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의 정원
다치바나 다카시.사토 마사루 지음, 박연정 옮김 / 예문 / 2010년 8월
평점 :
품절


 

1.
‘앎’을 정원에 비유한 책제목부터가 이 책이 말하고자 하는 바를 잘 보여주었다. 일반적으로 정원이라고 하면 계절에 따라 다르게 피어나는 꽃들과 묵묵히 자기 자리를 지키고 선 나무들이 어울려 있는 모습이 떠오른다. 지식도 이와 같이 다양한 너비와 깊이를 가지고 있기에 넓고도 깊은 ‘앎의 정원’을 한 사람의 능력으로 섭렵한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시간적 제약도 있지만, 누구의 눈에나 잘 뜨이는 꽃과 나무가 있는 반면 깊은 곳에 숨겨져 있거나 다른 식물들에 가려져서 잘 보이지 않는 것들도 부지기수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러한 앎의 정원을 탐구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스승이든 동료든 ‘배움의 동반자’를 만나 같이 돌아다니는 것이다.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가 그랬다. 그들은 함께 본 것에 대해 의견을 나누고, 미처 보지 못한 것에 대해서는 알려주고 배우면서 넓고도 깊은 정원을 거닌다.

[知의 정원]은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 두 사람의 대담을 통해서 기본적으로 책이 가지고 있는 위력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정원을 거니는 두 사람의 발자취는 단순히 자신의 생각을 즉자적으로 피력하는 수준에 머물러 있지 않다. 그들의 의견은 독서라는 정련의 과정을 통과한 것이다. 칸트를 비롯한 여러 철학자들의 사상이 가지는 현대적 의미에서부터 신(神)에 대한 입장, 미국과 소련을 비롯한 최강대국의 허점과 제국주의적 이면, 천황제를 비롯한 일본의 현대 정치와 정치 사상, 최신 과학의 성과 등 다양한 영역에 대하여 때로는 충돌하고 때로는 화합하면서 깊이 천착하는 두 사람의 의견은 역시나 책과 독서가 있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다.
그 뿐인가. 책은 지식의 담지자로서 다른 사람들이 힘들게 가꾸어 온 꽃과 나무를 편안하게 감상할 수 있게 하는 본연의 기능과 함께 연령의 차이는 물론이고 가치관과 세계관이 상이한 두 사람 사이에 공통의 공간을 만들고, 뜻있는 만남을 가질 수 있도록 기능하다. 이런 점에서 새삼 책의 위력에 감탄하게 된다.

2.
[知의 정원]은 다양한 영역을 다루고 있다. 모든 주제를 이 자리에서 리뷰해 볼 수는 없겠으나 개인적으로 인상적이었던 부분을 몇 군데 뽑아 보았다. 두 사람이 힘들게 탐구해 온 ‘앎의 정원’에 노력없이 숟가락 하나 얹어두고 달려드는 것 같아서 미안스럽지만 그래도 그 여정이 너무 매력적이어서 어떤 형태로든 참여하고 싶기 때문이기도 하고, 앞으로 개인적인 독서 과정에서 생각해 볼 만한 주제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첫째, 소리내어 책을 읽을 때 제대로 된 감각이 전달된다는 지적이다(사토, p.26). 잘 알려져 있다시피 인간이 얻는 정보에서 시각에 대한 의존도는 다른 모든 감각을 합친 것에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절대적이다. 하지만 이런 시각의 지배 하에서도 음(音)의 세계, 소리의 세계는 인간의 감정을 뒤흔드는 힘을 유지하고 있다. 독서하다가 어려운 부분의 의미를 깨우치고자 할 때, 외국어를 공부할 때 ‘낭독’을 사용해 보면 그것이 얼마나 효과적인 독서(또는 공부)방법인지 금방 알 수 있다. 그래서인지 독재와 제국주의 하에서 지배자들은 반드시 소리를 장악하고자 하는데, 이런 점에서 소리의 세계에 속아 넘어가지 않기 위한 지적 훈련이 필요하다는 주장은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  

둘째, 정치에서 가장 중요한 점은 눈으로 거리를 재는 것, 즉 목측(目測, 눈대중)이라고 한 지적이다(사토, p.45).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적이 되는 것처럼 다양한 인간관계가 존재하는 정치 영역을 ‘눈대중’의 정도로 설명하는 것이 다소 막연하긴 하지만 재미있는 분석틀이었다. 어떻게 보면 결국은 자신과 타인의 ‘범위’를 파악하는 능력에서 정책의 결정과 동지/적의 갈림이 생겨나는 것이 아닌가.   

