인 독서 과정에서 생각해 볼 만한 주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첫째, 소리내어 책을 읽을 때 제대로 된 감각이 전달된다는 지적이다(사토, p.26).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이 얻는 정보에서 시각에 대한 의존도는 다른 모든 감각을 합친 것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의 지배 하에서도 음(音)의 세계, 소리의 세계는 인간의 감정을 뒤흔드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 독서하다가 어려운 부분의 의미를 깨우치고자 할 때, 외국어를 공부할 때 ‘낭독’을 사용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독서(또는 공부)방법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독재와 제국주의 하에서 지배자들은 반드시 소리를 장악하고자 하는데, 이런 점에서 소리의 세계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한 지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둘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눈으로 거리를 재는 것, 즉 목측(目測, 눈대중)이라고 한 지적이다(사토, p.45).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처럼 다양한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정치 영역을 ‘눈대중’의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다소 막연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분석틀이었다. 어떻게 보면 결국은 자신과 타인의 ‘범위’를 파악하는 능력에서 정책의 결정과 동지/적의 갈림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셋째, ‘신(神)의 수축’이다(사토, p.54). 과연 절대선인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리고 지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선인 신의 직무유기 또는 방기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신학과 철학의 오래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 대해 전능한 신이 어떤 변화로 수축된 이후 남겨진 공간에 물질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에서 악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신의 수축’ 논리인데, 일견 신의 절대성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유물론적 현실과 신의 존재를 공존시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제는 과연 ‘신의 수축’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설명이 쉽지 않다는 점.

넷째, 칸트 철학이 뉴턴이 정초한 근대의 시공간 개념에 활용되었다면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의 시공간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는 주장(다치바나, p.110) 및 자기모순적인 이율배반을 극복하기 위하여 칸트가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사토, p.111)은 근대 이후 서구 철학사상의 흐름에서 중요한 주제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철학사상이 자연과학과 결합하는 지점이라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가치가 크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20세기는 미국의 시대라고 정의한 것(다치바나, p.135) 역시 대담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란 물론 실체적 국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대명사의 의미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계몽된 이성의 시대에 왜 나치와 같은 변종(?)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고찰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이 실상은 미국 사회가 가진 전체주의 경향에 대한 경고라는 점 역시 의미있는 지적이다. 

여섯째, 내셔널리즘이나 공산주의는 이류 지식인 또는 이류 엘리트가 하는 운동(사토, p.213)이라는 주장과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비롯한 유토피아 사상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판 역시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도 개인적으로 권력구조의 변동이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인간 소외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상의 의의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에 판단의 근거를 둔 반공/반혁명은 이를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용인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3.
[知의 정원]에는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가 각각 200권씩 엄선한 400권의 책이 제시되어 있어서 이 책의 목록과 서지사항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배부른 기분이 들게 하는데, 이 목록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독서의 힘이다. 그리고 이 독서의 힘이 곧 ‘출판의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역사]란 책을 보았는데, 책읽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와 민간 단체, 그리고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엄청난(!!!) 노력을 들인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제시한 책의 목록을 보면 아직까지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중요한 서양 철학자/작가의 저작들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저작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의의를 부여한 연구서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부러웠던 점은 일본 현대사에 관련된 각종 사건들(군국주의 시대, 태평양전쟁, 전공투, 정치적 격변 등)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분석이 책으로 출판되어 문고나 신서로서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팔리기 어려운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는 출판사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이들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길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며 고민하는 당국자가 있다면 두 권의 책, 그러니까 [知의 정원]과 [독서국민의 역사]를 일독해 주기를 권하고 싶다.

