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마제국 쇠망사 3 로마제국 쇠망사 3
에드워드 기번 지음, 송은주.윤수인 옮김 / 민음사 / 200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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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설 상의 로마의 창건자인 로물루스는 로마를 세울 즈음에 독수리 열 두 마리가 날아가는 것을 보았다고 한다. 이 독수리들은 열 두 세기를 상징하는 것으로 간주되었고, 호사가들은 열 두 세기가 끝나는 때를 서기 447년으로 잡았다. 그런데, 신통하게도 이 예언(?)이 얼추 맞았다. 오도아케르에 의한 서로마제국 멸망이 476년이었던 것이다.
‘독수리 신탁’을 받아들인다면 로마는 하늘의 뜻에 따라 ‘천수를 누리고’ 멸망한 셈이다(19년이나 더 갔다!!!). 그렇다면 독수리가 한 스무 마리만 더 날았다면 지금 우리는 세계 지도에서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가 아닌 ‘로마 제국’을 찾아볼 수 있었을까? 기번은 그렇지 않다고 말한다. 기번은 로마 쇠망의 원인은 하늘이 정한 운명이 다해서가 아니라 보다 현실적이고, 예방가능한 것에 있었음을 분명히 하고 있다.

날아가는 독수리 떼보다 더 확실한 징조가 로마의 멸망을 예고하고 있었다. 날이 갈수록 로마 정부는 적들에게는 더 이상 두렵지 않은 존재가 되는 반면 국민들에게는 더 혐오스럽고 압제적이 되어 갔다. 나라가 어려워질수록 세금은 불어났고 절약의 필요성은 요구될수록 오히려 반비례하여 무시되었다. 부자들은 부당한 행위로 가난한 자들에게 불공평한 짐을 떠넘겼고, 빈민들의 고통을 경감해 줄 수 있는 면제 방법마저 속임수를 통해 빼앗아 버렸다. 재산을 몰수하고 육체를 고문하는 가혹한 심문에 몰린 발렌티니아누스의 국민들은 차라리 더 단순한 야만인들의 폭정 쪽을 택했다. 그들은 숲과 산으로 도주하거나 야만족들 밑에서 돈을 받고 하인으로 일하는 비천한 생활을 받아들였다. 과거에는 전 세계인이 열망했던 로마 시민이라는 영예로운 이름을 버린 정도가 아니라 혐오했다. (p.368)

2.
율리아누스 황제 이후 로마 제국은 국내 각 세력들의 대립과 반란, 이민족들의 잦은 침입, 교회 내 교파들의 이단논쟁으로 혼란을 겪었다. 이 와중에 즉위한 테오도시우스는 강력한 통치력을 발휘하여 국내 반란세력을 진압하는 한편, 로마의 위세로써 이민족들의 복종을 이끌어냈다.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에 국교로 격상된 그리스도교는 제국 시민들의 신앙을 하나로 묶어내는 것은 물론, 이민족들의 교화에도 이바지함으로써 로마의 위상을 높였다. 과거의 전성기에는 미치지 못한다 하더라도 겉으로 보기에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대는 평화롭고 안온했으며 로마 제국의 명예가 지켜졌던 시대였다. 이런 점에서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로마 제국의 실질적인 마지막 황제로 불려도 무방할 것이다.

군대의 선두에 서서 전장에 모습을 나타냈고 전 제국에 걸쳐 널리 권위를 인정받았던 아우구스투스와 콘스탄티누스의 마지막 후계자인 테오도시우스의 죽음과 함께 진정한 의미의 로마의 진수는 막을 내렸다. (p.89)

