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설날 연휴에 들어가기 전인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 약 30분 동안
이 책의 전반부에 나온 만화 부분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깔아놓지 않은 깡촌 시골 고향마을에서 후반부의 원작 소설 부분을 마저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저를 좀 감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벤자민 버튼이 경험한 ‘시간’이란 것이 이제 예전의 방들만 남은 시골집에서 경험했었던 ‘시간’과 겹쳐서 여러 가지 추억과 상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명절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면
세대에 따라 보내는 시간과 활동공간이 대체적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다소 구석지지만 따뜻한 웃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거실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방에서,
꼬마들은 음침한(?) 건넌방과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한 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났고,
다음 세대는 또 전 세대가 생활하던 공간으로 조금씩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인에게 ‘시간’을 공평하게 주셨다고 하는 의미는,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24시간, 365일이란 정해진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세월이 흐르면서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일한 운명을 거스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벤자민 버튼은 이런 ‘공평한’ 시간을 좀 다르게 살았습니다.
결국에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맞은 것은 다른 사람과 같았으나,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는 과정을 통해 흙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벤자민 버튼의 일생을 보면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방법,
즉,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면서 성장한 후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길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어느 쪽이 개인에게 더 행복한 일생이 될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 개인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고자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선택은 제가 좋아하는 애니매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생각해보면 더욱 굳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료들이 모두 죽은 후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그들과 같이 일생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가 그 작품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불로장생은 인류의 꿈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혼자서 불로장생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생명.. 좋습니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데, 나만 쌩쌩하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우리에게 ‘혼자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의 행복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이 어린 아이의 순간이든, 팔팔한 청년의 순간이든, 늙은 노년의 시간이든 말입니다.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피츠제럴드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어째서 현대 독자들의 평이 갈리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나 다른 사람과 같이하고자 했던 ‘재즈의 시대’도 결국은 그와 그 동시대인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시대. 이 시대도 앞으로 흘러가고 다음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간다는 생각이 오래된 시골집의 구석구석 풍경들과 겹쳐지면서 좀 센치해졌던(?) 설 연휴가 되었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그림의 힘은 위대한 것을 재삼 느낍니다.
삽화든 만화든, 행간 속에 숨은 의미를 남김없이 간취하도록 도와주는 그 힘이 적절히 사용된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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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도의 악몽 - 소설보다 무서운 지구온난화와 환경 대재앙 시나리오
마크 라이너스 지음, 이한중 옮김 / 세종(세종서적) / 2008년 12월
평점 :
구판절판


이제 안전한 곳은 어디에도 없는 것 같다 (p.75)


나무라고는 찾아볼 수 없는 검은색 산을 배경으로 하여 건물은 지붕 부분만 남겨놓고 모두 물에 잠겨 있다.
한쪽에서는 억수같은 비가 내리는 가운데 높은 파도의 바닷물이 도시를 덮쳤다.
이 책, [6도의 악몽]은 그야말로 악몽과 같은 표지로 먼저 눈길을 끈다.
그리고 이 책을 읽는 내내 인류가 혹시 천천히 데워져 가는 물 속의 개구리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자신이 처한 환경의 변화가 목숨을 위협하는 데에도
그 사실을 전혀 알지 못하고 현실에 안주하다가 결국에는 뜨거운 물 속에서 죽음을 당하는 개구리의 이야기처럼,
인류도 역시 서서히 종말을 향해 가는 환경에 너무도 둔감한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 말이다.

한 30여년 전, 그러니까 1980년대 초반기에 ‘국딩’이었던 사람들은
아마도 지금의 날씨가 그 때와 무척이나 다르다는 것을 느낄 것이다.
나는 아직도 그 시절 겨울이면 한강물 위로 얼음을 타고 강 중간까지 가봤던 아찔한 기억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당시에만 해도 얼어 붙은 한강 위에서는 동그란 구멍을 뚫고 물고기를 잡는 모습을 볼 수 있었다.
그런데 지금은?
이제 한강에 살얼음만 얼어도 예년보다 며칠 늦게 얼었느니 하면서 뉴스까지 장식하는 기사거리가 되었다.