뱀다리
다치바나 다카시야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사람이니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토 마사루는 생소한 논객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예리하면서 흥미로운 입장을 많이 제시해 주었다. 사토 마사루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온다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램을 마지막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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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4 로마제국 쇠망사 4
에드워드 기번 지음, 운수인.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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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4]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이 전개된다. 첫째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현재의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격동에 대한 소개이며, 둘째는 동로마제국의 중흥을 가져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와 그에 의해 집대성된 로마법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이다. 마지막 내용은 삼위일체 논쟁에 이어서 교회의 분열과 이단시비, 믿는 자들간의 불화와 폭력, 살인과 방화를 가져왔던 커다란 논쟁인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성육신 논쟁’이다.

2.
지난 6월에 열렸던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수많은 말의 성찬이 오고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우리나라가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후의 이영표 선수의 소감이었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역할을 완수했다” 스스로 부여한, 또는 사회가 부여해준 역할을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도감이 그야말로 절절하게 느껴졌다.
역사속에서 로마 제국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천착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로마 제국의 절반을 이루던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서구 역사에서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상의 여러 민족이 몰려들어 휴식을 취했던 높은 나무 그늘이 이제는 잎도, 가지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줄기만이 땅 위에서 시들어 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루터기만 남아도 거목(巨木) 주위에는 생명의 원천이 살아있고, 그 원천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법. 서로마제국이라는 거목이 서있던 이탈리아 반도, 갈리아 지역, 이베리아 반도, 브리타니아 등에서는 오현제 시대를 전후로 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왔거나 로마 제국을 침략해 왔던 이민족들이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여 잎을 늘이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로마라는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 타협하고, 서로 대립하고, 서로 동맹하면서 지금의 ‘유럽’의 틀을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그것도 로마의 전통이 깡그리 무시된 것이 아니라 로마의 문화, 로마의 종교, 로마의 언어, 로마의 법체계 등과 같은 것이 계승되면서 말이다. 이후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로마의 세례를 받은 ‘로마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 역사가 ‘로마’에 부여한 역할인 셈이다.

3.
흔히 지금의 서구를 존재하게 만든 문화사적 원류로 2H,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꼽는다. 그에 비해 로마는 좀 더 실용적인 영역, 그러니까 법률이나 건축과 같은 제도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부여받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이건 좀 억울한 대우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도시국가 차원에서만 유행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을 보호한 것도 로마였으며, 일개 지방의 신흥 종교에 불과했던 크리스트교를 보호하여 세계종교화 한 것도 로마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통치체계를 갖추면서도 포용성과 다양성에서 탁월함을 보였던 로마라는 보호망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리스 철학과 크리스트교가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는 돌무더기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고, 크리스트교는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와 끊임없이 대립한 끝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유럽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이런 위상 격하(?)가 사실 꼭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로마의 역사와 의의를 다룬 책에서 로마법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면 그 책의 충실성은 의심받기 십상일 것이다. 로마와 ‘법’은 마치 쌍둥이처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로마가 확립한 법체계와 법철학은 현대의 많은 국가들 속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로마법은 로마로 하여금 단지 역사적 재미 차원에서나 교양지식 습득 차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배우고 까먹어 버리는 1,000년 전에 사라져버린 국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맞닿는 점점을 가진 ‘살아 숨쉬는’ 국가가 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마의 법체계는 유럽 전역,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륙의 법체계(특히 민법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산넘고 물건너 바다 건너서’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4.
고대 세계가 수용했던 법의 기본 원칙은 소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등가물로의 되갚음 또는 사적 복수의 허용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법률의 특성이 아니다. 범죄 행위 또는 불법 행위와 그 행위에 따르는 보상 행위를 물리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는 순간 ‘법률’이 가지는 조정 능력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굳이 연결시키자면 관습법 정도라고 해야 하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부합하는 듯한 관습적 특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구약 성서에서도, 동양 사회의 옛 법률에서도 확인되는데, 상대적으로 야만 상태에 있던 로마 근방의 이민족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더욱 확고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로마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이런 고대사회의 관습적 원칙과 질적으로 다른 원칙, 즉, ‘법률’이라는 공식적인 규제를 구성원들에게 관철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전해 가면서 그 규제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물론 로마라고 하여 법에 의한 규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래도 로마 사회는 고대의 무질서했던 사법(私法)체계를 공법(公法)체계로 바꾸어 내었다. 또한 범죄에 주로 적용되던 형법체계를 넘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족, 이혼, 상속 등)와 재산상의 관계(소유권, 소유의 이전 등), 채권/채무관계(계약, 이익 및 손해의 발생 등)라는 민법체계에까지 법률에 의한 지배를 확장시켰다는 점 역시 로마법의 중요한 의의가 되겠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구약성서에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長子權)을 산 야곱의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왜 그는 형을 속여서까지(나중엔 아버지까지 속인다) 장자의 권한에 집착했을까? 당시 상속제도는 물질적인 재산에서부터 집안에서의 권위, 신의 축복까지 모든 것을 한 명의 아들(주로 맏아들)에게만 ‘몰빵’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과 생명까지도 가부장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지금 우리 상속제도의 원칙은 ‘자녀 균등상속’이다. 자녀들이 동등하게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한을 법에 보장하고 있는데, 만약 부모가 한 명의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임의로 상속할 경우 소송을 통해 일정한 자신들의 몫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부장의 개인적 선택에서 벗어나 균등상속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로마법이었다. 법적 지배는 이렇게 가족 내로까지 파고들었고, 개인의 삶 속에 ‘합리성’이란 관념을 불어넣는다.

