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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F. 스콧 피츠제럴드 지음, 공보경 옮김, 케빈 코넬 그림, 눈지오 드필리피스.크리스티나 / 노블마인 / 2009년 1월
평점 :
절판

설날 연휴에 들어가기 전인 금요일 퇴근길 지하철 약 30분 동안
이 책의 전반부에 나온 만화 부분을 모두 읽었습니다.
그리고 컴퓨터도 없고 인터넷도 깔아놓지 않은 깡촌 시골 고향마을에서 후반부의 원작 소설 부분을 마저 읽었습니다.
그런데, 이 책이 저를 좀 감상적으로 만들었습니다.
벤자민 버튼이 경험한 ‘시간’이란 것이 이제 예전의 방들만 남은 시골집에서 경험했었던 ‘시간’과 겹쳐서 여러 가지 추억과 상념을 불러 일으켰기 때문입니다.
어렸을 때 명절을 맞아 시골에 내려가면
세대에 따라 보내는 시간과 활동공간이 대체적으로 구분됨을 알 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할머니 세대는 다소 구석지지만 따뜻한 웃방에서,
아버지, 어머니 세대는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거실의 역할을 하는 가운데방에서,
꼬마들은 음침한(?) 건넌방과 마당을 뛰어다니며 자신에게 주어진 시간을 보냈습니다.
세월이 지나면서 이제 한 세대는 거의 세상을 떠났고,
다음 세대는 또 전 세대가 생활하던 공간으로 조금씩 옮겨갔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만인에게 ‘시간’을 공평하게 주셨다고 하는 의미는,
아마도 모든 인간에게 24시간, 365일이란 정해진 시간이 주어졌다는 것 뿐만 아니라
누구든지 세월이 흐르면서 성장하다가 결국에는 늙어서 흙으로 돌아가야 하는 동일한 운명을 거스릴 수 없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벤자민 버튼은 이런 ‘공평한’ 시간을 좀 다르게 살았습니다.
결국에 흙으로 돌아갈 운명을 맞은 것은 다른 사람과 같았으나,
점점 젊어지고 어려지는 과정을 통해 흙으로 돌아갔기 때문입니다.
벤자민 버튼의 일생을 보면 우리가 보통 살아가는 방법,
즉, 아무 것도 모르는 아기로 태어나서 신체적, 정신적으로 성숙하면서 성장한 후 늙어서 죽음에 이르는 길과 비교해 보게 됩니다.
어느 쪽이 개인에게 더 행복한 일생이 될지는 판단이 서지 않습니다.
하지만, 제게 개인적으로 어느 쪽을 선택하라고 한다면 많은 사람들,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식대로 살아가고자 할 것 같습니다.
이런 선택은 제가 좋아하는 애니매이션 [나의 지구를 지켜줘]를 생각해보면 더욱 굳어집니다.
사랑하는 사람과 동료들이 모두 죽은 후 혼자서 외롭게 살아가는 것이
얼마나 큰 고통이며, 그들과 같이 일생을 마칠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가가 그 작품에는 잘 나타나 있습니다.
사실 불로장생은 인류의 꿈이라고 하지만, 조금만 더 생각해 보면 혼자서 불로장생하는 것만큼 비극이 없습니다.
영원한 젊음, 영원한 생명.. 좋습니다만,
내가 사랑하는 사람들은 모두 늙고 병들고 죽음을 맞는데, 나만 쌩쌩하게(!) 이 땅에 존재하는 것이 행복한지 모르겠습니다.
그런 점에서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우리에게 ‘혼자 사는’ 시간이 아니라 ‘함께 하는’ 시간의 행복함을 알려주는 것 같습니다.
그 순간이 어린 아이의 순간이든, 팔팔한 청년의 순간이든, 늙은 노년의 시간이든 말입니다.
과도하게 나가는 것인지 모르겠지만,
피츠제럴드의 명작으로 평가받는 [위대한 개츠비]에 대해 어째서 현대 독자들의 평이 갈리는지도 알 것 같습니다.
그가 그렇게나 다른 사람과 같이하고자 했던 ‘재즈의 시대’도 결국은 그와 그 동시대인의 시대였으니까요.
지금 우리가 공유하는 시대. 이 시대도 앞으로 흘러가고 다음 시대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서 강물처럼 세월은 흘러간다는 생각이 오래된 시골집의 구석구석 풍경들과 겹쳐지면서 좀 센치해졌던(?) 설 연휴가 되었습니다.
독특하고 신선한 소재로 흥미롭게 읽을 수 있었던 책이었습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역시 그림의 힘은 위대한 것을 재삼 느낍니다.
삽화든 만화든, 행간 속에 숨은 의미를 남김없이 간취하도록 도와주는 그 힘이 적절히 사용된 것이 이 책의 큰 미덕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