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중원 1 - 이기원 장편소설
이기원 지음 / 삼성출판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제중원]을 읽으면서 백구은(白救恩), 즉, 노먼 베쑨이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대학 신입생 때 추천도서 목록에서 발견하여 읽은 [닥터 노먼 베쑨]은 ‘내 인생의 책’ 가운데 하나입니다.
그는 캐나다에서의 안정적인 의사생활을 마다하고 파시즘과 일본 제국주의에 대항했던 스페인 내전과 중국 혁명의 일선에 참전합니다.
그리고 헌신적으로 부상병을 치료하던 중 손가락 상처로 감염된 패혈증으로 사망합니다.
그의 나이 49세였습니다.
꽤 많은 시간이 흐른 지금까지도 제게 잊혀지지 않는 것은 노먼 베쑨의 일생과 함께
인도주의실천의사협회(인의협)를 이끌었던 김록호 선생님이 쓰신 서문입니다.

질병을 돌보되 사람을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작은의사(小醫)라 하고,
사람을 돌보되 사회를 돌보지 못하는 의사를 보통의사(中醫)라 하며,
질병과 사람, 사회를 통일적으로 파악하여 그 모두를 고치는 의사를 큰의사(大醫)라 한다.


이번에 [제중원]을 읽으면서 이 말이 다시 살아왔습니다.
비록 허구의 소설이요, 역사적 팩션이지만 인간의 건강과 생명을 책임지기 위해서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에 대해 고민하게 했다는 점만으로도 높은 점수를 주고자 합니다.

[제중원]의 주인공 황정(黃正)은 이전의 여러 소설과 드라마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한 캐릭터이며, 그의 성장기는 전형성을 가지고 전개됩니다.
그는 계급사회의 최하층, 백정이라는 태생적 차별을 응어리로 가지고 있습니다.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많은 노력을 기울였고, 마침내는 경쟁자들은 물론 적들까지도 탄복하게 만드는 실력과 인품을 가지게 됩니다.
여기서만 머물렀다면 드라마 속의 <허준>이나 <대장금>과 같은 개인적 해피엔딩으로 마무리되었을지도 모릅니다.
그들도 죽을 고비를 무수히 넘겼고, 뛰어난 실력을 갖추었습니다.
금전적 이익이나 개인의 명예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환자를 치료하기 위하여 온갖 노력을 기울이는 그야말로 헌신적인 의사상을 구현하였습니다.

하지만, 주인공 황정의 일생은 마지막이 달랐습니다.
이 점이 의사로서 그의 삶을 곰곰이 음미해 봐야 하는 이유가 될 것입니다.
황정은 해피엔딩으로 끝낼 수 있는 안락함을 포기하고 가시밭길을 선택합니다.
식민지배가 현실화되던 조국의 현실앞에 그는 의사로서 안락한 생활을 버리고 만주독립군에 참가하기 위하여 망명의 길에 오릅니다.
어쩌면 그는 고향 땅에 다시 못 돌아올지도 모릅니다.
만주 벌판 어딘가에서 일본군이나 마적단의 총에 희생당할 수도 있고, 위생상태가 좋지 못한 전선에서 어떤 질병에 쓰러질 지도 모릅니다.
그럼에도 그는 좁은 길, 고난의 길을 선택합니다.

이제 우리는 독립된 나라를 되찾았고, 물질적 측면에서는 구한말과 비교할 수도 없을 정도의 풍요로움을 누리고 있습니다.
위생 관념은 철저해졌고, 좋은 의약품과 의료기술은 사람들의 평균수명을 높이고 있습니다.
수시로 이 땅을 습격하여 수많은 사람들을 죽음과 공포로 몰아넣은 천연두나 호열자는 이제 거의 완벽하게 예방이 가능한 전염병의 일종이 되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우리 사회의 의사 분들은 병을 잘 치료하고 환자들이 건강을 되찾게 해주면 그 사명을 잘 감당하는 것일까요?

저는 그렇지 않다고 생각합니다.
아직도 우리 사회에는 치료받고 싶어도 받지 못하는 사람이 있고, 경제적인 양극화는 건강의 양극화로 이어집니다.
영국의 [Black Report]를 비롯한 수많은 연구에서는 빈곤층, 육체 노동자, 비정규직, 소외계층 등이 상대적으로 높은 사망률과 유병율을 가지고 있음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거주하는 지역이 어디냐에 따라서 사망과 질병의 확률이 차이가 난다는 것은 몇 년 전 신문보도까지 된 사실입니다.
저는 의사 선생님을 비롯한 보건의료계에 종사하시는 분들이 관심을 가지고 궁극적으로 치료해야 할 것은 바로 이 것, 즉, 가난과 차별이라고 생각합니다.
세계보건기구(WHO)가 오래전, 그러니까 1995년도에 발표한 내용입니다.

The world's most ruthless killer and the greatest cause of suffering on earth is listed in the latest edition of WHO's International Classification of Disease, an A to Z of all ailments known to medical science, under the code Z59.5. It stands for extreme poverty.
Poverty is the main reason why babies are not vaccinated, clean water and sanitation are not provided, and curative drugs and other treatments are unavailable and why mothers die in childbirth. Poverty is the main cause of reduced life expectancy, of handicap and  disability, and of starvation. Poverty is a major contributor to mental illness, stress, suicide, family disintegration and substance abuse.


그렇습니다. 가난은 가장 무자비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사망의 원인입니다.
가난 때문에 많은 아이들이 예방접종을 맞지 못하며, 위생적인 환경에서 살아가지 못합니다.
가난은 수명을 줄이고, 장애와 영양실조, 스트레스, 자살, 가정파괴의 근본적 원인입니다.
여기에는 가난으로 인한 차별도 포함됩니다.
출생 국가와 민족이 다르다는 이유로, 지역이 다르다는 이유로, 경제적 수준이 다르다는 이유로 받는 차별은 곧 가난을 유발하고, 이는 곧바로 건강불평등으로 이어집니다.
최근 논쟁의 대상이 되고 있는 ‘의료민영화’에는 그 저면에 이러한 차별의 논리가 숨어 있기에 전적으로 찬성하기가 어렵습니다.