소유권과 채권/채무 관계는 어떠한가. 좀 복잡하지만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나는 건물을 짓기 위해서 A란 사람에게 땅을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 이 땅은 A의 소유가 아니라 제3자인 B의 소유였다. A는 돈을 벌었지만, B는 자기 땅에 갑자기 내가 나타나 건물을 짓겠다고 주장하는 사태였고, 나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내 땅에서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사태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이 예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법적 분쟁이다. A는 ‘부당이익’을 얻었으므로 나에게 대금을 돌려주고, B에게는 땅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아마 A에게는 추가로 사기죄가 적용되어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야 할 것이다.
로마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복잡해졌고, 그 복잡성에 비례하여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실제 사건은 위의 예처럼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복잡한 권리관계가 뒤엉켜 있고,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연관되어 있어서 마치 고르기아스 매듭 앞에 선 알렉산더 대왕처럼 골치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건의 해결방법으로 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사적 결정을 인정한다고 해 보자. 물리적 폭력 수단을 갖추고 있거나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모든 결정권과 재산을 독점하게 될 것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로마법은 이런 약속(개인과 개인의 약속, 개인과 국가의 약속), 약속에서 얻어지는 이익(정당한 이익, 부당이익)과 손해를 면밀하게 규정하고 그 법률관계를 공개적으로 적시함으로써 사회의 변동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런 로마법의 체계는 독일과 일본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 민법의 기본틀(어떤 조항은 거의 그대로)을 이루었다.

5.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크고 작은 논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이름이라도 들어보았던 논쟁은 세 가지인데, 삼위일체 논쟁, 성육신 논쟁, 성상 숭배 논쟁이 그것이다. 이번 [로마제국 쇠망사 4]의 마지막 장은 이 가운데 두 번째 논쟁, 즉,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성육신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성육신 논쟁이란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神性)이냐 인성(人性)이냐 하는 것이다. 양쪽으로 갈리던 의견은 에페수스 공의회와 칼게돈 공의회를 거치면서 신성과 인성이 완벽히 조화되어 결합된 양성론(兩性論)을 정통파 교리로 인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신성이든 인성이든 어느 한 쪽만을 인정하던 단성론(單性論)은 이단으로 몰리게 되고, 단성론자들은 큰 박해를 당하게 된다.

