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4 로마제국쇠망사 4
에드워드 기번 지음, 운수인.김혜진.김지현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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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에드워드 기번의 [로마제국 쇠망사 4]에서는 크게 세 가지의 내용이 전개된다. 첫째는 서로마제국 멸망 이후 현재의 유럽 지역에서 벌어진 격동에 대한 소개이며, 둘째는 동로마제국의 중흥을 가져온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치세와 그에 의해 집대성된 로마법에 대한 전반적인 개관이다. 마지막 내용은 삼위일체 논쟁에 이어서 교회의 분열과 이단시비, 믿는 자들간의 불화와 폭력, 살인과 방화를 가져왔던 커다란 논쟁인 그리스도의 신성과 인성에 대한 ‘성육신 논쟁’이다.

2.
지난 6월에 열렸던 남아공 월드컵에서는 수많은 말의 성찬이 오고갔지만 개인적으로 가장 인상깊었던 말은 우리나라가 16강 진출을 확정지은 후의 이영표 선수의 소감이었다. “우리 세대가 해야 할 역할을 완수했다” 스스로 부여한, 또는 사회가 부여해준 역할을 완수했다는 뿌듯함과 함께 그 무거운 짐을 내려놓을 수 있는 안도감이 그야말로 절절하게 느껴졌다.
역사속에서 로마 제국에게 주어진 역할은 무엇이었을까? 그 해답은 에드워드 기번이 [로마제국 쇠망사]에서 천착했던 주제 가운데 하나였다. 사실 로마 제국의 절반을 이루던 서로마제국의 멸망은 서구 역사에서 보통 중요한 일이 아니었다. 지상의 여러 민족이 몰려들어 휴식을 취했던 높은 나무 그늘이 이제는 잎도, 가지도 없이 말라비틀어진 줄기만이 땅 위에서 시들어 가게 된 것이었다. 하지만 그루터기만 남아도 거목(巨木) 주위에는 생명의 원천이 살아있고, 그 원천으로부터 새로운 생명이 약동하는 법. 서로마제국이라는 거목이 서있던 이탈리아 반도, 갈리아 지역, 이베리아 반도, 브리타니아 등에서는 오현제 시대를 전후로 하여 로마 제국에 편입되어 왔거나 로마 제국을 침략해 왔던 이민족들이 새로운 주역으로 등장하여 잎을 늘이고 꽃을 피우기 시작한다. 로마라는 뿌리에서 갈라져 나온 그들은 서로 경쟁하고, 서로 타협하고, 서로 대립하고, 서로 동맹하면서 지금의 ‘유럽’의 틀을 갖추어가기 시작한다. 그것도 로마의 전통이 깡그리 무시된 것이 아니라 로마의 문화, 로마의 종교, 로마의 언어, 로마의 법체계 등과 같은 것이 계승되면서 말이다. 이후 유럽의 모든 국가들은 로마의 세례를 받은 ‘로마의 자녀들’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이것이 세계 역사가 ‘로마’에 부여한 역할인 셈이다.