난방시설이 발달하여 겨울이 더 이상 춥게 느껴지지 않는다고 반론할지 모르겠다.
좋다. 하지만, 분명히 겨울철 서울에 내리는 눈의 빈도나 양은 줄어들었다.
요즘엔 언론매체마다 겨울 가뭄이 극심하다는 보도를 본다.
저수지가 바닥을 드러내고, 겨울 농작물이 말라간다는 것이다.
그런데, 나는 어릴 때만 해도 보리는 쌓인 눈 아래에서 겨울을 보낸다고 알았다. 눈이 소복히 덮힌 들판이 원래 모습인 것이다.
사실 겨울 가뭄이란 것도 10여년 전부터 이렇게 심각하게 받아들여지고 있지 않은가.

우리나라는 UN이 정한 ‘물부족 국가’란다. 여름이면 그렇게 비가 많이 오는데도.. 왜?
<장마→무더위, 가끔 태풍>이라는 전통적으로 익숙했던 여름 날씨에 비해
요즘의 여름은 ‘국지성 집중 호우’라는 다소 생소한 원인으로 물난리를 매년 겪는다.
이렇게 일년 강수량의 대부분을 여름 짧은 시기에 쏟아내고 나면 다른 때는 전체적으로 가물다.
여름에는 많은 수량을 홍수조절을 위해 내보내야 하지만, 겨울에는 아무리 물을 모아놓으려 해도 점점 수량은 줄어든다.

이런 날씨의 변화는 우리나라에만 적용되는 현상이 아니다.
이제 TV만 켜면 지구촌 어딘가에서 들려오는 기상이변과 자연재해 소식이 빠지는 날이 별로 없을 지경이다.
인도네시아를 덮쳤던 쓰나미, 허리케인 카타리나로 인한 미국 남동부의 파괴,
갈수록 영역을 넓혀가고 있는 사하라 사막과 고비 사막을 비롯한 사막 지대,
폭염으로 수많은 노인들이 죽음을 맞았던 프랑스, 세계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는 가뭄과 홍수, 폭설과 폭염,
호주, 캘리포니아 등지에서 자주 발생하고, 또 한 번 발생하면 잘 꺼지지 않는 산불,

마크 라이너스의 [6도의 악몽(six degrees)]은 이런 기상이변들이 갈수록 그 정도가 심각해지고 있는 ‘지구온난화’에서 상당 부분 기인하고 있으며,
그 온난화 정도가 심해짐에 따라 자연계와 우리의 생활, 인류의 생존에 어떤 변화가 있을 것인지를 그야말로 악몽처럼 실감나게 보여주고 있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상승하면,
대륙의 서부에는 가뭄이 닥치지만, 동부와 남부는 홍수가 빈번하게 일어난다.
대륙 중심의 초지들에서는 사막화가 진행되고,
킬리만자로와 알프스의 만년설은 녹아내려 산사태는 물론이고, 인근 지역의 가뭄을 초래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2도 상승하면,
가뭄과 홍수는 그 정도가 심해지고, 또한 더욱 빈번하게 발생한다.
과거 온대지방에는 여름마다 열파가 닥쳐서 노인들의 사망률이 증가하고,
과도한 이산화탄소는 바닷물을 산성으로 변화시켜 바다속의 생태계를 파괴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3도 상승하면,
아마존을 비롯한 열대 우림은 파괴당하고, 기상이변은 이제 더 이상 ‘이변’이 아닐 정도로 일상적이 된다.
이 때부터 문제는 온난화의 속도가 더욱 빨라진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제 사람들은 굶어죽지 않기 위한 대이동을 시작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4도 상승하면,
남극의 빙하는 완전히 녹아 내리고, 세계의 해안선 모양은 완전히 달라진다.
가뭄, 홍수, 열파로 인해 생태계는 파괴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5도 상승하면,
해안도시들은 모두 바다 밑으로 가라앉고 내륙지방까지 바닷물이 들어온다.
국제무역 시스템은 붕괴되고 공황이 일어난다.
재해를 피해 이동하는 사람들은 많아지나, 거주가능지역은 한정되어 있다.
결국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 시작된다.
이제 바다 속의 메틴하이드레이트라는 메탄가스 함유물질이 분출되고, 이로 인한 지진해일(쓰나미)이 전세계를 덮친다.