신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한대로 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크리스트교의) 창시자의 법을 실천하는 대신 그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에 열을 올렸던(p.505)' 이 논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박해와 순교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크리스트교가 교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순수한 믿음과 실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형식적 틀에 집작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참람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을 인간들이 정확히 아는 것에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이단으로 몰린 수많은 단성론자들이 죽음과 투옥, 추방과 유배를 당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에게 이단의 굴레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사익을 얻고자 노력했던 소위 ’정통파‘ 추종자들의 모습에 슬퍼하지 않으셨을까?

6.
[로마제국 쇠망사]의 네 번째 권에서 단연 주목받는 인물은 동로마 제국의 중흥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라 할 것이다. 천혜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에 의지한 동로마제국은 쇠약해진 국력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을 존속하며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지켜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아프리카와 서방의 잃어버렸던 속주를 수복하였고, 페르시아와 야만족들에게 빼앗겼던 동방 아시아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에드워드 기번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를 설명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들이고 있다(이 책의 거의 2/3 이상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오히려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시기를 반짝거리게 할 수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라는 개인의 명민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의 쇠망을 가져온 로마 정신의 몰락과 로마 군대의 나약함이었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중흥은 꺼져가던 촛불이 마지막으로 피워올린 불꽃에 그쳐 버렸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외국에서 얻은 성과는 동로마제국의 내부의 힘을 배양할 개혁조치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현장에서 퇴장할 치명적인 약점들을 본격적으로 노출하기 시작했다. 언제 창검을 자신들에게 돌릴지 모르는 신뢰할 수 없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시민정신의 실종, 다른 국가들의 침략과 협박을 금전적 보상으로 무마해야만 했던 나약함, 군사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를 얻은 신하 또는 동료에 대한 질투와 모함, 지배적 종교(크리스트교)가 보여주고 있는 독단과 독선. 이 모든 것이 동로마제국을 갉아먹고 있었고, 이제 역사는 동로마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두 주역을 준비시킨다. 동방의 마호메트와 서방의 십자군이 그 주역이었다.

시민들은 지쳐 있었고 병사들은 돈을 받지 못했다. 병사들의 빈곤은 약탈과 나태라는 특권으로 사방에 해를 끼치고서야 달랠 수 있었다. 이미 체불된 급여는 용기나 위험이라는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의 이익만을 가로채는 관리들이 사기를 치며 지연시키고 가로채고 있었다. 군대는 공적‧사적인 곤란 때문에 모집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더구나 적을 앞에 두고는 그 수가 언제나 모자랐다. 국민 정신의 부족은 신뢰할 수 없고 무질서한 야만족 용병으로 메워졌다. 덕성과 자유가 사라져도 존속했던 군인의 명예마저도 거의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전 세대와 비교해 전례없이 불어난 수의 장군들이 일하는 것은 오로지 동료들의 성공을 막거나 평판을 해치기 위해서만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경험상, 공훈은 황제의 질투를 불러일으키지만 실수나 죄는 너그러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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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1 - 로마인의 피 로마 서브 로사 1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1.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인 책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책을 통해 느끼는 재미의 정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의 로마 거리를 손에 잡힐듯이 생생하게 펼쳐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막 카이사르가 출생한 시기, 그러니까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키케로, 술라, 크라수스 등과 작가가 창조해 낸 가공인물(탐정 역할)인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바로 옆에서 살아 숨을 내쉬는 듯 하고, 그들이 활약하던 로마의 거리, 뒷골목, 교외지역들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군중들이 모인 포룸(forum)에서의 재판, 그리고 딱 지금 날씨처럼 후텁지근한 로마의 날씨는 ‘역사 속의 로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 줄거리를 정리해 보자.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라는 한 귀족이 야심한 시각, 로마의 뒷골목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이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고발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모든 신들에게 버림받고, 복수의 여신이 세상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존속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신출내기 변호사였던 키케로는 ‘로마의 정의’를 지키고 시민의 생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존속살인범으로 기소된 아들 로스키우스의 무죄를 밝히고자 변론을 맡는다. 그리고 필요한 증거들을 수집하기 위해 ‘더듬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고르디아누스를 고용한다. 과연 포룸(forum)에서의 재판까지 남은 8일 동안 키케로와 고르디아누스는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살해한 진범을 찾아낼 수 있을까?