몇 년 전 의약분업을 둘러싸고 벌어졌던 의사들의 파업은 보건의료계에 종사하던 사람으로서 엄청난 무력감을 느끼게 했습니다.
의사 선생님들의 불만이 무엇이고, 그 요구에 일리가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 분들이 선택했던 방식과 그 이후 보여준 ‘정치화’된 모습은 실망이었습니다.
때때로 차별의 논리와 경제적 이익 추구의 논리를 주장하는 것도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닌가 하는 의문이 들게 하였습니다.
우리 사회에서 의사가 되기 위해서는 전국에서 1% 안에는 들어야 하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만큼 의사는 멸시받는 직업이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선망하는 직업으로, 사회지도층으로 자리매김되어 있습니다.
많은 의사 분들이 진료 현장에서 묵묵히 환자들과 가족들의 고통을 덜어주기 위하여 애쓰고 계신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계층과 자신의 지위를 떠나 사회 문제에 목소리를 내는 의사 분들을 찾기 어렵다는 것이 무척 아쉽습니다.
어쩌면 그래서 의사분 개개인은 존경을 받을지 몰라도 ‘의사 집단’은 국민들에게 질책과 불신을 받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제중원]을 읽고, 이제 우리에게도 노먼 베쑨이나 체 게바라와 같은 의사가 나오기를 기대해 봅니다.
그들이 한 손엔 메스를, 한 손엔 총을 들고 억압과 차별과 제국주의에 대항해 싸웠듯이,
현재의 의사 선생님들은 우리 사회가 안고 있는 죽음과 질병의 근본적 원인에 대항해 싸워 주시기를 간절히 바랍니다.

덧붙여서.... [제중원]과 관련하여 두 가지 아쉬운 점만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첫째, 황정의 개인적인 노력과 백성사랑은 잘 나타나 있습니다만,
대의(大醫)로서의 일생, 즉, 만주에서 독립군에 가담한 일생이 약하다는 인상을 받습니다.
이 부분은 황정과 애비슨 원장 사이에 오고간 편지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최소한 몇 가지 에피소드라도 더 보강되었으면 어땠을까 합니다.
예를 들어 그의 의술을 통해 독립군 내에 존재하던 파벌이 화해하는 사건이라든지,
적군이지만, 부상당한 일본군을 몰래(?) 치료해 주는 것을 통해 의술이 담고 있는 보편적 사랑을 표현해 주는 것 등도 괜찮을 것 같습니다.

둘째, 중반부에 등장하는 소년인 삼돌이가 갑자기 사라진 것이 아쉽습니다.
그는 제중원 원장 헤론에게 찍혔던 황정이 의학당에 입학할 수 있도록 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하는데, 그 이후로 갑자기 사라집니다.
역사의 격동기에서 제중원은 부침을 거듭하고, 당연히 제중원에 속한 사람들 역시 여러 변화를 겪게 될 것입니다.
삼돌이가 제중원에서의 경험을 통하여 어떻게 격동기를 살아가는지를 그려보는 것도 흥미로울 것 같다는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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캡틴 블루베어의 13과1/2 인생 1
발터 뫼르스 지음, 안인희 옮김 / 문학수첩 리틀북 / 2009년 4월
평점 :
절판



발터 뫼르스를 찬양하라!!!
이렇듯 신기하고 기상천외한 이야기의 틀 속에 지혜를 담아 우리에게 선물해 줄 수 있다니.
분명 그는 (최소한 나에게는) 찬양받아 마땅한 작가이다.

상상력으로 건설한 대륙 ‘차모니아’는 [꿈꾸는 책들의 도시]에서 처음 만난 이후로 내게 잊혀지지 않는 세계가 되었고,
미텐메츠, 루모, 에코 등은 차모니아 땅 구석구석을 내게 알려주는 소중한 길벗이 되었다.
더 나아가 차모니아 대륙은 이제 ‘언젠가는 나도 반드시 가보리라’ 다짐하는 현실속의(?) 세상이 되어 버렸다.

[캡틴 블루베어의 13과 1/2 인생]은 푸른색 털을 가진 곰(블루베어) 한 마리가 차모니아 대륙을 전전하면서 겪은 모험과 여행을 따라가도록 되어 있다.
독자들은 발터 뫼르스가 치밀하게 만들어 놓은 환상의 대륙을 방문하게 된다.
이런 점에서 블루베어의 삶은 전세계와 저승까지도 전전하면서 겨우 귀향에 성공한 율리시즈와 같은 하나의 오디세이라 할 것이다.
차이가 있다면 율리시즈의 오디세이가 엄숙‧장엄하고 처절한 숭고미의 여정이라면,
블루베어의 오디세이는 장난‧긍정의 즐겁고 재미있는 유머의 여정이라는 점이다.
간단히 말해 환상적인 꿈 속에서 한바탕 즐겁게 놀다 오면 된다는 거다.
그런데 더 놀라운 것은 그 놀이란 것이 단순히 시간죽이기를 위한 재미에만 그치지 않고,
어딘지 우리 일생에 대한 풍자를 담아 두고 있다는 점이다.