셋째, ‘신(神)의 수축’이다(사토, p.54). 과연 절대선인 신이 이 세상을 창조했다면 도대체 악은 어디에서 나왔는가, 그리고 지상에 악이 존재한다는 것은 절대선인 신의 직무유기 또는 방기가 아닌가 하는 질문은 신학과 철학의 오래된 논쟁거리 가운데 하나이다. 여기에 대해 전능한 신이 어떤 변화로 수축된 이후 남겨진 공간에 물질세계가 형성되고, 그 세계에서 악이 태어났다고 하는 것이 ‘신의 수축’ 논리인데, 일견 신의 절대성에 모순되는 것 같으면서도 유물론적 현실과 신의 존재를 공존시켰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문제는 과연 ‘신의 수축’이 어떻게 일어날 수 있는가 하는 점에 대한 설명이 쉽지 않다는 점.

넷째, 칸트 철학이 뉴턴이 정초한 근대의 시공간 개념에 활용되었다면 아인슈타인 이후 현대의 시공간은 그 한계를 드러냈다는 주장(다치바나, p.110) 및 자기모순적인 이율배반을 극복하기 위하여 칸트가 의미를 가진다는 주장(사토, p.111)은 근대 이후 서구 철학사상의 흐름에서 중요한 주제라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지만, 철학사상이 자연과학과 결합하는 지점이라는 점에서도 생각해 볼 가치가 크다고 생각된다.   

다섯째, 20세기는 미국의 시대라고 정의한 것(다치바나, p.135) 역시 대담하면서도 흥미로웠다. 그런데 여기서 ‘미국’이란 물론 실체적 국가를 가리키기도 하지만 ‘제국주의’를 대표하는 대명사의 의미도 가진다는 점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도대체 계몽된 이성의 시대에 왜 나치와 같은 변종(?)이 생겨나게 되었는지를 고찰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의 저작인 [계몽의 변증법]이 실상은 미국 사회가 가진 전체주의 경향에 대한 경고라는 점 역시 의미있는 지적이다. 

여섯째, 내셔널리즘이나 공산주의는 이류 지식인 또는 이류 엘리트가 하는 운동(사토, p.213)이라는 주장과 더 나아가 공산주의를 비롯한 유토피아 사상에 대한 혐오에 가까운 비판 역시 인상적이었다. 물론 나도 개인적으로 권력구조의 변동이 그 안에 내재된 폭력성과 인간 소외를 바꿀 수 있을까라는 질문에 대해서는 부정적이지만, 그렇다고 하여 사상의 의의가 평가절하될 수는 없다고 생각한다. 특히나 소련이라는 현실 사회주의에 판단의 근거를 둔 반공/반혁명은 이를 주장하는 사람의 의도와 관계없이 자본주의/신자유주의에 대한 무분별한 용인으로 왜곡될 가능성이 충분하다.

3.
[知의 정원]에는 다치바나 다카시와 사토 마사루가 각각 200권씩 엄선한 400권의 책이 제시되어 있어서 이 책의 목록과 서지사항을 훑어보는 것만 해도 배부른 기분이 들게 하는데, 이 목록을 보면서 새삼 느끼는 것은 일본이란 나라가 가지고 있는 독서의 힘이다. 그리고 이 독서의 힘이 곧 ‘출판의 힘’으로 위력을 발휘하고 있기도 하다. 얼마 전에 나가미네 시게토시의 [독서국민의 역사]란 책을 보았는데, 책읽는 습관을 몸에 배도록 하기 위해서 일본 정부와 민간 단체, 그리고 개개인에 이르기까지 정말 엄청난(!!!) 노력을 들인 것이 무척이나 인상적이었다.
두 사람이 제시한 책의 목록을 보면 아직까지 한글로 번역되지 않은 중요한 서양 철학자/작가의 저작들이 보인다는 점, 그리고 그와 같은 저작들을 전문적으로 연구하여 자신의 입장에서 재해석하고 의의를 부여한 연구서들이 놀라울 정도로 많다는 점에서 부러움을 느끼게 한다. 또 한 가지 부러웠던 점은 일본 현대사에 관련된 각종 사건들(군국주의 시대, 태평양전쟁, 전공투, 정치적 격변 등)에 대한 다양한 관점에서의 분석이 책으로 출판되어 문고나 신서로서 서점에서 팔리고 있다는 점이었다. 우리나라였다면 어떠했을까. 솔직히 말하자면 팔리기 어려운 인문서나 사회과학서는 출판사를 찾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고, 그러다 보니 소위 ‘돈이 되지 않는’ 이들 분야를 전문적으로 공부하고 역사적 기록으로 남길 사람도 점점 줄어들고 있는 것도 현실이다. 인문학의 위기를 말하며 고민하는 당국자가 있다면 두 권의 책, 그러니까 [知의 정원]과 [독서국민의 역사]를 일독해 주기를 권하고 싶다.

뱀다리
다치바나 다카시야 우리나라에도 유명한 사람이니 따로 언급할 필요는 없겠지만, 사토 마사루는 생소한 논객임에도 불구하고 꽤나 예리하면서 흥미로운 입장을 많이 제시해 주었다. 사토 마사루의 책이 우리나라에서도 번역되어 나온다면 좋겠다는 개인적인 바램을 마지막에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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