2.
당시 로마의 지배자는 독재관 술라였다. 그는 원로원 귀족에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로마인의 생명과 명예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명의 변호사 키케로는 목숨을 걸고 당대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가 밝힌 이 ‘무모한 도전’의 이유는 로마의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그럼 ‘로마의 정의’란 무엇일까? 아니, 좀 더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

역사를 보면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 가치’란 것이 사실 현실에서는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는 어떤가? 지금 지구상의 거의 모든 정치인과 정부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는 ‘민주주의’는 또 어떠한가. 인류가 만들어 온 무수히 많은 정치제도와 사회제도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해 온 ‘놓칠 수 없는’ 가치는 역설적으로 단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가치이기도 했다.
‘정의(justice)’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싸워 온 가치가 정의이기도 했지만,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신군부 세력이 내세운 가치 역시 ‘사회정의’였다. 오죽했으면 그들이 모여 만든 정당 이름에도 정의는 사용되었다. 이 쯤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한다는 이상적 가치라는 절대성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실제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재단되고, 권력에 의해 농단되는 것이 이상적 가치가 되어 버린다.

정의라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선 [로마 서브 로사-로마인의 피]의 마지막 장(chapter)의 제목이 ‘정의’이다. 이 책을 통해 제시된 핵심어인 정의는 저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쯤 생각해 보길 원했을 가치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대충 ‘책 좀 읽어 본’ 독자들이야 짐작하겠지만 키케로는 로마 군중이 모인 포룸(forum)에서 피고의 무죄를 감동적으로 역설하여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그는 승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최고 권력자 술라의 방문을 받는다. 여기서 당대 로마의 대표적 두 인물의 ‘정의론’이 펼쳐지는데, 이들의 논쟁을 통해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존속살인사건의 새로운 진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정의’라는 절대가치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술라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간단하게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로마 공화정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던 공화정 말기. 로마는 권력을 사이에 둔 분열에 휩싸인다.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던 ‘귀족파’ 술라와 평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평민파’ 마리우스의 내전이 그것인데, 최종 승리자는 술라였다. 그는 살생부를 만들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재산을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헐값으로 넘겨준다. 고문과 무고, 밀고가 난무하고 로마의 시민들은 탐욕과 쾌락에만 탐닉한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술라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마치 ‘전두환 장군’이 만든 정당이 ‘민주정의당’이듯, 독재자 술라의 입에서 나오는 ‘정의론’은 오히려 절대 가치의 정의를 농단하고 있다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 키케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무고한 피고의 결백을 믿고 훌륭한 변론에서 그가 보여준 로마의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행동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승리 이후, 그의 집을 방문한 술라와의 논쟁은 그가 주장한 정의 속에 뭔가 ‘불순한’ 것이 끼어들어가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그 불순한 것이 무엇인가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독자들이 각자 찾아내야 할 몫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와 술라의 논쟁 이후 키케로의 고결한 정의론에는 사실 적지 않은 그늘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로마 시리즈’의 제목이 [로마 서브 로사]인지도 모르겠다. 직역하면 ‘장미 아래의 로마’ 정도일텐데 비밀 회합 장소에 장미를 걸어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마의 모습이 아니라 그 뒷이야기, 로마의 진정한 속살을 보여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독재관으로서의 술라, 명웅변가로서의 키케로가 화려한 외양이라면, ‘서브 로사’는 좀 더 다른 면이 있지 않았겠는가.