아무 걱정도 없는 갓난아기가 보호를 받으면서 차차 ‘감정’이란 것을 먼저 알고,
다음으로 말을 배우고, 여러 가지 유혹과 욕심을 이성적으로 다스리는 법을 배운다.
교육을 받고, 시간과 공간의 한계를 알고, 나이를 점점 더 먹어 가면서 청년으로 성장한다.
그 과정에서 만나는 수많은 인연들. 그리고 수많은 사건들. 위기와 기회의 순간, 절망과 희망의 순간은 결국은 모두 ‘현재의 나’를 존재하도록 만든 구성물이다.
발터 뫼르스는 블루베어의 인생을 통해 이렇게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인생의 ‘구성물’에 매이지 말아라. 일희일비할 것 없다.
인생을 긍정하고 웃음으로 포용해 봐라.“

우리는 블루베어가 경험한 13가지 인생과 1/2 인생을 만나게 되는데,
여기까지는 블루베어의 전체 인생의 중간점검이라고 하겠다.
앞으로 그의 앞에 몇 개의 인생이 더 남아 있고, 어떤 모험이 기다리고 있을지 아무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하지만 지금까지 그의 인생을 보아 장담하건데,
아마 잠깐 동안은 반려자를 만나 2세를 낳고 안정적으로 살아갈 것으로 예상되지만,
모험심과 탐구심을 이기지 못하고 결국에는 차모니아 대륙의 다른 곳으로 떠나갈 것이다.

블루베어의 여정을 따라가는 즐거운 놀이에는 두 가지의 즐거움이 동반된다.
첫 번째는 발터 뫼르스의 책을 읽기 시작할 때부터 가장 기대하는 것인데, 바로 그가 직접 그린 만화같은 삽화들과 형식을 떠난 글쓰기이다.
그의 삽화는 ‘상상’이라는 무형의 존재를 확실하게 형상화시키는 탁월한 역할을 하며,
커지는 발자국 소리를 점점 큰 활자로 처리한다든가 하는 형식을 초월한 글쓰기는 순간순간 놀라움을 주는 방법이다.
두 번째는 이 즐거운 놀이를 더욱 즐겁게 만드는 인문학적 지혜이다.
시간과 공간의 절대성과 가역성, 언어의 역할, 꿈의 출발점, 세계를 이루는 물질들, 실상과 허상, 제도와 규율의 필요성과 그 수준 등, 많은 철학자들과 역사학자, 과학자들이 관심을 갖고 도전한 것들이 이 책에 녹아 있는 것이다.
때론 직접적으로, 때론 비비 꼬아서, 때론 유머러스하게, 때론 허무할 정도로 간단하게 말이다.

발터 뫼르스의 책은 정말 재미있다.
그렇지만 그의 책이 주는 재미는 그냥 단순한 재미가 아니라 ‘재미의 종합선물세트’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카운터 어택과도 같은 결정적인 한 방도 기다리고 있지만,
그 결정적 한 방을 위해 툭툭 던지면서 웃음을 유발하는 잽도 보통이 아니다.
그러니 어떻게 발터 뫼르스를 찬양하지 않겠는가!!!!

마지막으로 블루베어가 겪은 놀라운 인생을 간략하게 살펴 보자.
0) 블루베어는 푸른색 털을 가진 곰으로서 처음에는 호두 껍데기 속에 들어갈만큼 아주 작은 곰이었다.
1) 난쟁이해적 생활: 난쟁이해적들은 블루베어를 바다 소용돌이에서 구해내지만, 덩치가 커지자 배에 태울 수가 없어 바닷가에 내려놓는다.
2) 바다도깨비들과의 생활: 음울한 감정만 가진 바다도깨비들을 위해 울음을 공연하던 블루베어는 그들 사이에서 스타가 된다.
3) 도망 중의 나의 삶: 도깨비에게서 도망친 블루베어는 수다파도를 만나서 말을 배운다.
4) 미식가 섬에서: 먹이를 유혹하여 잡아먹는 식충식물인 미식가 섬에서 죽을 고비를 맞는다.
5) 항해사 생활: 미식가 섬의 위기에서 구조공룡 맥에게 구출된 블루베어. 그는 맥의 등에 타고 위험에 빠진 이들을 구한다.
6) 어둠산의 삶: 은퇴시기가 된 맥과 이별한 블루베어는 어둠산에서 나흐티갈러 교수로부터 다양한 차모니아의 학문을 배운다.
7) 큰숲에서의 삶: 학교를 졸업한 블루베어는 겨우 갱도를 빠져나오고 큰숲에서 숲거미마녀를 만나 구사일생으로 도망친다.
8) 차원구멍에서의 삶: 숲거미마녀를 피해 뛰어든 차원구멍에서 블루베어는 시간 및 차원을 초월하는 여행을 한다.
9) 설탕사막에서의 삶: 설탕사막에 도착한 블루베어는 그곳의 떠돌이인 둔칠이들을 만나 신기루 도시 ‘아나크롬 아프타’를 찾아 나선다.
10) 회오리바람 도시에서의 삶: 시간이 빨리 흘러가는 회오리바람에 휩쓸려 노인이 되어 버린 블루베어. 탈출방법은?
11) 큰머리에서의 삶: 볼록의 머리 속을 지나던 블루베어는 ‘아이디어’들을 만나게 되고, 여기서 여러 가지 꿈을 만들어낸다.
12) 아틀란티스에서의 삶: 마침내 거대 도시 아틀란티스에 도착한 블루베어. 그는 여기서 거짓말검투사로 명성을 얻게 되지만, 스마이크의 승부조작에 협조하지 않았기 때문에 노예선 몰록호로 쫓겨난다.
13) 몰록호에서의 나의 삶: 전세계를 지배하려 한 차모민의 음모 하에 움직이는 몰록호. 블루베어는 다시 등장한 나흐티갈러 교수와 함께 차모민을 막아낸다.
13 1/2) 휴식하면서 보낸 절반의 삶: 몰록호에서 해방된 블루베어를 비롯한 오색곰들은 큰 숲에 정착하게 되고, 블루베어는 행복하고 안정된 생활을 시작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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괴짜사회학
수디르 벤카테시 지음, 김영선 옮김 / 김영사 / 200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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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학에서 사회과학을 공부하고, 사회문제를 보면서 가장 크게 고민하게 되는 것은 역시 문제의 원인과 해결방법에 대한 것이다.
학문적으로 보면 우리 사회의 문제에 접근하는 방법은 크게 두 가지인데,
하나는 양적(quantitative) 접근법이며, 다른 하나는 질적(qualitative) 접근법이다.
이 가운데 현재 학계의 주도적인 방법론은 양적 접근법이라 할 수 있다.
양적 접근법은 3개의 단계를 거쳐 진행되는데, 우선 연구자가 세운 가설에 대하여 해당되는 범주별로 연구대상의 특성을 일반화하는 변수를 설정한다.
다음으로 이들 변수에 대한 직접 조사 또는 기존 조사(센서스, 각종 정부 조사) 자료를 수집하여 dataset을 구축하고,
마지막으로 통계분석을 통해 가설의 채택/기각 여부를 결정한다.