지구의 평균기온이 6도 상승하면,
이제 인류를 비롯한 모든 생물이 멸종의 위기를 맞는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지구의 온도는 그렇게 쉽게 오르지 않을 것이라고.. 지구의 평균기온이 1도 오르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 아느냐고.
그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이런 논리에는 간과하고 있는 것이 두 가지 있다고 생각하는데,
우선 지구온난화는 일정한 간격을 두고 산술급수적으로 진행되지 않는다는 점이다.
저자도 온난화의 되먹임(feedback)을 지적했지만,
온난화가 일정하게 진행되어 어느 임계점을 넘으면 그 때부터 온도가 올라가는 속도는 기하급수적이다.
그리고 그로 인한 피해도 기하급수적이다.
또 한가지 문제는 이런 논리가 철저하게 인간중심적인 오만함의 논리라는 점이다.
1도 오르면 인간은 어떻게든 살아남을 것이다.
하지만, 어떤 동식물들에게는 이 1도가 그야말로 생과 사를 결정짓는 차이가 되며,
"인간 때문에 지구 자연계의 생물종들은 자연스러운 멸종률보다 이미 수백 수천 배나 빠르게 멸종하고 있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또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지구온난화의 문제가 중요하긴 하나 더 심각하고 더 시급한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냐고.
하지만, 빈곤이나 기아의 문제와 지구온난화의 문제를 선후차를 둔 것으로 파악하는 방식은 논란의 여지가 있다고 본다.
뒤집어 말하면, 지구온난화의 문제에만 매달리면 빈곤이나 기아 문제는 해결 못한다는 것인가?
어떤 책에서는 <온난화로 인해 매년 15마리의 북극곰이 희생되지만 인간의 포획으로는 매년 49마리가 사라진다. 그러니 온난화보다 더 관심을 두어야 할 것은 따로 있다>라는 논리를 폈다.
하지만 인간의 포획과 온난화를 모두 적절히 관리하면 49마리가 아니라 64마리를 살릴 수 있다는 것은 왜 간과하는지.
또 <해수면이 올라가는 건 바다의 얼음이 녹기 때문이 아니다. 얼음이 녹아도 물높이는 달라지지 않는다. 그러므로 온난화로 인한 위기는 과장되어 있다>라는 논리도 있다.
그러나 거대한 빙하라는 지구의 온도조절장치가 사라질 경우 초래될 수 있는 해수면 상승 효과는 단순히 물 위의 얼음이 녹는 수준이 아니다.
얼음이 녹아 생기는 수증기는 반드시 어디론가 되돌아 간다.
뿐만 아니라 빙하가 품고 있는 탄소는 그 빙하가 녹았을 때 대기중으로 나와 더 심각한 온난화의 촉진제가 된다.

나는 저자가 처음에 이야기한 것과 마찬가지로 이 책에서 예측한 것들이 실현되는 일이 없기를 진심으로 바란다.
하지만, 인류가 지금까지 쌓아올린 생활을 위한 최소한의 에너지 소비는 필요할 것이고,
그로 인해 발생하는 온난화 역시 피할 수 없는 현실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중요한 것은 조금이라도 적정한 수준에서 온난화를 조절하고자 하는 실천이다.
그리고 그 실천은 개인차원 뿐만 아니라 국제기구나 각 국의 정부 차원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지구에 대해, 자연에 대해 인간이 가진 오만함을 포기하지 않는다면,
인간이란 존재는... 어쩌면 스스로의 손으로 종의 멸망을 가져오는 첫 존재가 될지도 모른다.
또한 ‘수백만 년에 걸쳐 이 지구상에서 진화해온 생물 종들이 인간의 한 세대라는 시공간 속에서 영원히 파멸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늦었다고 생각할 때가 어쩌면 가장 빠를 때일 수 있다.
저자는 탄소배출의 차등화를 주장하고 있으나, 앞으로 탄소배출량을 줄이기 위한 더 실효성있는 대책이 추진되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저자의 성실성과 대중적 친절함에 경의를 표하고 싶다.
저자는 단순히 ‘지구가 따뜻해지면 이런이런 일이 일어나겠지...’하는 상상력에
화려한 필력을 덧붙여서 과장하여 책을 쓰지 않았다.
서론에도 밝혔듯이 저자인 마크 라이너스는 거의 매일 같이 노트북 컴퓨터를 들고 옥스퍼드 대학 레드클리프 과학도서관으로 향한다.
거기서 그는 기상학 관련 전문 저널을 뒤져서 지구의 온도와 기후변화 사이의 상관성을 분석․예측한 전문잡지들을 일일이 찾아냈다.
그리고 이 학술적 정보를 <지구기온 1도 상승에 따른 단계적 변화>라는 누구나 알기 쉬운 방법으로 재구성하여 사례들을 들었다.
이로 인해 [6도의 악몽]은 과학적 객관성과 냉정함을 바탕으로 하면서도 무시무시한 내용의 SF같은 책으로 탄생한 것이다.