하지만 테오도시우스 황제는 중병 환자였던 로마 제국이 피워낸 ‘마지막 불꽃’일 뿐이었다. 그의 무능한 후계자들과 권력욕에 불타는 총신들의 대립으로 인해 동서로 분할된 로마 제국은 훈족, 반달족, 고트족, 게르만족 등 주변 민족의 침입을 끊임없이 받는다. (이민족의 침입은 서로마 제국에 더욱 심각한 문제였다. 콘스탄티노플이라는 천혜의 요새가 있었고, 동방의 페르시아를 제외하면 큰 위협을 줄 민족이 없었던 동로마 제국은 그나마 행운을 잡은 셈이다.)
지금도 그런지는 잘 모르겠지만, 예전에 세계사 시간에 서양의 중세 부분은 ‘훈족의 압박과 게르만족의 이동’이라는 장(chapter)으로 시작되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제국 붕괴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지목되었다. 그렇지만 사실 이민족들의 침입은 로마 역사 전체에서 비일비재했던 일 아니었던가? 문제는 과거 같았으면 ‘전투에서는 져도 전쟁에서는 승리했을’ 로마의 힘이 더 이상 발휘되지 않았다는 점이다. 지치지 않는 투혼으로 카르타고인들과 갈리아인들을 경악시켰던 로마의 힘은 이제 소진되었다. 이민족들의 침입 앞에 속수무책으로 약탈을 당하다가 굴욕적인 강화조약을 체결하여 겨우 위기를 넘기는 악순환이 반복되었던 것이다.

3.
나는 개인적으로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인 폴리스들과 로마의 가장 큰 힘은 ‘내 조국은 내 손으로 직접 방어하는 정신’에서 나온다고 생각한다. 자신의 재산과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바치는 진취적이고 헌신적인 시민 정신이야말로 테베레 강변의 일개 도시 국가에 불과했던 로마를 전 지중해를 호령하는 대제국으로 팽창시킨 원동력이라고 믿는다.
공화정 시대에는 귀족들이라 할 수 있는 집정관이나 원로원 의원들이, 제정 시대에는 황제들이 직접 군사들을 이끌고 전선의 맨 앞에 섰다. 국민의 대부분을 이루었던 시민 계급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들은 자신들의 무장을 위하여 자비를 들였다. 자신의 명예를 위해, 가족과 국가의 안녕을 위해 자발적으로 무장하여 나선 로마 군대를 누가 막을 수 있었겠는가? 로마인들에게는 자신감이 있었다. 로마인들에게는 결코 지지 않는다는 믿음이 있었다. 한니발이 이끄는 카르타고 군대의 침입으로 로마가 풍전등화의 위기에 처했을 때, 어떤 일이 일어났는지 들어보라.

한니발의 원정 시기에 (중략) 당시의 원로원 의원들은 빠짐없이 미관 말직에서든 고위직에서든 군복무 임기를 다했다. 한니발이 로마에서 3마일 떨어진 아나오 강변에 진을 쳤을 때, 곧 그가 막사를 친 땅이 공개 경매에서 제값을 받고 팔렸다. (p.167)

한니발이 점령한 땅인데도 땅값이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이다. 땅을 구입하는 사람 입장에서는 현재 적장이 점령한 땅인데도 반드시 자신에게 소유권이 회복될 것이라는 믿음이 있었던 것이다. 이쯤 되면 이건 보통 자신감이 아니라 높은 긍지와 믿음의 표출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몇몇 전투에서 패하더라도 병력은 금방 보충되었고, 마지막 승리는 언제나 로마의 것이었다.
그러나 로마 제국 말기가 되자 이런 정신은 온데간데 없이 사라져 버린다.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일신상의 안락 또는 현실에서의 쾌락일 뿐이었고, 이제 국가의 방위는 스스로의 손이 아닌 이민족 용병들에게 맡겨진다. 간단히 말해 고양이에게 생선가게를 맡긴 셈인데, 더 한심한 것은 몇 차례나 이민족 대장들에게 로마의 국토가 유린되고서도 정신을 차리지 못했다는 점이다.

군율이 느슨해지고 훈련을 하지 않게 되면서 병사들은 군무의 피로를 버텨 낼 힘도 의지도 약해졌다. (중략) 무기력해진 병사들은 그들 자신과 국가의 방어를 포기했다. 그들의 나약함과 태만은 제국의 몰락을 가져온 직접적인 원인으로 간주될 수 있을 것이다. (p.60)

병역(兵役)에 얼마나 치명적인 악습이 만연하게 되었는가. (중략) 시민들과 국민들은 돈을 주고 자신의 나라를 지킬 중대한 의무를 면제받았다. 그리하여 이 의무는 야만족 용병들에게 넘어갔다. (p.122)