모든 사람들을 조사하는 것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한 측면에서 양적인 접근방법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물론 통계적 방법이 점점 엄정해지고 있다는 것도 큰 강점이다.
그렇지만 이런 통계적 방법을 밥벌이로서(!!!) 거의 매일 사용해야 하는 나 스스로도 이런 통계만능주의와 자료만능주의는 때로 갈등을 불러온다.
왜냐하면 이 접근은 기본적으로 ‘확률’이라는 특성을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아무리 정밀한 가설을 세우고 좋은 데이터를 모았다고 하더라도 그 결론에는 최소 1%에서 최대 10%까지의 오류가 나타날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바꿔 말하면 양적인 접근법에서는 100명 중 대략 5명 정도는 결론과는 다른 특성을 가지고 있음에도, 그 차이가 제대로 반영되기 어렵다는 한계가 있는 것이다.
또한 이 방법을 활용한 논문은 전문적인 훈련이 없이는 이해하기가 무척 어렵다. 어려운 수학기호와 통계적 방법은 그 형태만으로도 독자들의 기를 죽이기에 충분하다.

수디르 벤카테시의 [괴짜 사회학]은 이러한 양적 접근법에 반기를 든 사회학적 연구성과라 할 것이다.
이 책에는 고등학교 시절부터 우리의 머리를 아프게 했던 머리 아픈 통계적 기호들도 찾아볼 수 없고, 안드로메다 언어를 옮겨 쓴 듯한 수학 공식도 없다.
학자로서 벤카테시가 갖춘 최고의 미덕은 손쉽고도 편안한 방법으로 자신의 학위를 준비할 수 있었던 조건을 과감히 포기하고 직접 몸으로 느끼는 방법을 선택한 점에 있다.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러하듯이, 그도 역시 도시 빈민들의 생활에 대한 기존 자료와 데이터를 모아서 통계 프로그램을 돌린 후, ‘통계적으로 의미가 있다/없다’라는 기준으로 프로그램 결과를 해석하기만 하면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런 쉽고 편안한, 그러면서도 시간이 절약되는 방법을 선택하지 않았다.
그는 직접 시카고 슬럼가로 들어가 몸으로 부딪쳤다. 그는 거기서 갱단과 마약중독자, 매춘부, 경찰 등과 어울리면서 자신의 안전을 돌보지 않았다.

이런 그의 열정과 열심이 [괴짜 사회학]에 생명력을 부여했다.
자신의 박사학위 논문 작성 과정이면서 동시에 박사학위 논문이라고 할 수도 있는 이 책은 흔히 학회지에 발표되는 논문이 가지는 딱딱함과 전문성을 걷어내 버렸다.
우리는 이 책을 통해서 벤카테시와 함께 흑인 빈민촌의 생활을 그대로 경험하고, 그 곳 사람들과 함께 그 공기를 호흡할 수 있게 된다.

[괴짜 사회학]이 주는 매력에는 방법론의 새로움 뿐만 아니라 흥미진진한 내용과 사회학적 상상력을 자극하는 풍부한 내용도 포함된다.
무엇보다 내 관심을 끌었던 것은 흑인 빈민사회에서 작동하고 있는 또 하나의 권력구조와 사회공동체의 모습이었다.
어떻게 보면 이문열의 [우리들의 일그러진 영웅]에 등장하는 엄석대가 구축한 권력구조와도 유사한 이중적 착취구조였던 것이다.

흑백 인종차별이 엄연히 현실적으로 존재하고 있는 미국 사회에서 흑인들은 상대적으로 백인들에 비해 사회의 하층을 형성할 수밖에 없다.
인종차별은 경제적 차별과 교육기회에서의 차별을 낳았고, 미국 대도시에는 거의 예외없이 이들의 슬럼가가 형성되어 있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마약판매와 총기사고, 매매춘 등 각종 범죄 및 일탈행위들은 미국 복지정책과 도시정책의 중요한 과제이다.

그렇다면 이러한 도시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인가?
정부 관리들이나 대학의 학자들은 이 문제 해결을 위해 마약거래에 대한 엄격한 법집행을 주장하고, 지역을 개발함으로써 거주환경을 개선시키겠다는 주장을 펼 것이다.
그러나 실제 슬럼가를 생활 터전으로 삼고 있는 주민들은 이런 ‘교과서적인’ 해결방법은 그다지 의미가 없다고 말한다.
무엇보다 이들은 제도의 보호로부터 벗어나 있기 때문이다.
문제가 생겨서 신고해도 이들에게는 경찰이 오지 않는다. 아픈 사람이 있어서 연락해도 이 지역에는 구급차가 오지 않는다.
따라서 이들에게 실질적인 도움의 손길을 내밀 수 있는 힘을 지닌 조직은 경찰이나 의료조직이 아니라 지역의 갱단들과 범죄조직이다.
아이러니 하게도 범죄조직은 주민의 보호자로서의 선한 사마리아인같은 역할만 수행하지 않는다.
이들은 주민들에게 마약을 팔고 경제활동에 대한 세금을 요구하며, 이에 응하지 않을 경우 폭력을 앞세워 응징하거나 지역에서 살지 못하도록 쫓아 버린다.
뿐만 아니라 이들은 부패한 주택공사나 경찰들과 결탁하여 부당한 이익을 편취하기도 한다.