저자의 이런 성실성이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 일으키고,
더 물이 뜨거워지기 전에 위기를 깨닫고, 박차고 나올 수 있도록 개구리를 깨워주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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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의 아이 -상 영원의 아이
텐도 아라타 지음, 김난주 옮김 / 살림 / 1999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17년전, 후다미 소아종합병원 아동정신과에서 세 명의 아이가 만나게 된다.

‘구사카 유키’는 성폭행의 후유증으로 입원한 후,
세면장에서 호스를 휘둘러 자기 몸에 물을 뿌리는 이상행동을 보인 후부터 별명이 루핀(돌고래의 약칭)이 된다.

‘아리사와 료헤이’는 부모의 이혼과 학대로 아동정신과에 입원한 소년이다.
그의 별명은 지라프(기린)였는데, 엄마가 담뱃불로 온몸을 지진 흉터가 기린과 같은 무늬로 남아 있었기 때문이다.

‘나가세 쇼이치로’ 역시 부모의 이혼과 엄마의 문란한 생활로 입원하였다.
그 시절 별명은 모울(두더지)이었는데, 그것은 그는 어둠 속에 갇히는 것을 극단적으로 두려워하였기 때문이었다.

세 명의 아이가 퇴원하기로 되어 있던 날, 병원의 전통이던 퇴원 기념 등산 행사 도중에 추락사고가 일어난다.
그리고 세 명의 아이는 흩어지고, 각자의 인생을 살아가게 된다.
하지만, ‘셋이면서 하나일 수밖에 없는’ 세 아이의 운명이라고 해야할지..
이들은 17년 후 29세의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되고, 이들 주위에서는 살인사건이 발생한다. 마치 어린 시절, 이들이 가슴에 품고 있던 상처에 대한 보복처럼...

텐도 아라타의 [영원의 아이]는 유키(루핀), 료헤이(지라프), 쇼이치로(모울),
이 3명의 아이들이 12세였던 시절 아동정신병원에 보낸 약 1년간의 생활과
병원에서 퇴원한 후 29세의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나게 된 생활을 교차시키면서
그들의 마음 속 깊은 곳에 감추고 있는 상처와 그 상처로부터의 구원에서부터
아동학대나 치매 노인의 돌봄, 가족의 문제 등으로 발생하는 사회병리의 문제까지를 한 작품 안에 녹여내고 있는 책이다.

2000년쯤이었던 것 같은데, 이 책을 처음 읽었을 때에는
뒤에 벌어질 일이 너무나 궁금해서 시간가는 줄도 모르고 줄거리에만 빠져들어 갔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 때는 세 명의 아이가 받은 ‘아동학대’에 대해서 혼자 흥분하고,
그런 학대를 너무도 당연하게 행하는 소설 속의 부모들을 향해 혼자 울분을 터뜨리던 기억도 생생하다.
이번에 [영원의 아이]를 다시 천천히 읽으면서 그 때 미처 느끼지 못했던 아픔과 감동을 느낄 수 있었다.

