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외딴집 - 상 ㅣ 미야베 월드 2막
미야베 미유키 지음, 김소연 옮김 / 북스피어 / 2007년 10월
평점 :
그저께 밤에 이명박 대통령의 <국민과의 대화>를 보면서 열불이 터졌는데,
마침 그 때 읽고 있던 책이 미야베 미유키 여사의 [외딴 집]이었습니다.
서평이라고 할 것까지는 없고, <국민과의 대화>를 보고 책을 읽으면서 그냥 들었던 단상만 써 본 것입니다.
-------------------------------------------------------------------------------------
재작년부터 작년까지 우리나라에서 최고로 유행한 말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가 아니었을까?
뭐든지 조금만 부정적인 일에 대해서는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 “이렇게 될 동안 노무현은 뭐했나?”라는 댓글이 빠짐없이 달렸었다.
인터넷 상에서 이 말이 댓글로 붙여질 때는 하나의 ‘놀이’라는 관점에서도 해석이 가능했던 현상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사자가 퇴임하여 낙향한 현재까지도 국민적 비난을 받는 일에 아직도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을 일삼는 사람들을 보면 단순히 인터넷에 놀이로만 사용되던 뉘앙스가 아닌 책임 떠넘기기와 희생양 삼기라는 느낌을 강하게 가질 수밖에 없다.
미야베 미유키의 [외딴 집]에도 이와 비슷한 상황이 벌어진다.
“이게 다 가가님 탓이다”
쇼군의 권위가 절대적이었던 에도 막부 시기의 어느 무더운 여름.
쇼군의 측근인 가가님은 악령에 씌워 부인과 자녀, 호위무사들을 죽이고 마루미 번이란 바닷가 마을로 유배를 오게 된다.
그 때부터 평화로웠던 마루미 번에는 이상한 현상이 벌어진다.
마을 사람들은 매년 심심찮게 발생하던 식중독이나 전염병은 가가님의 저주 때문이며,
여름이면 지역특성상 있던 벼락 역시 가가님이 마을에 왔기 때문이라고 수군거린다.
사람이 죽어도 가가님 탓, 병이 들어도 가가님 탓, 이웃간에 싸움이 일어나도 가가님 탓, 자연재해가 일어나도 모두 가가님 탓....
[외딴 집]을 보면서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의 질긴 생명력이 의미하는 바를 알 수 있었다.
언제부터인가 ‘내 탓이오’라는 말은 사라져 버리고 ‘네 탓이오’라는 풍조가 지배적이 되었다.
변명과 합리화가 팽배해진 사회가 되었고,
뭔가 자신이 잘못한 일에는 사과보다 우선 무조건 부인한 후에, 나중에 ‘그건 오해였다’, ‘그런 뜻이 아니다’라는 말로 회피하는 사회가 되어 버렸다.
내 책임을 돌릴 희생양이 되어준다면, 내가 잘못한 것을 일순간이라도 모면하게 해준다면
퇴임한 대통령이든, 내 옆의 이웃이든 누구이든 좋다.
‘책임 떠넘기기’가 낳게 되는 결과는 무엇일까?
“이게 다 노무현 탓이다”라는 말을 알 리가 없는 미야베 미유키 여사가 [외딴 집]에서 그린 마지막 장면을 보면 알 수 있을 것이다.
모든 것을 ‘가가님’의 탓으로 돌리던 마루미 번에서는 주민들 사이에 불신과 미움이 싹튼다.
결국 큰 벼락이 떨어지던 날.
마루미 주민들은 두 패로 나누어져 피가 피를 부르는 격렬한 다툼을 벌이게 되고,
그 와중에 지역의 지도층 집안에서는 주도권을 잡기 위한 권력다툼을 벌인다.
이 다툼이 어떻게 해결되고, “이게 다 가가님 탓이다”라는 말이 어떻게 해소되었는지는 스포일러가 될 것 같아서 밝히기 어렵지만,
분명히 말할 수 있는 것은 결국에 누군가는 그 책임을 져야 한다는 점이다. 그게 진짜 가가님이 되든 아니면 이름없는 민초의 한 사람이 되든지 간에 말이다.
나는 우리 사회의 이 ‘책임 떠넘기기’가 돌고 돌아서 궁극적으로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은
아무 죄없이 어려움만을 감내하고 있어야 할 민초들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간절한 희망을 가져본다.
또 한가지.
이런 민초들의 맹목적인 공포와 공포가 불러온 혼란에 대해서
소위 위정자라 할 수 있는 마루미 번의 지도층 인사들은 정보를 자신들에게 유리하게 조작하여 해석하고, 상대편을 넘어뜨리기 위한 여러 가지 움직임을 보인다.
물론 이들은 말한다. ‘이게 다 마루미 번과 가문을 위해서‘라고.
물론 봉건시대라는 시대적 한계는 있겠으나, 그들에게 민초들의 고통과 힘든 생활은 전혀 개선할 대상이 아니다.
이런 위정자들의 모습이 소위 ‘자유민주주의 시장경제’를 부르짖는 현재에도 겹쳐서 보이는 것은 내가 너무 과민한 탓일까?
사족 하나
이건 밝혀야 정당할 것 같은데,
개인적으로 현재 정부에 대해서 상당히 비판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지금 정부에서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표현하는 시기에 대해 100% 지지하는 입장은 아닙니다.
뭐랄까... 지금 정부에 대해서는 ‘증오의 관계’인데, 지난 정부에 대해서는 ‘애증의 관계’라고 해야 할까... 하여튼 설명하기 어려운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습니다.
사족 둘
사실 미미 여사의 책은 [이유]와 [모방범]에 이어서 세 번째였고, 꽤나 우연한 계기가 있어서 읽어보게 되었는데,
[이유]는 왠지 모르게 2% 부족한 느낌이었고, [모방범]은 너무도 유명한 이름값이 오히려 책읽기의 걸림돌로 작용했다는 느낌을 받았습니다.
하지만, 에도 막부 시대는 개인적으로 관심이 있는 시기라서 그런지 [외딴 집]은 여러 가지 배우기도 하면서 잘 보았습니다.
깜짝 놀랄만한 트릭이나 공포 같은 것을 기대하고 보시는 분들께는 좀 실망스러울 수도 있겠지만.... 오히려 미미 여사의 능력을 본 것 같아서 새롭게 느껴지기도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