이런 이중적인 권력관계,
즉, 공식적인 국가권력과 사회조직은 공공연히 빈민층을 방치하고,
자경주의(自警主義)를 내세우는 지역 내 조직이 빈민층으로부터 대가를 얻어 기생하는 관계는 도시빈민을 연구하고, 그 해결책을 찾는 데에 있어서 반드시 먼저 파악해야 할 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번드르르한 복지정책을 세우는 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이 실제 필요한 사람에게 제대로 전달될 수 있어야 한다는 점이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정책의 혜택이 가로채어지지 않아야 한다.
경제위기로 양극화가 심화되어 가고 있고, 주위에서 외국인 노동자들과 결혼이주여성들을 비롯한 외국인들이 많이 등장하고 있는 우리나라에서 미국사회와 같은 인종차별이 언젠가 나타나지 않는다거나 할렘과 같은 지역이 나타나지 않는다고 누가 장담할 것인가?
이미 서울의 가리봉동이나 경기도 안산에서는 이러한 지역이 현실적인 형태를 띠고 나타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또 한가지 이 책에서 인상깊었던 것이 있었는데,
빈민가를 지배했던 갱단인 ‘블랙 킹스’의 조직원이었던 티본의 일생과 죽음이었다.
티본은 다른 갱단 조직원들과 달리 하루라도 빨리 재산을 모아 손을 씻고 공부를 하면서 뭔가 다른 일을 하고 싶어 하였다.
생활 속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끼던 티본은 결국은 마약밀매 혐의로 체포되어 10년형을 선고받고 감옥에서 죽는다.
‘다른 조직원들의 이름을 팔아 넘기지 않았다’라는 허울뿐인 칭송을 들으면서....
티본의 삶은 가슴 아프면서도 허술한 미국식 사회정책의 한계를 보여주었다.
어느 정도 교육을 받아도 엄연한 인종차별 속에서 좌절하고 결국은 갱단에 들어와 마약판매의 길로 들어설 수 밖에 없었던 흑인 청년.
갱으로서의 생활을 청산하고자 열심히 일했으나, 그 일이란 것이 사실 사람들을 마약중독자로 전락시키는 것이라는 점에서 양심의 가책을 느꼈던 청년.
미국 사회에서, 그리고 우리 사회에서 제2, 제3의 티본은 미래가 아니라 지금 현재에도 얼마든지 나오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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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미의 이름 - 상 - Mr. Know 세계문학 15 Mr. Know 세계문학 15
움베르토 에코 지음 / 열린책들 / 2006년 2월
평점 :
절판




 

여름휴가 정도의 여유가 아니라면 언제 움베르토 에코 아저씨의 책을 정독해보겠는가.
이번 휴가에 인적 드문 산골 마을에서 에코 아저씨의 [장미의 이름]을 읽었다.
이번에 세 번째로 읽은 [장미의 이름]은 무척 즐거운 시간을 가지게 해주었다.

사실 [장미의 이름]은 반복하여 읽은 몇 안되는 책 중 하나이다.
한참 스릴러물을 찾아다니던 때에 ‘수도원에서 묵시록의 예언대로 일어나는 연쇄살인’이라는 책표지의 문구에 혹해서 처음 접했지만,
그 때는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그냥 글자만 따라가는 데 급급했던 책이었다.
두 번째 읽을 때에 겨우 수도원에서 일어난 살인사건과 그 해결방법이 눈에 들어왔다.
물론 이 때에도 사건의 줄거리 외에는 지루하다는 느낌이 더 강했다.
세 번째 읽으면서 겨우 에코가 수도원을 중심으로 만화경처럼 벌여놓은 중세의 종교, 문화, 세계관이 조금씩 이해가 되었다.
그리고 지식의 측면에서 뿐만 아니라 종교적 독단의 의미, 이성과 과학, 기호와 상징 등에 대한 여러 생각도 정리해 보는 기회가 되었다.
과연 여러 사람들이 평가하는 대로 왜 에코의 책에 ‘아는만큼 보이는 책’이라는 수식어가 붙는지도 아주 약간이나마 이해할 수 있었다.

요한 호이징하는 중세가 끝나가는 시기를 일컬어 <중세의 가을>이라고 아름답게 표현했다.
낙조(落照)가 아름다우면서도 슬픈 것은 결국 종말의 숙명을 의미하고 있기 때문이 아닐까.
마찬가지로 가을빛이 쓸쓸하다는 것은 모든 걷이가 끝난 후 다가올 죽음의 계절 겨울을 앞두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14세기 초, 중세시대는 낙조를 비치면서 가을로 달려가고 있었다.
길었던 한 시대가 저물어가면서 새로운 시대가 도래하고 있는 것이었다.
그 속에서는 변화에 대항하여 기존의 가치를 지키고자 애쓰는 사람들, 새로운 가치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의 모습이 담겨있다.

‘카놋사의 굴욕’ 사건으로 만방에 그 힘을 과시했던 교황청.
그러나 그 후 300년 만에 교황은 프랑스 국왕의 압력에 굴복하여 로마에 들어가지 못하면서 권위에 큰 타격을 입는다(아비뇽 유수).
세속 권력의 도전에 직면한 교황청은 자신들의 권한을 지키기 위해 수도원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려 하였지만,
성(聖) 프란체스코에서 비롯된 ‘청빈(淸貧)’ 운동은 교회의 재산 소유를 비판하는 등 내부로부터 교황청에 대한 반대 목소리를 높인다.
교황 요한 22세는 교회의 청빈을 주장하던 수도사들을 파문하고 종교재판, 화형을 동원하여 이와 같은 반발을 무마하려 하였다.

중세는 정신적 지주였던 교회 내부의 변화와 경제와 사회사상에서도 큰 변화를 겪는다.
개별화된 봉건적 촌락과 대지에 귀속된 농노 중심의 생산양식은 이제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발생하기 시작한 시장 중심의 생산양식과 화폐경제에 뒤처지기 시작한다.
도시를 중심으로 성장한 대학은 기존 수도원들이 가지고 있던 지식의 독점권을 해체하였고,
신앙과 교리가 지배하던 사고방식은 이성과 경험의 힘을 통하여 자연에 대한 객관적인 관찰을 중시하는 ‘과학’의 지배로 바뀌어 가기 시작했다.
바야흐로 중세를 규정짓던 생산양식과 생활양식과 사유방식이 ‘근대’로 넘어가는 시기인 것이다.