사람이 공포를 느끼는 이유는 어디에 있을까.
그건 아마도 그동안 익숙한 것이 갑작스럽게 낯선 것이 되어버린 ‘낯설음’에 있지 않을까 한다.
살아있는 것이 익숙한 사람들에게 ‘죽음’이란 낯설음은 큰 공포가 되고,
익숙한 사람들 대신에 낯선 사람들 속에 들어갈 때, 익숙한 장소와 풍경 대신에 낯선 장소와 풍경 가운데 있어야 할 때 공포는 시작된다.

그렇다면 가족은 어떨까?
우리들의 머리 속에는 가족은 가장 익숙한 것, 그래서 가장 편안하고 안전하고 따뜻함을 느껴야 하는 곳으로 그려져 있다.
그러나 이와 같이 익숙한 가족의 모습이 깨어질 때, 그로 인한 공포는 아이들에게 지울 수 없는 상처로 남게 된다.
특히 가장 큰 사랑을 받아야 할 부모로부터 일어나는 학대는 가족 뿐만 아니라 자기 자신에 대한 증오와 저주, 죄의식을 남기게 된다.

아동소아과에서 만난 유키, 료헤이, 쇼이치로는 태풍으로 비바람이 몰아치던 어느 초가을 밤,
병원 근처 숲 속의 거대한 녹나무 구멍 안에서 자기자신과 가족에 대한 증오와 죄의식을 공유함으로써 구원의 실마리를 찾는다.
서로의 마음을 열어놓음으로써 세상을 향해 한 걸음 힘들게 발을 내디딘 것이다.

그러나 이들이 구원을 위해 최종적으로 선택한 것.
그 선택은 또다른 마음의 상처를 새기고 마는 계기가 되고, 결국 성인이 되어 다시 만난 이들의 삶을 비극으로 이끌고 간다.

이들은 각자 열심히 살아보고자 하였다.
업무에 헌신하면서, 금욕적으로, 일에 충실하면서, 다른 사람에게 인정을 받으려 하고, 칭찬을 받으려 하고, 어떻게든 세상을 헤쳐보려 하였다.
이 과정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하였다.
'이렇게 아픈 마음을 움켜쥐고 살아가는데, 너무도 몰라주는구나'하는 안타까움과..

어린 시절의 경험이 남긴 아픈 상처가 서로에 대하여,
그리고 주위 사람들(다른 가족, 연인, 직장동료..)에 대하여
서투른 인간관계의 표현으로 나타날 때의 안타까움이 뒤섞인 채로 말이다.

텐도 아라타가 그리고 있는 이들의 아픔과 고통,
그리고 그 아픔과 고통을 가지고 살아가야 하는 생명에 대한 이야기는
너무도 가슴 아파서 읽는 도중 몇 번이나 책을 덮도록 만들었다.
주위의 헌신적인 도움을 받아 올바른(?) 사회인으로 성장해 가는 일반적인 성장소설의 범주와는 180도 다른,
죄의식과 증오 속에서 파국으로 달려가고 마는 성장의 경험.
그 성장이 가져온 마지막 비극의 장면을 읽으면서 너무도 가슴이 아파서 눈물을 애써 참아야 했다.

아동학대와 가족의 붕괴가 이제 더이상 어쩌다 한번씩 신문지상을 장식하는 뉴스의 수준을 벗어난 지금의 사회.
그러면서도 이들에 대해 무엇이 올바른 치료와 구원인지 아직도 서투르기만 한 우리 사회.
나는 개인적으로 어릴 때 함께 비밀을 나누었던 곳으로 돌아온 료헤이의 마지막 독백.
그 독백이 아동학대, 또는 가족의 붕괴로 인하여 고통을 당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치료와 구원의 힘을 줄 수 있는 말이 되었으면 한다.

