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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카라무슈
프로메테우스 / 2008년 1월
평점 :
절판

스카라무슈.
즉흥극이 유행하던 시대. 검은 의상을 입고 항상 기타를 들고 나와서 비굴하면서도 허풍 떠는 익살꾼 역할을 의미한다.
지금식대로 간단히 말하자면 '광대'인데, 이들은 마치 미친 사람처럼 세상을 비웃으면서도 아무 거리낌없는 삶을 살고자 하였다.
이들은 중세시대에 깊은 지혜를 가지고 있으면서도 미친 사람 취급을 받곤 하였는데, 그 대표적인 예가 셰익스피어의 [리어왕]에 등장하는 '바보 광대'이며, 아직도 그 흔적은 트럼프 카드의 '조커'로 남아 있다.
이들이 세상에서 어떻게 사라지게 되었는지, 그 안에서 사회적 억압기제가 어떻게 작용하였는지는 미셀 푸코의 [광기의 역사]의 중요한 연구대상이기도 하다.
라파엘 사바티니의 [스카라무슈]는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시대적 대전환기의 한 가운데를 살면서,
그 시대와 어울리지 않으면서도 그 시대를 조롱하고자 하였던 한 광대(스카라무슈)의 이야기이다.
앙드레 루이라는 이름을 가진 이 남자는 원래 냉소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사람이었으나, 평등과 이상사회를 꿈꾸던 친구가 지배계급이었던 다쥐르 후작의 계략에 빠져 죽은 후 혁명 선동가가 되어 도망다니는 신세가 된다.
그는 도망치면서 스카라무슈(일종의 광대) 역할을 하는 배우가 되었다가, 검술 학원을 운영하는 검술 마스터가 되었고,
마지막에는 혁명을 옹호하기 위하여 실제 검을 들고 결투의 복판에 서는 정치가가 되었다.
우선 이 책은 여러가지로 재미있다. 따라서 막힘없이 술술 읽어내려갈 수 있는 책이다.
주인공인 앙드레 루이라는 인물의 인생역정이 아주 재미있을 뿐만 아니라, 앙드레 루이대 다쥐르 후작이라는 대결구도도 흥미롭고,
무엇보다 프랑스 대혁명이라는 격변기를 살아가는 여러 계층의 사람들(귀족들, 부르주아, 프롤레타리아)의 모습에서 당시의 상황을 느끼게 해주는 긴박감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책의 마지막 부분에는 생각지도 못했던 반전도 하나 기다리고 있어서, 이런 반전을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작은 선물이 되기도 한다.
프랑스 대혁명을 비롯한 여러 시민혁명들은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주제 가운데 하나인지라,
단순히 재미있는 소설로서의 의미로만 읽히지는 않았다.
물론 프랑스 대혁명을 소재로 한 소설 중에 가장 유명한 것이라면 역시 빅토르 위고의 [레 미제라블]일 것이지만, 이 책 역시 나름대로 생각거리를 주었다.
흥미로웠던 것은 책의 마지막 부분에서 작가가 다쥐르 후작의 입을 빌려 프랑스 혁명에 대해 가지는 관점을 보여준 부분이었다.
그의 주장은 혁명이 자유, 평등, 박애를 내세웠음에도 그 방법이 폭력적이 되어 혼란과 무질서를 부르고,
결국에는 다시 한 계급이 다른 계급을 지배하는 의미없는 변화로 이어진다는 것이었다.
결과론적으로 프랑스 대혁명이 결국은 자본주의 부르조아의 승리, 그들의 지배로 귀결되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지배계급의 출현'을 말한 후작의 이야기는 옳았을 지도 모른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프랑스 혁명이 혼란과 무질서라는 의견에는 동의할 수 없다.
지배계급이 보는 '혼란'과 '무질서'는 결국 자신이 이때까지 향유해 왔던 지배적 지위에 대한 '혼란'이며 '무질서'이니까...
그래서 그 지위가 민중들에게 돌려주고자 하는 노력이 나타날 때, 그들은 전가의 보도처럼 '혼란'과 '무질서'를 말하지 않는가.
민중의 폭력을 비난하는 사람들은 침묵하던 민중의 손에 무기를 들게 만든 자신들의 폭력과 억압에는 관대하다.
프랑스 대혁명 과정에서 흘려진 피는 정말 안타까운 것이나,
그 피흘림의 일차적인 책임은 어려운 상황에서도 자신의 지위를 유지하기 위하여 시민과 농민들을 착취했던 귀족계급들과,
귀족들과 야합하여 혁명을 진압하고자 군대를 출동시켰던 유럽의 봉건군주들이 아니었을까.
프랑스 대혁명은 여러 가지 관점에서 볼 수 있을 것이다.
자유, 평등, 박애를 몸소 실천한 시민혁명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며,
영국의 역사학자 에릭 홉스봄이 [혁명의 시대]에서 주장했듯이 산업혁명과 '이중혁명'으로 작용하여 봉건주의 종식과 자본주의적 지배권 확립이라는 새로운 세계의 장을 연 사건으로 볼 수도 있다.
좀 더 나아간다면 칼 마르크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부르주아는 자신이 지배를 확립한 곳에서는 어디서나 모든 봉건적, 가부장적, 전원적 관계를 종식시켰으며', 결국에는 '현대의 대의제국가에서 배타적인 정치적 지배권을 장악하게 되었다.'라고 말했듯이
지배계층의 교체임과 동시에 새로운 시대의 주역인 계층(노동자)의 각성과 등장을 의미하는 일대 사건이었을 수도 있다.
작은 것 같지만, 이런 점에서 [스카라무슈]의 출판사 이름이 '프로메테우스'라는 점도 흥미롭다.
잘 알려지지 않은 사실이지만, 그리스 신화의 프로메테우스는 사회주의권에서 칼 마르크스를 가리키는 말이기도 하다.
인간 세상에 불을 가져다 주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듯이, 마르크스 역시 '공산주의'라는 불을 통해 새로운 인간의 역사를 열었다고 평가하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개인적인 추억 하나.
책의 띠지에 "노스탤지어가 샘솟는 최고의 활극소설"이라 한 것은
아마도 한 자루 검에 의지하여 정의와 사랑을 지키려 고군분투하는 남자의 "활극같은" 삶에 대해 가지고 있는 동경심을 의미한 것이리라.
그런데 개인적으로 [스카라무슈]에 대한 노스탤지어는 엉뚱하게도 [보물섬]이라는 만화잡지로 이어져 있다.
아마 이현세씨의 만화였을 것 같은데 [보물섬] 창간호에는 <<검객 스카라무슈>>라는 만화가 연재되었다.
시대적 배경이야 아직 어린 나이에 잘 이해가 가지 않았지만, 멋진 주인공의 멋진 검술 솜씨는 아직도 기억의 한 컷으로 남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