[장미의 이름]의 배경에는 표면적으로는 황혼을 맞은 중세의 이중의 갈등 구조,
즉, 교회 외부의 갈등이라 할 수 있는 교황과 황제의 대립과
교회 내부의 갈등이라 할 수 있는 교황과 일부 수도사들(청빈파)의 대립을 담고 있다.
그러나 그 속에 흐르는 보다 본질적인 갈등구조는 새로운 시대로의 변화와 기존 시대의 고수 사이의 갈등이라 할 것이다.
이는 중세적 세계관을 대변하는 호르헤 수도사와 그 반대편에서 이성과 경험, 합리적 추론으로 진리에 접근하는 윌리엄 수도사와의 대립으로 잘 나타난다.

개인적으로 에코의 작품이 가지는 매력은 오래 전 과거에 일어난 사건들 속에서 현재의 모습을 찾을 수 있게 한다는 점에 있다고 생각한다.
[장미의 이름]의 주요 등장인물인 호르헤 수도사는 독단적 진리관을 대변한다.
그가 보기에 진리란 인간의 이성의 힘으로 찾을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다.
진리란 이미 신이 완성한 것이기 때문에 성서가 천명한 진리의 보존만이 필요할 뿐이다.
따라서 호르헤 수도사에게 성서의 가르침에 위배되는 것은 마땅히 폐기되어야 할 것이며,
그런 맥락에서 ‘웃음’을 통해 신의 세계를 다르게 보는 법을 가르치고, 진리라 일컬어지는 것을 비웃음으로써 새로운 진리를 얻는 아리스토텔레스의 가르침은 그에게 절대 용납될 수 없는 것이었다.
나는 호르헤 수도사에게서 종교근본주의자, 맹신론자, 맹목적 반공주의자, 파시스트와 같은 지긋지긋한 자기 중심의 독단주의의 뿌리를 보았다.
그들은 자신이 믿는 것, 자신이 말하는 것만이 진리이며, 여기에 반대하거나 의심을 품는 것은 이단이라고 주장한다.
이들이 주장하는 진리를 거부하는 자는 설령 죽음을 당한다 해도 당연한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장미의 이름]의 배경이 된 수도원과 장서관은 화재로 무너져 내린다.
이는 중세적 세계관의 종말과 앞으로 긴 세월동안 근대적 세계관이 그 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그러나 수도원은 무너지고 장서관의 책들은 모두 불에 탔음에도 불구하고,
호르헤 수도사의 독단주의는 그 얼굴만 달리한 채 현재까지도 힘을 발휘하고 있다.

또 하나 중세의 모습에서 떠올릴 수 있는 현대의 모습은 종교가 가지는 세속적 권한과 재산의 문제이다.
사실 [장미의 이름]을 읽는 사람들을 가장 힘들게 하는 것 중에 하나는 그리스도의 청빈을 둘러싼 지루해 보이는 논쟁인데,
‘그리스도가 재산을 소유했는가?’라는 논쟁은 지금 보기에는 그다지 중요할 것이 없는 문제일지 몰라도 당시로서는 교회 내부의 입장차이 뿐만 아니라 교회와 황제와의 권력 쟁탈이 걸린 문제였고, 따라서 [장미의 이름]을 이해하는 중요한 주제이다.
[장미의 이름]에도 등장하는 교황 요한 22세는 교회사에서 교황청의 재정을 튼튼히 한 능력있는 인물로 그려지는데, 이는 뒤집어 말하면 그만큼 축재(蓄財)에 능했다는 의미이기도 하다.
물론 이 책에도 등장하는 체제나의 미켈레나 카잘레의 우베르티노와 같은 수도사들은 그리스도가 재산을 소유하지 않았므로 교회도 청빈(淸貧)해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이들의 주장에 대한 교황청의 답변은 파문, 화형, 암살 사주였다.

종교의 재산을 둘러싼 중세말 모습은 어딘지 지금의 모습과 맥락이 닿아있지 않은가?
성장만을 중요하게 여긴 사회 속에서 종교 역시 양적 성장을 최우선의 목표에 두었고,
이것이 신도의 수와 건물의 규모에 집착하는 모습으로 왜곡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종교개혁을 통한 중세의 정신의 몰락은 결국 로마 카톨릭의 쇠퇴를 의미한다.
마르틴 루터의 종교개혁은 당시 교황청이 보여준 구원에 대한 독단(면죄부)과 성직자 집단의 부패에서 기인한 것이었다는 점을 되새겨 보아야 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사족삼아, 나중에라도 도움이 될 것 같아 몇 가지 읽으면서 메모해 둔 것을 여기에 남겨 두고자 한다.

1. [장미의 이름]의 제목의 의미

지난날의 장미는 이제 그 이름뿐, 우리에게 남은 것은 그 덧없는 이름뿐
(Stat rosa pristina nomina nuda tenemus)