4.
진취적인 시민 정신과 함께 로마의 성장을 가져온 원동력은 세계제국으로서의 관용과 포용성에 있었다고 여겨진다. 사실 전쟁에서 패한 피정복민의 입장에서 가장 중요한 관심사는 생존과 현실의 유지에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이런 요구를 정복자가 수용할 경우 지배에 대한 순응도과 통합의식은 급격히 높아지게 된다. 아직까지 민족국가의 개념이나 제국주의-식민지라는 인식이 없었고 인적 자원에 사회의 발전을 의존하던 고대 사회에서 ‘승자의 포용과 아량’은 국가의 성장을 위한 가장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런 점에서 다신교 전통을 이어받은 로마가 광신적인 신앙과 배타적인 포교 논리를 가진 일신교 전통이라 할 수 있는 그리스도교까지 받아들였다는 점은 보통 중요한 결정이 아니었던 것이다. 그렇지만 그리스도교가 황제를 비롯한 지배층과 시민들의 다수가 믿는 종교가 되어 버리자 어느 순간부터 신앙의 순수성을 과도하게 주장하고, 진리와 믿음의 독점성으로 인해 내부에서조차 ‘너죽고 나살자’ 식의 이단논쟁이 발생한다. 그리고 테오도시우스 황제가 그리스도교, 그 중에서도 삼위일체설을 주장한 아타나시우스파의 교리를 정통으로 하는 그리스도교를 국교로 인정한 후 로마 제국에는 과거와는 전혀 다른 형태의 ‘박해’가 일어났다.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중략) 이교의식 자체를 벌하는 것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교에 위배되는 이러한 행동들을 보고 묵인한 자에게도 우상 숭배죄를 폭로하거나 처벌할 의무를 다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적지 않은 벌금이 부과되었다. (중략) 테오도시우스의 법의 박해 정신은 그의 자손 대대로 그리스도교 세계의 열렬한 지지 속에서 거듭 강화되었다. (p.77)

간단히 말해 정통파 그리스도교 입장에서 보아 우상숭배이거나 이단 교파인 경우에는 가차없이 생명과 재산상의 손해를 입혀도 무방하다는 주장인데, 그 논리의 이면에는 정통파라면, 모든 이단자는 천상과 지상의 지고한 권력에 거역하는 역적이므로 천상과 지상의 권력은 각각 죄인의 정신과 육체에 재판권과 처벌권을 행사할 수 있다는 독선과 광신의 논리가 숨어 있다. 이러한 독선의 결과는 무엇이었을까? 인류가 경험한 가장 큰 광란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는 종교재판, 마녀재판, 이단재판.... 이런 것들이었다.

종교 재판관(이단 심문관)이라는 혐오스럽기 짝이 없는 이름의 관직이 처음 설치된 것도 테오도시우스 치세하에서였다. (p.22)

뿐만 아니라 이제 주도적 지위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합법적인 재산증식, 병역회피, 사치의 수단으로 변질되어 버린다. 순수한 신앙에서 시작한 수도원 운동은 로마의 야심가들에게 부와 명예를 한꺼번에 얻을 수 있는 통로로 받아들여졌다. 성직에서 성공한 수도사들은 수도원을 세워 그들의 동료를 늘려나갔으며, 돈 많은 귀족 집안 또는 황실과 연계하여 자신의 수도원을 지원해 줄 개종자들을 확보해 나갔다. 결국 비대해진 수도원은 초심을 잃게 되었고, 귀족 청년들이 병역의 의무를 면제받을 수 있는 공간으로까지 타락한다.

인근 지방과 도시로까지 세력을 확장한 유명한 수도원의 재산은 시간이 지날수록 꾸준히 증가했고, 사고로 줄어들거나 하는 일은 좀처럼 없었다. (중략) 수도원이 번성하면서 규율은 무너졌고, 점차 부자라는 자만심에 젖어 마침내는 사치와 소비에 탐닉하게 되었다. (중략) 수도사들은 이제 수도원을 창설할 당시의 목표를 잊고 자신들이 저버린 세상의 헛된 감각적 쾌락을 좇았는가 하면, 창시자들이 엄격하게 덕행을 쌓아 획득한 부를 철면피하게 낭비하였다. (p.447)