3.
로마의 광장, 즉, 포룸(forum) 중에는 야누스 신상을 세워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야누스 신은 잘 알려진대로 반대쪽을 향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 그래서 양면성과 이중성을 대표하는 신이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장소, 절대적 가치가 지배해야 할 장소에 상대적 가치를 대변하는 야누스 신상이 서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로마인들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정의의 가치는 당연히 모두가 복종해야 할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실현과정은 상대적인 것임을. 그래서 정의를 말하는 무수히 많은 정치인, 정치 단체들 가운데 어떤 정의가 과연 상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며, 어떤 정의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할지의 문제에 항상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정의는 재단되고 농단되어 바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와 힘에 대한 최고의 아포리즘은 역시 파스칼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팡세] 298번째 글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오싹 돋곤 했었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뱀다리
근데 이 책에 ‘지적 역사추리소설의 결정판’이라는 어마어마한(!!!) 선전문구가 붙었던데, 개인적으로는 트릭 자체는 뭔가 기발하거나 반전이 기가 막히다던가 하는 점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건 제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고, 꼭 멋진 트릭을 써야만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 외에도 이 책에서 재미와 매력을 느낄 점이 아주 많다는 점이죠. 10권의 시리즈 중에 현재 3권까지 번역, 출판되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읽어볼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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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제국 쇠망사 3 로마제국 쇠망사 3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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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 상의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는 로마를 세울 즈음에 독수리 열 두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독수리들은 열 두 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호사가들은 열 두 세기가 끝나는 때를 서기 447년으로 잡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예언(?)이 얼추 맞았다.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제국 멸망이 476년이었던 것이다.
‘독수리 신탁’을 받아들인다면 로마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천수를 누리고’ 멸망한 셈이다(19년이나 더 갔다!!!). 그렇다면 독수리가 한 스무 마리만 더 날았다면 지금 우리는 세계 지도에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가 아닌 ‘로마 제국’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기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번은 로마 쇠망의 원인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예방가능한 것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날아가는 독수리 떼보다 더 확실한 징조가 로마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로마 정부는 적들에게는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되는 반면 국민들에게는 더 혐오스럽고 압제적이 되어 갔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세금은 불어났고 절약의 필요성은 요구될수록 오히려 반비례하여 무시되었다. 부자들은 부당한 행위로 가난한 자들에게 불공평한 짐을 떠넘겼고, 빈민들의 고통을 경감해 줄 수 있는 면제 방법마저 속임수를 통해 빼앗아 버렸다. 재산을 몰수하고 육체를 고문하는 가혹한 심문에 몰린 발렌티니아누스의 국민들은 차라리 더 단순한 야만인들의 폭정 쪽을 택했다. 그들은 숲과 산으로 도주하거나 야만족들 밑에서 돈을 받고 하인으로 일하는 비천한 생활을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전 세계인이 열망했던 로마 시민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버린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 (p.368)

2.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은 국내 각 세력들의 대립과 반란,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 교회 내 교파들의 이단논쟁으로 혼란을 겪었다. 이 와중에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국내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로마의 위세로써 이민족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국교로 격상된 그리스도교는 제국 시민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물론, 이민족들의 교화에도 이바지함으로써 로마의 위상을 높였다. 과거의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는 평화롭고 안온했으며 로마 제국의 명예가 지켜졌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고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로마의 진수는 막을 내렸다. (p.89)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중병 환자였던 로마 제국이 피워낸 ‘마지막 불꽃’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한 후계자들과 권력욕에 불타는 총신들의 대립으로 인해 동서로 분할된 로마 제국은 훈족, 반달족, 고트족, 게르만족 등 주변 민족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민족의 침입은 서로마 제국에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었고, 동방의 페르시아를 제외하면 큰 위협을 줄 민족이 없었던 동로마 제국은 그나마 행운을 잡은 셈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세계사 시간에 서양의 중세 부분은 ‘훈족의 압박과 게르만족의 이동’이라는 장(chapter)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제국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역사 전체에서 비일비재했던 일 아니었던가? 문제는 과거 같았으면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승리했을’ 로마의 힘이 더 이상 발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치지 않는 투혼으로 카르타고인들과 갈리아인들을 경악시켰던 로마의 힘은 이제 소진되었다. 이민족들의 침입 앞에 속수무책으로 약탈을 당하다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겨우 위기를 넘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3.
나는 개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들과 로마의 가장 큰 힘은 ‘내 조국은 내 손으로 직접 방어하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재산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시민 정신이야말로 테베레 강변의 일개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를 전 지중해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팽창시킨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공화정 시대에는 귀족들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이, 제정 시대에는 황제들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전선의 맨 앞에 섰다.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시민 계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장을 위하여 자비를 들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가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나선 로마 군대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로마인들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로마인들에게는 결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의 침입으로 로마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라.