3.
흔히 지금의 서구를 존재하게 만든 문화사적 원류로 2H, 즉, 헬레니즘과 헤브라이즘을 꼽는다. 그에 비해 로마는 좀 더 실용적인 영역, 그러니까 법률이나 건축과 같은 제도적이고 실용적인 측면에서 의의를 부여받는 경향이 강한데, 사실 로마 입장에서 보면 이건 좀 억울한 대우라고 할 수 있다. 몇 개의 도시국가 차원에서만 유행하다가 사라질 수도 있었던 고대 그리스의 사상과 철학을 보호한 것도 로마였으며, 일개 지방의 신흥 종교에 불과했던 크리스트교를 보호하여 세계종교화 한 것도 로마였다. 나는 개인적으로 하나의 통일되고 일관된 통치체계를 갖추면서도 포용성과 다양성에서 탁월함을 보였던 로마라는 보호망이 없었다면 과연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그리스 철학과 크리스트교가 존재할까라는 의문이 든다. 아마도 고대 그리스는 돌무더기 유적으로만 남아 있을 것이고, 크리스트교는 유대인들의 민족 종교와 끊임없이 대립한 끝에 사라지지 않았을까? 만약 그랬다면 유럽의 모습은 지금과 사뭇 달라졌을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로마 입장에서는 억울할 수도 있는 이런 위상 격하(?)가 사실 꼭 틀린 말은 아니라는 점이다. 만약 로마의 역사와 의의를 다룬 책에서 로마법에 대한 언급이 빠져 있다면 그 책의 충실성은 의심받기 십상일 것이다. 로마와 ‘법’은 마치 쌍둥이처럼 따로 떼어 놓고 생각하기 어려울 뿐만 아니라 로마가 확립한 법체계와 법철학은 현대의 많은 국가들 속에서 아직도 사라지지 않고 면면히 흐르고 있다.
로마법은 로마로 하여금 단지 역사적 재미 차원에서나 교양지식 습득 차원에서 세계사 시간에 배우고 까먹어 버리는 1,000년 전에 사라져버린 국가가 아니라 21세기 한국에서 살고 있는 우리들과 맞닿는 점점을 가진 ‘살아 숨쉬는’ 국가가 되게 하는 중요한 역할을 한다. 로마의 법체계는 유럽 전역, 특히 독일을 중심으로 한 대륙의 법체계(특히 민법체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고, 이것이 ‘산넘고 물건너 바다 건너서’ 지구 반대편 우리나라에까지 영향을 미치고 있기 때문이다.

4.
고대 세계가 수용했던 법의 기본 원칙은 소위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이다. 그렇지만 사실 이런 등가물로의 되갚음 또는 사적 복수의 허용은 엄밀하게 말하자면 법률의 특성이 아니다. 범죄 행위 또는 불법 행위와 그 행위에 따르는 보상 행위를 물리적으로 동일한 것으로 보는 순간 ‘법률’이 가지는 조정 능력은 상실되기 때문이다. 따라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는 굳이 연결시키자면 관습법 정도라고 해야 하겠다. 어쨌거나 이렇게 인간의 동물적(?) 본성에 부합하는 듯한 관습적 특징은 함무라비 법전에서도, 구약 성서에서도, 동양 사회의 옛 법률에서도 확인되는데, 상대적으로 야만 상태에 있던 로마 근방의 이민족들에게는 이러한 원칙이 더욱 확고하게 작용하고 있었을 것이라 생각해 본다.

로마법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의의는 이런 고대사회의 관습적 원칙과 질적으로 다른 원칙, 즉, ‘법률’이라는 공식적인 규제를 구성원들에게 관철시켰다는 점에 있다. 그리고 로마가 세계 제국으로 발전해 가면서 그 규제가 영향을 미치는 범위 역시 지속적으로 증가하게 된다. 물론 로마라고 하여 법에 의한 규제가 현재와 같은 수준에까지 이르렀다고 보기에는 어렵지만, 그래도 로마 사회는 고대의 무질서했던 사법(私法)체계를 공법(公法)체계로 바꾸어 내었다. 또한 범죄에 주로 적용되던 형법체계를 넘어서 인간들 사이의 관계(가족, 이혼, 상속 등)와 재산상의 관계(소유권, 소유의 이전 등), 채권/채무관계(계약, 이익 및 손해의 발생 등)라는 민법체계에까지 법률에 의한 지배를 확장시켰다는 점 역시 로마법의 중요한 의의가 되겠다.

예를 하나 들어 보자. 구약성서에는 팥죽 한 그릇으로 장자권(長子權)을 산 야곱의 유명한 이야기가 나온다. 왜 그는 형을 속여서까지(나중엔 아버지까지 속인다) 장자의 권한에 집착했을까? 당시 상속제도는 물질적인 재산에서부터 집안에서의 권위, 신의 축복까지 모든 것을 한 명의 아들(주로 맏아들)에게만 ‘몰빵’해주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자녀로서 누릴 수 있는 모든 권한과 생명까지도 가부장에게 전적으로 일임되어 있었던 것이다. 반대로 지금 우리 상속제도의 원칙은 ‘자녀 균등상속’이다. 자녀들이 동등하게 부모의 재산을 상속받을 수 있는 권한을 법에 보장하고 있는데, 만약 부모가 한 명의 자녀에게 모든 재산을 임의로 상속할 경우 소송을 통해 일정한 자신들의 몫을 얻을 수 있다. 이와 같이 가부장의 개인적 선택에서 벗어나 균등상속을 인정하고 있는 것이 바로 로마법이었다. 법적 지배는 이렇게 가족 내로까지 파고들었고, 개인의 삶 속에 ‘합리성’이란 관념을 불어넣는다.