에코가 창작노트에서 말했듯이 제목의 의미 간취는 독자들의 몫이라 했지만, 나는 기호학자로서 에코의 생각이 반영된 제목이라 생각한다.
소쉬르는 언어를 나누어 의미를 담지하는 ‘기의’와 문자로 표기되는 ‘기표’로 구분하였다.
이는 기호학의 가장 기본적인 출발점이라 할 수 있는데, 이런 점에서 <장미의 이름>에서 중요한 단어는 ‘장미’보다는 ‘이름’ 쪽에 있는 것이 아닌가 한다.
움베르토 에코는 책 중에서 윌리엄 수도사의 말을 빌려 ‘이름은 사물의 궁극(nomina sunt consequentia rerum)'이라고 칭하였다.
그리고 구약성경 창세기에 보면 하느님이 세상을 창조한 후 땅의 지배자로 세운 아담에게 처음으로 맡긴 일이 동물들의 ’이름‘을 붙이도록 한 것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결국 이름은 그 자체로서 의미를 가지며, 존재를 존재하게끔 하는 힘을 가진다.
윌리엄 수도사가 결국 ‘피니스 아프리카에’로 들어가는 암호의 해답을 찾은 것도 이름이 의미하는 바(기의)가 아니라 ‘이름 그 자체(기표)’에서이지 않은가?
밀실로 들어가는 키워드인 ‘프리뭄 에트 셉티뭄 데 쿠아투오르(Primum et septimu de quatuor)’에서 ‘넷’이란 어떤 사물을 가리키는 것(de re)이 아니라 ‘넷’이라는 말 그 자체(de dicto)였던 것이다.

따라서 책의 제목을 담고 있는 마지막 어구는 죽음이라는 인생의 종착역에 거의 다다른 아드소가 자신이 겪었던 한 시대의 종착이라는 것을 의미할 수도 있고,
변하지 않는 궁극의 관념인 말, 또는 언어의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으리란 생각이다.

2. 번역에 대해서
[장미의 이름]을 읽기 힘들게 만드는 이유로 많은 사람들은 번역의 문제를 든다.
이윤기씨의 번역이 너무 어렵고, 그래서 가독성이 떨어진다는 것인데 이건 좀 다르게 봐야 하지 않을까 한다.
중세의 언어구사 자체가 수식이 많고 화려하다는 점, 그리고 당시 수도사들이 즐겨 쓰던 라틴어는 일종의 고어(古語)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오히려 이윤기씨의 번역이 읽는 맛을 더 주고 있다고 생각한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장미의 이름]을 현대어로 번역했다면 의미 전달에서는 어떨지 모르겠으나, 작품 자체가 가지는 특징은 살리지 못했을 것이다.
원작을 충실하게 재현하는 것이 번역의 첫 번째 목표라고 할 때 [장미의 이름]은 분명 좋은 번역이라고 여겨진다.
오히려 번역과 관련하여 우리 출판계에서 아름다운 전통이 되었으면 하는 것이 있는데,
바로 문학과 인문과학의 아름다운 번역 협동작업이다.
이윤기씨도 지적했듯이 그는 철학전공자가 아니기 때문에 내용상의 오역이 있었고,
이를 바로잡기 위해 강유원 박사는 3백여 군데를 고친 원고를 보내오게 된다.
번역자와 출판사는 그 의견을 받아들여 새로운 개정판을 낸 것이 현재의 [장미의 이름]이 된 것이다.
꼼꼼한 의견으로 작품의 정확도를 높인 강유원 박사와 열린 마음으로 이를 수용한 번역자 및 출판사에 독자로서 감사하게 생각한다.

3. 아드소의 마지막 행위
이번에 읽으면서 아드소의 마지막 행동이 왠지 눈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수도원에서의 일주일을 보낸 아드소는 오랜 시간이 흐른 후 다시 수도원 폐허를 찾아 사그러진 양피지 조각을 모은다.
그리고 이따금 모아온 한 조각 양피지를 읽은 후, 그 원본이 되는 책을 찾아 앎을 완성하고, 그 서책이 그리고 있던 세계를 복원한다.
조각으로부터 진리를 복원하는 것, 작은 단서들을 보아 진리를 추론하는 것.
이건 근대 이후 세계를 지배하는 과학의 특징이면서, 또한 보르헤스가 말한 자기만의 도서관을 완성해 가는 과정이기도 한 것 같아서 책을 모두 읽은 지금까지도 깊은 인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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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둑들의 도시
데이비드 베니오프 지음, 김이선 옮김 / 민음사 / 2009년 7월
평점 :
절판




 

“전쟁은 모두를 변화시켰다.” (p.362)

그렇습니다. 정말 전쟁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습니다.

전쟁은 한 가정의 좋은 남편, 자상한 아버지로 하여금 눈 하나 깜빡하지 않고 유대인들을 학살한 독가스 버튼을 누른 전범으로 만들었습니다.
전쟁은 사회구성원들로 하여금 ‘총화단결’을 최상의 모토로 삼도록 하였고, ‘정부 비판=적(敵)’라는 단순한 논리를 내재화하여 선입견과 편견으로 인간과 사회를 바라보게 하였습니다.
전시에는 평화로울 때에 쉽게 나타나지 않을 잔인함, 폭력성, 이기성이 미덕이 되며,
화해와 이해는 ‘이적행위(利敵行爲)’로 간주되어 반국가적 가치로 전락합니다.
전쟁은 가치를 전도시킵니다. 인간의 가치는 먼 발치로 밀려나는 대신, 표면적으로는 ‘국가’와 ‘민족’의 가치를, 내부적으로는 지배층의 이해관계라는 가치를 극대화 하는 것이 전쟁입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절정을 향해 치닫던 1942년 겨울.
900일간 독일군에 포위된 레닌그라드는 굶주림과 절망의 도시가 되어 버렸습니다.
누구보다 레닌그라드를 사랑하고 조국을 위해 용기있는 행동을 할 자신이 있었던 소년 레프는 친구들과 우연히 낙오한 독일군 병사를 ‘털다가’ 붙잡혀 감옥에 갇히게 되고, 감옥에서 탈영병 신세로 들어온 콜야라는 병사를 만나게 됩니다.
죽음을 기다리던 그들에게 내려진 거부할 수 없는 그레치코 대령의 제안.
대령의 딸의 결혼식 케이크에 들어갈 계란 12개를 찾아오면 석방하겠다는 제안을 듣고 목숨을 걸고 최전선으로 향합니다.