한니발의 원정 시기에 (중략) 당시의 원로원 의원들은 빠짐없이 미관 말직에서든 고위직에서든 군복무 임기를 다했다. 한니발이 로마에서 3마일 떨어진 아나오 강변에 진을 쳤을 때, 곧 그가 막사를 친 땅이 공개 경매에서 제값을 받고 팔렸다. (p.167)

한니발이 점령한 땅인데도 땅값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땅을 구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 적장이 점령한 땅인데도 반드시 자신에게 소유권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보통 자신감이 아니라 높은 긍지와 믿음의 표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몇몇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병력은 금방 보충되었고, 마지막 승리는 언제나 로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말기가 되자 이런 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신상의 안락 또는 현실에서의 쾌락일 뿐이었고, 이제 국가의 방위는 스스로의 손이 아닌 이민족 용병들에게 맡겨진다. 간단히 말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셈인데, 더 한심한 것은 몇 차례나 이민족 대장들에게 로마의 국토가 유린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율이 느슨해지고 훈련을 하지 않게 되면서 병사들은 군무의 피로를 버텨 낼 힘도 의지도 약해졌다. (중략) 무기력해진 병사들은 그들 자신과 국가의 방어를 포기했다. 그들의 나약함과 태만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p.60)

병역(兵役)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습이 만연하게 되었는가. (중략) 시민들과 국민들은 돈을 주고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중대한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리하여 이 의무는 야만족 용병들에게 넘어갔다. (p.122)

4.
진취적인 시민 정신과 함께 로마의 성장을 가져온 원동력은 세계제국으로서의 관용과 포용성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전쟁에서 패한 피정복민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생존과 현실의 유지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정복자가 수용할 경우 지배에 대한 순응도과 통합의식은 급격히 높아지게 된다. 아직까지 민족국가의 개념이나 제국주의-식민지라는 인식이 없었고 인적 자원에 사회의 발전을 의존하던 고대 사회에서 ‘승자의 포용과 아량’은 국가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신교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가 광신적인 신앙과 배타적인 포교 논리를 가진 일신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까지 받아들였다는 점은 보통 중요한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과 시민들의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어 버리자 어느 순간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과도하게 주장하고, 진리와 믿음의 독점성으로 인해 내부에서조차 ‘너죽고 나살자’ 식의 이단논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후 로마 제국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박해’가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중략) 이교의식 자체를 벌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위배되는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 묵인한 자에게도 우상 숭배죄를 폭로하거나 처벌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적지 않은 벌금이 부과되었다. (중략)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그의 자손 대대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거듭 강화되었다. (p.77)

간단히 말해 정통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아 우상숭배이거나 이단 교파인 경우에는 가차없이 생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입혀도 무방하다는 주장인데, 그 논리의 이면에는 정통파라면, 모든 이단자는 천상과 지상의 지고한 권력에 거역하는 역적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권력은 각각 죄인의 정신과 육체에 재판권과 처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독선과 광신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독선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광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종교재판, 마녀재판, 이단재판.... 이런 것들이었다.