소유권과 채권/채무 관계는 어떠한가. 좀 복잡하지만 또다른 예를 들어보자. 나는 건물을 짓기 위해서 A란 사람에게 땅을 구입하고 대금을 지불했다. 그런데 알고 봤더니 실제 이 땅은 A의 소유가 아니라 제3자인 B의 소유였다. A는 돈을 벌었지만, B는 자기 땅에 갑자기 내가 나타나 건물을 짓겠다고 주장하는 사태였고, 나는 정당하게 돈을 주고 구입한 내 땅에서 정당한 재산권을 행사하지 못하게 된 사태인 것이다. 이걸 어떻게 해결할까? 이 예는 복잡해 보이지만 사실은 가장 단순한 형태의 법적 분쟁이다. A는 ‘부당이익’을 얻었으므로 나에게 대금을 돌려주고, B에게는 땅의 소유권이 인정된다. 아마 A에게는 추가로 사기죄가 적용되어 감옥에 가거나 벌금을 내야 할 것이다.
로마 사회는 수많은 사람들이 함께 어울려 살면서 복잡해졌고, 그 복잡성에 비례하여 해결책을 찾기 어려운 문제들이 비일비재하게 일어났다. 실제 사건은 위의 예처럼 단순하게 해결되지 않았다. 복잡한 권리관계가 뒤엉켜 있고, 수많은 이해당사자들이 연관되어 있어서 마치 고르기아스 매듭 앞에 선 알렉산더 대왕처럼 골치가 지끈거렸을 것이다. 그런데 만약 이런 사건의 해결방법으로 고대사회에서 통용되던 사적 결정을 인정한다고 해 보자. 물리적 폭력 수단을 갖추고 있거나 권력을 가진 소수의 사람이 모든 결정권과 재산을 독점하게 될 것이고 사회는 혼란에 빠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래서 로마법은 이런 약속(개인과 개인의 약속, 개인과 국가의 약속), 약속에서 얻어지는 이익(정당한 이익, 부당이익)과 손해를 면밀하게 규정하고 그 법률관계를 공개적으로 적시함으로써 사회의 변동을 최소화하고자 하였다. 그리고 이런 로마법의 체계는 독일과 일본을 거쳐 현재 우리나라 민법의 기본틀(어떤 조항은 거의 그대로)을 이루었다.

5.
콘스탄티누스 황제가 크리스트교를 공인한 이후 교회는 크고 작은 논쟁을 경험하게 된다. 그 중에서도 내가 이름이라도 들어보았던 논쟁은 세 가지인데, 삼위일체 논쟁, 성육신 논쟁, 성상 숭배 논쟁이 그것이다. 이번 [로마제국 쇠망사 4]의 마지막 장은 이 가운데 두 번째 논쟁, 즉, 그리스도의 본성을 둘러싸고 일어났던 성육신 논쟁을 소개하고 있다.
성육신 논쟁이란 간단히 말해 그리스도의 본성이 신성(神性)이냐 인성(人性)이냐 하는 것이다. 양쪽으로 갈리던 의견은 에페수스 공의회와 칼게돈 공의회를 거치면서 신성과 인성이 완벽히 조화되어 결합된 양성론(兩性論)을 정통파 교리로 인정하게 된다. 이에 따라 신성이든 인성이든 어느 한 쪽만을 인정하던 단성론(單性論)은 이단으로 몰리게 되고, 단성론자들은 큰 박해를 당하게 된다.

