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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서브 로사 1 - 로마인의 피 ㅣ 로마 서브 로사 1
스티븐 세일러 지음, 박웅희 옮김 / 추수밭(청림출판) / 2009년 12월
평점 :
절판

1.
아주 재미있고 매력적인 책이었다. 물론 사람마다 책을 통해 느끼는 재미의 정도와 의미를 부여하는 지점이 다르겠지만 최소한 나에게 있어서 이 책은 지금으로부터 약 2,100년 전의 로마 거리를 손에 잡힐듯이 생생하게 펼쳐놓은 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이제 막 카이사르가 출생한 시기, 그러니까 로마 공화정 말기의 실존 인물이었던 키케로, 술라, 크라수스 등과 작가가 창조해 낸 가공인물(탐정 역할)인 ‘더듬이’ 고르디아누스는 바로 옆에서 살아 숨을 내쉬는 듯 하고, 그들이 활약하던 로마의 거리, 뒷골목, 교외지역들과 그들이 만나는 사람들, 군중들이 모인 포룸(forum)에서의 재판, 그리고 딱 지금 날씨처럼 후텁지근한 로마의 날씨는 ‘역사 속의 로마’에 생명력을 부여하고 있다.
먼저 간단하게 줄거리를 정리해 보자.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라는 한 귀족이 야심한 시각, 로마의 뒷골목에서 무참하게 살해당한다. 그런데 이 살인사건의 주범으로 고발된 사람이 바로 그의 아들이었다. 모든 신들에게 버림받고, 복수의 여신이 세상끝까지라도 따라가서 반드시 벌을 내린다는 존속살인사건이 발생한 것이다. 신출내기 변호사였던 키케로는 ‘로마의 정의’를 지키고 시민의 생명을 수호하기 위하여 존속살인범으로 기소된 아들 로스키우스의 무죄를 밝히고자 변론을 맡는다. 그리고 필요한 증거들을 수집하기 위해 ‘더듬이’란 별명으로 알려진 고르디아누스를 고용한다. 과연 포룸(forum)에서의 재판까지 남은 8일 동안 키케로와 고르디아누스는 섹스투스 로스키우스를 살해한 진범을 찾아낼 수 있을까?
2.
당시 로마의 지배자는 독재관 술라였다. 그는 원로원 귀족에서부터 노예에 이르기까지 모든 로마인의 생명과 명예를 좌지우지할 수 있는 사람이었다. 무명의 변호사 키케로는 목숨을 걸고 당대 최고 권력자에게 정면으로 도전한다. 그가 밝힌 이 ‘무모한 도전’의 이유는 로마의 정의를 지켜내기 위해서이다. 그럼 ‘로마의 정의’란 무엇일까? 아니, 좀 더 일반화시켜서 말하자면 ‘정의란 무엇인가?’
역사를 보면 인간이 지향하는 ‘이상적 가치’란 것이 사실 현실에서는 얼마나 취약한 것이었는지를 잘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프랑스 대혁명의 이상이었던 자유, 평등, 박애는 어떤가? 지금 지구상의 거의 모든 정치인과 정부들이 전가의 보도처럼 말하는 ‘민주주의’는 또 어떠한가. 인류가 만들어 온 무수히 많은 정치제도와 사회제도에서 거의 빼놓지 않고 등장해 온 ‘놓칠 수 없는’ 가치는 역설적으로 단 한 번도 제대로 구현되지 못한 가치이기도 했다.
‘정의(justice)’도 그랬다.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 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해서 싸워 온 가치가 정의이기도 했지만, 1980년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집권한 신군부 세력이 내세운 가치 역시 ‘사회정의’였다. 오죽했으면 그들이 모여 만든 정당 이름에도 정의는 사용되었다. 이 쯤되면 인간이라면 누구나 추구해야 한다는 이상적 가치라는 절대성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로 전락하고, 실제로는 각자의 입장에 따라 재단되고, 권력에 의해 농단되는 것이 이상적 가치가 되어 버린다.
정의라는 가치를 이야기하는 이유는 세 가지이다. 우선 [로마 서브 로사-로마인의 피]의 마지막 장(chapter)의 제목이 ‘정의’이다. 이 책을 통해 제시된 핵심어인 정의는 저자가 독자들로 하여금 한 번쯤 생각해 보길 원했을 가치였다고 생각한다. 두 번째로 대충 ‘책 좀 읽어 본’ 독자들이야 짐작하겠지만 키케로는 로마 군중이 모인 포룸(forum)에서 피고의 무죄를 감동적으로 역설하여 재판을 승리로 이끈다. 그리고 그는 승리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최고 권력자 술라의 방문을 받는다. 여기서 당대 로마의 대표적 두 인물의 ‘정의론’이 펼쳐지는데, 이들의 논쟁을 통해 섹스투스 로스키우스의 존속살인사건의 새로운 진상이 드러난다. 그래서 마지막 세 번째로 이 진실을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 ‘정의’라는 절대가치의 양면성을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술라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간단하게 당시 상황을 이해할 필요가 있겠다. 로마 공화정이 곳곳에서 파열음을 내던 공화정 말기. 로마는 권력을 사이에 둔 분열에 휩싸인다. 원로원의 입장을 대변하던 ‘귀족파’ 술라와 평민들의 입장을 대변하던 ‘평민파’ 마리우스의 내전이 그것인데, 최종 승리자는 술라였다. 그는 살생부를 만들어 반대파를 무자비하게 처형했을 뿐만 아니라 그들의 모든 재산을 자신의 지지자들에게 온갖 술수를 동원하여 헐값으로 넘겨준다. 고문과 무고, 밀고가 난무하고 로마의 시민들은 탐욕과 쾌락에만 탐닉한다.