종교 재판관(이단 심문관)이라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의 관직이 처음 설치된 것도 테오도시우스 치세하에서였다. (p.22)

뿐만 아니라 이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합법적인 재산증식, 병역회피, 사치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순수한 신앙에서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로마의 야심가들에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통로로 받아들여졌다. 성직에서 성공한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세워 그들의 동료를 늘려나갔으며, 돈 많은 귀족 집안 또는 황실과 연계하여 자신의 수도원을 지원해 줄 개종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결국 비대해진 수도원은 초심을 잃게 되었고, 귀족 청년들이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까지 타락한다.

인근 지방과 도시로까지 세력을 확장한 유명한 수도원의 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증가했고, 사고로 줄어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중략) 수도원이 번성하면서 규율은 무너졌고, 점차 부자라는 자만심에 젖어 마침내는 사치와 소비에 탐닉하게 되었다. (중략) 수도사들은 이제 수도원을 창설할 당시의 목표를 잊고 자신들이 저버린 세상의 헛된 감각적 쾌락을 좇았는가 하면, 창시자들이 엄격하게 덕행을 쌓아 획득한 부를 철면피하게 낭비하였다. (p.447)

5.
유럽의 역사에서 로마 제국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로마는 현재 유럽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도록 만든 ‘멍석을 깔아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비록 후세 역사가들의 시대 구분이겠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 고대의 종언임과 동시에 중세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자양분과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종교적/정신적 자양분은 로마라는 한 용광로에서 녹아들었고, 로마의 강역 확대와 함께 도나우 강에서 브리타니아 지방까지 지금의 전 유럽 땅으로 확대되었다. 도저히 같은 문화권으로 편성될 것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련된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과 야만적이고 거친 갈리아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비록 국가는 달라도 공통적인 경제체제와 공통적인 정치체제를 영위하게 된 것이다.
서로마 제국 이후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게르만인들이었다. 로마라는 명칭의 현실속의 국가는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 즉위와 동시에 종결되었지만 문화적 상징물로서 로마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서로마 멸망과 더불어 지금의 프랑스 및 독일 지역에서 번영하기 시작한 프랑크 족의 클로비스 대왕에게 눈을 돌린 것과 중세 사회의 중요한 모습 중 하나인 수도원의 발흥에 관심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던 클로비스 대왕은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함으로써 향후 중세 시대의 지배적 생산관계인 분봉제도와 농노제도의 기틀을 잡았으며, 이제 서구인들의 정신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수도원이란 공간을 통해 세속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문화의 전수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은 말이나 갑옷 등으로 보상받는 대신, 공적이나 총애의 정도에 따라 봉토(benefice)를 받았다. 이것이 봉건 영지의 최초 명칭이자 단순한 형태라 할 수 있다. (p.511)

6.
동로마 제국이 남긴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맞았지만 로마는 단순히 150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역사적 국가로만 남아 있지 않다. 로마가 성장할 때, 그리고 위기에서 일어날 때에는 예외없이 헌신적인 지도자와 시민계급이 발견됨을 기억해야 한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격찬하는 오현제 시대는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직접 가장 미천한 자와 같이 군대의 선두에 서고, 권력의 자리는 독점이 아니라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과 함께 분점하다가 죽으면서 양위하던 시기였다. 주위의 많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정복하고, 약탈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로마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그들을 로마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이제 유럽 지역에서 다시는 로마처럼 성장한 나라는 등장하지 않았다. 샤를마뉴 대제도,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지리적인 영토나 영향권은 로마에 버금갈 정도로 넓게 확보하였으나 로마와 같은 권력관계 및 문화적 성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은 하나의 문화적/정신적 유산을 배경으로 한 서로 다른 민족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직접적인 권위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교도 형제들을 영적으로 결합시키는 종교적 친교였다. (중략) 그 결과 서서히 유사한 풍속과 공통된 법제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근대 유럽의 독립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여러 나라들을 유럽 이외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해 주는 특징이 되었다.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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