신의 본성에 대한 신학적 지식을 가지고 있지 못하기 때문에 어느 쪽 입장이 옳고 그른지를 판단하기는 어렵다. 하지만 에드워드 기번이 지적한대로 이 당시 교회 지도자들이 ‘(크리스트교의) 창시자의 법을 실천하는 대신 그의 본성을 규명하는 데에 열을 올렸던(p.505)' 이 논쟁이 과연 무슨 의미가 있는지 모르겠다. 이제 박해와 순교의 위험에서 완전히 벗어난 크리스트교가 교권의 주도권을 잡기 위한 내부 권력투쟁으로 변질되기 시작하였고, 순수한 믿음과 실천의 가치를 잃어버린 채 형식적 틀에 집작하기 시작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을 뿐이었다.
참람한 말인지 모르겠으나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본성을 인간들이 정확히 아는 것에 그다지 큰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았을 것 같다. 오히려 이단으로 몰린 수많은 단성론자들이 죽음과 투옥, 추방과 유배를 당해야 하는 상황, 그리고 정치적 반대파에게 이단의 굴레를 뒤집어 씌움으로써 사익을 얻고자 노력했던 소위 ’정통파‘ 추종자들의 모습에 슬퍼하지 않으셨을까?

6.
[로마제국 쇠망사]의 네 번째 권에서 단연 주목받는 인물은 동로마 제국의 중흥황제인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라 할 것이다. 천혜의 요새였던 콘스탄티노플(비잔티움)에 의지한 동로마제국은 쇠약해진 국력에도 불구하고 상당한 기간을 존속하며 로마제국의 정통성을 지켜나가는데, 이 과정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비록 일시적이나마 아프리카와 서방의 잃어버렸던 속주를 수복하였고, 페르시아와 야만족들에게 빼앗겼던 동방 아시아의 주도권을 되찾는다. 에드워드 기번 역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의 치세를 설명하는 데에 상당히 많은 분량을 들이고 있다(이 책의 거의 2/3 이상이 아닌가 한다).

하지만 오히려 내 눈에 띄었던 것은 한 시기를 반짝거리게 할 수 있던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라는 개인의 명민함이 아니라 궁극적으로 로마 제국의 쇠망을 가져온 로마 정신의 몰락과 로마 군대의 나약함이었다. 국가의 근간이 흔들리는 상황에서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시대의 중흥은 꺼져가던 촛불이 마지막으로 피워올린 불꽃에 그쳐 버렸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가 외국에서 얻은 성과는 동로마제국의 내부의 힘을 배양할 개혁조치로 이어지지 못했다. 오히려 이제 동로마제국은 역사의 현장에서 퇴장할 치명적인 약점들을 본격적으로 노출하기 시작했다. 언제 창검을 자신들에게 돌릴지 모르는 신뢰할 수 없던 이민족들을 용병으로 고용하여 국가의 안위를 맡길 수밖에 없었던 시민정신의 실종, 다른 국가들의 침략과 협박을 금전적 보상으로 무마해야만 했던 나약함, 군사적 성공과 대중적 인기를 얻은 신하 또는 동료에 대한 질투와 모함, 지배적 종교(크리스트교)가 보여주고 있는 독단과 독선. 이 모든 것이 동로마제국을 갉아먹고 있었고, 이제 역사는 동로마제국에 결정적인 타격을 가할 두 주역을 준비시킨다. 동방의 마호메트와 서방의 십자군이 그 주역이었다.

시민들은 지쳐 있었고 병사들은 돈을 받지 못했다. 병사들의 빈곤은 약탈과 나태라는 특권으로 사방에 해를 끼치고서야 달랠 수 있었다. 이미 체불된 급여는 용기나 위험이라는 대가도 치르지 않고 전쟁의 이익만을 가로채는 관리들이 사기를 치며 지연시키고 가로채고 있었다. 군대는 공적‧사적인 곤란 때문에 모집되었다. 그러나 전장에서는, 더구나 적을 앞에 두고는 그 수가 언제나 모자랐다. 국민 정신의 부족은 신뢰할 수 없고 무질서한 야만족 용병으로 메워졌다. 덕성과 자유가 사라져도 존속했던 군인의 명예마저도 거의 완전히 소멸하고 말았다. 전 세대와 비교해 전례없이 불어난 수의 장군들이 일하는 것은 오로지 동료들의 성공을 막거나 평판을 해치기 위해서만이었다. 게다가 이들은 경험상, 공훈은 황제의 질투를 불러일으키지만 실수나 죄는 너그러이 용서받을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p.2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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