셋이서 같이 얘기했었지. 녹나무에 팔을 두르고, 셋이서 울었었어.
그 후에 구멍에 들어가 손을 마주 잡고, 서로 몸을 꼭 껴안듯 기대고,
우리는 줄곧 같은 말만 나누었던 것 같아.
우리는 오직 이 말만을, 오로지 이 한 마디 말만을 주고받았었어.
“살아 있어도 괜찮아. 너는 … 살아 있어도 괜찮아. 정말로, 살아 있어도 괜찮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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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아
파스칼 메르시어 지음, 두행숙 옮김 / 상상공방(동양문고)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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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파스칼 메르시어의 [레아]..
며칠 동안 이 책을 읽고 갑자기 생각난 것은 유진 오닐의 [밤으로의 긴 여로]였습니다.
겉으로 보기에는 아무 문제없는 중산층 가정이지만, 안으로는 고통받고 방황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였던 [밤으로의 긴 여로].
마찬가지로 이 채, [레아] 역시 겉으로는 인생의 탄탄대로를 걷고 있는 듯한 사람이지만,
안으로는 잠시 동안의 쉴 여유조차 없는 급박하고 목말라서
자신이 가진 모든 것을 태워 자신의 생명까지 대신하고 만 이야기였습니다.

어머니가 죽은 이후 침울하게 지내던 레아는 우연히 길거리 바이올린 연주를 듣게 되고, 운명처럼 바이올린에 빠져들게 됩니다.
점차 자기 안에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재능을 발견하는 레아. 그러나 첫 번째 콘서트에서 그만 실수를 범하게 됩니다.
이후 바이올린에 대한 열정과 자기 충족감, 성공에 대한 열망으로 실력을 한 계단씩 발전하던 레아는 생모리츠서 열린 콩쿠르에서 다비드 레비라는 당대의 바이올린 교사를 만납니다.
레비의 지도 하에 ‘마드모아젤 바흐'라는 칭송까지 듣는 레아. 그러나 레비를 사랑하던 레아는 그의 배신으로 충격을 받고 무너져 내립니다.
그 모든 과정을 불안 속에 바라보던 아버지 반 블리에트는 자신의 연구비까지 횡령하여
세계적인 명품 바이올린인 과르네리 델 제수를 얻기위한 여정을 떠납니다.
그것이 결정적인 파국과 파멸의 시작이 아닐까하는 불안감을 가지고...

‘인간은 사회적 동물’이라는 말과 같이
인간으로 태어난 이상 아주 특별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관계망 속에서 살아가게 됩니다.
따라서 한 사람의 일생에서 관계망 가운데 다른 사람들과 맺는 관계들은
순간순간의 삶 뿐만 아니라 때에 따라선 그 사람의 일평생에까지 영향을 미칩니다.
‘관계맺음’도 어떻게 보면 하나의 기술인지라,
이것에 능숙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또 어떤 사람은 여기에 무척이나 서투르다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이렇게 관계맺음에 서투르고, 잘 풀어가지 못하는 이유는 아마도
나르시스처럼 자신만을 사랑하거나,
또는 반대로 에코처럼 특정한 대상만을 맹목적으로 사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마음 속으로 생각하는 것을 솔직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강박적인 의무로서 다른 사람을 대하는, 겉과 속이 다른 모습을 어쩔 수 없이 보임으로써 인간관계의 미숙함은 더욱 깊어집니다.

평행선이 교차선보다 그나마 행복하다고 생각되는 점은
어쩌면 영원히 만나지 못하고, 그래서 깨어질 염려가 없어서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파스칼 메르시어의 [레아]에는
평행선이 아니라 마주보고 달리는, 그래서 언젠가는 교차하고 부딪칠 수밖에 없는 두 사람이 등장합니다.
모두 인간 사이의 관계맺음에 서투른 사람들.
비극적인 것은 이 두 사람의 겉모습과 속모습이 전혀 다른 모습이라는 점입니다.
한 사람은 자신에 대한 사랑, 자신에 대한 자부심으로 뭉쳐 있는 것 같으면서도 내면 깊숙한 곳에 애정과 관심을 갈구하는 마음을 숨겨놓고 표현하지 못합니다.
또 다른 한 사람은 그런 사람을 위해 무엇이나 해주고 희생하고자 하면서도 마음 한 켠에는 그런 희생과 마음씀씀이가 가져오는 속박을 못견뎌하는 마음이 자리잡고 있습니다.
더 비극적인 것은 그 두 사람이 딸과 아버지의 관계라는 것.
이건 두 사람 사이의 관계의 파국과 모두의 파멸을 예견하는 것이나 다름없습니다.