전쟁의 참혹함과 그 속에서 보여지는 다양한 인간군상을 다룬 책과 영화는 무수히 많았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도둑들의 도시]에서 다시 한 번 분노를 금하기 어려운 장면들과 부딪치게 되었습니다.
바로 ‘전체’나 ‘국가’, ‘민족’이라는 절대 가치 앞에서 인간의 고귀한 생명을 수단화할 수 있으며, 언제든지 그 신성한 제단에 목숨을 바칠 수 있어야 한다는 병영 문화가 철저하게 관철되고 있는 장면들입니다.
이는 파시스트들은 물론이고 프롤레타리아를 위해 존재한다는 소련의 붉은 군대에서도 예외가 아니었습니다.
더욱 문제인 것은 그런 가치관을 사람들에게 끊임없이 주입시켜 수많은 민중과 병사들을 전선으로 내몰고 아사 직전의 상태까지 몰아간 소위 ‘윗대가리’들의 이율배반적인 행태들입니다.
순결한 아리안 민족이나 국가사회주의 어쩌고저쩌고 하면서 전쟁을 일으킨 히틀러나 스탈린 등 최상층 ‘윗대가리’들은 사람들이 굶어 죽어갈 때 안전한 후방에서 호의호식했겠죠.
겨우(!) 자기 딸의 결혼식에 쓸 계란을 구하기 위해 두 생명을 전선으로 몰아대는 소련군의 그레치코 대령과 러시아 소녀들을 성적 노리개로 삼아 도망치려는 소녀의 두 발목을 톱질해 버리는 독일군의 아벤드로트 등 말단 ‘대가리들’.

그런데 [도둑들의 도시]를 보면서 전쟁으로 인한 이와 같은 ‘가치의 전도’가 2009년 현재 한국에서도 이런 병영문화의 잔재로 남아 있는 것 같아서 씁쓸했습니다.
병영문화는 권위에 대한 복종과 희생을 의미하며, 지식의 전제(專制)와 독점을 특징으로 합니다. 그리고 개인은 전체를 위하여 희생될 수 있다는 논리로 지탱됩니다.
해병대 체험이니 전방입소교육 체험이니 하는 것들은 ‘고통을 통해 자신을 이길 정신력을 신장한다’는 이상한 논리 하에 개인의 육체에 대한 학대를 미화시킵니다.
사회의 질서와 조화, 안보가 강조되지만 그 속에는 불공평한 관계에 처한 개인의 희생이 강요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 의심해 보아야 합니다.
개인은 국가에게, 학생은 교사에게, 아내는 남편에게, 아이는 어른에게, 여자는 남자에게 순종해야 한다는 ‘권위’에 따른 복종은 계급에 대한 복종이라는 병영 문화와 상승작용을 일으켜 우리들의 머릿속을 지배해 오지 않았나 생각해 봅니다.

[도둑들의 도시]는 무척 재미있는 소설이었지만, ‘입에서는 달고 배에서는 쓴’ 소설이었습니다.
레프는 결국 계란 12개를 얻어 생명을 건집니다.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 미국으로까지 가게 됩니다.
하지만 계란 12개 때문에 당한 콜야의 죽음은 어이없는 개죽음(!!)이 아니었다고 말할 수 없겠습니다.
개인적으로 그를 기다렸을 소냐의 슬픔이 언급되지 않은 것이 더욱 슬프게 합니다.
독일군의 시달림에서 벗어나 탈출한 소녀들은 혹독했던 기억과 그보다 더 혹독할 사회적 편견 및 경제적 어려움에서 어떻게 살아갔을지 궁금합니다.

그런데 [도둑들의 도시]에서 나오는 참상은 2차 세계대전으로 끝난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것이 쓴 맛을 더하게 합니다.
전쟁의 명분은 늘 그렇듯이 뭔가 멋진 말들로 치장됩니다.
미국의 이라크 침공도 ‘이라크 국민의 독재로부터의 해방’을 명분으로 걸었지만, 진정한 목적은 석유의 안정적 확보와 친미정권 수립에 따른 이란 등 중동국가들 견제에 있다는 것은 삼척동자도 아는 사실입니다.
폭격으로 가족을 잃은 사람들의 슬픈 눈빛과 참상들, 워싱턴에 앉아 ‘신이여! 미국을 구원하소서!’를 부르짖는 사람들은 [도둑들의 도시]에 나오는 장면들과 시대와 배경만 조금 달라졌을 뿐 변한 것이 없습니다.
나찌의 인종주의는 발칸반도와 아프리카 곳곳에서 계속되고 있고, 이들의 현실은 2차 세계대전 당시를 능가합니다.

이 책을 비롯하여 전쟁에 대한 책을 읽을 때마다 국가의 가치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사람은 누구나 평화롭게 살기를 갈구하고, 전쟁으로 자신이나 사랑하는 가족의 생명을 잃는 것을 원하지 않습니다.
인간의 이성과 경험은 날로 진보해 나가는데, 왜 가장 야만적인 행태인 전쟁은 사라지지 않는 것인지...
미국의 요청으로 우리나라가 이라크에 파병하게 되었을 때, 그 불가피성을 역설하던 말, '국익 때문에...'
우리의 이익을 위해서 바르지 않은 전쟁에 참가하여 그들을 슬프게 만드는 것이 과연 피할 수 없는 현실이었는지 의문이 갑니다.

67년 전 레닌그라드를 사이에 둔 소련군과 독일군은 국가의 이익을 위해 개인을 희생시켰습니다.
그리고 그 와중에 레닌그라드의 민간인들이 경험한 처참함은 더욱 안타까운 것이었습니다.
전쟁 후에 그들에게 돌아간 보상이나 위로는 거의 없었습니다. 전후복구라는 더 피폐한 삶을 참아야 할 의무만 주어졌을 뿐입니다.
평소에는 레닌그라드를 위해 목숨까지도 바칠 것처럼 말하던 레프는 생사의 갈림길에 서자 '살고 싶다!'라는 순수한 소원을 숨기지 않습니다.
이 가치를 존중하고, 이 소원에 관심을 가지는 사회로 나아가기를 바래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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