5.
유럽의 역사에서 로마 제국이 가지는 함의는 무엇일까? 한 마디로 말해서 로마는 현재 유럽이라는 공동체가 존재하도록 만든 ‘멍석을 깔아준’ 역할을 했다고 본다. 비록 후세 역사가들의 시대 구분이겠지만, 서로마 제국의 멸망은 서양 고대의 종언임과 동시에 중세의 시작을 의미하기도 한다. 헬레니즘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자양분과 헤브라이즘으로 대표되는 종교적/정신적 자양분은 로마라는 한 용광로에서 녹아들었고, 로마의 강역 확대와 함께 도나우 강에서 브리타니아 지방까지 지금의 전 유럽 땅으로 확대되었다. 도저히 같은 문화권으로 편성될 것으로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세련된 이탈리아 반도의 사람들과 야만적이고 거친 갈리아 지역의 사람들이 하나의 문화권을 형성하기 시작하였고, 비록 국가는 달라도 공통적인 경제체제와 공통적인 정치체제를 영위하게 된 것이다.
서로마 제국 이후 이 역할을 담당한 것이 게르만인들이었다. 로마라는 명칭의 현실속의 국가는 오도아케르의 이탈리아 왕 즉위와 동시에 종결되었지만 문화적 상징물로서 로마는 여전히 살아 숨쉬고 있다. 에드워드 기번이 서로마 멸망과 더불어 지금의 프랑스 및 독일 지역에서 번영하기 시작한 프랑크 족의 클로비스 대왕에게 눈을 돌린 것과 중세 사회의 중요한 모습 중 하나인 수도원의 발흥에 관심을 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메로빙거 왕조를 열었던 클로비스 대왕은 공적을 세운 신하들에게 영지를 나누어 주고 이를 농민들에게 경작하게 함으로써 향후 중세 시대의 지배적 생산관계인 분봉제도와 농노제도의 기틀을 잡았으며, 이제 서구인들의 정신세계에서 빼놓을 수 없는 지배적 위치를 차지한 그리스도교는 수도원이란 공간을 통해 세속 사회에 막대한 영향을 미침과 아울러 문화의 전수자로서 역할을 수행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부하들은 말이나 갑옷 등으로 보상받는 대신, 공적이나 총애의 정도에 따라 봉토(benefice)를 받았다. 이것이 봉건 영지의 최초 명칭이자 단순한 형태라 할 수 있다. (p.511)

6.
동로마 제국이 남긴 했지만, 오랜 세월 동안 서구 세계의 중심이었던 로마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종말을 맞았지만 로마는 단순히 1500여년 전에 지구상에서 사라진 역사적 국가로만 남아 있지 않다. 로마가 성장할 때, 그리고 위기에서 일어날 때에는 예외없이 헌신적인 지도자와 시민계급이 발견됨을 기억해야 한다. 에드워드 기번을 비롯한 서양의 역사학자들이 인류 역사상 최고의 황금기로 격찬하는 오현제 시대는 최고 권력자인 황제가 직접 가장 미천한 자와 같이 군대의 선두에 서고, 권력의 자리는 독점이 아니라 자신보다 현명한 사람과 함께 분점하다가 죽으면서 양위하던 시기였다. 주위의 많은 민족들과 전쟁을 벌이고 정복하고, 약탈 당하기도 하였으나 기본적으로 로마는 다른 민족의 문화를 인정하면서 그들을 로마 시민으로 적극적으로 포용하였다.
이제 유럽 지역에서 다시는 로마처럼 성장한 나라는 등장하지 않았다. 샤를마뉴 대제도,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지리적인 영토나 영향권은 로마에 버금갈 정도로 넓게 확보하였으나 로마와 같은 권력관계 및 문화적 성숙을 보여주지 못하였다. 서로마 제국의 멸망과 함께 유럽은 하나의 문화적/정신적 유산을 배경으로 한 서로 다른 민족들의 각축장으로 변모하기 시작한 것이다.

종교의 직접적인 권위보다 더 효과적이었던 것은 모든 그리스도교도 형제들을 영적으로 결합시키는 종교적 친교였다. (중략) 그 결과 서서히 유사한 풍속과 공통된 법제가 생겨났는데, 이것이 근대 유럽의 독립적이고 심지어 적대적인 여러 나라들을 유럽 이외의 다른 나라들과 구별해 주는 특징이 되었다. (p.4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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