다시 한 번 질문해 보자. 술라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마치 ‘전두환 장군’이 만든 정당이 ‘민주정의당’이듯, 독재자 술라의 입에서 나오는 ‘정의론’은 오히려 절대 가치의 정의를 농단하고 있다는 이율배반적 감정을 느끼게 한다.
그럼 질문을 바꿔 보자. 키케로는 정의로운 사람이었을까? 무고한 피고의 결백을 믿고 훌륭한 변론에서 그가 보여준 로마의 정의에 대한 확고한 신념과 행동은 그야말로 나무랄 데가 없는 것이었다. 그러나 법정에서의 승리 이후, 그의 집을 방문한 술라와의 논쟁은 그가 주장한 정의 속에 뭔가 ‘불순한’ 것이 끼어들어가 있음을 직감하게 한다. 그 불순한 것이 무엇인가는 스포일러가 될 수도 있고, 독자들이 각자 찾아내야 할 몫이긴 하지만 어쨌거나 그와 술라의 논쟁 이후 키케로의 고결한 정의론에는 사실 적지 않은 그늘이 있음을 느끼게 될 것이다.
어쩌면 그래서 이 ‘로마 시리즈’의 제목이 [로마 서브 로사]인지도 모르겠다. 직역하면 ‘장미 아래의 로마’ 정도일텐데 비밀 회합 장소에 장미를 걸어 두었다는 데서 유래한 표현으로서, 우리에게 잘 알려진 로마의 모습이 아니라 그 뒷이야기, 로마의 진정한 속살을 보여 준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독재관으로서의 술라, 명웅변가로서의 키케로가 화려한 외양이라면, ‘서브 로사’는 좀 더 다른 면이 있지 않았겠는가.
3.
로마의 광장, 즉, 포룸(forum) 중에는 야누스 신상을 세워둔 곳이 있었다고 한다. 야누스 신은 잘 알려진대로 반대쪽을 향한 두 개의 얼굴을 가진 신, 그래서 양면성과 이중성을 대표하는 신이다. 정의가 실현되어야 할 장소, 절대적 가치가 지배해야 할 장소에 상대적 가치를 대변하는 야누스 신상이 서 있는 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아마도 로마인들도 알고 있지 않았을까? 정의의 가치는 당연히 모두가 복종해야 할 절대적인 것이지만, 그 실현과정은 상대적인 것임을. 그래서 정의를 말하는 무수히 많은 정치인, 정치 단체들 가운데 어떤 정의가 과연 상대적으로(!!!!!) 올바른 것이며, 어떤 정의에 힘을 실어 주어야 할지의 문제에 항상 민감하게 깨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만약 그렇지 못한다면 정의는 재단되고 농단되어 바로 시민의 생명과 안전을 위협하는 칼로 되돌아 올 수 있다는 점을 말이다.
개인적으로 알고 있는 정의와 힘에 대한 최고의 아포리즘은 역시 파스칼의 것이 아닌가 한다. 나는 [팡세] 298번째 글을 읽을 때마다 소름이 오싹 돋곤 했었다.
힘없는 정의는 무기력하다. 정의없는 힘은 전제적이다.
힘없는 정의는 반격을 받는데, 왜냐하면 항상 사악한 자들이 있기 때문이다.
정의없는 힘은 비난을 받는다. 따라서 정의와 힘을 결합해야 한다.
그리고 이를 위해서는 정당한 것이 강해지거나 강한 것이 정당해져야 한다.
그런데 사람들은 정당한 것을 강한 것으로 만들 수 없었기 때문에, 그들은 강한 것을 정당한 것으로 만들었다.
뱀다리
근데 이 책에 ‘지적 역사추리소설의 결정판’이라는 어마어마한(!!!) 선전문구가 붙었던데, 개인적으로는 트릭 자체는 뭔가 기발하거나 반전이 기가 막히다던가 하는 점은 없지 않았나 싶습니다. 물론 그건 제 개인적인 취향일 뿐이고, 꼭 멋진 트릭을 써야만 한다는 법도 없습니다. 그리고 더 중요한 것은 그런 것들 외에도 이 책에서 재미와 매력을 느낄 점이 아주 많다는 점이죠. 10권의 시리즈 중에 현재 3권까지 번역, 출판되었는데 기회가 되는대로 계속 읽어볼 생각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