[레아]는 이렇게 인간관계에서 자신과 주위에 솔직하지 못한 덕분에,
때론 자신과 주위를 속이려고 하는 덕분에 스스로를 나락에 밀어넣은 사람들의 이야기였습니다.
어쩌면 이런 기만은 우리들 모두가 경험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다만 나의 세계를 무너뜨릴 정도로 그 기만이 심각한 것이냐, 아니면 소주 한 잔 마시면서 내뱉는 솔직한 토로와 함께 해소할 수 있느냐 하는 그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입니다.
어딘지 모르게 요즘에는 자신에 대한 강박관념과 의무에만 충실한 사람들을 많이 보게 됩니다.
마치 레아가 음악가로서의 자신의 자부심이란 의무에, 블리에트가 아버라는 자신의 신분적인 의무에 속박당하여 부녀간의 솔직한 소통에 이르지 못한 것처럼 말입니다.

풀사이즈의 바이올린을 구입한 후 파티를 열기로 했으나 초대할 사람이 아무도 없는 레아.
딸로서 사랑하지만, 애초에는 자녀를 키울 책임감을 두려워했고, 가슴 속 깊이 ‘이 딸이 없었으면...’ 하는 생각을 가진 아버지.
이런 삭막하고 비극적인 모습이 의무감에 빠진 현재 우리들의 모습 가운데 하나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오싹하기까지 합니다.

그래서 소통이란 것이 중요하고,
그 소통의 첫 번째 조건은 자신만의 의무를 내려놓을 뿐만 아니라
그 의무만이 신성한 것이다라는 아집에서 깨어나는 것이 아닌가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여기서 자기만의 의무는 자신의 잣대로 다른 사람을 평가하고, 다른 사람의 삶의 모습을 재단해 버리는 오만과 독선과 일맥상통합니다.
특히 권력을 가진 자의 자기의무 충족감은 여러 사람을 피곤하게 만들 뿐입니다.

그래서 파스칼 메르시어는 책 첫머리에 쓴 고대 아르메니아의 묘비명에서 그런 얘기를 하고 싶었나 봅니다.

우리는 우리 감정의 그림자를
다른 사람 위에 드리우고, 그들은
그들의 그림자를 우리 위에 드리운다.

그러나 그들이 없다면
우리 인생에는 아무런 빛도 없을 것이다.

이러한 인간 사이의 소통의 문제는 작가인 파스칼 메르시어가 전작 [리스본행 야간열차]에서도 이야기해 온 주제이기도 하다는 생각입니다.
누가 내 옆에 앉게 될지 모르는 ‘기차여행’이라는 미지의 여행에서 함께 목적지까지 가야만 하는 다른 손님과의 소통말입니다.

[레아]에서 소통에 실패한 딸과 아버지는 모두 비극적인 삶을 살았고,
이것이 책을 읽는 내내 마음을 아프게 했습니다.
메르시어의 다음 작품에서는 이 소통이 구원이 되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보여주었으면 하는 개인적인 소망을 가져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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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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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매력적인 책이었다. 아마 누구든 이 책을 붙잡기 시작하면 그 매력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책의 매력은,
단지 살았던 시대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우리와 똑같이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 가족의 삶이 축적된 공간과 철학을 연결시킴으로써
철학이 가졌다고 오해받아온 고리타분함과 딱딱함을 씻어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은,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유럽의 도시를 선정하고,
그 도시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삶을 연결시켜서
마치 도시의 오래된 거리를 느릿하게 산책하며, 때론 노상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사색에 잠기는 듯한 편안한 접근성에 있다.

이 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다른 철학책이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시간 순서를 따르는 데 비해
이 책은 거꾸로 현대→근대→고대 및 중세의 순서를 취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마도 저자도 밝혔듯이 ‘이번 유럽 철학 여행의 목표로 설정한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것이리라.
철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다.
비록 위대한 철학자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은 종료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철학 유산은 계속하여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반박되고, 공박당하며, 재발견되고,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변증법적 나선형으로 발전되어 왔다.
어쩌면 변증법적 나선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보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볼 때에 아래에 토대로 깔린 전(前)단계들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더 잘 보일 수 있겠다.

