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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 1
정재영 지음 / 풀빛 / 2008년 11월
평점 :

아주 매력적인 책이었다. 아마 누구든 이 책을 붙잡기 시작하면 그 매력에서 쉽게 빠져나오기 어려울 것 같다.
이 매력은 어디에서 나오는 것일까.
무엇보다도 이 책의 매력은,
단지 살았던 시대만 천차만별로 다를 뿐 우리와 똑같이 느끼고 우리와 똑같이 생각하고 우리와 똑같이 부대끼며 살아온
우리 이웃, 우리 친구, 우리 가족의 삶이 축적된 공간과 철학을 연결시킴으로써
철학이 가졌다고 오해받아온 고리타분함과 딱딱함을 씻어주고 있다는 점에 있다.
또 한 가지 이 책의 매력은,
한 시대를 풍미한 철학이 태어나고 성장해온 유럽의 도시를 선정하고,
그 도시를 둘러싼 시대적 배경과 철학자들의 삶을 연결시켜서
마치 도시의 오래된 거리를 느릿하게 산책하며, 때론 노상의 카페에서 커피를 한 잔 마시면서 사색에 잠기는 듯한 편안한 접근성에 있다.
이 책은 서로 관련되어 있는 두 가지의 중요한 특징을 가지고 있다.
한 가지는 다른 철학책이 고대→중세→근대→현대의 시간 순서를 따르는 데 비해
이 책은 거꾸로 현대→근대→고대 및 중세의 순서를 취한다.
또 한 가지 특징은 철학을 ‘동사로서의 철학’으로 파악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와 같은 특징은 아마도 저자도 밝혔듯이 ‘이번 유럽 철학 여행의 목표로 설정한 지금 여기, 그리고 우리에 대한 정체성을 다시 생각하기’ 위한 것이리라.
철학의 역사는 단절의 역사가 아니다.
비록 위대한 철학자들의 자연인으로서의 생명은 종료되었다고 할지라도, 그들이 남긴 철학 유산은 계속하여 확대되고, 재생산되고, 반박되고, 공박당하며, 재발견되고, 공격하면서 끊임없이 변증법적 나선형으로 발전되어 왔다.
어쩌면 변증법적 나선형은 아래에서 위로 올라가며 보기 보다는
위에서 아래로 내려오면서 볼 때에 아래에 토대로 깔린 전(前)단계들이 어떤 모습을 가지고 있는지 더 잘 보일 수 있겠다.
나는 철학을 동사로 파악하는 저자의 입장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철학을 비롯하여 인문학에 ‘위기’가 운운되는 가장 큰 원인은 오히려 그 학문에 있지 않았던가 하는 반성이다.
전문가들에 의하여 독점되는 학문, 고상하고 현학적으로 보이는 말의 성찬, 대중성을 얻고자 하는 노력에 대하여 순수성을 훼손시킨다는 비판 등.
최근에 와서야 학문의 대중화가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지, 기본적으로 우리 학문이 대중 속에서 호흡하기 보다는 정형화된 모습으로 고정되었던 측면을 부인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변화의 양상으로 철학을 바라보고,
그 변화의 주체를 독자들 개인에게 돌리고자 하는 저자의 모습, 그러면서도 본인이 제시한 문제에 성실한 답안을 제시하는 저자의 모습에서 ‘동사’로서의 철학이 나아가야 할 길을 본다.
물론 저자가 말한 ‘동사’로서의 철학은 다소 다른 의미이다. 안다. 하지만, 말 그대로 동사는 움직임, 즉, 변화를 내포한 개념이다.
어쩌면 철학의 변화가능성과 다양성에 항상 눈을 열어두어야 하는 것이 철학자의 사상 몇 가지를 기계적으로 외우는 것보다 더 나은 철학적 자세가 아닐까.
저자는 제3장에서 ‘실재’의 귀환으로 본인의 답안지를 작성하여 독자들에게 제출하였다.
그리고 독자에게 스스로의 답안지를 작성해 볼 것을 권하였다. 그렇다면 이제 내 개인적인 답안지를 써서 정리해 보는 것이 예의가 될 것이다.
저자는 중세 이후 철학사의 가장 큰 흐름으로 ‘근대 프로젝트’를 지적하고 있다.
이는 ‘이성 프로젝트’, 또는 ‘계몽 프로젝트’라고 부르는, 서양철학사 전체를 관통하는 뼈대라고 할 수 있겠다.
데카르트는 생각하는 자기를 발견하고, 철학의 제일 원리를 이성에서 출발하였다.
물론 경험주의는 이성과 다른 경험을 강조함으로써 또다른 거대한 물줄기를 이루었으나,
칸트는 이성과 경험을 비판적으로 종합하였고, 헤겔은 이를 절대정신으로까지 끌어올려 독일 관념론 철학의 정수를 구성한다.
어쩌면 자본주의를 비판한 맑스 역시 그 주체를 프롤레타리아로 바꾸었을 뿐, 본질적으로는 이성 중심의 사고와 이성 중심의 프로젝트, 근대 프로젝트를 뒤집지 않았다.
이성 중심은 근대를 넘어올수록 ‘과학’과 결합한다. 비엔나에서 시작한 논리실증주의는 기본적으로 ‘과학’을 이성의 최고봉으로까지 상정하고, 과학적 세계관 하에서 세계를 해석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68혁명세대로 대표되는 파리, 프랑스의 철학자들은 이 모든 이성과 근대를 해체하고 이전 시대와의 단절을 선언하였다.
이제 만능의 이성과 절대불변의 과학적 세계관 대신에 모든 것이 처지와 조건에 따라 ‘구성’되어 왔으며, 그 구성의 이면에는 권력이 숨어 있음을 대대적으로 폭로하게 된다.
80년대 사회과학도에게 필수적인 학습대상이 맑스라면, 90년의 필수 학습대상은 미셀 푸코라는 이야기가 있었던 적이 있었다.
미셀 푸코에 대한 대대적인 붐은 실상 우리나라에 있어서 90년대 들어 갑자기 등장하기 시작한 ‘신세대’, ‘X세대’라는 인구 구성상 새로운 세대의 출현과,
‘서태지와 아이들’의 등장으로 대표되는 문화적 격변, 포스트모더니즘이라는 사조의 문분별할 정도의 유입으로 대표되는 사상적 혼돈이 결합된 시대에서 나온 측면이 분명히 있다.
그렇지만, 열풍처럼 불었던, 포스트모더니즘, 또는 과도한 일반화의 오류를 감안해 준다면 ‘구조주의’라고 부르는 철학의 과제가 현재 우리 사회의 과제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이 갈 수밖에 없다.
물론 서양철학사에서 구조주의가 미친 영향은 지대했다.
절대화된 과학과 이성에 반기를 들었고, 맥락에 따른 사상과 그 사상의 구현체인 사회의 구성가능성 및 변화가능성을 새롭게 제기하였다.
이 과정에서 푸코 등은 그동안 신성하게까지 여겨왔던 권력(power) 아래에 감추어진 본질적인 면을 ‘폭로’함으로써 새로운 담론과 새로운 실천방안을 제시한 것은 인류 지성사에서 소중한 성과로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그렇지만, 나는 개인적으로 일부 구조주의에서 주장하는 진리의 상대성 개념에 대해서는 아직도 의문이다.
또한 과연 서양의 탈근대 프로젝트가 우리 사회에 적용될 것인가에 대해서는 의문의 수준이 아니라 확신의 수준으로 ‘아직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이런 점에서 하버마스의 노력을 높이 평가하고, 맑시스트들이 주장하는 당파성 개념의 유효성을 여전히 인정한다.
맑스는 [공산당 선언]에서 “그 사회의 지배 이데올로기는 지배계급의 이데올로기이다”라고 갈파한다.
우리 사회는 지금 근대 사회에 접어들어 있는가.
이성이 신격화될 정도로, 더 이상 계몽의 과제의 유효성을 제기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우리 사회가 이성중심적이고 합리적인가의 물음이 반드시 필요하다.
개인의 일상생활에서부터 사회 각 부분이 돌아가는 모습 속에는 계급간에, 성별간에, 지역간에, 세대간에 아직도 ‘전근대적인 야만이 독버섯처럼 남아있다’
근대 프로젝트는 이러한 전근대적 억압과 착취의 틀에 대해 개혁적이다.
그리고 이 개혁성이 유효한 사회에서 근대 프로젝트의 단절과 포스트모던으로의 해체는 하버마스가 푸코에 대해 공격한대로 ‘보수주의적’일 수 있다.
탈근대의 전제조건은 누가 뭐래도 ‘주체의 성숙’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그 회사는 다양성과 다원성을 갖추는 것이 선결조건이다.
양극화로 대표되는 계급 또는 계층간 불평등이 여전히 크고,
그 불평등이 교육을 통해 세대를 거쳐가며 여전히 확대재생산되는 우리 사회의 문제해결지점은 근대의 해체가 아니라 여전히 정치경제학적 문제에 있다는 생각이다.
우연이겠으나, 2008년 마지막 책으로 [철학, 도시를 디자인하다]를 읽게 되었다.
그리고 평소에 나름대로 관심이 있었던 분야를 정리하게 된 계기가 되었는데,
한 해를 마무리하면서 아주 뜻깊은 독서였다는 생각이 든다.
저자의 말을 보니, 아마도 이 책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서양철학사에서 끈질기게 대치하고 경쟁했던 사상의 충돌을 그린 ‘생각의 전쟁’에 대한 이야기와, 이러한 생각의 전쟁에서 승리한 자의 오만과 독선을 논파한 ‘생각의 함정’에 대한 이야기를 계속 준비하고 있는 것 같다.
저자의 시도에 응원을 보내면서 또 하나의 의미있는 철학적 소산을 남겨주었으면 하는 바램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