나는 철학을 동사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에 ‘위기’가 운운되는 가장 큰 원인은 오히려 그 학문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다.
전문가들에 의하여 독점되는 학문, 고상하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의 성찬, 대중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대하여 순수성을 훼손시킨다는 비판 등.
최근에 와서야 학문의 대중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기본적으로 우리 학문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기 보다는 정형화된 모습으로 고정되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양상으로 철학을 바라보고,
그 변화의 주체를 독자들 개인에게 돌리고자 하는 저자의 모습, 그러면서도 본인이 제시한 문제에 성실한 답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동사’로서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한 ‘동사’로서의 철학은 다소 다른 의미이다.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동사는 움직임, 즉, 변화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철학의 변화가능성과 다양성에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상 몇 가지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 더 나은 철학적 자세가 아닐까.

저자는 제3장에서 ‘실재’의 귀환으로 본인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독자에게 스스로의 답안지를 작성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 개인적인 답안지를 써서 정리해 보는 것이 예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중세 이후 철학사의 가장 큰 흐름으로 ‘근대 프로젝트’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성 프로젝트’, 또는 ‘계몽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철학의 제일 원리를 이성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경험주의는 이성과 다른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또다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었으나,
칸트는 이성과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였고, 헤겔은 이를 절대정신으로까지 끌어올려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정수를 구성한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 역시 그 주체를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이성 중심의 사고와 이성 중심의 프로젝트, 근대 프로젝트를 뒤집지 않았다.
이성 중심은 근대를 넘어올수록 ‘과학’과 결합한다. 비엔나에서 시작한 논리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을 이성의 최고봉으로까지 상정하고, 과학적 세계관 하에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8혁명세대로 대표되는 파리,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이 모든 이성과 근대를 해체하고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이제 만능의 이성과 절대불변의 과학적 세계관 대신에 모든 것이 처지와 조건에 따라 ‘구성’되어 왔으며, 그 구성의 이면에는 권력이 숨어 있음을 대대적으로 폭로하게 된다.

80년대 사회과학도에게 필수적인 학습대상이 맑스라면, 90년의 필수 학습대상은 미셀 푸코라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미셀 푸코에 대한 대대적인 붐은 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신세대’, ‘X세대’라는 인구 구성상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격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의 문분별할 정도의 유입으로 대표되는 사상적 혼돈이 결합된 시대에서 나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열풍처럼 불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감안해 준다면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의 과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과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양철학사에서 구조주의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절대화된 과학과 이성에 반기를 들었고, 맥락에 따른 사상과 그 사상의 구현체인 사회의 구성가능성 및 변화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푸코 등은 그동안 신성하게까지 여겨왔던 권력(power) 아래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면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실천방안을 제시한 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소중한 성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일부 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진리의 상대성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다.
또한 과연 서양의 탈근대 프로젝트가 우리 사회에 적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수준이 아니라 확신의 수준으로 ‘아직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당파성 개념의 유효성을 여전히 인정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갈파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있는가.
이성이 신격화될 정도로, 더 이상 계몽의 과제의 유효성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적인가의 물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 각 부분이 돌아가는 모습 속에는 계급간에, 성별간에, 지역간에, 세대간에 아직도 ‘전근대적인 야만이 독버섯처럼 남아있다’
근대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근대적 억압과 착취의 틀에 대해 개혁적이다.
그리고 이 개혁성이 유효한 사회에서 근대 프로젝트의 단절과 포스트모던으로의 해체는 하버마스가 푸코에 대해 공격한대로 ‘보수주의적’일 수 있다.

탈근대의 전제조건은 누가 뭐래도 ‘주체의 성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회사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갖추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양극화로 대표되는 계급 또는 계층간 불평등이 여전히 크고,
그 불평등이 교육을 통해 세대를 거쳐가며 여전히 확대재생산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지점은 근대의 해체가 아니라 여전히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연이겠으나, 2008년 마지막 책으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정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뜻깊은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을 보니, 아마도 이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에서 끈질기게 대치하고 경쟁했던 사상의 충돌을 그린 ‘생각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이러한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오만과 독선을 논파한 ‘생각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시도에 응원을 보내면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철학적 소산을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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